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 이제야 좀 조용하네
* * *
로이의 최후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분신들을 소환했다.
그리고 문 바깥으로 나갔다.
“여봐라, 하녀!”
내 호통을 듣고 헐레벌떡 하녀가 달려온다.
얼굴에 패인 주름살을 보니 하녀장이거나 그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여인이다.
이런 새벽 시간에 하녀장이 직접 셰릴의 방 근처에 대기하고 있다는 건 로이놈이 혹시 모를 일에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부르셨습니까? 마이 로드.”
복도가 살짝 어두워서도 있겠지만 내 모습이 영락없이 로이인가 보다.
저런 나이 든 하녀장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면 분장은 완벽하다.
“얼음을 채운 커다란 금속 상자에 독한 술을 가득 담아와라. 오늘 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시원한 술을 마음껏 마시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그럴싸하고 자연스러운 명령이었기에 하녀장도 고개를 끄덕이고 퇴장했다.
나는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또다시 외쳤다.
“나와라.”
이미 예리한 기감으로 주변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하녀대신 풀로 무장을 갖춘 기사가 걸어 나왔다.
자세히 보니 록펠이었다.
“록펠.”
“네, 백작님. 축하드립니다.”
“뭐가.”
“일이 잘 풀리신 거 아니십니까?”
내가 술을 가득 가져오라는 말에 록펠도 어림짐작한 모양.
장단에는 맞춰주는 게 좋기에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태연함을 가장했다.
“맞다. 셰릴이 나에게 넘어왔다. 이제 크래스 폴리스는 내 손에 넘어왔어.”
“하지만 제가 그때 본 바로는 데이몬 도련님의 지배력이 상당히 공고해 보이…”
“닥쳐라!”
록펠의 입을 억지로 다물게 했다.
로이 녀석 성질머리를 아는 나이기에 주변 기사에게 이렇게 화를 내도 들킬 위험이 없다는 걸 안다.
“고작 사절로 잠깐 갔다 왔으면서 그 녀석의 모든 걸 파악했다는 거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기사가 돼서 나이도 그 정도 먹었으면 보여주기식 연출엔 당하지 말아야지?”
“…네.”
록펠에게 말했다.
“그래도 네 말도 일리가 있긴 있어. 데이몬 녀석이 있으면 향후 폴리스 통치에 걸림돌이 되긴 하겠지. 허수아비라도 명목상 지배자는 그 푼수 놈이니까.”
잠시 호흡을 내쉬고 명령했다.
“록펠, 당장 기사들을 이끌고 데이몬의 방에 가라. 가서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 내일 아침, 내가 셰릴과 함께 침실에서 나왔을 때 그놈의 목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진심이십니까?”
“원래 그럴 계획이었지 않나?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도록.”
아무리 배다른 형제라지만 동생을 죽이라는 형의 비정한 명령을 들은 록펠이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어차피 록펠은 제삼자고 로이는 원래 이런 녀석이었기에 결국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다.
“알겠습니다.”
“명심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네.”
내가 나를 죽이라는 이 상황이 다소 웃기긴 하지만 뭐 어떠랴.
이로써 나는 로이의 수하들에게도 완벽한 명분을 얻었다.
내일이면 내가 크래스 폴리스의 주인을 죽이고 셰릴을 취했다는 소문이 저택을 넘어 캘리알 성 전체에 퍼질 거다.
여기도 나름 눈과 귀라는 게 있으니까 말이다.
그전까지 나는 할 일이 있었다.
때마침 여러 하녀가 낑낑대며 가져온 커다란 금속 상자는 원래는 보물상자 용도로 사용하는 것 같았지만 하녀가 내용물을 다 빼고 얼음을 채워서 왔나 보다.
“잘했다. 거기에다가 둬라.”
“아닙니다. 방안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그런 고사리 팔로 애쓰지 마.”
그러면서 네다섯 명이 붙어서 질질 끌고 가져오던 상자를 한 손으로 번쩍 들었다.
하녀들은 내 힘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서 들어가서 자라.”
“아, 네.”
뭔가 배려해준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안쪽에 얼굴가죽 벗겨지고 심장에 칼 박힌 시체를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달칵
문을 닫고 들어왔다.
셰릴은 그사이에 분주하게 방 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보급품 왔다.”
“괜찮은 것들이군요.”
로이의 옷을 모조리 벗기고 두꺼운 천 재질의 침대 커튼도 걷어냈다.
하녀들이 갖다준 커다란 상자에 가득 들어있던 술들을 확인했다.
