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 갚아줄 때가 왔다
* * *
흠, 나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이거 못 살리나?
그런 악마 후보자 스킬은 없겠지.
뭔가 좀 아쉬운데.
내 포켓걸 전략이 이렇게 물거품이 되나 싶었으나…
“생각해보니까 푸루루가 있잖아?”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푸루루가 있으니 그년을 쥬쥬 대신으로 삼으면 되겠네.
고민해결! 끝!
망가진 인형 버리듯이 죽어버린 쥬쥬를 어깨 뒤로 홱 던졌다.
“진실의 방 해제.”
슈슈슉!
진실의 방이 해제되고 다시 푸른 하늘이 머리 위에 떠올랐다.
나오자마자 전황을 빠르게 살폈다.
제임스 형은 자신이 악마후보자라는 걸 입증하듯 나와 동일한 스텟의 분신과 백중지세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고.
첫째 엄마와 새롬 쪽은…
“너! 헥헥...잡히면…헥 뒤졌어!!”
“파이어 볼!!”
새롬이 여전히 온갖 마법에 다 처맞으면서 죽음의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
보라색 머리가 땀 때문에 미역줄기처럼 붙어버렸고 화장이 번진 탓에 눈가가 시커메서 좀 웃겼다.
그 와중에 다친 곳은 하나도 안 보인다.
10분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수많은 마법을 다 맞고도 멀쩡한 걸 보면 대단하다고 해야 하려나.
그래도 처음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힘들어 보이는 건 당연하고 첫째 엄마도 연이은 마법 난사로 마나 고갈이 찾아왔는지 낯빛이 창백하다.
“왕의 귀환이다, 얘들아.”
진실의 방 승패를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알릴 시간이 왔다.
쥬쥬의 시체와 나를 본 첫째 엄마와 제임스가 동시에 경악했다.
“어떻게 이겼지?”
“페어리 드래곤은 강력한 고대 종족이다. 이건 말이 안 돼!!”
저들의 반응이 이해가 간다.
나도 진실의 방 없이 깡스텟으로 일대일 싸움을 이끌었으면 상당히 애먹었을지도.
지금은 진실의 방에서 나왔는데 힘이 넘치고 몸이 가볍다.
쥬쥬를 죽이고 강간해서 진실의 방이 끝나고 그녀의 스텟 10%를 영구 갈취했기 때문이다.
단지 10%뿐인데 도합스텟 600가량의 나에게 이 정도 느낌을 주려면 쥬쥬의 드래곤일 때 스텟은 어림짐작해도 도합스텟 800은 됐으리라.
“그동안 시간 끌어주느라 고생 많았어, 새롬.”
“야, 힘드니까 빨리 와서 해결해!”
언제부터 반말이야?
건방져서 분신 먼저 도와주기로 한다.
“그럼 조금 더 고생하고 있으라고.”
“야! 빨리 안 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제임스 녀석에게 다가갔다.
내 분신과 겨우 막상막하의 대결을 벌이고 있던 첫째 형 입장에서는 악몽일 것이다.
“크윽!”
“도망치려고? 어림도 없지.”
그가 도망갈만한 퇴로를 막았다.
분신체는 이때다 싶어 더 강력한 공격을 퍼붓는다.
그런데 의외의 변수가 생겼다.
“넌 날 잡지 못한다.”
첫째 형은 이제 보니 땅속성 고위 마법사여서 그런지 단순히 대지 위만 막는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곧바로 땅속으로 들어가더니 두더지처럼 대지 속을 휘저으며 탈출을 감행하는 걸 보고 내심 감탄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닥쳐라!!”
멍청한 녀석이 소리를 질러서 자기 위치를 알려준다.
소리가 들린 땅 아래쪽을 향해 진각을 강하게 밟았다.
콰아아앙!!
고막이 먹먹해질 만한 굉음과 함께 땅에 거미줄을 연상시킬만한 균열이 생겼다.
200이상의 힘스텟을 가진데다가 제대로 된 무공까지 섭렵한 나는 단순한 발구름만으로도 약한 지진 정도의 충격을 줬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첫째 형도 아예 타격이 없을 순 없을 거다.
쿵 쿵 쿵 쿵
계속해서 땅을 짓이겼다.
내 분신도 이때다 싶어 도망친 지렁이 새끼를 계속해서 밟았다.
이러니까 예전 지구 오락실에서 보던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는 느낌이 든다.
쿵 쿵 쿵
주변지대가 초토화가 됐다.
처음에 제임스가 나를 위해 준비했던 함정보다도 더 깊은 구덩이가 베르너 성 내부에 생겼다.
