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화
<제8장 : 노상강도의 비애>
태영은 아라킨의 눈빛에서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재생의 핵이 부서져 전의를 상실해야 할 터인 그가 내뿜는 기운은 절대 패배하는 쪽의 것이 아니었다.
태영은 저격총을 들었다.
이제 괴물 같은 재생력도 없으니 한 번만 맞춰도 치명상이다.
분명 그럴 터인데 태영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이 괴물! 너는 더 이상 푸르트와 가문의 인간이 아니다!”
“이제 와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늙은이! 인간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야!”
류트는 분노하며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그의 검에 실린 청아한 기운이 아라킨을 향해 쏘아졌다.
그러나 아라킨은 신속한 몸놀림으로 류트의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어. 모두 죽음이다.”
아라킨을 중심으로 기분 나쁜 검은 구름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태영은 재빨리 총을 들어 아라킨을 향해 쐈다.
탕!
거친 총성과 함께 날아간 총알이 아라킨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나 꿰뚫린 심장 부위가 흑색 구름으로 변하더니 총알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흑색 구름은 다시 아라킨의 신체가 되었다.
“그딴 공격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어느새 아라킨으로부터 피어오른 검은 구름이 저택 전체를 덮었다.
태영의 불길한 감각이 최고조에 올랐다.
“이곳은 나의 공간이다.”
아라킨이 류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류트는 아라킨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았다.
류트의 레이피어가 허공에서 춤을 췄다.
아라킨은 이전과 비교도 안 되는 쾌속의 몸놀림으로 류트의 검을 피했다.
그러나 류트의 검은 아라킨의 몸놀림보다 빨랐다.
그가 푸르트와 가문의 경비를 총괄하는 이유가 여실히 드러났다.
류트가 그려내는 레이피어의 아름다운 춤은 분노가 극에 달한 흡혈귀의 움직임조차 간파했다.
흡혈귀가 가장 강한 순간은 부정적인 감정을 최고로 끌어냈을 때이다.
재생의 핵이 사라지고 느낀 엄청난 상실감에 분노한 아라킨은, 흡혈귀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본신의 모든 힘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이 세상이 가소롭게 느껴질 정도로 감각이 팽창했고 몸이 가벼워졌으며 전신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류트가 선보이는 아름다우면서 강렬한 검술은, 그런 아라킨의 신체에 차분하게 데미지를 누적하고 있었다.
“늙어빠진 영감! 가문의 충신이라면 내 손에 뒤져라!”
“저승으로 돌아가라 이 괴물!”
류트의 검에 실린 강력한 마나는 흡혈귀의 유체화를 관통하고 아라킨에게 데미지를 주었다.
태영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감탄을 자아냈다.
류트가 자신에게 진짜 실력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봐 태영! 구경만 할 때가 아니야!”
“젠장. 구원 병력을 불러와야 하나?”
“이 검은 안개는 일종의 결계인 것 같아. 아마 강력한 빛 속성의 마법이 없다면 부수기 힘들 거야.”
바라바가 저택을 둘러싼, 검은 안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단검에 인챈트 돼 있는 마법으로는 무리야. 정식적인 빛 마법이나 류트 경의 레이피어에 실린 마나라면 모를까.”
태영은 검은 안개를 향해 저격총을 연발로 발사했다.
충성이 울려 퍼지며 총알이 안개를 관통했다.
태영은 그 즉시, 안개 쪽으로 달려갔다.
검은 안개를 헤치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저택을 둘러싼 진한 안개는 태영의 방향감각을 교란했다.
태영은 방향감각이 상실된 공간에서 오로지 앞으로만 뛰었다.
“태영. 무리라니까.”
그러나 태영이 나온 곳은 결계 안쪽이었다.
이 신기한 결계는 밖으로 나가려는 태영의 시도를 원천 봉쇄했다.
“이런 요란한 결계라면, 밖에서 알아채지 않을까?”
“글쎄. 흡혈귀들이 사용하는 인식장애 결계라면 힘들 것 같은데. 아마 밖에서는 이렇게 요란한 검은 구름 따위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
태영은 류트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아라킨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저 녀석을 직접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다.
류트는 충실하게 아라킨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부정한 힘을 계승한 후, 아이를 취함으로써 얻은 순수한 마력의 힘은 류트의 고절한 무위에 모두 파훼 당했다.
아라킨은 오른손을 붉은 안개로 변화시켰다.
그의 손끝에서 붉은 광선이 여러갈래 쏘아져 나왔다.
이전과 다른 다중 광선이었다.
그러나 류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마나가 실린 레이피어로 아라킨의 광선을 모두 튕겨냈다.
태영은 흡사 제다이를 보는 것 같았다.
류트의 레이피어가 은은한 아지랑이를 흩뿌리며 허공에 수를 놓았다.
“저 영감이 혼자 상대해도 해치우지 않을까?”
태영은 내심 기대했다.
실제로 싸움은 류트가 아라킨을 압도하고 있었다.