예전 지구에서 러시아 사내들이 마실만 한 높은 도수의 보드카였다.
“적당하군.”
술은 최고의 소독제이자 청소도구이기도 하다.
나는 로이의 시체 앞에 다가가서 양 손등을 앞으로 보이게 한 후 어깨높이로 들었다.
그리고 셰릴에게 말한다.
“메스.”
“네?”
“…칼 달라고.”
칼을 잡고 로이의 시체를 해체했다.
이전 생에서 하도 많이 해봤기에 어렵지 않았다.
도축업자 뺨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게 로이의 장기를 분리해서 아이스박스(?)에 넣어놨다.
안에 있던 보드카는 모조리 꺼내서 방 안에 뿌렸다.
도수가 워낙 높은 술이라 피비린내를 술 냄새가 가려주었다.
커튼으로 주변에 튄 피를 정리하고 검강으로 잘게 파쇄한 뒤 창문 바깥으로 흘려보내니 밤새 저지른 광기의 흔적들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정리가 끝날 때쯤 해가 뜨고 있었다.
어느새 아침이 된 것이다.
하녀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마이 로드, 식사 드시겠습니까? 피곤하시면 있다가 오겠습니다.”
“바로 가져와라. 그보다는 내 명령이라 하고 기사들 모두 집합시켜.”
“알겠습니다.”
하녀가 가져다준 아침을 먹었다.
역시나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문을 열고 저택의 홀로 향했다.
내 옆구리에는 셰릴이 발그레한 얼굴로 찰싹 붙어있었는데, 몽롱한 눈빛은 누가 봐도 사랑의 빠진 여인의 그것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이 로드!”
명령을 받고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내게 인사했다.
몇몇 녀석들의 갑옷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가져오도록.”
짧은 명령이었지만 알아들은 기사들이 피투성이가 된 목 잘린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목을 얹어놓았다.
그건 바로 눈을 부릅뜨고 죽은 나였다.
좀 이상하긴 했다.
비록 분신이긴 하지만 내가 내 시체를 보다니.
분신은 나와 생각을 공유하는 녀석이기에 아무런 저항 없이 죽어줬다.
분신을 죽인 기사 놈들을 처리할 방법은 생각해놨으니 복수는 나중에 해주기로 한다.
시체를 앞두고 입을 닫고 있으면 분위기가 어색해지니 셰릴을 껴안은 채로 일장 연설을 했다.
“다들 어제 이후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크게 달라졌다. 덜떨어진 동생 놈은 죽었고 거대도시의 실질적 통치자인 셰릴 경이 나에게 협력을 약속했다.”
“감축드립니다! 백작님!”
“감축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경례를 올리는 폼이 조폭들을 연상시켰지만, 남자들 모인 집단은 원래 이런 법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또 다른 큰 결심을 하려 한다.”
모두가 나에게 시선이 집중된 상황.
내가 로이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전 베르너 백작 부인을 데려오도록.”
내 명령에 약간 의아한 기색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으나 어쨌든 명령은 명령이었으니 몇 명의 기사들이 잠시 사라졌다가 둘째 엄마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백작님? 무슨 일이죠?”
꼭두새벽에 급하게 불려 나왔는지 화장이 번진 새엄마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나왔다가 얇은 옷을 입고 내 옆에 붙어있는 셰릴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남사스럽군요. 그보다 언제 둘이 그렇게 친해졌는지 원.”
여전히 셰릴의 아버지 몬두르 기사단장 때문에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티를 팍팍 내는 둘째 엄마.
그런 그녀를 보고 나도 모르게 진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어제도 보지 않았습니까? 백작.”
“하긴 그렇긴 하군요.”
“쓸데없는 얘기를 하려면 들어가겠습니다.”
몸을 홱 돌려 홀을 떠나려고 하는 둘째 엄마를 보고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전 베르너 백작 부인을 붙잡아라.”
“…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백작.”
기사들도 의심하고 둘째 엄마 또한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물어본다.
로이 형 부하들은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같기에 친절하게 다시 한번 말해줬다.
“어머니를 붙잡으라고 했다.”
“마이로드, 그것은…”
“한 번만 더 내 입에서 똑같은 말이 나오게 하면 명령 불복종으로 알겠어.”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하는데 별수 있나.
기사들이 머뭇거리면서 둘째 엄마를 구속했고, 당연히 그녀는 발작 버튼이 눌려서 발버둥 친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가 백작의 어미입니다. 세상에 어미를 억류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아들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요기요.”
