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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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 부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손가락이 까닥거리고 있었다.

“고객님 잠시만요, 캔슬 된 게 있나 한번 찾아 볼게요.”

눈웃음.

항공사 여직원의 이런 적극성은 하나도 반갑지 않았고.

릴리스의 여유로운 표정은 더 꼴 보기 싫었다.

제길,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뭐가 말이 안돼요?

-씨끄러!

-깜짝이야, 이상하다. 오늘 따라 왜케 날카로우실까?

-몰라서 물어?

직원 특유의 사근거리는 말투가 릴리스와의 대화를 끊었고,

“요즘 공항에서 제주도 항공권 구하긴 힘들거든요. 중국인 관광객들이 싹쓸이 해가서요.”

다시 눈웃음.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자세히도 설명해주는 여직원이 키보드를 잡아먹을 듯 두드려 되고 있었다.

“어쩜, 딱 두 자리 뜨네요. 정말 운이 좋으신 거에요. 방금 노쇼로 캔슬되었나 봐요.”

-거 봐요. 제가 뭐랬어요? 킥킥.

일은 그렇게 커져가고 있는 느낌.

릴리스는 전혀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지만, 이대로 제주도로 훌쩍 떠난 다는 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니까.

“근데 출발시간이 이십 분 밖에 안 남았는데, 고객님 괜찮으시겠어요?”

괜찮긴 개뿔.

분리불안증을 겪고 있다는 다섯 살 딸, 그리고 새벽 일을 나가는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다.

그런 유부녀와 몸을 섞은 건 그렇다 치고 이제 하다하다 평일 날 제주도로 여행?

아니다. 이건 아니다.

악마 할애비가 와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

평일 낮인데도 불구하고 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이 앉아 있는 벤치.

그 사이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날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 이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 할까. 감조차 오지 않는 상황.

그리고 내 옆, 공항 부스에 턱을 기대고 한껏 나태하게 서 있는 릴리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왜요?

-좋아, 네 말대로 지금 제주도에 간다고 쳐. 적어도 거기서 하룻밤은 자야 할 텐데. 그럼 규리는? 또 박씨 아저씨는? 너 지금 하고 있는 일 정말 확실한 거야? 이건 말이 안되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아줌마한테 피해가는 일 아니냐는 거야!

-아휴! 저 새가슴! 좋아요! 이젠 저도 설명하기 지쳤어요. 맘대로 생각해요.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제가 다 알아서 한다는 것, 그러니 아무 걱정 말라는 것. 딱 그것 두 가지 에요. 그나저나 주인님 정말 큰 일이네요. 저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잖아요!

-이씨! 신뢰고 나발이고! 좋아, 다 좋다고. 근데 이 빌어먹을 상황을 아줌마한테 뭐라고 이야기해! 마트에서 일하다 나온 사람한테 뜬금없이 지금 제주도 갑시다?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왜요? 안 될 건 또 뭐가 있어요? 어려울 것 하나 없잖아요. 그럼 제주도는 무조건 쫙 빼 입고 가야 하나? 그리고 주인님, 왜케 겁이 많아요? 저 아줌마란 사람한테 최고의 날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건 주인님 이었다구요!

-이게 최고의 날이냐!

아무튼 이 현실 감각 없는 악마 같으니라고.

-일단 표나 끊어요.

좋아, 될 대로 되라다.

“탑승권 주세요.”

하얀색 블라우스와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였다.

내 옷이야 얘기하면 입만 아프고 그녀도 제주도를 가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

암튼 그녀가 핸드백을 고쳐 메는 모습이 저 멀리 보였다.

다가오는 날 향해 벤치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고.

“무슨··· 일이에요?”

동그란 눈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

하긴 아직까지 여기에 온 이유를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당황스러움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느낌.

릴리스가 내 팔을 툭하고 쳤지만 감각조차 없었다.

-아! 왜!

