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79
함께 티타임을 가지던 일행들이 모두 클로에를 주목했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격식을 차린 클로에의 인사에 대답했다.
“반갑군. 클로에.”
갑작스러운 방문은 아니었다. 전에 내가 얘기해둔 판테온의 사교 클럽. 그 곳의 쓸 만한 생도 몇 명을 내게 소개시켜달라고 그녀에게 말해두었다.
‘친분을 만들어두면. 그들로부터 중간고사 이론 시험의 족보를 받아낼 수 있을 테니.’
꾸준히 이론 공부는 스스로 하고 있지만. 역시나 그 양이 너무 많다. 그리우스 추기경의 계략을 완벽히 무너뜨리려면 이처럼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이렇게 율리안 백작님의 저택에 오는 건 처음이군요. 영광이에요.”
클로에는 그리 말하며 슬쩍 내 저택을 둘러보았다.
황도의 부촌에 있는 나의 저택. 거리상으로는 같은 부촌에 있는 클로에의 저택과 머지않았다.
하지만 클로에가 내 저택을 방문한 건 처음. 그래서 그녀의 적안이 반짝거렸다.
“북부인들은 검소한 편이로군요. 후훗. 이정도면 대공의 후계자가 머무르기에는 상당히 규모가... 조금 작지 않나요? 뭐, 나름 실용적인 편이긴 한 것 같지만. 이 정도면 저희 아이테른 상회가 운영하는 호화 여관보다는 조금.”
제국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아이테른 상회. 그 상회의 여식이 할 법한 거만한 말이었다.
다만 클로에가 황도에서 사용하는 저택이 유독 호화스럽고 거대할 뿐. 사실 내 저택도 대공의 후계자가 머무는 곳답게 결코 작은 저택은 아니었다.
남작 영애인 루시아도 이곳이 크다고 놀랄 정도였으니까.
‘건방지군.’
하지만 평소처럼 클로에의 무례를 딱히 지적하진 않았다. 이곳에는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었으니까.
“어머. 먼저 온 손님이 있었군요. 저분은... 흐흠...”
클로에가 루시아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자 루시아가 목례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아이테른 후작 영애. 메이 남작가의 루시아가 인사를 드립니다.”
“아. 그랬죠. 순간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얼굴은 그래도 몇 번 본적 있죠. 반가워요. 루시아양. 메이 남작가의 영지는 아마 휴양지로 유명했죠?”
비교적 정중한 루시아의 인사에, 클로에는 살짝 부채만 흔들며 대답했다. 클로에는 후작 영애. 루시아는 남작 영애니.
제국 귀족의 관습상 루시아가 먼저 예의를 차리는 게 맞긴 했다.
‘사실 루시아는 그 유명한 페드로 공작의 딸이긴 하지만.’
루시아가 그의 딸이라는 건 페드로 공작조차 알지 못하는 사실이니. 아니 관심이 없었다는 게 맞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보니 새삼 클로에도 높은 신분을 가진 영애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화기애애하던 티타임의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만큼. 그 고약한 성격이 알려진 악역 영애라는 것도.
‘처음에는 나도 클로에를 꺼렸으니까.’
마왕살을 플레이 했을 때 클로에 때문에 게임 오버 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지금은 잘 길들여놓은 덕에 그저 내 말을 잘 따르는 애완동물 같지만.
‘하지만 애완동물이라기에는... 또 너무 별난가.’
주인의 마실 거리에 몰래 약을 타는 애완동물이라. 뭐, 성격이 고약한 강아지들도 있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닐지 몰랐다.
클로에가 루시아의 옆에서 목례한 에이린을 보고 말을 건넸다.
“어머. 때마침 티타임 중이셨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게도 차를 한 잔 주실 수 있을까요, 에이린씨?”
나는 슬쩍 에이린의 표정을 관찰했다. 루시아와 있을 때는 무표정하긴 했지만 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에이린이 싫어하는 상대를 대할 때의 표정이 잔뜩 드러나 있었다.
“알겠습니다. 아이테른 후작 영애. 얼른 가져다 드리지요.”
메이드복 치맛자락까지 살짝 들어 올리며 화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에이린이 저 표정을 지을 때는 나도 은근 무서웠다.
‘여자들은 대단하군.’
루시아도 클로에와 단 둘이 있기 어색했는지. 서둘러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려했다.
“그러면 율리안 백작님! 저는 가보겠습니다!”
“수고 많았다. 루시아. 대련은 다음에 또 부탁하지. 로베르토! 한스에게 말해서 그녀를 바래다주도록.”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렇게 루시아가 떠나자 클로에와 잠깐 둘만 남게 됐다. 클로에는 응접 테이블의 맞은편에 나와 함께 앉았다.
