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성 아카데미의 망나니는 마왕 아들-92화 (92/595)

EP. 92

에이린의 꿈은 저번에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혼란스러웠다.

배경은 저택이 아니었다. 까마귀의 모습을 한 내가 조심히 내려앉은 곳은 한 성벽의 위. 그 성벽 안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침입해 전투가 한창이었다.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이었다. 성 안의 경비병들은 적의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설마. 에이린이 어렸을 땐가.’

내 생각이 맞았다. 나는 몽마의 본능으로 꿈의 주인이 있는 장소를 찾아갔다. 성벽 안에 위치한 왕궁. 그 왕궁 어느 한 방의 창문 앞에 내려앉았다.

왕궁에 자리해있는 방답게 그 실내는 호화로웠다. 마치 왕녀라도 기거할 듯한 방. 아니, 실제로 왕녀의 방이 맞았다.

에이린 글로리아. 지금은 멸망한 글로리아 왕국의 왕녀. 변경백의 저택에서 살게 되기 전, 에이린이 가졌던 신분이니까.

그 방 안에는 앙증맞은 공주 옷을 입은 어린 에이린이 있었다. 10살 정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흑발 소녀. 이때의 에이린은 단발이 아니라 장발이었나 보다.

밖에서 일어난 습격을 전혀 모르는지, 에이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늘 무표정한 지금과는 달리 표정이 몹시 다채로워 더 귀여운 얼굴. 그리고 에이린의 방에는 스케치를 해놓은 종이들이 잔뜩 널려있었다.

10살배기 소녀의 그림이라기에는 수준이 너무 높았다. 얼핏 보면 마상화로 착각할 만큼 정교한 인물과 풍경 묘사. 나는 그 그림을 보고 글로리아 왕국의 설정을 떠올렸다.

글로리아 왕국. 대륙 서부에 위치한 중소 왕국들의 연합체, 왕국 연합. 그 연합에 소속된 소왕국이었지만 지금은 멸망해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다.

‘그리고 분명 예술의 신, 헤소스를 국신으로 모시는 왕국이었지.’

그래서 글로리아 왕가의 사람이 예술에 재능을 가진 것은 축복이었다, 라는 설정을 마왕살에서 본 적 있었다. 바로 에이린의 설정이었으니까.

꼬마 에이린 역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너무 좋은 듯, 조금도 쉬지 않으며 계속 스케치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그림에 열중한 그 모습이 더없이 화사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가득했다.

지금의 차가운 에이린을 생각하면 마치 전혀 다른 사람 같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평화는 잠시였다.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그 곳으로 한 기사가 뛰어 들어왔다.

“에이린 전하! 큰일 났습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와 동시에 꿈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사나운 병사들이 마침내 왕궁까지 완전히 함락시켰다. 에이린의 방까지 그 마수가 뻗어, 그녀가 그려놓은 그림들도 전부 불에 타올라 재가 되었다.

에이린은 그 적군을 피해, 호위 기사와 함께 왕궁의 복도를 바쁘게 달려 나갔다.

이윽고 왕궁의 비밀 통로로 탈출하기 직전. 에이린은 마지막으로 글로리아 왕국의 왕과 왕비, 그녀의 부모님과 만났다.

“저들은 왕가의 씨를 남겨두지 않을 테다. 글로리아 왕가와 저들의 은원은 깊고 깊으니 말이다! 그러니 에이린. 부디 너만이라도 반드시 살아 남거라! 그리고 에센문트로...”

에이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의 모든 세계가 파괴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이다. 그러니 그 절망 속에서 어린 아이다운 울음을 터뜨릴 법도 하건만. 꼬마 에이린이 울음을 꾹 참는 게 보였다.

그녀는 10살 어린애였지만, 총명하고 심지가 굳었다. 이제 다시는 못 볼게 틀림없는 부모님을 생각한 거겠지. 에이린은 호위 기사와 함께 왕궁을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악몽의 하이라이트. 거센 화마가 글로리아 왕궁을 전부 뒤덮었다.

사납게 불이 타오르는 그 성으로부터 단말마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왕궁을 뒤돌아서며 죽은 눈이 되어가는 어린 에이린. 그 얼굴에 서린 무표정함이 지금과 같았다.

꿈이 이내 새롭게 뒤바뀌었다.

이번에는 어린 에이린이 아닌, 다시 원래 나이의 에이린으로 돌아왔다. 메이드복 차림의 에이린이 판테온에 있었다.

그녀가 여러 명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면 에이린님! 저는 로이아관의 연무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유리엘경. 오늘도 수고하시길.”

에이린에게 꾸벅 인사를 남긴 유리엘이 기운차게 그녀의 곁을 떠났다. 마부인 한스도 판테온의 마부 휴게실로 향했다.

“에이린. 너도 편히 쉬고 있어라.”

“네. 도련님.”