-자, 맘에 드는 거 하나 골라요. 1번 우리 제주도 가요. 2번 제주도가 우릴 부르네요. 3번 아무 소리하지 말고 그냥 따라 와요. 개인적으로 전 3번이요. 남자답잖아요? 킥킥.

제길.

어쩔 수 없이 손에 들고 있는 탑승권을 흔들어 보이는 소극적인 의사표시를 했고.

내 손에 들린 비행기 그림이 그려져 있는 탑승권에 그녀의 눈이 천천히 고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이 조금씩 찌푸려지는 모습.

분명 앞뒤 안 따지고 어떻게 하면 건수나 만들까 하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으로 볼 터.

최수혁 이 병신아,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그게··· 뭐에요?”

글쎄, 이게 뭘까.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핸드백을 고쳐 메는 동작은 한 눈에 보기에도 불안함.

-뭐해요! 빨리 말해 버려욧!

좋다. 일단 말이라도 해보는 거다.

“우리··· 제주도··· 갈래요?”

더듬거리긴 했지만 결국 해버렸고, 그녀는 잘 못 들었다는 듯 눈으로 다시 묻고 있었다.

“어디··· 요?”

“그러니까··· 제주도요.”

“지금··· 요?”

내 얼굴을 살피는 그녀의 한쪽 눈이 인상을 쓰며 되묻는 장면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미쳤어요? 하고 뒤 돌아서서 가버린다고 해도 하나 이상치 않을 상황.

제길.

“알아요. 그러니까 물론 말도 안 된다는 거 저도 잘 알아요.”

“······”

“근데 이 말도 안 되는 여행. 아니다. 이건 안 되는 일이에요. 잠깐 제가 미쳤었나 봐요. 미안해요.”

-주인님이야말로 진짜 미쳤어요? 다 된 밥에 코 빠트리기잖아요!

-그래 미쳤다. 근데 너보단 덜 미쳤거든!

손에 들린 탑승권을 등 뒤로 감췄고.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신경 쓰지 말아요. 괜한 짓 한번 해본 거니까. 우리 그만 돌아가요.”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날 뚫어져라 쳐다보며 서 있는 모습.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짚는 모습이 이어졌고.

“그거··· 혹시···”

볼에 바람을 집어넣어 부풀리더니 앞머리를 불어 올리는 모습에선 차라리 고개를 돌려버리는 게 편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 신경 쓰지 말아요.”

“비행기 표에요?”

“······”

“어디 봐봐요.”

순간 그녀의 손이 다가와 등 뒤로 감춘 비행기표를 빼앗아갔고.

“아··· 저기, 안 보셔도···”

상황은 그렇게 최악이었다.

찬찬히 탑승권을 살펴 보는 눈.

그래, 한심하겠지. 덜컥 유부녀를 데리고 수작쯤 부리는 생각 없는 인간으로 볼 터.

그녀의 눈이 아직 탑승권에 고정 되어 있다.

손가락까지 짚어가며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는 느낌.

그리고 얼마쯤 흘렀을까.

조심스럽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읊조리듯 흘러나왔다.

“처음 봐요. 비행기 탑승권.”

허둥대는 내 등을 그녀의 손가락이 살짝 두드렸고.

“저쪽 인 것 같은데요.”

가쁜 숨소리.

순간 잘못 본건지 알았다. 상기된 얼굴은 웃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11~17번 탑승구↑’ 란 표지판을 가리키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

“아무래도 우리 또 뛰어야 할 것 같은데요?”

“아··· 네.”

당황한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분명 그녀의 얼굴엔 싱긋거리는 작은 미소.

진짜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뭐해요? 뛰어야죠!”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벌써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고.

묘한 기분 아니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의아함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보고도 믿기진 않았지만 그녀는 마치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릴리스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제가 뭐라고 했어요. 다 잘 될 거라 그랬죠?

배시시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려 보이는 릴리스가 웬일인지 미워 보이지 않는 느낌.

-주인님, 이쯤 되면 저 믿어줄 거에요?