“주말 아침에 이렇게 차까지 한잔 하는 사이라. 백작님과 저 남작 영애는 제법 사이가 좋은 가봐요.”
“전투 종단의 훈련을 참가하다 어찌 인연이 되었지.”
“그렇군요. 어쩐지. 조금 전 그녀가 떠날 때 대련 얘기를 하셨죠. 전투 종단의 실력 있는 생도라면 종단 대표인 리프. 아니면 로트 남작가의 파비안도 있을 텐데... 흐흠.”
클로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겼다.
“저 루시아라는 남작 영애. 귀족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저 분홍 장발과 외모가 인상적이라 얼핏 기억하고는 있었어요. 저 미색이라면 백작님과 어울리기에 부끄럽지 않는 외모겠죠.”
클로에가 뭔가를 착각하는 것 같다. 아마도 내 숨겨둔 애인이라도 찾은 듯한 표정.
하긴 루시아의 미모는 뛰어난 반면. 검술 실력에 두각을 나타낸 건 최근이니. 아직 루시아에 대해 잘 모를만 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재밌어지겠군.’
그때면 루시아도 금빛에 들어가게 될 테니까. 클로에가 견제해야할 생도가 로제트말고 한 명 더 늘어난다는 뜻이다.
히로인들끼리 경쟁이 좋은 자극이 된다면 나로서도 이득이니까.
잠시 뒤. 에이린이 내어준 차를 클로에가 모두 비웠다.
“그러면 슬슬 출발해볼까요. 제가 율리안 백작님을 모실게요. 오늘은 백작님을 위한 시간이니까요. 제 마차에 함께 타시겠어요?”
“그렇게 하지.”
나는 클로에와 함께 저택을 나섰다.
***
클로에는 율리안 백작과 함께 그녀의 마차에 타고 있었다.
지금은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있다. 클로에가 은근슬쩍 백작의 옆에 앉으려고 했지만. 백작이 거부했다.
‘부끄러워하기는.’
이미 몸을 진하게 섞은 사이. 남들이 보지 않는 이곳에서 나란히 앉아 고위 귀족끼리의 화합을 도모해도 전혀 나쁠 건 없다.
‘뭐, 저렇게 튕기는 것도 귀엽지만.’
클로에는 입술 끝을 혀로 살짝 핥았다. 백작과 단 둘이 마차에 들어선 순간부터. 클로에의 은밀한 그곳이 마구 움찔거렸지만. 지금은 참기로 했다.
‘어차피 기회는 충분해.’
오늘은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그를 유혹할 자신도 있다.
‘지난 몇 주와는 달라. 오늘은 반드시 성공하겠어.’
그동안 율리안 백작과는 틈틈이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가 황제에게 올렸던 빙정석을 함께 제작했고. 세실리아의 공방을 방문했다가 그를 또 만났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의 일을 나눌 기회가 없었지...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백작과 하고 싶어 미치겠어.’
남자 따위는 하찮다고 생각했지만. 저 백작은 달랐다.
대공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고귀한 대공자. 게다가 절묘한 시기를 노려 자신을 망나니로 위장할 만큼 처세술이 뛰어나다.
거기에 검술 명가 라인하르트에 걸맞은 검술 실력. 빼어난 외모까지. 어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아니 넘쳐흐르는 남자가 바로 저 율리안 폰 라인하르트였으니까.
‘갖고 싶어. 저렇게 비싼 물건... 아니 비싼 백작. 내가 갖지 않으면 누가 갖겠어.’
또한 최근 제후들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얼마 전 황제의 생일 연회.
그 곳에서 율리안 백작이 빙정석 조각상을 올리며 보여준 충정. 그로인해 황제파와 귀족파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던 제후들 몇몇이 황제파로 돌아섰다.
황제파의 수장은 당연히 빌헬름 변경백이다. 그 후계자가 제후들의 사절 앞에서 황제와 에센문트의 견고한 결속력을 다시 한 번 천명했으니.
그 사이에서 간만 보던 제후들도 마음을 굳힐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아이테른은. 중부는 여전히 중립의 입장이지만.’
아이테른 후작가에서도 의견이 아직 분분하다.
최근의 기세가 무서운 남부, 페드로 공작을 위시한 귀족파에 설지. 아니면 변경백의 의지가 여전히 굳건한 황제파에 설지. 클로에의 가문은 고민 중이었다.
