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84
리아트 교수가 말했다.
“마나 로드의 분포가 이렇게 복잡한 경우가 다 있다니. 믿기지 않아.”
그리 혼잣말을 하고는 한참 내 마나 로드 구조도를 예시로 강의를 이어갔다.
“이런 구조도의 예시는 몹시 드물다. 아니, 고대인의 마나 로드 구조는 현재로서는 실전 되었으니. 거의 유일하다고 보아도 좋겠군. 특히 이 경우에는 마나 하트의 복잡성이 일반적인 마나 각성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굳이 교수가 어렵게 설명하지 않아도, 릴리아가 만들어낸 구조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 구조라면 일반 각성자의 1위계 마나 순환 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마나가 필요하겠군. 또한 구조가 복잡한 이상 보통의 마나 연공법으로는 마나 정련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가 펼쳐진 구조도 사이사이에 붉은 원을 그렸다. 그 동그라미의 수가 수십 개에 가까웠다.
“게다가 보다시피 마나 로드 곳곳이 이처럼 막혀 있지. 마나 로드의 미세 경로가 다량 분포하는 만큼 그 곳을 뚫는 일도 오래 걸린다. 실력 높은 치유술사. 값비싼 영약. 그리고 자신의 필사적인 노력. 이 세 요소의 도움이 있다 해도 이 막힌 마나 로드를 전부 뚫긴 쉽지 않은 일이겠지.”
강의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특별한 마나 로드를 가지고 있지만 그 특별함 때문에 지금은 문제가 된다. 그리고 하필은 그 결함의 소유자가 릴리아의 약혼자인 나.
그래서 교수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의가 모두 끝나고 그가 우리가 있는 자리를 찾아왔다.
“릴리아 전하. 조금 전 강의 시간에는 실례했습니다. 비록 강의라고는 하지만 율리안 백작의 흠을 지적하는 모양새가 되어서...”
“아니에요. 리아트 교수님. 저도 이미 알고 있는 걸요. 실습을 통해서 율리안님의 마나 로드를 영사한 사람이 바로 저였으니까요.”
“하지만 걱정마십시오. 저희 종단에서 가장 수준 높은 치유술사를 지원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율리안 백작의 신분 또한 몹시 높으니 제국 전역에서 귀한 영약을 수소문해서 얼른 복용하는 게...”
“그렇군요. 교수님의 그 말이 옳겠죠.”
“다만 전하께서도 보시다시피 이 정도로 꽉 막힌 마나 로드라면 단시간 내에는 힘들지도 모릅니다. 최소 반년은...”
리아트 교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반년이라...’
절대 안 된다. 조건도 까다로운 데 반년은 너무 길었다.
고작 1장의 오의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 그만큼 걸린다는 뜻. 리아트 교수가 말 한대로 내 신분이면 대륙에서 가장 귀한 영약을 복용할 수 있을 텐데도 그렇다는 소리였다.
‘백야는 3위계의 정련 마나를 바탕으로 만드는 오의. 그러니 반년 뒤에야 내 수준이 겨우 그 정도라는 소리지.’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도 현재 3위계인 클로에나 로제트 정도의 수준 밖에 못 된다는 소리니. 당연히 둥지 공략은 물 건너간다.
릴리아가 말했다.
“생각해주셔서 고마워요. 리아트 교수님. 하지만 찾아보면 방법은 있겠죠. 저도 한번 수소문해보겠어요.”
“알겠습니다. 다만 율리안 백작은 아직 젊으니 반년 정도도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마나 로드가 뚫리면 그 이후의 성장세는 몹시 가파르게 올라갈 테니까요.”
교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동시에 릴리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허나 당사자인 나는 사실 그녀만큼 걱정되지 않았다.
‘이미 해결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일반적인 영약으로 안 된다면 그보다 훨씬 수준 높은 영약을 구하면 된다. 오직 황가의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는 숨겨진 보물고.
그 곳이라면 내가 원하는 특별한 영약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 옆에는 나와 미래를 약속한 황가의 사람이 있었다.
‘물론 황족이라고 해서 다 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릴리아는 가능하겠지.’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없이 있자, 릴리아가 다급히 말했다.