“원한다면 아틀리에에 가있어도 좋다.”

“... 알겠습니다.”

잠시 내 모습도 에이린의 근처에서 비추었다.

꿈속의 내가 한 말대로, 나는 강의나 훈련을 받는 시간동안 에이린에게 자유시간을 내주었다. 물론 유리엘이나 마부 한스에게도.

하지만 에이린은 의술 종단, 메디카관에 주차해놓은 마차에 머물러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았다.

에이린의 옷차림은 판테온에서는 눈에 띄는 메이드복. 그처럼 에이린은 이곳의 생도도 아니니 마땅히 갈 곳이 없던 모양이다. 에이린은 마지못해 마차 안으로 들어가 다소곳이 앉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쓸쓸하고 처량해보였다.

‘그래서 아틀리에에 가있어도 괜찮다고 말했는데.’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던 바로 그 순간. 마차 안에 들어간 에이린이 혼잣말을 하는 게 들렸다.

“... 그리고 도련님과 멀리 떨어지는 것도 싫고.”

아마도 이 혼잣말이 에이린의 본심이었나 보다.

메디카관과, 내 아틀리에가 있는 헤소스관은 거리가 조금 떨어져있다. 마차로는 금방이지만 걸어서는 제법 멀다.

그동안 내가 저택에 돌아오지 않으면 잠에 들지 못했던 에이린. 그래서 이미 짐작은 했지만.

역시 에이린은 나에게서 떨어지는 분리불안이 심했던 것 같다.

‘글로리아 왕국이 멸망한 뒤로, 내 곁에만 쭉 머물러서 그런 거겠지.’

그리고 하필 꿈의 배경은 메디카관이었다. 그 걸보니 꿈의 배경이 되는 시간대는 분명 이번 주.

막힌 마나 로드 때문에 며칠을 릴리아 곁에서 찰싹 달라붙어 있던 그때였다.

“지금쯤이면... 도련님은 그 황녀랑 함께 계시겠지... 그 거슬리는 젖소 가슴통 황녀랑...”

에이린의 시선이 슬쩍 내려갔다. 아마도 슬쩍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 것 같았다.

“휴우...”

그리고 의기소침한 표정이 되더니, 완전히 좌석 위로 올라가 앉았다. 이내 무릎을 끌어안고 한숨을 쉬었다.

“짜증나...”

그리 말하고는, 에이린은 에이프런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꾸러미와 연필을 꺼냈다. 이어서 그 종이위에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나갔다.

‘갑자기 릴리아를?’

금방 윤곽을 드러내는 그 얼굴은 뜻밖에도 릴리아였다. 에이린이 그려내는 그림은 몹시 정교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가 없었으니까.

분명 저택에 있을 때 에이린이 따로 그림 연습을 하는 건 본적 없었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 덕분인지 아주 손쉽게 릴리아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내가 이전에 릴리아에게 전달 받았던 마상화를 보는 것만큼, 몹시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릴리아에겐 안 좋은 감정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일부러 고약하게라도 그릴만하지만. 에이린의 그림은 릴리아의 외모를 전혀 해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림만이 나타낼 수 있는 느낌으로, 더욱 매력적인 분위기를 드러냈다.

그리고 금방 릴리아의 초상화를 완성해낸 에이린. 에이린은 그 초상화를 마차의 건너편 좌석 위에 높게 매달았다.

현실이라면 쉽게 고정이 되지 않고 아래로 떨어졌겠지만. 꿈이라 그런지 마치 사격장의 과녁처럼 마차의 한 벽에 완벽하게 고정 되었다.

‘무슨 일을 하려는 거지?’

마차의 창 너머로 그 모습을 내가 유심히 들여다보던 그 순간. 에이린이 에이프런 주머니에서 다시 무언가를 꺼냈다.

거기서 나온 물건은 뜻밖에도 다트였다.

현대식 다트와는 조금 다른, 클래식한 느낌의 작은 화살촉 모양의 다트였다. 에이린은 그 다트를, 릴리아의 초상화를 향해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푹푹푹-

꿈이라서 그런지, 에이프런 주머니에서 끊이지 않고 다트가 계속 나왔다. 에이린은 몹시 화가 난 목소리로 외치며, 그 다트를 연사하듯 마구 날려댔다.

“여우같은 년! 젖소 같은 년! 암고양이 같은 년!”

평소의 에이린의 입에서는 절대 나올 리 없는 저렴하고도 경박한 말. 순간, 어둠의 정령의 몸에 빙의한 내가 밖으로 도로 뛰쳐나올 만큼 황당한... 그런 모습이었다.

“왜!! 왜!! 안 맞는 거야!!”

하지만 에이린의 다트 실력은 형편없었다. 판테온의 생도라면 눈감고도 전부 명중시킬 너른 과녁, 아니 릴리아의 초상화.