“……”
예전에 지구에서 유명했던 배달어플 이름을 말해봤는데 별로 호응이 좋지 않다.
“어머니, 거기서 들으세요. 방금 전에 데이몬을 저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들었어요.”
“모두 셰릴과 약속한 일이었습니다. 데이몬을 처단하면 그녀가 크래스 폴리스를 저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맞지요? 셰릴?”
“네, 백작님. 저는 오늘부터 당신의 아내이니 제 모든 것은 모두 백작님의 소유입니다.”
사랑의 빠진 여인처럼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셰릴의 연기는 언제봐도 일품이다.
그러니 나도 젊은 여인에게 홀딱 넘어간 연기를 해준다.
“고맙게도 셰릴은 첫째 형과의 싸움에서 큰 도움을 주기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더군요.”
여기서 나는 말을 잠시 끊었고 셰릴이 내 옆에 더 가까이 붙었다.
마치 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그녀는 숙종을 꼬신 장희빈, 황제의 애첩 양귀비, 트로이 전쟁을 시초가 된 헬레네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맛이 간 눈을 연기하며 사방을 둘러본 내가 둘째 엄마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셰릴이 자신을 싫어하는 시어머니와는 한 지붕 아래 살 수 없다고 하더군요. 죄송합니다.”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바닥을 바라보는 나는 입꼬리가 조절이 안 되어서 연신 씰룩거렸다.
표정이 들킬까 봐 일부러 공손하게 인사하는 척을 한 거다.
“어머니를 지하 감옥으로 데려가라! 음식은 일절 주지 말도록! 혹시라도 주는 사람이 있다면 엄하게 벌할 것이다.”
“백작!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백작!”
둘째 엄마가 당황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어찌나 통쾌한지.
미소를 짓고 싶지만,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끝까지 마누라에 홀랑 넘어간 남자 역할을 완수해야 했다.
“주군!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기사 중에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 나왔다.
레벨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로이와 비슷한 20레벨 정도.
하지만 굉장히 고령이어서 딱 봐도 원로 역할을 하는 사람 같았다.
“백작 부인의 합류와 거대도시의 세력이 저희에게 필요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어머니를 유폐하다니요! 이건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영감이 셰릴을 설득하든가.”
은근슬쩍 셰릴에게 바통을 넘겼고, 원래도 한 연기하던 그녀는 이때다 싶어 아름다운 루비 눈동자에 표독스러움을 줄기줄기 뿜어대며 기사를 노려본다.
“리드너 경. 저는 목숨을 걸고 백작님의 곁에 선거예요. 모든 세력을 바쳤는데 어째서 저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저 나이 많은 여자까지 참아줘야 한다는 거죠?”
이름이 리드너였구나.
그것도 모르고 영감이라고 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두루뭉술 잘 넘어갔군.
“크흠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을 강구해보심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요? 사이좋게? 리드너 경은 한 지붕 아래서 등 돌린 두 여자가 다시 사이좋아지는 걸 본 경우가 있나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리드너 경.
저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그런 경우가 없었나 보다.
“하지만…”
“리드너 경이 제 입장이 되어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까요? 백작님을 믿고 모든 걸 걸었는데 그 어미 되는 사람이 절 싫어하는 것까지 인내해야 한다고요? 아니면 혹시…그저 내가 만만해 보여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건가?”
스르르릉
셰릴의 타이밍 좋게 검을 빼 들었다.
누가 봐도 분을 참지 못한 기색이다.
그러자 늙은 기사도 엉겁결에 반사적으로 칼을 꺼내 들었고, 나는 이때다 싶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누구에게 검을 들이대는 거냐! 셰릴은 이제 공식적인 내 아내다! 여봐라! 저 영감탱이도 감옥에 가둬라.”
“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제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 부하 기사들이 둘째 엄마와 늙은 기사를 끌고 나가려고 했다.
“어찌 이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백작! 아들아!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봐라!”
“아, 귀 아파.”
두 사람이 하도 고함을 치며 지랄발광을 해대니 고막이 너무 혹사당한다.
부하들도 워낙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쩔쩔매는 상태.
짜증이 나서 셰릴이 들고 있는 검을 뺏은 뒤에 늙은 놈을 향해 던졌다.
쐐애애액 푹
“커허헉!”
정확히 10점에 박혔으니 금메달.
리드넌지 리스넌지 늙은 영감탱이의 승천일을 조금 일찍 앞당겨줬다.
삽시간에 벌어진 충격적인 광경에 급격히 가라앉은 홀을 보니 그제야 좀 만족스러웠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