20
-누구? 이태선?
-벌써 잊어버리신 거에요?
잊어버릴 리가 있을까.
‘아줌마 창녀야?’
그녀 앞에서, 이런 사악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렸던 기억은 생생했다.
릴리스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였다지만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악마 같은 짓.
고개를 돌려 등 뒤 새초롬하게 서 있는 릴리스를 바라봤다.
아침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아침.
-그 아줌마는 왜?
손에 들고 있는 민법총칙 이라고 쓰여진 두꺼운 책을 내려 놓았고.
-그러니까··· 다시 만나 볼 생각 있으신가 해서요.
알 듯 모를 듯 릴리스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반짝였지만, 목소리는 꽤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시 만나?
-뭔 소리야? 그··· 누구더라? 슈···
-슈엘이요.
하얀 깃털의 펄럭이던 날개, 온통 근육으로 뒤덮여 있던 암튼 엄청나게 거대했던 천사녀석.
릴리스를 사라지게 했던 그 푸르딩딩한 녀석이 없어졌단 말은 들었지만 여전히 두려웠다.
-푸르딩딩이 뭐에요! 킥, 암튼 그 거만한 천사는 완전히 사라졌어요. 물론 다 주인님 덕분이죠. 아! 주인님도 이태선이라는 여자분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요. 제 기억으로 분명 그랬던 거 같은데.
-그 아줌마··· 어떻게 지내?
별 관심 없다는 듯 묻고 있었지만 내 신경은 온통 릴리스의 목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여전해요. 여전히 팍팍하고. 여전히 힘들어하고. 또 여전히 불행하게 살고 있어요.
무슨 말이 그 따위.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 예쁜 아줌마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거짓말 이었다.
반듯하고 단정한 외모.
청순한 얼굴.
자연스레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여성스러움과 여림.
거기다 착한 성격까지.
릴리스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이더니 천천히 방안을 걸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암튼 천사의 극진한 보호는 거짓말처럼 사라졌어요. 하긴 그걸 보호라고 하는 것도 웃기네. 참고, 견디고 희생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둥바둥 사는 삶. 암튼 이태선이란 그 여자 분, 지금까지의 답답한 인생에서 조금씩 눈이 트여 가고 있어요. 악행에 대한 삼엄한 결계가 완전히 풀려버렸으니까.
-쉽게 얘기해.
-이태선씨··· 남자 만나요.
‘툭’
나도 모르게 손에 들려있던 책을 떨어트렸다.
남자?
-남자?
-놀라시긴. 네, 남자.
빌어먹을.
순간 심장이 조여대 아픈 느낌.
단정하고 반듯하게만 보였던 여자였다.
그리고 마지막 봤을 때의 애틋했던 눈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고.
근데 남자?
그러니까 불륜?
잘 돌아간다.
멋대로의 추측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설마 나 때문일까?
어쨌거나 그녀가 남편 이외의 남자에게 처음 안긴 것도, 그녀를 지켜주던 천사를 물러가게 한 것도 모두 나 때문이었으니까.
-혹시··· 그 여자 돈 때문에 남자 만나는 거야? 그러니까 날 만났던 것처럼?
-그 여자 주인님 때문에 불행해진 거라 생각하세요? 전혀 아니에요. 주인님이 아니었으면 그 슈엘 이라는 천사, 그 여자를 더 심한 시험에 들게 했을 테니까요. 분명 더 불행해질 여자였어요. 오히려 주인님이···
-대답이나 해. 그 여자 돈 때문에 남자 만나는 거냐고?
내 목소리는 높아져 있었고, 릴리스의 말을 끊었다.
-그거 말고 뭐가 더 있겠어요. 아무리 강력한 수호천사가 사라졌다고 해도 설마 그런 타입의 여자가 바람 피울 리는 없잖아요. 다 돈 때문이죠. 돈 이란 게 인간 혼자선 떨쳐내기 쉬운 유혹은 아니니까. 더군다나 돈이 간절하게 필요한 이태선씨 같은 여자쯤 유혹하는 건 너무 쉽고 간단한 일이죠. 아니다, 어디 이태선씨뿐 일까?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잖아요. 그리고 슈엘이 물러간 자리엔 아주 미미한 하급천사가 내려 온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하급 천사, 전혀 의지가 없어 보이네요. 장난끼 많은 악마들이 여자 주변으로 가득 몰려있는 모습이 보기 좀 그래요. 아마 그 여자 얼마 안 있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릴지도 몰라요.