그리고 가장 깊숙한 구덩이 한가운데에 피투성이가 된 제임스가 드러누운 채로 신음하고 있었다.
“으, 으으으…”
“어차피 도망도 못 칠 걸 왜 그렇게 도망간 거야? 미꾸라지 같은 새끼.”
정신이 없어서 내 말을 들을 겨를도 없나 보다.
넝마가 된 옷을 걸친 놈의 발목을 붙잡고 질질 끌어서 구덩이 바깥으로 빼냈다.
이 모든 장면을 첫째 엄마가 봤음은 물론이다.
“제, 제임스!”
당황한 그녀가 서둘러 내 쪽으로 마법의 화살을 돌리려 했으나,
“어디서 한눈을 팔아!”
신경이 분산된 사이 새롬에게 거리를 내주고 말았다.
새롬이는 첫째 엄마의 뒷덜미를 붙잡자마자 땅에 세 번을 패대기쳤다.
마법은 뛰어나지만 육체적으로 강한 게 아닌 그녀는 바로 피투성이가 되어 제임스의 옆에 버려졌다.
“으으으…”
“아흑…”
눈앞에서 굴러다니는 두 모자(?子)를 보니 이제야 영지 전쟁이 끝났다는 걸 실감한다.
빙의된 지 2년이 지나서야 전쟁을 끝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 오래 걸렸다.
어떻게 200화가 넘어서야 망나니 주인공이 가문을 먹는 미친 소설이…
“응? 내가 뭐라고…했더라?”
깐부할아버지가 할 법한 대사를 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일단 두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게 우선이다.
지금은 부상이 심해 끙끙대고 있지만 상태가 괜찮아지면 언제든지 이빨을 내밀 수 있는 연놈들이다.
“분신, 일단 팔다리부터 다 분질러 놔.”
“라져.”
나와 생각을 공유하는 놈이니 고문 기술과 사악성까지 모두 닮았다.
부러트린다고 그냥 부러트리지 않는다.
싸움의 여파로 베르너 성의 건물들이 상당히 많이 부서져서 주변은 난장판 상태.
유리조각과 돌조각이 상당히 많다.
분신은 그 뾰족한 돌조각과 유리 조각을 주워서 제임스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왜 그걸 들고 오는 거야? 하지, 하지마아악!!!”
첫째 형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는데.
사실 저건 내가 행할 수 있는 수많은 종류의 고문들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
인간의 신체에 관절이 몇 개 있는지 아는가?
내가 말하고 내가 대답해서 조금 웃기긴 하지만, 모두 206개다.
분신은 206개의 관절이 있는 모든 곳을 미세하게 절개한 뒤에 유리나 돌조각들을 그사이에 끼워 넣는 거다.
딱히 엄청나게 심한 고문도 아니다.
사람을 숨만 쉬어도 죽을 듯이 아프게 만드는 정도랄까?
심지어 고통이라는 게 반복되면 무뎌지기 마련인데.
저건 적응이 안 되는 고통이다.
“끄아아아악!!!”
시술은 신속했다.
내 분신이라 그런지 내가 봐도 깔끔한 솜씨다.
나는 분신이 제임스를 괴롭히는 걸 구경하면서 새롬과 대화를 나눴다.
“새롬, 수고했어. 일당은 외상 달아놓을게.”
마무리 멘트를 하면서 은근슬쩍 새롬의 통통한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손바닥에 감기는 부드러운 감촉과 탄력이 제법이었다.
누가 봐도 대놓고 성희롱이었기에 보라색 머리카락 미녀의 눈이 단번에 세모꼴이 됐다.
“뭐 하는 짓이죠?”
“왜? 고마워서 엉덩이 좀 때렸는데? 젖가슴도 만져줄까? 야들야들해 보인다.”
지구와 달리 판타지아 대륙은 경찰도 없고 법도 선택적으로 적용받는다.
이런 식으로 배 째라 전법으로 나가면 여자 쪽에서 할 말이 없다.
“하, 원래 쓰레기였지. 맞다.”
그냥 저러고 마는 거다.
“아무튼, 씨알도 안 먹힐 소리 하지 마시고요. 당신 이번에 페어리 드래곤 진실의 방에서 잡고 영구스텟 증가했죠? 그 증가분만 가져갈게요.”
제기랄.
이래서 내가 노예에서 탈출하려는 거다.
열심히 일해서 얻어놓은 스텟 바로 뺏겨버리네.
“어쨌든 스텟 변화는 없겠네요. 오히려 증가하려나요?”
“그렇겠지. 쥬쥬를 잡으면서 얻은 스텟은 상납하지만, 베르너 성을 점령하고 저 연놈들 족치면 카르마가 또 들어올 테니까.”
