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성장형 어플-162화 (162/220)

제 162화

<제16장 : 용사를 위하여>

세아의 검은색 구두가 또깍또깍 맑고 고운 소리를 냈다.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왔다.

그녀는 크게 한숨을 쉬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침 엘리베이터는 언제나 만원이다.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지만, 그녀는 이 자연스러운 만원 엘리베이터가 정말 싫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녀의 근무지인 인사총무부는 빌딩 20층에 위치한다.

엘리베이터가 평소와 다름없는 느릿한 속도로 올라갔다.

주말 동안 집에서 실컷 영화를 보며 푼 피로가 다시 쌓이는 느낌이다.

오늘따라 월요병 증세가 더 심한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각 층에 멈추어 설 때마다 사람을 토해냈다.

만원이던 엘리베이터도 삼 분의 이 이상이 줄었다.

그녀는 그제야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자주 쉬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니다.

빨리 고치자고 생각했지만, 이 버릇만큼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20층에 도착했다.

드디어 자신이 토해질 차례이다.

세아는 답답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해방되었다.

물론 그녀는 자유로운 새가 되어서 창공을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새장에 갇힌 것뿐이다.

그 사실을 너무 잘 아는 자신이 살짝 미워졌다.

세아의 자리는 회계 1팀의 가장 안쪽 자리다.

팀의 막내인 자신에게 어울리는 불편하고 좁은 자리였다.

물론 좁다고 해도 업무가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자리가 벽면과 맞닿아 있어 답답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녀는 황금빛 머리를 흩날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앞에서 상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아쓰~ 좋은 아침.”

경쾌한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사소한 것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자신도 참 단순하다.

세아는 밝은 목소리로 화답해 주었다.

“주원이도 좋은 월요일.”

“오늘따라 목소리가 침울한걸? 무슨 일 있어?”

날카로운 직감이다.

과연 여자의 직감이 무섭다는 말은 허언이 아닌 모양이다.

정작 여자인 자신의 직감은 그다지 날카롭지 않은 모양이지만 말이다.

세아의 입사 동기인 주원은 활달하고 붙임성 좋은 여사원이다.

볼이 통통하고 눈이 길게 찢어졌으며, 애교살이 가득해서 빈말로라도 예쁘다고 할 여성은 아니지만, 조직의 활력을 돋우는 탁월한 재능이 있어서 모두에게 귀여운 받고 있다.

어느 회사에 들어가도 사랑받을 인재이다.

세아 자신도 그녀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다.

“무슨 일은. 그냥 월요병이 도진 거지.”

“그런 것 치고는 평소와 너무 다르단 말이지~ 내가 감은 뛰어난데.”

세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적당히 받아넘겼다.

주원은 세아가 그렇게 반응하자 더 이상 깊게 파고들지 않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번 주말에 무슨 이상한 일이 일어났나 봐. 뉴스 봤지?”

세아의 노트북을 켜려던 손이 갑자기 뻣뻣하게 멈췄다.

무어라 말을 해야 했지만, 입술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세아가 갑자기 금기라도 들은 듯한 애매한 태도를 취하자, 주원은 두툼한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렸다.

배려심이 큰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하지 않았는지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설마…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 아니, 그런 거는 아니야.”

세아는 즉시 그녀의 오해를 풀어 주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배려심이 많은 그녀는 쉽게 착각을 한다.

세아는 오해의 불씨를 살려 두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서둘러 자신이 망설인 이유를 말했다.

“그 사건이 이 근처에서 일어났잖아. 잠실 야구장이면 차로 삼십 분 거리인데…. 그냥 엄청 놀라서.”

“나도 놀라기는 엄청 놀랐지. 그런데 사고가 일어난 게 가까워서가 아니라, 그런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워. 아니, 사고라고 봐야 하나? 언론사에서는 테러라고 보는 주장도 많더라고.”

“테러?”

미처 조간신문을 확인할 새가 없었던 세아는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추가적인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이, 주원은 몇몇 언론 기사의 제목을 인용하는 말을 던졌다.

“‘외계인의 침략이 시작되었다.’라던지 ‘이세계의 첨병? 비밀 생체실험의 실험체?’라던지 굉장히 자극적인 기사가 많아. 기레기들 일할 시간이라는 거지. 하긴, 근데 나도 동영상을 봤는데 절대 지구 생명체처럼 생기지는 않더라고. 기자들이 그런 근거 없는 소리를 떠들어 대는 것이 이해가 가.”

그녀의 말대로 포털 사이트의 배너에는 온갖 자극적인 제목의 뉴스 기사가 쌓여 있었다.

보통 때라면 구독자를 우롱하는 기자의 가벼운 태도에 분통을 터뜨렸겠지만, 실제로 괴물의 존재가 확인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 많은 쓰레기 기사 중에 진실을 담고 있는 기사가 있을지도 모른다.

세아의 생각에도 이번 사건은 외계인의 침략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었다.

“그나저나, 그 ‘영웅’들 말이지.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우리 회사 사람이 한 사람 있다고 하더라고.”

세아는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주원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볼펜을 굴리며 초조한 감정을 드러냈다.

반대편에서 주원이 고개를 빼꼼 들어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아는 볼펜을 오른손에 쥐고 태연한 척을 했다.

“아는 사람이야?”

“어…. 연수원 동기. 우리랑 같은 신입 사원이야.”

세아의 말에 주원은 손뼉을 쳤다.

텔레비전에서 나온 멋진 여전사가 세아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에 놀란 것이다.

물론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세아와 서연은 그다지 큰 접점이 없었다.

연수원 시절에도 팀원으로서 단합했지만, 그녀와 개인적인 교류는 거의 없었다.