‘오라버니들도 요새 제법 바빠 보이니까. 뒷공작이라도 하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아이테른 상회의 후계자 후보들도 바쁜 건 마찬가지. 과연 어느 쪽에 연줄을 대어 후계자 위치를 굳건히 할지 고민이겠지.
이처럼 아직 아이테른 상회의 정식 후계자는 결정되지 않았다.
물론 클로에가 제일 유력한 후보지만. 오라버니들도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나름 필사적인 것 같으니까.
그런 면에서 율리안 백작과 자신이 한배를 탄다면. 후계자 경쟁을 마침표 찍을 큰 무기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과 조건이 저 백작을 취하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냉정하고 계산적인 클로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백작을 유혹할 자신이 있지만.
‘그야 그렇긴 한데...’
어쩐지 이번만큼은... 다른 남자들을 유혹할 때와 달랐다.
백작을 자신의 손에 넣고 지배하고 싶긴 하지만. 사실 속내는 백작에게 지배당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으니까.
‘이게 흔히 말하는 사랑... 아니, 호감. 그런 건가?’
허나 그리 생각하며 속으로 코웃음 쳤다. 클로에 자신이 그렇게 감상적인 여자라는 걸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머릿속에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생각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최근 클로에가 자주 떠올리던 그 생각이었다.
‘율리안 백작이 약혼녀가 있다 해도. 제국법상 대공이 측실을 두는 건 문제 되지 않지.’
신성 라미르 제국은 귀족이라도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한다. 물론 수많은 제후들이 대놓고 측실을 들이고 있지만.
율리안이 미래의 대공인 이상. 릴리아가 율리안의 아내가 된다하더라도. 클로에 또한 그 옆에 충분히 자리가 있었다.
‘아니. 내가 백작의 후계자를 낳으면. 정실의 자리도 빼앗을 수 있어.’
그 황녀는 가슴만 클 뿐. 세상의 무서움을 모르는 온실 속 화초. 그런 멍청한 여자 따위에게는 절대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릴리아 뿐만 아니라 백작은 미색이 뛰어난 애인도 몇 명 두고 있는 것 같지만. 클로에 자신의 미모가 더 뛰어나니 상관없었다.
그렇게 클로에가 속으로 미래의 일을 한창 계획하고 있던 때.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한 것 같군. 그건 그렇고. 클로에 너치고는 조용한 데. 뭐라도 잘 못 먹었나?”
“아니. 그럴 리가 있나요. 머릿속으로 복잡한 연금술 술식을 한번 정리해봤답니다. 그러면 어서 내리죠.”
차마 그와의 2세를 생각하고 있었다 말할 수는 없으니.
클로에는 손거울로 화장을 슬쩍 확인하고, 율리안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
클로에는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조용했다.
마차에 막 올랐을 때. 끈적끈적한 콧소리를 내며 내 옆에 자꾸 앉으려 길래. 손을 툭치며 맞은 편 자리로 쫓아냈다.
‘삐진 건가?’
그렇다기에는 또 표정은 멀쩡했다. 물어보니 연금술 술식을 생각했다지만. 진심은 아닌 것 같았다.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려서니 한 유람선의 앞이었다.
“어떤가요. 율리안 백작님! 저희 상회가 자랑하는 다에른 강의 초호화 유람선, 이메리아호랍니다!”
클로에의 말대로 유람선은 몹시 호화로웠다. 유람선에 오르자 다에른 강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황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 그리고 그 강에 자리한 특급 유람선.
클로에는 오늘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 유람선의 한 층을 통째로 빌렸다고 했다.
‘마왕살에서도 히든 플레이스 같은 곳인데. 이렇게 쉽게 들어오다니.’
특급 유람선답게 그 안은 도박장과 경매장 같은. 온갖 부대시설들도 마련되어 있다. 그 것도 전부 회원제.
그래서 마왕살에서 그 티켓을 얻으려면 상당한 수고를 들여야 했지만. 클로에 덕에 쉽게 들어왔다.
‘안 그래도 이곳은 언젠가 들러야 할 곳인데. 잘 됐군.’
클로에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교 클럽의 생도 회장들과 간부도 함께 초대했어요. 물론 제 이름이 아닌 율리안 백작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불렀답니다!”
그러면 족보를 얻기 더 쉬울테니. 나쁘지 않았다.
‘내 이름으로 그들을 초대해주다니. 클로에도 센스가 있군.’
클로에가 부채를 펼쳐 거만하게 흔들었다. 내 칭찬을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럼 사교 클럽 생도들이 있는 곳으로 가볼까.”
하지만 나또한 클로에에게 에이린과 세실리아라는 인재들을 제공해준 건 마찬가지. 클로에를 무시한 채, 유람선의 안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