지긋지긋한 악마와 천사의 얘기 따위는 관심 없었다. 와 닿지도 않았고.
돈.
빌어먹을 돈.
순간, 나도 모르게 짜증이 일었다.
-아니, 그 아줌마는 왜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 거야? 박씨 아저씨도 벌고, 그 아줌마도 식당에서 일 하잖아. 그만하면 살만한 거 아니야? 잠깐···
-······왜요?
-혹시 박씨 아저씨 그 도박 빚··· 맞지? 아직도 그 도박 빚인가 뭔가 갚고 있는 거지? 아니 내가 갚을 필요 없다고 말해줬었잖아! 나 그것 때문에 죽을 뻔 했다고!
-뭘 모르시네. 주인님,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도박 빚, 딴엔 희망에 들떠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긴 한 모양인데, 운이 없었던 건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어떻게 빌린 돈을 안 갚아도 되냐는 말만 들었던 거 같아요. 아직 전혀 해결하지 못한 거 같네요.
-미친! 똑똑히 봐! 여기 이 책! 내가 어제도 분명히 읽었어. 이 망할 책, 사실 나 하나도 이해 안 되는데 이거 하난 똑똑히 이해 되더라. 도박 빚 갚을 필요 없어! 그 뭐냐··· 그러니까 판례도 나와 있고, 민법에도 분명 갚을 필요 없다고 나와 있다구! 그런데 왜! 그 바보 같은 아줌마는 갚지 않아도 될 빚 때문에 몸까지 파는 거냐구! 요즘 세상에 돈 때문에 몸을 파는 바보가 어디 있어! 내가 분명 변호사 사무실에 가라고 이야기 했었잖아!
왜 이렇게 흥분해 버린 건지.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거리고 있었다.
-궁금해 하시는 것 같으니까 아는 대로 말씀 드릴게요. 주인님과 그렇게 된 이후에 이태선씨는 조금은 곤란한 상황에 빠졌어요. 그 만남을 주선했던 여자가 이태선씨를 가만 놔두질 않았거든요. 여자가 이태선씨에게 빌려준 돈은 백 만원, 그리고 주인님이 준 돈은 오십 만원. 뻔하죠. 빨리 돈을 갚으라고 안달이 난거죠, 남편에게 말 하겠다는 은근한 협박까지 곁들이며 한번 더 남자를 만나서 돈을 갚으라는 뻔한 유혹. 며칠을 고민하던 이태선씨가 남자를 만난 건 사실 어제가 처음 이었어요. 그리고 남자를 만나러 간 자리엔 불행히도 아주 나이 많은··· 환갑이 훌쩍 넘은 어르신이 나왔죠. 에휴··· 그러니까 말하자면 완전 할아버지.
-미치겠네.
-걱정 말아요. 주인님이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이태선씨, 그 할아버지에게 욕을 얻어 먹긴 했지만 할아버지가 안으려는 찰나에 간신히 도망쳐 나왔어요. 좀 안됐더라구요.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모텔에서 빠져 나오는 모습. 하긴 아무리 돈 때문이라 해도 그런 할아버지에게 안 길 순 없었을 테니까. 이태선씨는 그래서 지금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상황이에요. 이걸 뭐라고 하더라. 아··· 그렇지. 사면초과. 제가 어려운 말엔 좀 약해요.
내 손가락은 책상 위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녀를 돕고 싶은 마음.
하지만 그녀를 도우려다가 죽을 뻔했던 기억은 아직 뚜렷했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릴리스의 눈이 그런 내 모습을 쫓았고.
-제가 주인님이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맞춰볼까요? 이태선씨를 데리고 변호사 사무실쯤 같이 가고 싶을 거구, 거기서 변호사를 만나서 민법에 도박 빚 안 갚아도 되어 있지 않냐, 판례도 버젓이 나와 있다는 이야기를 하시고 싶을 테죠. 어떻게 하면 그 도박 빚 안 갚아도 되냐는 따위의 자문을 구하시고 싶으실 테고. 어때요? 제 말이 맞죠? 그렇게 이태선씨를 도와주시고 싶은 신 거죠?