“율리안님. 어떡해요... 별로 좋지 않은 말을 들었는데. 게다가 지금처럼 전투 종단의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며 실력 향상에 힘쓰고 있는 때에...”
“괜찮습니다. 반년이라면 길지만 짧은 시간. 오히려 그동안 게을리 놀았던 벌이라 생각하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겠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조금은 시무룩하게 보일 정도로. 그러자 릴리아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내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그... 그럴 수는 없어요! 이미 율리안님은 이전의 개망나니가 절대 아니니까! 내 남편이 될 사람의 기를 죽일 수는 없어요. 제가 당장 해결 방법을 찾아오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릴리아가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섰다.
“황녀의 이름을 걸고 당장 율리안님의 질환을 치유해 드릴 거니까요!”
릴리아는 강의실을 떠났다.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릴리아가 서둘러 움직였다. 하긴. 내가 그녀의 정혼자인 이상 자신의 일인 것과 마찬가지니까.
이렇게 되면 문제는 반쯤 해결 된 것과 다름없었다.
***
이틀 뒤. 금요일 밤. 역시 릴리아는 그 해결책을 찾아왔다.
오후에 그녀의 연락을 받은 나는 판테온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다.
신전 같은 모습의 메디카관. 그리고 그 곳의 한 강당. 나는 엄숙한 분위기의 강당 밖에서 릴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의술 종단의 신성사제, 치유술사들이 금요일 밤을 맞아 메디카 신에게 철야 기도를 드리며 신앙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기도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만 그 내용은 의술 전공서 낭독과 다름없어서 3자가 듣기에는 조금 웃겼다.
“환자의 용태가 나아지지 않을 때는 2위계의 신성 마법과 동시에 물리적 외과 시술을 동반하여...”
저런 내용이 기도문이었으니. 다른 종단에도 방법이나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신앙 증명의 시간은 있었다.
‘전투 종단에서는 살벌한 군가 비슷한 걸 찬송가로 부르며 신앙을 증명했지.’
종단의 색에 맞추어, 신앙 증명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자신이 가진 마나의 신성력 점유를 늘려가는 것.
특히 던전에 가득한 마수의 마혼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신성력이 아주 중요했다. 그러니 판테온의 생도들에게는 필수적인 시간.
물론 나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 없었다. 저럴 시간에 여자들과 활발한 성생활을 나누는 쪽이 성장에 더 도움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성녀의 아들 칭호 퀘스트와 아그네스의 로자리오. 그걸로 제딘의 신성력을 얻는 쪽이 훨씬 낫지.’
그렇게 들려오는 기도문을 들으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강당에서 수녀복을 입은 생도 한명이 빠져 나왔다. 릴리아였다.
“죄송해요. 율리안님! 많이 기다리셨지요?”“아닙니다. 저 또한 밖에서 잠시 로이아 신의 기도문을 외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머! 부지런하셔라. 군가를 부르셨나보군요. 역시 제 미래의 남편이 되실 분이에요!”
릴리아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철야 기도를 핑계로 황궁에 돌아가지 않았어요. 때마침 메디카관의 사람들도 강당에서 기도에 열중하고 있으니. 움직이기에는 지금이 적기에요.”
두 사람은 메디카관의 중앙 시계탑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 곳에 올랐다.
“이 시간에는 아무도 올 리 없는 곳이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율리안님.”
릴리아의 말대로 이곳은 조용했다. 시계탑이 가리키는 시간은 밤 10시. 시계탑 말고는 별다른 게 없는 곳이라 사람의 출입이 평소에도 뜸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 내부로 들어가 탑의 꼭대기에 올랐다.
철컹- 철컥- 철컹-
그 내부에는 수많은 톱니바퀴가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이런 곳으로 오자고해서 당황하셨죠. 율리안님?”
“릴리아 전하라면 다 뜻이 있겠지요. 전하를 믿습니다.”
그 말에 릴리아가 감동한 눈빛으로 내 손을 더욱 꼭 쥐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사실 판테온이 생긴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는 걸. 율리안님도 잘 알고 계실거에요.”
릴리아의 말이 맞았다. 판테온이 설립 된 건 대전쟁 이후. 성녀 아그네스의 유지를 이어 만들어진 곳이 바로 판테온이었다.