“그 사람들, 경찰 조사를 받는 모양이야. 오늘 회사에 나올 수 있으려나? 여론에서도 말이 많던데. 진짜 정의의 용사냐, 아니면 인류를 방심시키기 위한 적의 첩자이냐. 뒤는 조금 많이 나간 것 같지만, 어쨌든, 호의적이기만 한 반응은 아닌 모양이야. 그 사람...이름이 뭐라고 했지?”

“서연 씨야. 이서연 씨.”

“그래, 서연 씨.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어?”

주원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물론 그녀의 질문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왠지 세아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주원이 남의 뒤를 터는 것 같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세아도 서연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런 상대에 대해서 무어라 섣부른 말을 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이 주라는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였지만, 세아와 서연은 놀랄 만큼 접점이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소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세아는 서연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다시 잘 떠올려 보았다.

그녀의 작은 몸과 앙증맞은 포니테일, 까무잡잡한 피부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훌륭한 기억력이 고마웠다.

서연은 얌전한 여자였다.

침묵을 사랑한다고 할 정도로 조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필요하지 않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에 대한 인상이 크게 달라졌다.

서연이 어떤 사람인지 골똘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더욱 그녀라는 사람을 모르겠다.

세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글쎄. 뭐라 말하기 힘드네.”

주원의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배신해서 미안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정직한 답변이었다.

그녀는 서연을 잘 모른다.

“뭐야. 이 주나 같이 붙어 다녔으면 쫌 오는 느낌 있지 않아? 그 사람의 인상이라던가, 성격이라던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모르겠어. 흠… 뭔가 나에게 진심을 열지 않은 기분이야.”

“진심을 열지 않았다니? 아하. 너한테 가식적으로 행동했어?”

“가식이라니. 무슨 그런.”

세아는 주원의 너스레를 질책하면서도 의외로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연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예의 발랐던 것 같다.

오히려 그런 격식이 둘 사이의 벽처럼 느껴진 것은 잘 기억한다.

그것은 그녀의 본래 성격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의식적으로 행동한 것이었을까?

문득 세아는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한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선배…’

같은 시기에 직장에 취업했으니, 선배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태영은 선배였다.

아름다운 기타 선율을 연주할 줄 아는 남자.

세상에 미련이 없는 듯한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는 남자.

세상과 벽을 친 듯하면서도, 누구보다 자유로운 세속을 살고 있는 남자.

그녀는 태영을 떠올렸다.

연수원 때 자신과 소미가 단짝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연은 태영과 단짝이었다.

단짝이라는 표현은 과도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와 태영은 항상 같이 움직였다.

세아는 두 사람이 확실하게 가벼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남녀 간에 연애로 발전할 관계냐고 묻는다면 가차 없이 고개를 저으며 아니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기묘한 우정의 끈이 있는 것 같았다.

여자인 자신은 잘 알지 못하는 투명하고 길고 가느다란 어떤 끈이.

생각해 보니 서연도 여자다.

자신은 여자인데 왜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을까?

태영을 떠올리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태영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호감인가?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했지만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이상하다.

어째서 자신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이렇게나 무지한 것일까.

연모, 혹은 동경.

호감, 혹은 존경.

이상형이거나, 우상이거나.

Ideal or Idol.

영어로 표현하면 더욱더 재미있다.

세아는 잡생각을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이상한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일단 지금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우아한 건물주의 생활 대신에 치열한 커리어 우먼을 선택한 이유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수저가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녀는 노트북을 켜고 업무를 시작했다.

지루한 숫자들이 화면에 나타나서 그녀를 괴롭혔다.

세아는 한 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말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집중의 최고조에 달하면 업무가 막힘없이 뚫리고 손가락이 점점 빨라진다.

그녀의 뛰어난 업무 처리 능력은 팀 내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인사과에서 넘어온 업무 처리 비용 영수증을 확인하고 부서별 평균 법인카드 사용률을 기록했다.

총무과로 결재가 올라온 비용 외에 추가 비용이 있는지 감시하는 것은 그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이다.

꼭 총무과에서 경고하는데도 가족 회식에 법인 카드를 쓰는 인간들이 있다.

나름 머리를 굴리며 카드 긁은 후에 자화자찬하겠지만, 총무과에서는 착실하게 잡아내서 인사고과에 빡빡하게 반영하고 있다.

화면에서 튀어나올 듯한 숫자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옆에는 달러나 유로, 원 기호를 친구로 달고 있었다.

세아의 부드러운 손길이 무질서한 숫자에 질서를 부여했다.

그녀의 노트북은 작은 우주가 되어 수많은 세상으로부터 들어온 잡동사니 정보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건 부장님께 결재로 올릴 것.

이건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비품비 서류.

이건 구매부에 메일로 보낼 것.

빡빡한 업무를 마치자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역시 일에 파묻히면 월요병이든 뭐든 금빵 낫는다.

그녀의 몸을 잠시 동안 점거한 나태함은 씻은 듯 사라졌다.

머리를 과도하게 돌렸더니, 당분이 땡겼다.

세아는 맞은편 책상 칸막이를 툭툭 두드렸다.

“주원아. 오늘 케이크 콜?”

“점심은 밥을 먹어야 하는데… 카페 케이크 한 조각으로 배가 차냐?”

“그럼 밥도 먹고 케이크도 먹지.”

“우린 이렇게 열심히 먹는데, 왜 살은 나만 찌는 거야. 이건 불공평해!”

몸무게에 대한 격한 걱정을 토로하면서도 그녀는 순순히 세아의 결정을 따랐다.

아마 세아가 그런 대담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어도, 그녀는 달달한 간식을 입에 댔겠지만.

[작품 후기]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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