내 마음에 들어온 것처럼 정확했다.
하긴 진짜로 들어왔을 지도 모르는 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풉, 우리 주인님 눈치 하난 정말 빠르다니까. 이태선씨 도울 방법이 있는데 어때요? 관심 있어요?
-도울 방법? 그게 뭔데?
-어차피 그녀는 지금처럼 가면 타락하게 되어 있어요. 이번엔 아주 운 좋게 벗어났지만, 다음 번엔 절대 그러지 못 할 테니까. 돈 때문에 몸을 팔고, 또 협박을 당하고, 그 협박에 다시 몸을 팔고··· 그러다 언젠가 박씨 아저씨가 알게 되겠죠. 그 후는 안 봐도 뻔하고. 그래서 제가 생각해봤는데···
거래의 제안.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악행의 제안이었다.
릴리스는 그렇게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고 있었다.
릴리스, 그녀는 악마였으니까.
-그리고 그 여자 주인님에게 두고두고 도움이 될 거에요. 꼭 형수처럼 말이에요.
어쩌면 지지리 사악한 말.
하지만 왜 그때 난 이상한 기분이 들었을까.
릴리스의 제안은 분명 악행을 하라는 제안이었지만 꼭 그렇게만 들리진 않았다.
따지고 보면 릴리스가 안으라고 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여자들이었으니까.
무료한 남편에다 언제나 똑같은 일상의 지독한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던 형수.
구질구질한 빚더미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 몸까지 팔려고 했던 이태선이라는 여자.
언니의 연인을 좋아하면서 속 시원히 표현조차 할 수 없이 꾹꾹 참아오던 은영이까지.
악행이면서 선행.
선행이면서 악행이었던 교묘한 일들.
순수한 악행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릴리스는 또 다시 이태선이라는 여자에게 다가 온 불행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때요? 괜찮쵸?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너무나 귀엽게 웃어 보이는 릴리스.
악행을 이야기하는 릴리스였지만 그 말은 다르게 생각하면 꼭 이렇게 들렸다.
‘그녀를 도와주세요.’
-미친! 야! 너 미쳤어?
-헉! 지금 저보고 미친년이라고 하려고 했죠?
-미친 이라고 했거든.
-어머 웬일이니. 헐··· 이제 나 보고 미친년 이래. 언제는 예쁘다고 난리더니.
-너 말 돌리지 마!
한껏 토라진 표정.
릴리스가 팔짱을 단단히 낀 채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어때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야! 그게··· 말이나 돼? 좋아. 다 좋다고, 그런데 그러다 들키면?
-안 들켜요! 그건 제가 확실하게 말 할 수 있어요. 절대 안 들켜요!
-진짜 그 방법뿐이야?
-물론 다른 방법도 있긴 하죠··· 하지만 그건 더 힘들걸요?
-다른 방법? 뭔데? 설마 이거 보다 더 어렵겠어?
-안돼요. 이거 말했다간 주인님 분명 또 미친년이라고 할거라구요.
-말해봐. 빨리!
릴리스가 내 눈을 피해 차창으로 시선을 돌리는 모습.
-임··· 신?
-야잇! 미친···
-거봐! 거봐! 또 미친년이랬죠!!!
진정 무슨 야동이라도 찍는 기분이었다.
후···
이건 아니다. 말도 안 된다.
고개를 젖고 있는 날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릴리스의 모습.
-지금 글자 몇 개 보여요?
열 한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그리고 눈 앞엔 노란색 간판의 감자탕 집이 보였고.
그녀가 일하고 있는 곳.
그리고 그녀의 퇴근시간은 이제 십분 정도 남아있는 듯 했다.
-네 개.
-거짓말 하지 말구요.
-이씨··· 세 개.
-무조건 다섯 개 까진 늘여야 해요. 그래야 그녀를 도울 수 있으니까.
-너 이거 완전 사악한 짓인 거 알아? 나 이러다 진짜 지옥 갈 거야.
-주인님 저기··· 드디어 나왔네요.
릴리스의 손가락 끝.
하얀색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입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정체 모를 반가움이 가슴을 일렁이게 했고, 퇴근 인 듯 식당 유리문을 열고는 그녀가 밖으로 나오는 모습.
