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 갇힌 건 내가 아니라 너야
* * *
“허풍도 적당히 쳐야 하는 법이다. 7천 정도라고만 했어도 내가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만. 3만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지.”
나는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혹시 카르마를 더 많이 얻었는데도 줄여 말해서 내 방심을 유도한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제임스의 표정에서 거짓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최근 내 상황과 맞물려서 그의 카르마가 왜 고작 1만밖에 안 되었는지 깨달았다.
“너 말이야. 초반에는 카르마를 많이 벌었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처음에는 주변에 만만한 놈 하나를 잡아다 죽였겠지. 카르마도 많이 벌렸겠고. 그다음엔 더 많은 사람을 잡아 죽였을 거야. 카르마도 당연히 몇 배가 더 들어왔겠지.”
제임스의 입가에 머물러있던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이후에도 점점 스케일을 늘렸겠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람 한 명당 주는 카르마가 점점 줄어들었을 거야.”
“그게 어쨌다는 거지?”
“노예 사업도 처음에나 많이 주지, 나중에는 얼마 주지도 않았겠지.”
내 추측이 맞을 거다.
죽인 사람으로만 따지면 제임스는 명백히 나를 능가한다.
내가 아무리 2년 동안 꽤 많은 사람을 죽여왔다 해도 저런 식으로 성 단위의 사람을 죽이진 않았기 때문.
하지만 왜 제임스는 나보다도 훨씬 적은 카르마를 벌었을까?
“너는 카르마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뭐라는 거냐.”
“카르마가 어떤 원리로 주어지는지 진정한 악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제임스를 보고 알았다.
저 모자란 놈보다는 내가 더 후보자에 가깝다는 사실을.
왜 상위서열 마왕 아유나가 나를 총애했는지 더욱 명확해졌다.
“병신. 이건 예술이다.”
“뭐라고? 미친 건가?”
“판타지아 대륙에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이라고 여겨지는 [가브리엘의 기도]를 알고 있겠지.”
고등 교육을 받은 귀족 출신의 첫째 형이 모를 리가 없다.
나도 표국 출신의 귀녀대원들에게 들은 상식이니까.
“워낙 유명한 예술품이라 이를 따라한 모작만 수천 품이 된다지.”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거냐?”
“같은 후보자로서 불쌍해서 한마디 해주는 거다. 그 수천 개의 모조품이 모인다고 해서 진품 하나보다 가치가 높을까?”
당연히 아니다.
이 정도는 묻지 않아도 첫째 형쯤 되는 수재면 알 거다.
“우리는 예술가이자 공연가야. 제대로 된 예술을 펼쳐야지 찾아오신 손님들에게 더 좋은 인상을 남기고 같은 짓을 해도 더 후한 카르마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저 녀석은 뭐랄까?
낭만이 없었다.
나는 많은 사람을 죽이진 않았어도 개개인을 공들여 작업했다.
크래스 장원 농노 녀석들.
고작 십수명의 인간들에게 지하실 밑에 지옥이 있다는 걸 보여주었고.
모나스 시티 검투사들.
단순히 가슴에 칼을 꽂거나 목을 날려 죽이는 게 아닌 피부 껍질을 벗기거나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선사했다.
나를 얕봤던 템프강 북부 귀족들.
놈들이 죽기 전에도 꼭 쥐고 있었던 소중한 무언가를 뺏어서 절망감에 물든 걸 확인한 뒤에 안식조차 주지 않았다.
가임기 여자라면 거의 모두를 뺏어서 내 소유로 만들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강간 후 죽였다.
이미 내 소유가 된 여자들도 좋게 대하는 법이 없었다.
스스로가 내 성욕 배출구라는 걸 확실히 인지시키기 위해서 자존감을 깎아내고 희망을 짓밟아서 맹목적으로 나에게 복종하게 했다.
이 모든 과정은 마치…
“예술이었지. 너는 우리 후보자들을 모독했다.”
“개소리 집어치워!”
“넌 보나 마나 학살 명령만 내리고 집에서 고상하게 와인이나 마셨겠지? 그따위 짓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제임스도 저렇게 화내는 걸 보면 자신도 뭔가 느끼는 바가 있단 얘기다.