-미친··· 아직은 아니야.

-치!

비행기 티켓을 입에 물었고.

수속을 마치자 마자 나타난 공항 탑승구가 열을 지어 있는 복도였다.

“같이 가요!”

그녀가 뛰어간 방향으로 달렸다.

얼마 안 있어 앞서 달리는 그녀의 손을 움켜 잡았고.

“풉···”

흩어지는 청량한 웃음소리.

숨을 몰아 쉬는 얕은 숨소리를 배경으로 하얀 얼굴가로 흩어지는 머리카락.

그리고 달려가는 중에 가끔씩 마주치는 그녀의 활짝 웃고 있는 눈까지.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게 그녀의 달리기 솜씨는 일품이었고, 내 손안에 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이유는 몰랐지만 그녀의 웃는 모습은 눈 앞의 모든 불안과 걱정을 사라지게 해주는 것 같았으니까.

어쨌든 이제 비행기 시간까지 십분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헉헉··· 잠깐만요! 기다려요! 우리도 타야 돼요!”

탑승 수속 서류를 정리하는 승무원들이 깜짝 놀라서 달려오는 우리를 쳐다보는 모습이 마치 영화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막 탑승구가 닫히기 직전처럼 보였고, 깜짝 놀란 승무원들이 빨리 오라는 듯 손짓을 해대는 모습.

“지금 출발할 거에요. 빨리 뛰세요!”

그리고 달려 나온 여자 승무원은 탑승권을 빠르게 확인 하더니 살짝 인상을 찡그린다.

“헉헉헉··· 뭐 잘 못됐나요?”

“아··· 아니요. 일단 빨리 타세요.”

일단?

부자연스런 미소였지만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순간, 내 옆의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으니까.

“아줌마, 잘 뛰던걸요?”

“킥킥, 지금 놀리시는 거죠?”

그녀의 블라우스 앞 가슴이 아직 진정되지 않는 숨소리에 들썩이는 모습.

아직 내 손안에 들어있는 그녀의 손이 땀으로 촉촉했다.

흔한 캐리어도 배낭도 없이 청바지 차림의 그녀와 난 그렇게 비행기 탑승구로 들어서고 있었고.

“꼭 우샤인 볼트 같았어요.”

“혹시 그··· 올림픽에 나오던 흑인이요? 치! 킥킥.”

내 팔을 살짝 때리는 가벼운 주먹. 그리고 입가엔 넘쳐나는 귀여운 미소.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을 땐, 낯선 행동에 잠시 멈칫거렸지만 그녀의 눈이 나의 손길에 맞추어 올려다봤다.

이 여자, 불안하지도 않는 걸까.

아이와 남편을 두고는 훌쩍 떠나는 갑작스런 여행.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정말 우리 떠나는 거에요?”

한껏 들뜬 목소리.

날 완전히 믿는 듯한 그녀의 눈이 반달을 그리며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난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놓았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기분이었으니까.

천천히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 내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럼요. 지금 떠나는 거에요.”

수줍음에 뒤에 따라오는 승무원들을 흘끔 쳐다보는 그녀의 붉어진 얼굴은 귀여웠고.

이내 자신의 허리를 감싼 내 팔을 두 손으로 꼭 잡는 그녀.

연약한 허리의 부피감은 기어코 심장을 일렁이게 만들어 놓고야 만다.

탑승구를 따라 걸어가는 길.

우린 마치 아이들처럼 그렇게 들떠 키득거리고 있었다.

“요즘 비행기 사고 많이 나던데.”

“치! 그러지 마요. 저 비행기 처음 타보는 거라구요.”

“비행기에 테러범 탔으면 어떡하죠?”

“킥킥, 제가 잡을게요.”

“하긴 아줌마 힘 쎄더라.”

“아휴! 진짜!”

머리를 기울였고, 그녀의 귀에다 입술을 가져다 되었다.

속삭임.

“남들이 보면 우리 막 결혼한 부부 같을 거에요.”