-진짜 여전히 예쁘네요.
다시 식당 안을 향해 한번 더 고개를 숙인 그녀가 얼굴 선을 따라 내려온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릴리스의 말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은 청순했고, 아이 하나 있는 유부녀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의 매끈한 몸은 눈부셨다.
청바지가 이렇게나 잘 어울리는 여자를 티브이에서 말고 본적이 또 있었을까 싶은 두근거림.
핸드백을 한쪽어깨에 단단히 고쳐 맨 그녀는 이제 어둠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뭐 해요? 전화 하셔야죠.
-나 진짜 안 내키는 거 알지?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라져 가는 이태선씨를 바라봤고.
마른 침을 삼켰다.
후··· 될 대로 대라.
핸드폰을 들었다.
‘누구? 학생? 웬일이야, 이 늦은 시간에, 참! 몸은 괜찮아?’
가래가 거릉거리는 쇳소리.
잠에서 덜 깬 박씨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싸한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아저씨 혹시 주무신 거 아니셔요? 죄송해요. 전 지금쯤이면 우유배송 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아니야, 아니야. 일어날 때 다 되었는데 뭘. 목소리 들으니까 괜찮아 보이네. 다행이다. 나 그날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그 목소리엔 다정함 마저 깃들어 있었고.
정말이지 좋은 분.
박씨 아저씨.
그리고 이태선씨의 남편.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찾아 뵙고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아저씨 지금 어디세요?’
‘어쩌나 나 아직 집인데. 그리고 인사는 무슨. 됐어, 자네만 건강하면 그걸로 된 거야.’
릴리스를 다급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걱정 말라는 듯 빙긋 웃어 보이는 릴리스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고.
뭐가 저렇게 느긋한 건지.
릴리스가 차 바닥에 놓여 있는 상자를 가리킨다.
‘별건 아닌데··· 제가 아저씨 드리려고 뭘 좀 샀거든요. 이따가 배송 나오시면 이 번호로 전화 꼭 좀 주세요. 그래도 얼굴 뵙고 인사 드리고 싶어서요.’
“이 사람, 왜 그런데다 돈을 써.”
릴리스는 인간의 나약한 부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릴리스의 계획이란 것.
어찌 보면 대충 머릿속에서 생각해낸 것 같았지만 꽤나 치밀했으니까.
모든 건 릴리스가 말한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학생 지금 밖에 나와 있으면 수고스럽지만 여기 우리 집으로 올 텐가? 내가 나가고 싶어도 마누라 오기 전엔 아이 때문에 안 되거든.’
-빙고!
릴리스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더니 그것 보라는 듯 웃는 모습.
절대 불가능 할 것만 같았던 악행은 그렇게 코 앞으로 천천히 다가와 있었다.
빌어먹을.
릴리스의 계획은 이랬다.
-확실한 악행을 해서 선행을 덮어버리는 거에요. 더 간단히 이야기 하면 선행을 하기 전에 글자 수를 확 늘여 놓는 거죠. 기억나시죠? 병원에서 주인님이 형 앞에서 형수에게 야한 손장난 했던 거. 박씨 아저씨가 있는 장소에서 이태선씨를 안으세요. 형수와 똑 같은 방법. 아니다. 형수보다 더 과감하게 하셔야 해요. 그래야 확실한 악행이 될 테니까.
‘끽.’
아저씨가 가리켜준 주소에 차를 세웠다.
한눈에 보기에도 낡은 4층짜리 아파트였다.
걸어서 퇴근하는 이태선씨 보다 분명 먼저 도착 했을 터.
-자, 주인님 파이팅! 제가 옆에서 도울 테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왜 꼭 그 아줌마여야 해? 다른 악행을 하면 되잖아?
-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가 하루는 길을 가다가 위험에 처한 유태인을 구해줬다고 쳐요. 과연 그게 선행일까요? 악행을 한 대상에게 베푼 선행은 그 효과가 확 줄어든답니다. 속담에 이런 말도 있잖아요. 병 주고 약 주고.
-말 하난 잘한다.
-이것만 기억해 두세요. 지금 우리가 하려는 악행은 이태선이라는 불행한 여자를 돕기 위한 행동이라는 걸.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여자···
-······
-주인님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요.
-미친!
-또! 또!
고개를 저었다.