“나도 너처럼 요새 슬슬 정체기에 접어들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길이 틀리단 생각은 들지 않아. 하지만 너는? 10만까지 가는 여정에서 이제 1만. 벌써 멈춰있다. 네 그릇이 고작 거기까지라는 거다.”
내 도발이 너무 잘 먹혔나 보다.
참지 못한 붉은 머리 모지리가 성벽을 뛰어넘으려다가 제 엄마에게 제지당했다.
“제임스, 저런 하찮은 도발에 넘어갈 필요 없단다.”
연륜이 있어서인지 확실히 아들놈보다는 침착하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아까는 너무 급해서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렸으니 지금 제대로 드리겠습니다.”
일부러 과장된 제스쳐로 인사를 올리고 첫째 엄마를 봤는데 딱히 반응이 없다.
재미없는 년.
“그래. 오랜만이구나, 데이몬. 네 친모와는 달리 예의가 바르네. 제대로 배웠어.”
갑자기 내 친엄마 얘기를 꺼내는군.
사실 빙의되기 전 데이몬 친모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이 없다.
어느 날 방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졌다는 정도?
물론 거기에 계모들이 개입해있다고 의심하고 있긴 했다.
“이상하군요. 메이에게 듣기로는 제 어머니는 누구보다 상냥하고 친절했다던데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란다. 죽기 전에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다리를 열어주더구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나.
“제 어머니는 실종이라고 들었는데요. 최후를 지켜보신 듯합니다.”
“당연한 거 아니겠니? 내가 사람을 시켜서 납치했으니 말이다.”
이제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 벌어졌으니 가면을 벗어버린 거다.
“마지막에는 남정네의 더러운 것을 덕지덕지 묻힌 채로 다가와서 살려달라고 애걸을 하더구나. 같은 여자로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
그러면서 저 악녀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저런 얘기를 괜히 하는 게 아니라 일부러 나를 도발시켜서 심리전을 유도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봐도 첫째 엄마는 보기 드문 악인이었다.
후보자는 제임스가 아니라 저 어머니였어야 했다.
내 반응이 영 시큰둥해서일까?
그녀는 한 발짝 더 나아가서 나를 건드렸다.
“크래스 장원에서 내 선물은 잘 받았니?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 보면 전달이 잘 안 된 것 같구나.”
자신이 독약을 보낸 흑막이었다는 것까지 밝혀서 어떻게든 흔들어보려 했으나.
“하찮은 농노새끼들에게 맡겼으니 배달 사고가 나지요. 너무 어설퍼서 일을 꾸민 의뢰주의 지능이 조금 의심되긴 하더군요.”
나도 어디 가서 말로 져 본 기억은 많이 없다.
듣기 싫은 말을 내뱉는 놈들은 미리 파묻어버려서 애초에 질 일이 없긴 했다만.
아무튼, 내 말을 들은 첫째 엄마의 고운 이마에 한줄기 핏대가 살짝 올랐다 다시 내려갔다.
“다른 건 몰라도 허세는 많이 늘었구나. 인정하마.”
“그쪽은 주름살이 많이 늘었군요. 인정합니다.”
아무래도 합격 목걸이는 나에게 더 어울린다.
“……날 긁어봐야 달라질 건 없단다? 네가 베르너 성을 점령할 가능성은 없어.”
묘하게 확신에 찬 목소리.
나는 첫째 형님과 그의 엄마가 성안에도 뭔가를 숨겨놨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데스나이트, 검투사, 마법사, 언데드.
여기서 또 뭐가 더 남아있을까?
“어머니, 그리고 첫째 형님. 제안할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제임스 베르너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어차피 이렇게 불필요한 소모전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장전으로 깔끔하게 끝내죠. 당사자들끼리 해결을 보는 겁니다.”
모두를 위해서 베스트 선택안을 내놓았으나,
“아까 보니 제법 잘 싸우더구나. 그 제안엔 응해줄 수 없다.”
역시나 내가 무슨 수를 숨겨놓았는지 모를 놈이 간을 보면서 일대일을 회피했다.
“웃기는군요. 끝까지 영지민들을 고통에 빠지게 할 셈입니까? 당신은 군주라 칭할 자격이 없습니다.”
참고로 나는 켈리알 성의 남자들을 모조리 몬두르 성에 갈아 넣었다.