그리고 입술을 꼭 깨물고 웃음을 참아내는 그녀의 하얀 얼굴이 미칠 것 같이 사랑스러운 느낌.

“환영합니다. 탑승권 보여주세요.”

이미 비행을 소개하는 기장의 기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었고, 눈 앞으로 좌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모습은 낯설었다.

내 옆에 꼭 붙어 있는 그녀를 내려다 봤고.

생각해보면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사이인지도 몰랐다.

침대 위에서 섹스를 한 것만 세 번.

그녀의 퇴근 길, 어두운 골목에서 서로의 몸을 탐했던 것까지 합하면 족히 수십 번은 몸을 섞은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 이 기분은 완전히 달랐다.

섹스를 통해선 알 수 없었던 특별한 친밀감.

내 사람인 것 같은 존재감이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어 놓는 느낌이었으니까.

우리 뒤로 비행기 문이 닫히는 육중한 소리가 들렸을 땐 그녀가 놀라 천진하게 웃는 모습.

순간 아까 탑승권을 검사하던 여 승무원이 활짝 웃는 표정으로 우리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고객님, 좌석 업그레이드 시켜 드리겠습니다.”

왠 업그레이드?

“여기 계단 따라서 위쪽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비즈니스 석 이에요.”

-싫다고 하세요.

그녀와 둘이 있을 땐 웬만하면 끼어들지 않는 릴리스가 툭하고 끼어들었다.

-왜? 비즈니스 석이래잖아.

-그냥 무조건 싫다고 하세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 아! 목소리도 조금 높이셔야 할거에요. 그렇다고 싸우라는 건 아니구요. 승객들한테 살짝 들릴 정도로만. 탑승권에 표기 된 좌석 아니면 무조건 싫다고 하세요.

경험상 이런 경우 릴리스의 말을 들으면 밑질게 없었고

그녀가 어리둥절해서 날 쳐다보는 모습.

허리에 두른 팔을 풀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요. 그냥 여기 탑승권에 있는 좌석으로 주세요..”

“저기··· 편히 가시는 게···”

“어차피 금방 내릴 거잖아요. 저희 자리로 갈게요.”

그제서야 상황은 천천히 파악되기 시작했다.

안절부절 못하는 승무원의 곤란해하는 표정은 꽤 볼만했으니까.

아까 탑승권을 확인할 때 표정이 이상타 했는데,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뭐야? 재들 왜 저래?

-이런 일은 드물긴 한데. 아주 없는 일은 아니에요. 오버부킹이죠.

-오버부킹? 그게 뭔데?

-모든 항공사는 일정부분 오버부킹을 해요. 오버부킹이란 같은 좌석에 두 명 이상의 고객을 태우는 것을 말하거든요. 나타나지 않는 고객을 비율로 따져서 비행기 정원 보다 서너 자리 더 항공권을 판매하는 거죠. 아주 오래 된 항공사들 관행 같은 거에요. 주인님 경우는 원래 전산상 걸러져야 했지만 입력 하기도 전에 주인님이 그 탑승권을 구매해 버린 거예요. 전형적인 오버부킹이죠.

-뭐야? 그럼 지금 내 자리에 누가 앉아있다는 거야?

-자, 그게 요점이 아니구요. 지금부터가 중요해요. 오버부킹을 하면 보통 좌석 업그레이드로 넘어가곤 하는데, 최근에 법이 바뀌었어요. 오버부킹을 한 항공사에 대한 페널티가 상당히 높아졌거든요. 벌금도 꽤 세고.

-그래서?

선뜻 믿기지 않았지만.

세 명?

아니 뒤 늦게 달려 온 남자 승무원까지 모두 네 명이었다.

서류를 뒤적거리는 모습.

눈 앞, 승무원들의 이런 당황한 행동은 릴리스의 말을 충분히 일리 있어 보이게 만들었다.

심각한 상황 인 듯 굳어있는 표정.

천천히 그들 쪽으로 다가갔고.