태영과 바라바는 낄 틈이 없었다.
바라바는 언제나 빛의 마법이 인챈트된 단검을 투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영역시 저격총을 조준했다.
“이제 지옥으로 돌아가라. 푸르트와 가문의 수치여!”
류트의 검에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담기기 시작했다.
태영은 직감적으로 저 공격이 이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할 결정타라는 것을 깨달았다.
류트의 레이피어에는 엄청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지랑이는 이내 청명하고 푸른 빛을 띠었다.
류트의 마나가 형상화된 것이었다.
“골치아픈 영감…”
아라킨은 스스로가 핀치에 몰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교활한 머리는 위기의 순간에 더 잘 돌아갔다.
아라킨은 류트가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잠시의 시간 동안에 탈출구를 생각해 냈다.
아라킨은 몸을 던지듯 뛰어올랐다.
동시에 바라바의 단검과 태영의 총알이 그를 향했다.
아라킨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도는 몸놀림으로 바라바의 단검을 피했고, 오른쪽 허벅지를 유체화 시켜서 태영의 사격을 피해냈다.
아라킨이 다가간 곳은 푸르트와 버벨라의 시체 쪽이었다.
“노옴!”
순간 류트의 노성이 울려 퍼졌다.
아라킨은 얼굴이 벌게져 성을 내는 류트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하하! 류트 경. 존경하는 주인님의 시신을 난도질할 생각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아버지께서도 저승에서 슬퍼하실 거야.”
“네 놈! 당장 거기서 떨어져라.”
“영감님! 이미 죽은 시체라고요. 그냥 공격하세요.”
“태영! 류트 경은 명예를 아는 명망 높은 기사라고!”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
태영은 답답한 듯 발만 동동 굴렀다.
백 년 만에 부활한 흡혈귀를 다시 골로 보낼 중요한 찬스인데 류트는 마나를 짙게 품은 검을 차마 휘두르지 못했다.
그의 기사 된 마음가짐은 올곧기 그지없었지만, 그 정신이 올바른 판단을 지연시켰다.
이미 흡혈귀에게 욕을 당한 주인의 명예를 되살리는 방법은 원수를 처단하는 일뿐이다.
태영은 그런 말을 입에 담으려 했다.
그러나 아라킨의 행동이 더 빨랐다.
“류트 경! 존경하는 주인님이야!”
아라킨은 류트에게 버벨라의 시신을 던졌다.
아라킨은 들고 있는 검마저 놓치며 그 시신을 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라킨이 류트를 덮쳤다.
“크헉!”
류트의 새하얀 목덜미에 아라킨의 송곳니가 사정없이 박혔다.
태영은 그 즉시 사격을 가했다.
두두두두두두!
정확히 아라킨만을 겨냥하는 소름 돋는 사격이었다.
아라킨은 제빨리 유체화해서 태영의 공격을 피했다.
유체화 상태의 검은 구름이 다시 한 점에 모여 아라킨이 되었다.
“하아. 마시고 싶었어. 오랫동안 강력한 마나가 축적된 기사의 피. 실로 별미가 따로 없군.”
“영감님!”
태영은 류트의 기색을 살폈다.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얬다.
다행히 아직 죽지는 않았는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태영은 류트의 얼굴에서 죽어가는 생명의 그림자를 보았다.
흡혈귀에게 흡혈을 허용한 순간, 인간의 생명은 끝이 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괴물! 네 녀석은 애미 애비도 없냐?”
“땡. 아쉽게도 애미는 아직 저택에 살아 있지. 어차피 너희를 모두 죽이고 곧 죽일 거지만.”
바라바는 분노하며, 단검을 투척했다.
그의 안주머니에서는 단검이 끝없이 나왔다.
그러나 아라킨은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바의 단검을 피했다.
류트를 흡혈한 직후.. 그의 눈동자는 더욱 붉어졌으며, 움직임에는 예측할 수 없는 스피드가 느껴졌다.
고작 한 번의 흡혈이지만, 엄청나게 강해진 것 같았다.
류트와 같은 고절한 기사를 흡혈한 것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본디 흡혈귀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은 강력한 마력을 지닌 인간이다.
그다음이 강한 마력과 잠재력을 가진 아이다.
그리고 보통 인간, 강한 마나의 아인종 순이다.
강한 마나를 지닌 인간은 워낙 사냥하기가 쉽지 않아 어린이를 노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아라킨은 류트를 흡혈한 이 순간, 자신이 왜 강한 상대를 사냥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들 정도였다.
광기를 품은 그의 눈이 더욱 빛났다.
“크흐흐흑. 그래, 이 맛이야. 이 힘이야. 나는 다시 태어났다. 나 푸르트와 아라킨은 부활했다!”
고작 열 댓 살의 꼬맹이의 광소였지만,. 결코 웃어넘길 수 없었다.
태영과 바라바는 백 년 만에 완전히 부활한 괴물을 앞에 두고 침음성을 삼켰다.
[작품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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