하지만 난 필요하다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척 할 수 있는 남자다.
“뭐라하든 난 여기서 나갈 생각이 없다. 아쉬우면 네가 들어오거라.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으니.”
말을 끝마친 제임스의 뒤에 한때 내 부하였던 오크들과 트롤 한 마리가 시체가 되어 나타났다.
저런 식으로 하나하나 내 부하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다가 때가 되면 성문을 열고 역으로 몰아칠 계획이겠지.
얍삽하고 치사하고 자존심도 없고 무엇보다 딱히 볼거리조차 없는 졸전.
지금 나와 제임스의 대결은 후보자 간의 맞대결이니 수많은 마왕이 주의 깊게 보고 있을 텐데.
둘 다 지지부진하게 있다가는 제임스뿐만 아니라 내 가치마저도 떨어질 위험이 있다.
“아아…아파…”
“흐흑…조금만 참아!”
“으윽.”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내 여자들을 아프게 한 녀석에게 상당히 화가 나 있다.
그녀들은 오로지 내 자지한테 아가집 토닥토닥 받을 때만 아파해야만 한다.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첫째 형에게 최후통첩을 내렸다.
“제임스, 마지막이다. 항복해라. 지금 고개를 숙이면 그래도 인연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하마.”
성벽 위에 선 붉은 머리 첫째.
땅에 붙어있는 검은 머리 막내.
눈높이가 아득히 차이 난다.
역시나 제임스는 삐뚜름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젓는다.
“거절한다. 너야말로 지금이라도 백기를 들면 셰릴을 비롯한 네 여인들은 내 여자로 삼아서 살려줄 수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나는 베르너 백작성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깜짝 놀란 여인들이 뒤에서 소리치는 게 들린다.
“주인님!”
“돌아오세요!”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높은 스텟에서 비롯된 폭발적인 스피드.
바람이 내 발목을 휘감는 듯한 착각과 함께 나는 어느새 성문 앞에 서 있었다.
“홀로 이곳에 오다니. 무슨 생각이지?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제임스의 의아한 목소리마저 무시한 채 다리를 힘껏 굽힌 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땅을 박찼다.
콰아아앙!!!
두 발에서 발생한 원형의 흙먼지가 파문을 그리면서 사방으로 퍼졌고.
나는 어느새 푸른 하늘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경악한 첫째 형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성벽 위에서 나를 올려다봤고.
나는 하늘에서 그를 내려다봤다.
빙의된 후의 송길준이자 데이몬.
악마후보자가 된 후 더 형편없어진 제임스.
바로 이 순간이 나와 첫째 형 사이의 진짜 눈높이였던 셈이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지구에서 별의별 짓을 다 했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보호구도 없이 이렇게 날 수는 없었다.
새삼스럽게 두 번째 생을 선물해준 악마연합에 신세를 진 느낌이니.
보다 사악한 공연으로 저들을 만족시켜야겠다.
몸을 잡아당기는 중력의 힘에 저항하지 않으며 성벽 위로 떨어졌다.
쿠웅!!
굉음과 함께 착지.
어느새 내 주변에는 적의가 가득한 수비병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간이 떨어질 정도로 두려워할 순간이겠으나,
“크핫하하하하!!!”
나는 오히려 광소를 터트린다.
내 성장의 밑거름이 될 녀석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녀석들.
위협거리조차 안 되는 가소로운 녀석들.
병장기를 꼬나잡고 날 노려보는 쪼렙 녀석들의 미래를 점쳤다.
“뭔가 했더니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었군.”
메인디쉬가 자신의 운명을 깨닫지 못하고 나에게 다가오며 피식댄다.
“갑자기 영웅병이라도 걸리셨나? 아무튼 넌 이제 못 빠져나간다.”
고개를 위로 쳐들고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이마에서 세 치 정도 떨어진 허공에 생긴 미세한 균열.
눈으로 확인하는 그 순간에도 절망의 응집체는 이때다 싶어 차원 경계선을 사정없이 무너트렸다.
“제임스, 멍청한 놈. 갇힌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쩌저저적!!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급격히 갈라진 균열 속에서 그 진신(?)을 내보이는 혼돈의 힘.
꿀렁대는 블랙홀이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하늘 위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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