“이거 오버부킹이죠?”

순간 고개를 들어 일제히 날 쳐다보는 승무원들.

그리고 그 표정은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고.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남자 승무원이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선수끼리 왜 이러냐는 듯한 말투.

“고객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전상상에 조금 실수가 있는 바람에··· 너그럽게 이해 부탁 드립니다.”

넓은 파란색 시트, 그리고 푹신한 허리 쿠션은 생각이상으로 안락했다.

계열사 호텔 이용권 한 장이 정갈한 봉투에 담겨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었고.

버튼을 눌러 받침대에 올려진 발을 쭉 뻗어 봤지만 앞자리까지 닿지 않는다.

자리에 앉자마자 승무원이 득달같이 가져다 준 알록달록한 스낵이 담긴 예쁜 접시.

이 넓은 공간에 달랑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은 호사스런 고즈넉함이 사방에 가득했다.

FIRST CLASS라는 음각된 글자가 시트마다 고급스럽게 새겨져 있는 모습.

암튼 이 비행기에선 가장 좋은 좌석이라 했다.

“여기서 축구 해도 되겠네요.”

“풉.”

긴장이 풀어져서 일거다.

그녀의 표정은 이제 온화해 보이기까지 했고.

불과 몇 시간 전, 망할 년이란 소리를 듣고 내 손에 이끌려 마트 주차장에 비참하게 서 있던 모습은 상상하기 조차 어려웠으니까.

입가에 맺힌 미소 그리고 창 밖을 살피는 호기심 가득한 눈.

“지금도 뭐가 보여요?”

“아니요. 그냥··· 신기해서요.”

보라는 듯 그녀가 몸을 비키며 뭔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냥 구름이잖아요.”

“풉, 구름 위잖아요.”

순간 창을 바라보던 그녀가 손을 뻗어 팔걸이에 올려져 있는 내 손을 감싸 잡았다.

그녀의 긴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어 들어오는 부드러운 촉감들.

낮은 비행기의 엔진 음.

그리고 먼지 하나 없이 정갈한 비행기안의 고급스런 공간.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한가로움이 낯설다.

“우리 뭐 좀 마실까요? 아까 승무원이 필요한 거 있음 뭐든지 말하라던데.”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고.

“고마워요.”

뜬금없는 인사였다.

입가에 맺힌 소소한 미소가 아름답다는 생각.

그리고 하얀 얼굴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모습 중 어쩌면 가장 평온한 느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창을 향해 있던 그녀의 눈이 이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알아요?”

귀엽게 올라간 눈이 한쪽으로 기울인 얼굴 안에서 반짝이는 모습.

“당신하고 있으면··· 편안한 거.”

마치 고백이라도 하듯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당신은 왜 이렇게··· 든든해요?”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 말인데.

순간 생소한 감정이 가슴을 먹먹하게 메워버렸다.

뿌듯함이 이런 걸까 싶은 느낌.

그녀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날 들뜨게 만들어버렸으니까.

나도 모르게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가 버렸다.

“아까워요.”

“네?”

사악한 마음인지도.

박씨 아저씨의 아내로 두기엔 아깝다라는 생각을 해버렸으니까.

그리고 무슨 수를 쓰든 이 여자를 가지고 싶다라는 생각까지.

미친놈.

진짜 악마 같은 마음은 그렇게 심장을 요동치게 하고 있었다.

“저기··· 아줌마. 든든한 사람이랑··· 키스 한번 안 할래요?”

“풉.”

수줍은 듯 소리를 감춘 그녀의 웃음소리.

주저하며 내 손 안에 든 자신의 손을 가볍게 흔드는 모습은 사랑스러웠고.

순간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가늘고 긴 목선이 블라우스 위로 아름답게 드러나버리던 순간 이기도 했고.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감싸고는

“아··· 저··· 잠깐만···요”

특유의 습관적인 방어기재는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하지만 이런 말과는 다르게 시트에 깊숙이 가라앉은 가냘픈 몸은 날 향해 활짝 열려 있었으니까.