하지만 에이린이 던진 다트는 엄한 마차의 내부만 밤송이로 만들었다. 아무래도 에이린은 생각지도 못한 몸치 같았다.

결국 모든 다트를 소진한 에이린이, 다시 무릎을 끌어안고 의기소침해졌다.

“... 그래. 황녀는 도련님의 약혼자니까. 내가 이길 수 없는 건 당연하겠지...”

그리고 꿈의 색이 더욱 우울해졌다. 꿈은 부정적인 장면으로 계속 모양을 바꾸어갔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꿈. 배경이 저택의 세탁실로 바뀌었다. 그 곳에서 에이린이 내 옷과 속옷을 계속 확인했다. 하필이면 저번처럼 내가 외박하고 돌아온 날인 것 같다.

노란색, 흰색, 분홍색. 각양각색의 머리카락.

옷에 섞여있던 여자들의 머리카락을 에이린이 발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모양이군.’

꿈은 무의식의 발로. 최근 에이린은 평정심을 유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나 때문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

자고 일어난 에이린이 이 꿈을 기억한다면 아무래도 흉몽이 될 것 같다.

‘이 상태로 몽마의 힘을 사용하면. 에이린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지도 모르겠군.’

그래서 이 꿈에 음몽을 덧씌워 에이린의 정기를 빼앗아 가는 일을,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꿈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현실의 에이린이 그 순간 잠에서 깨어버렸다.

***

꿈에서 깬 에이린은 머리가 멍했다. 잠을 길게 잔 것 같진 않다. 게다가 너무 많은 꿈을 꾸었다.

‘그 것도... 전부 좋지 않은 내용으로만.’

틀림없이 흉몽이나 악몽에 가까운 꿈. 특히 어렸을 때의 그 꿈은 변경백 저택에서의 위치를 인정받은 이후로 거의 꾸지 않게 되었는 데.

아무래도 최근의 일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치 않았나보다. 특히 율리안 도련님이 판테온에서 릴리아 황녀 곁에 꾹 붙어 있던 지난 며칠.

도련님의 옷에 붙어 있는 노란 머리카락을 보면 도무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올라 에이린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 황녀... 내가 보란 듯이... 일부로...’

그러면서도 릴리아 황녀는 자신과 마주치면 싫은 티 한번 내지 않았다. 무서운 여자였다. 물론 에이린 역시도 평소에 절대 짓지 않는 아주 화사한 미소로 그 황녀에게 대답을 보냈지만.

그래도 에이린도 사람이었다. 혼자 있을 때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꾸욱 그 화를 마음속에 눌러 담았는데.

꿈에서는 결국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다. 황녀를 그려놓고 마구 다트를 던져댔다. 현실에서 그랬다면 역모죄로 황궁에 끌려갈 수 있을 만큼 불경한 짓.

에이린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물론 현실의 에이린이 그런 유치한 일을 절대 저지를 리는 없겠지만.

‘그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한 번을 제대로 맞추질 못하다니.’

차라리 꿈에서라도, 던진 다트를 그 얄미운 얼굴이나 커다란 가슴통에 명중시켰다면 속이 시원했을 테다.

하지만 한발도 맞추지 못했다. 스스로가 몸치인 건 알고 있었지만. 꿈에서도 그랬다니 어쩐지 마음이 더 속상해졌다.

그나마 꿈에서라도 오랜만에 다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재밌었지만. 비록 그 그림의 주인공이 릴리아일지라도 말이다.

역시 꿈의 여운이 너무 짙다. 에이린은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때라는 걸 느꼈다.

‘내가 너무 도련님을 의지하는 것 같아.’

이렇게 지나친 질투와 집착을 보이면 도련님도 자신의 마음을 눈치 챌지 모른다. 늘 그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표정을 숨겨왔다. 이제 와서 무너질 수는 없다.

그런데 하필 다른 여자도 아니고 도련님의 정식 약혼자, 황녀에 대한 질투라니.

일개 메이드로가 가질 감정으로서는 너무 터무니없었다. 그렇게 뒷맛이 씁쓸한 꿈과, 개운하지 못한 잠 때문에 다시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 뜬 찰나.

에이린은 기겁할 만큼 놀랐다.

“왜... 내가 도련님의 이불 안에!”

생각났다. 잠들기 전, 도련님의 명령으로 침대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대로 잠들어버린 것 같다.

밤시중을 든 이후라면 모르겠지만. 방의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분명 낮이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을 내버려두고 잠에 든 것.

그대로 이불 밖으로 서둘러 뛰쳐나오려고 했을 때. 누군가 에이린이 이불을 빠져 나가지 못하게 몸을 붙잡았다.

“에이린. 도로 누워 있어라. 오늘 하루는 쉬게 해줄 테니.”

그 순간, 에이린은 자신을 막아선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숨이 막힐 만큼 잘생긴 귀공자.

율리안 도련님이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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