그러니 판테온의 역사는 지금 두 사람의 나이와 비슷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판테온이 생기기전, 판테온이 있던 자리가 어떤 곳인지도 알고 계시나요?”
릴리아가 마저 설명했다. 구황도 이전에 황도 테리아가 불렸던 명칭은 성도. 그리고 판테온이 있던 부지에는 원래 6신의 대신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 신성 라미르 제국이 성립될 무렵부터 존재하던 대신전이었어요. 하지만 20년 전, 마족과의 대전쟁에서 그 곳은 모두 파괴 되고, 설상가상으로 마수들의 습격까지 받아서 말 그대로의 폐허가 되었죠.”
그 황무지 위에 만들어진 곳이 바로 신성 아카데미 판테온. 나는 릴리아가 말한 6신의 대신전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판테온에 남아 있는 대신전의 흔적. 그리고 그 곳의 이면 공간. 마왕살의 아주 중요한 히든 피스였으니까.
‘그 대신전의 시련이 아니면 둥지 공략은 꿈도 못 꾸지.’
다만 나는 처음 듣는 얘기인 것처럼,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릴리아의 말을 계속 경청했다.
“지금은 그 대신전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요. 대신전이 있던 곳에는 각 종단의 본관이 세워져 있으니까요. 허나 황족에게만 알려진 비밀이 하나 있답니다. 지금은 사라진 그 옛 대신전의 비밀스러운 장소로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요.”
대신전이 존재하던 때. 그 대신전에서도 오로지 황족만이 접근 할 수 있는 숨겨진 장소가 존재했다.
아슈테리크 황가는 그 이면 공간을 황족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나 보물을 숨겨 놓는 장소로 사용해왔다고 한다.
“일종의 황궁 보물고라고 할까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장소는 메디카관. 그러니 메디카 대신전의 일부분일 뿐이에요. 나머지 대신전의 이면 공간은 옛 저희 선조들조차도 금기시 여겼던 곳이랍니다. 알아서는 안 될 무언가를 봉인해둔 장소라는 언급도, 황가에 전해 내려오는 고서에 기록 되어있었으니까요.”
그만큼 위험한 곳이니 비밀과 보물을 숨겨 놓을 수 있었을 테지. 그래서 그 보물고는 황족들의 출입이 끊긴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보통의 보물고가 아닌 만큼 그 곳에 들어가려면 일종의 자격 증명이 필요해요. 정말로 위험한 곳이죠.”
제국 창립 초기. 그때까지만 해도 아슈테리크 황가의 사람들은 영웅의 기상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개국 공신 라인하르트 가문과 마찬가지로 아슈테리크 황가도 영웅의 가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래도록 제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으로 그들은 살아왔다. 굳이 위험한 보물고에 들어가서 보물을 꺼내오지 않아도, 그 부와 권력은 넘쳐흘렀다.
지금의 황제는 영웅보다는 게으르고 무능한 돼지에 가까웠으니까. 다른 황족들도 별반 차이 없었다.
‘잘못 도전하다가 핏줄이 끊기기라도 하면. 그 리스크가 더 크지.’
그래서 황궁 보물고는 황족들 사이에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잊혀진 전설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하지만 릴리아는 나를 위해서 그 위험한 장소로 출입을 각오한 것이다.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면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릴리아 전하. 반년이라면 저도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그건 안 돼요! 이미 각 종단 대표들은 3위계의 경지에 올랐어요. 저 역시 신성 마법이 3위계니까요. 반년이나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게 미루어진다면... 반년동안 판테온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말하고 릴리아는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작은 상처 사이로 피가 몇 방울 새어나왔다.
“저는 꼭 율리안님과 함께 강해지고 싶어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율리안님. 우리 두 사람이 함께라면 메디카관의 이면 공간 정도는 무섭지 않으니까요.”
릴리아가 시계탑의 톱니바퀴에 자신의 피를 몇 방울 떨어뜨렸다. 그러자 갑자기 주변이 몹시 밝은 빛에 휩싸이며, 톱니바퀴가 맹렬한 속도로 회전했다.
“제 손을 붙잡으시겠어요?”
나는 릴리아가 내민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잠시 뒤. 두 사람은 메디카관의 잊혀진 대신전에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