“누가··· 오면··· 어떡··· 읍···”

넓은 시트에 쓰러지듯 등을 기댄 그녀가 다가오는 내 입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트 팔걸이를 사이에 두고 내 얼굴이 그녀 쪽으로 넘어가 입술을 덮었고.

물컹거리는 따듯함은 한없이 부드러운 느낌.

그리고 이제 내 입안으로 들어온 그녀의 혀는 천천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치열을 간질이고는 깊숙이 들어와 넘실대는 현란함.

“츄릎···”

분명 날 만난 이후 그녀는 변해 있었다.

처음, 자신의 입안으로 들어 온 내 혀에 어쩔 줄 몰라 당황하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남자가 기분이 좋을까 연구라도 한 것처럼 혀는 꿈틀거리며 입안 곳곳을 음란하게 헤집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눈 아래, 좌석 손잡이를 부여잡은 그녀의 손가락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모습.

그녀가 내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 당기더니 혀 끝으로 익숙하게 간질인다.

다시 깊숙이 들어와 박히는 그녀의 혀.

생각해보면 그녀와의 키스는 늘 이랬다.

남의 눈을 의식해야 했고, 장소를 가려야 하는 긴박함이 있었으니까.

하긴 우린 어떤 멋들어진 이유를 가져다 부쳐도 우린 그저···

“으음···”

그녀의 달뜬 교성이 포개진 입술 사이로 간간히 뿜어져 나왔다.

시트를 넘어간 내 손은 이제 블라우스 위로 천천히 옮겨가고 있었고.

잊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 우린 불륜이었으니까.

“잠깐··· 만··· 요.”

내 손이 그녀의 블라우스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봉긋한 부분을 찾아 들어가고 있었다.

마른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만함은 브래지어 위에서도 확연했고.

블라우스 위, 딱딱한 브래지어를 아래로 쓸어 내리고는

“저기··· 아··· “

쏟아져 나온 보드라운 가슴을 손바닥 안으로 가득 움켜잡았다.

순간 호사스러운 부드러움이 손안에서 부서진다.

“으···음···”

블라우스를 뚫고 나올 듯 솟아있는 유두가 손바닥을 간질이는 이질적인 느낌.

그리고 허리를 살짝 굽혀 이런 나의 행동을 도와주는 그녀의 모습은 심장을 아프게 할 정도로 자극적이었고.

여자의 몸이 이리도 유혹적일 수 있을까 싶은 감탄.

순간 가슴을 치받듯 강한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욕망.

아니 욕정.

벗기고 싶었다.

그것도 완전히 발가벗기고 싶었다.

실오라기 하나 없이 하얀 알몸을 만들고는 카펫이 깔린 이곳 바닥에 다리를 활짝 벌려 눕히고 싶은 말도 안 되는 욕구.

그리고 이 먹먹한 심장이 풀어질 때까지 그녀의 아래를 실컷 유린하고 헤집어 놓고 싶은 욕망이 잔인할 정도로 꿈틀거렸다.

빌어먹을, 한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한번도 이렇게 까지 욕정에 목말라 본적은 없었건만.

힘겹게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고.

가슴을 가득 움켜 쥔 내 손이 움직일 때마다 꼭 감은 눈을 파르르 떠는 그녀의 여린 모습.

이성?

절재?

개나 줘버리라지.

박씨 아저씨에게서 그녀를 반드시 빼앗아 버리고 싶었다.

딸? 그 어린아이쯤 고쳐 생각해보면 문제 될 것도 없을 터.

내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었으니까.

완벽하게 내 여자를 만들어 버리고 싶은 되도 않는 사악한 마음이 내 안에서 낯설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상상조차 못할 욕망과 더러운 욕정들이 내 심장을 견딜 수 없게 헤집어 놓는 느낌.

“그만요···!”

그녀의 비명과 같은 짧은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고.