현실 감각 없는 릴리스의 말일 뿐.
‘아줌마 창녀야?’
그런 말을 한 나 따위를 좋아할 리는 없었으니까.
“어여 들어 와. 나 이렇게 살아. 허허허.”
“안녕하세요. 아저씨.”
좁은 현관.
그리고 그것 보다 더 좁아 보이는 거실이었다.
딸 아이인 것 같은 귀여운 꼬마 사진이 벽 한쪽에 걸려 있었고, 작은 식탁 하나와 나무 장식이 다 떨어져 나간 낡은 싱크대.
빛 바랜 벽지와 족히 삼십 년은 되었을 것 같은 작디작은 티브이.
낡음과 허름함은 집 전체에 가득 이었다.
삶의 팍팍함. 아니 고단함.
천사가 아껴 마지 않던 이태선씨는 이런 고단한 곳에 살고 있었던 것.
“어여, 앉아. 그래 몸은 어때?”
아저씨가 식탁의자를 끌어왔고.
낡은 장판이 깔린 거실바닥이 만들어내는 삐걱거리는 소리.
“저 그날 아저씨 아니었으면 영락없이 죽었을 거에요.”
“에이, 이 사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
“그럼, 이제 우유배달은 안 하는 거지?”
“네, 저희 형 그때 병원에서 보셨죠? 형이 우유배달 다시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허허허. 그래, 잘 생각했어. 젊은 사람이 할 일은 아니지. 가만 있자. 그래도 우리 집에 왔는데 커피라도 한잔 해야지? 잠깐만 기다려봐.”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저씨.”
“괜찮긴. 나도 일 나가기 전에 커피한잔씩 꼭 해.”
“아저씨 저기 이거.”
들고 왔던 작은 상자를 내밀었고.
“별 거 아니에요. 약주 좋아하시면 두고 드세요.”
“아이고, 학생, 이게 뭐야? 술 이야? 왜 이런 걸 샀어. 비싼 돈 주고.”
마트에서 파는 포장만 화려한 채 십만 원도 안 되는 싸구려 양주였다.
하긴 지금 내 형편엔 십 만원도 큰 돈.
아무튼 아저씨는 감격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상자와 날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아휴, 이거 참··· 나 이런 거 받아도 되는 줄 모르겠네.”
“죄송해요. 아저씨,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인사 드리러 왔어야 하는데. 그리고 이거 비싼 거 아니에요.”
아저씨의 커다란 손이 다가와 내 등을 두드렸고.
마치 형의 손처럼 따듯한 느낌은 또 한번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사람도 아니었다.
“고마워. 학생. 학생 같은 사람 알게 된 거 내 복이야. 대리점에서도 나 아는 척해주는 사람은 학생 하나 밖에 없었는데. 나야말로 정말 고마워.”
선량한 사람.
-준비하세요. 지금 들어와요.
-뭐?
그리고 그때였다.
‘철컥.’
릴리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현관문 고리가 움직이는 소리가 울렸고.
‘끼익.’
낡은 현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있었다.
“문 안 잠겼네. 왜 더 자지 않고요. 당신··· 일어···”
끝이 흐려진 목소리가 멈춘다.
머리카락이 몇 올쯤 청순하게 내려온 하얀 얼굴.
흰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입은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는 모습.
이렇게 예뻤었나?
나와 눈이 마주쳤고.
그리고 그녀는 현관 문 앞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여보, 일전에 얘기 한 적 있지?”
이태선.
그녀였다.
도무지 이 낡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사함이 마치 향기처럼 공간으로 퍼져 오르는 느낌.
“······”
그녀의 손가락이 잡고 있는 문고리를 쉽게 떨쳐내지 못하고는 굳어있다.
입술이 말려들어가 잇자국이 생길 정도로 꼭 깨물었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져 있는 모습.
이건 미친 짓이다.
마치 내 모습이 비췰 듯 커져 버린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은 안쓰러웠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튕기듯 의자에서 일어섰다.
파렴치 할 정도로 큰 목소리를 낸 나의 인사.
자신과 몸을 섞은 남자가 자기 집에서 그것도 자신의 남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그녀의 심정은 어떨까.
진짜 악마라도 된 기분.