“쥬쥬가 누구예요?”
“…그런 게 있어.”
대화가 일단락되자 새롬이 마계로 귀환하기 위해서 차원 균열을 열었다.
“새롬, 도와줘서 고맙다. 또 보자.”
고마워서 엉덩이를 한 대 더 때려주려 했는데, 이번엔 그녀가 냉큼 골반을 뒤로 빼서 내 손길을 피했다.
“아뇨, 당신 보기 싫으니까 강림 스킬은 최대한 자제하시고요.”
“싸움에 자신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보니깐 너 졸라 못 싸우긴 하더라.”
한 번 놀려주니 새하얀 피부가 금세 붉어지는 게 놀려주는 맛이 있는 년이다.
“진짜 당신은 악인후보자 안 했으면 뭐 했을지 궁금하네요.”
“대기업 회장. 지구에서 봤잖아?”
“……아무튼, 당분간 최대한 연락 자제해주세요.”
몸을 돌려 도도하게 균열로 걸어가던 새롬이 갑자기 몸을 홱 돌려 날 보았다.
냉담하고 차가운 눈빛과 마주하자 아무리 하급이라도 마족은 마족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한 번만 더 제 몸 함부로 만지면 가만 안 둬요. 이건 경고예요. 후보자고 뭐고 그냥 뒤엎을 거니까 생각 잘해요.”
나한테 손찌검을 당한 게 어지간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나.
인간을 벌레처럼 여기는 평소 그녀의 언행을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하다.
물론 난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몸을 만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예정이니까.
저년이 나한테 도게자해서 자지 박아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는 날까지 열심히 달려보련다.
새롬은 내 대답을 기다리다가 내가 그저 웃으면서 손만 흔들고 있자 한숨을 쉬고 균열을 통해 복귀했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성문과 성벽을 타 넘고 내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야, 너희는 뭐 하고 있다가 이제 오냐?”
보아하니 꼴이 말이 아니다.
가장 앞에 있던 소피아가 내 말에 대답했다.
“부상자들을 돌보다가 주인님이 갑자기 뛰어들어서 우리도 따라갔어요. 그런데 성 안쪽에서 안개 같은 게 퍼지더니 이후에 고렙 기사들이 뛰쳐나와서 전투 끝나고 지금 온 거예요.”
한마디로 제임스의 떨거지들을 처리하고 오느라 늦었다는 말.
레벨 40에 근접했거나 이를 뛰어넘는 놈들은 심상세계 힘에도 어느 정도의 회피력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었다.
“개새끼, 죽여버리겠어!”
“셰릴, 참아!!”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내 생각이 끊겼다.
고개를 돌려보니까 원독어린 눈빛을 줄줄 흘리고 있는 셰릴이 검을 빼 들고 온몸에 유리와 돌조각이 박혀 신음하고 있는 제임스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런 그녀를 어디서 피라도 뒤집어썼는지 하녀복 앞치마가 붉게 물든 메이가 두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애써 말리고 있었다.
“저 새끼가 내 아빠의 명예를 더럽혔어. 고귀한 기사의 혼을 능욕했다고! 죽여버리겠어!”
셰릴이 저렇게 열받아 하는 걸 정말 오랜만에 본다.
그리고 이해도 간다.
차라리 생사결로 죽였으면 뼛속까지 기사 집안인 셰릴이 저 정도로 격렬한 반응은 안 보였으리라.
“참아라. 셰릴.”
“어째서요? 저들은 악마와 결탁했어요! 단죄할 이유가 넘쳐나잖아요.”
“악마랑 놀아난 건 나도 마찬가지야. 너도 알잖아?”
“……”
이제야 좀 얌전해지네.
“내가 참으라고 한 이유는 나 또한 제임스와 그 어머니에게 갚을 게 있어서다. 그리고 원수에게 행하는 가혹행위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심장으로 해야 해. 너같이 흥분해서 일찍 죽여버리면 그보다 바보 같은 짓이 없어. 알아들었냐?”
싱긋 웃으며 셰릴을 바라보자 그녀의 눈동자에 이성이 돌아왔다.
지금쯤 머릿속에는 내가 여태까지 했던 수많은 비인간적인 행동들이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있겠지.
“알겠어? 저들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네가 빠져줘야지 저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는다. 넌 그냥 구경이나 해.”
타락한 여기사에게서 몸을 돌린 나는 제임스와 그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이미 첫째 형은 살갗을 찢고 뼈를 긁는 유리와 돌조각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고.
아직 관절 시술을 받지 않은 첫째 엄마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도 첫째 계모에 대해서는 조금 감정의 응어리가 있으니.
비로소 그동안 당해왔던 것들을 갚아줄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