블라우스 위, 가슴을 터질 듯 움켜 쥔 손.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 들어가 있는 또 다른 한 손이 내려다보였다.

“그만··· 그만해요.”

미친 놈. 뭘 하려고 했던 거지?

내 손은 안간힘으로 버티는 그녀의 허벅지를 강제로 벌리고 있었으니까.

순간 그녀는 내 목 언저리에 얹혀져 있던 얼굴을 떼어내고는 손을 들어 내 가슴을 밀어냈다.

“이··· 손··· 아파··· 요.”

어느새 그녀의 손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내 손 위에 포개어져 있었고.

움켜 쥔 손을 놓아달라는 듯 바라보고 있는 하얀 얼굴.

새근거리는 가쁜 숨소리.

서둘러 가슴을 움켜 쥐고 있는 손을 거뒀다.

“미··· 미안해요.”

그리고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 들던 손도 빼내었고.

몸을 움츠린 그녀가 내 표정을 살피는 모습은 낯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아팠던 거다. 그녀가 블라우스 위로 내 손안에 들어있던 가슴을 만지고 있었으니까.

제길, 한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순간적으로 정신을 놓쳐버린 기분이었고, 꼭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그때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다가왔다.

“괜··· 찮아요?”

걱정스레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고.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만···”

그녀의 눈이 날 올려다보는 모습.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은 이제 내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흉하게 구겨진 블라우스.

그 블라우스를 펴주려고 손을 뻗는 순간.

그녀가 내 손을 피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모습까지.

후···

상황은 거지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괜찮은··· 거죠?”

다시 묻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눈가를 스치는 번쩍거리는 섬광.

글자?

서둘러 눈을 감았고.

염소 문양 밑.

-뭐야 이거!

일반적인 하얀색의 문자와는 확연히 다른 붉은색의 문자 하나가 새로 생겨나 있었다.

-릴리스! 이 기분 나쁜 빨간 글자는 뭐야!

-이런··· 그건 지금까지처럼 바포메의 일반적인 문자가 아니에요. 붉은색의 문자. 바로 사티로스의 상징이죠. 바포메처럼 얼굴은 염소지만 몸과 팔은 사람의 형상을 한 지독한 쾌락과 환락의 악마예요. 지옥에서도 심심하면 동물과 성교를 하곤 하는 변태 같은 사티로스죠. 질투 많고 시기도 많은 그리고 포악하기 그지 없는 악마 중의 악마. 그 사티로스가 주인님에게 관심이 있나 보네요. 이런 선물까지 보낸 걸 보면.

-알아듣게 이야기해.

-주인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어요. 이 문자가 가진 힘은 대단해요. 바포메가 일반적인 악마라면 사티로스는 차원이 다르니깐요. 그리고 엄청난 능력을 주지만 그만큼 대가도 크죠. 사티로스가 이런 문자를 보낸 걸 보면 원하는 건 한가지에요.

-그게 뭔데.

-주인님, 그녀를 망가트려야 해요.

-뭐?

-주인님은 지금 사티로스의 힘을 받은 거에요. 그녀를 완전히 주인님의 노예로 만들 수 있는 힘. 그녀는 이제 주인님이 없으면··· 정확히 말하면 주인님이 안아주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갈 수 가 없어요.

-미친!

뭐가 뭔지 하나도 알아먹지 못했다.

다만 기분은 아주 엿 같았고.

순간 그녀의 손이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

내 손을 잡았고.

-따르지 않으면 사티로스는 분명 화를 낼 거에요. 자신의 선물을 거부한 인간에겐 늘 말할 수 없이 잔혹하니깐.

그녀가 내 손을 천천히 자신의 블라우스 위로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 위로 내 손을 살짝 올려둔다.

“이따가···”

“네?”

그녀의 하얀 얼굴에 한 줄기 희미한 미소가 반짝이는 모습.

“이따가··· 이렇게··· 안아줘요. 지금처럼···”

--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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