“나랑 같이 일하던 학생이야. 그날 왜 기억나지? 내가 병원에 데려 갔다던 바로 그···”
그리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한 그녀가 내 시선을 피하며 작게 고개를 숙였고.
앞섶을 여미더니 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쾅.’
하지만 곧장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녀.
옆에 앉아 있던 박씨 아저씨의 표정이 굳어지는 모습까지.
“아니 저 사람이··· 식당에서 무슨 일 있었나? 잠깐만, 학생.”
그리고 박씨 아저씨는 일어서서 그녀가 사라진 방안으로 따라 들어가는 모습들이 천천히 펼쳐지고 있었다.
제길,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너 아까 저 여자 나 좋아한다 그랬지. 한대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싸한 표정 봤어?
-제가 볼 땐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걸요?
-뭐가 부끄러워?
-이렇게 사는 모습을 주인님 봤으니까. 주인님 여자를 너무 모르시네요.
하긴 온통 낡음이 가득한 집.
-좋아, 다 좋아. 근데 이제 어떡해?
-뭘 어떡해요. 과감하게 하셔야죠.
-그니까! 뭘!
덜렁 거실에 혼자 있는 상황.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 ‘그럼, 저 가볼게요.’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딱 그저 그만일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릴리스, 이거 정말 가능이나 한 일이긴 해? 이 좁은 집에서 게다가 박씨 아저씨가 버젓이 있는데 도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잘 들어요, 주인님. 딱 1, 2분 정도 밖에는 시간이 없을 거에요. 그러니까 머뭇거릴 시간은 전혀 없어요. 무조건 글자 수 다섯 개 이상은 만들어야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반드시 기억해요! 최대한 악행을 강하게 하셔야 해요! 주저하지도 머뭇거리지도 말아요. 과감하게. 알았죠?
-미친··· 말이 되는 소릴 해!
“우리집사람 몸이 좀 안 좋다네. 잠깐만 기다려. 커피 금방 타줄게.”
박씨 아저씨가 다시 밖으로 나왔고.
“저 괜찮아요. 아저씨.”
“그럼 내 맘이 편치 않아서 안돼. 잠깐만 기다려. 금방 타니까.”
정말 커피를 타려는 듯 아저씨가 싱크대를 오가는 모습.
등을 돌리고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커다란 손에 달려 있었다.
“일 나가기 전에 한잔 먹는 커피. 자네도 알지? 새벽일 해봐서. 아? 어때? 새벽에 일 안 하니까 요즘은 푹 자지?”
-지금이에요. 화장실 간다고 하고, 그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세요.
-뭐? 너! 진짜 미쳤어? 나 못해. 아니 안 해!
-하셔야 돼요!
-분명 들킬 거라구!
-안 들켜요! 절 믿으세요!
순간 아저씨가 날 돌아봤고.
“네··· 네. 그럼요. 요즘은 푹 자요.”
심장은 꼭 죽을 것처럼 뛰고 있었다.
저 방으로 들어가라고?
지금?
미쳤다.
“난 아직까지도 구식인지 일회용 커피는 영 입에 안 맞아서 못 먹겠더라구. 학생 설탕 몇 개나 넣어?”
“아··· 그게··· 두 개? 네! 두 개 넣어주세요.”
-진짜 이러실 거에요? 시간 없다구요!
-이건 아니야. 릴리스 진짜 이건 아니다. 아무리 봐도 너 살짝 맛 간 거 같은데. 이건 도저히 불가능해!
-그냥 좀!!!! 해요!!!!
빌어먹을.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지.
후···
쉼 호흡을 했다.
그러니까 화장실 가라고···
시발,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지!
“아저씨 저 화···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그럼, 저기야”
아저씨의 손가락 끝이 작은 문을 가리켰고.
그리고 다시 등을 돌려 커피를 타는 모습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르겠다. 될 대로 대라.
떨리는 손가락.
‘달칵’
천천히 화장실 문으로 다가서서는 벽에 있는 스위치를 올렸다.
그 소리에 아저씨가 다시 뒤를 돌아보려다, 물이 끓는지 냄비를 살피는 모습.
-이제 진짜 시간 없다구요! 빨리 그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세요. 박씨 아저씨, 화장실 문 여는 소리와 구분 못할 거에요.
젠장!
젠장!
그래. 해보는 거다.
걸리면 맞아 죽기 밖에 더 할까.
몸을 돌려 그녀가 들어간 방문고리를 잡았고.
지금 아저씨가 돌아본다면 그야말로 끝장일 것 같은 느낌.
눈을 감았다.
차라리 그게 편했으니까.
해보는 거다.
해보는 것!
‘끼리릭···’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마치 심장을 긁어대는 소리처럼 들리는 느낌이었다.
-빨리요!
-조용히 좀 해! 지금 하고 있잖아!
마치 이끌리듯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이익.’
-헉.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녀의 얼굴, 그리고 동그랗고 검은 눈동자.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으니까.
눈 앞 아니 코 앞.
소스라치게 놀란 하얀 얼굴이 바로 내 앞에서 날 똑바로 보고 서 있었고.
그 모습을 마주했을 땐 심장이 쪼그라 드는 느낌이었다.
마치 지금까지 문밖의 광경을 살피고 있었다는 듯 문을 열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바로 코 앞에 있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서둘러 손가락을 입에 올려서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몸에 달라 붙는 청바지.
그리고 하얀 어깨를 완전히 드러낸 하얀색 레이스의 캐미솔 차림.
놀란 그녀가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급히 막는 모습들이 마치 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쿵.’
서둘러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방.
뭘 해야 하지.
일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아 버린 느낌이었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위를 살피는 모습.
그리고 한 옆에 있는 옷을 집어 들어 바쁘게 자신의 어깨를 가리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다 이야기 해야 할까.
-그럴 시간 없어요!
그녀는 뒤로 한 두 걸음 물러섰고 이 어처구니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는 듯 보였다.
-이제 1분 정도 남았어요. 빨리 그녀를 안아요!
제길.
미친 짓.
진짜 이건 미친 짓이다.
낯선 방안의 공기와 이제 떨기까지 하는 그녀의 모습.
순간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내 손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시발!
“악··· ”
그리고 난 그녀를 끌어당겨 버렸고.
내 손에 이끌려 놀란 여자의 몸이 내 품으로 와락 안겨왔다.
작고 여린 부피감.
차가운 맨 살의 느낌과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들.
“왜 이래요!”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그녀의 입 모양이 날 향해 차갑게 말하더니, 필사적으로 몸을 틀며 내 품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저항들이 이어진다.
버둥거리는 그녀의 손은 내 등을 때리고는 내 가슴을 밀어내고 있었다.
떨리는 눈동자와 하얀 얼굴은 바로 내 눈앞에 있었고.
머리가 새 하얗게 되어버린 느낌.
제길! 뭘 어떡해야 하는지 하나도 판단이 서질 않았다.
-빨리요!
버둥거리는 그녀의 몸이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내 팔을 벗어나려 안간힘이다.
“미안해요···. 그러니까··· 보고 싶었어요.”
소리를 내지 않은 입 모양으로 그녀에게 빠르게 이야기 해버렸다.
-보고 싶었어? 지금 그게 할말이에요! 진짜! 이럴 시간 없다니깐요! 아휴! 답답해!
머릿속을 쉬지 않고 울려대는 릴리스의 목소리.
모든 건 그렇게 다 틀려버린 듯 했다.
하지만 순간, 내 품 안 에서 버둥거리던 그녀의 손이 잦아드는 느낌.
그리고 그녀의 버둥거리는 움직임은 천천히 멈췄다.
뭘까.
떨리는 그녀의 눈은 살짝 들려 날 바라보고 있었고.
심장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긴장감은 조용한 방안에 가득 한 느낌.
“학생 어여 나와. 커피 다 식어.”
제기랄.
“보고싶었다구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보고 싶었으니까.
그녀의 머리가 들렸고 날 조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청순하다는 말이 부족하리 만치 하얀 얼굴이 완전히 드러난 모습.
얼마나 꼭 깨물었는지 얇은 입술은 한쪽이 갈라져 있다.
그리고 긴 속눈썹이 올라간 큰 눈은 파르르 거리며 떨렸고.
“······”
순간 그녀의 작은 손이 내 가슴팍을 때렸다.
다시 입술을 안으로 깨물고는···
눈을 감는 모습.
그리고 그녀의 손이 스르륵 내 팔을 벗어나 내 허리를 천천히 감았다.
-진짜 시간 없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