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11
나는 당황했다.
판테온의 임시 휴교가 끝났다. 그래서 오후에 훈련이 있는 전투 종단의, 로이아관으로 찾아왔다.
로이아관은 로이아의 수녀였던 어머니를 기리는 동상이나 초상화가 많은 곳. 판테온으로 복귀한 김에 그 동상을 찾아가보고 싶었다.
모든 기억이 돌아온 나는. 어머니, 아그네스를 생각할 때마다 어머니가 몹시 그리워지고는 했으니까.
‘사실 어머니의 품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는 아직 아기였던 나를 변경백 저택에 남겨두고, 최후의 전투를 위해 구황도로 떠났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의 로자리오를 통해 전해오는 신성력. 그 따뜻함을 통해 그리움을 조금 달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동상 앞에서 미래를 위한 각오를 다지려 했던 순간. 대뜸 그 앞에 모여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파비안, 리프. 그리고 에릭이잖아.’
파비안과 리프는 이미 문란한 파티를 통해 매우 친근한 사이가 된 걸 알고 있다.
에센문트 출신이자 한스의 동생인 에릭도. 자신감만 부족할 뿐 실력은 있는 검사니 저들과 어울리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알아차렸다. 그 순간 느닷없이 파비안이 내게 빠르게 다가왔다.
“저 백야 기사단의 파비안이. 제 주군께 인사드립니다.”
느닷없는 충성의 맹세. 나는 속으로 당황했지만 이내 납득했다.
‘파비안이라면... 뭐.’
언제나 나를 변경백이라고 부르는 황당한 녀석이다. 그 마연전의 격전 중에도 의술 종단의 수녀를 꼬셔 질펀한 성애를 나누는 놈이니.
이 남부 금태양의 사고방식은 정상인과는 많이 달랐다.
“파비안. 나도 모르는 사이 언제 백야 기사단에 들어갔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네 주군은 내가 아니다. 빌헬름 전하시지.”
“어차피 율리안 변경백님... 아니 백작님께서 백야의 주인 되실 분 아닙니까!”
그렇게 대답을 해오니 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역시나 정상인에 가까운 리프나 에릭이 몹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파비안 너는 남부의 귀족 영식 아닌가. 백야 보다는 센티악이 자네에게는 더 어울릴 텐데.”
“절대 아닙니다! 남부의 여자는 질렸... 아니. 저는 어차피 제 가문의 막내니 남부에 남아 있어봐야 빛 볼 기회도 없습니다. 역시 그렇다면 제국 최강의 백야 기사단에...”
“아무래도 네 관심사는 백야보다는 북부의 여자인 것 같군.”
“드, 들켰군요! 역시 백작님께서는 대단하십니다!”
역시 그랬다. 사실 에센문트의 여자들은 예쁘기로 제국에서도 유명하긴 했다. 전생의 기억, 지구와도 비교하면 에센문트인은 슬라브계 인종과 비슷했으니.
‘지구에서는 유럽인들이 슬라브인들을 무시하기도 했다지만...’
이스랜드에서는 에센문트의 위상이 달랐으니까. 특히 검후 아틀린이나, 내 어머니 아그네스 덕분에. 에센문트의 여자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숭배 받는 느낌이 있었다.
‘검후의 음악극도 있고. 어머니께서는 음악극 때문에 대중에게 더 유명해졌으니까.’
물론 아틀린이나 어머니. 그리고 내 호위 기사였던 유리엘처럼. 에센문트의 여자들은 성격이매우 고집스럽고 드세다.
파비안처럼 경박한 남자라면. 마음에 안 들면 자지를 잘라버릴 정도로. 물론 미래의 북부의 주인이 될 나에게 그럴 일은 없다.
‘유리엘. 잘 지내고 있겠지.’
에이린 다음으로 내가 관계를 가졌던 나의 호위 기사. 그녀 덕분에 마나를 각성할 수 있었으니. 기억을 찾은 이후 그녀에 대한 고마움이 더욱 커졌다.
‘그리운 걸.’
하지만 사실 그녀가 북부로 돌아간 지 사실 두 달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에센문트 역시도. 오러 유저인 그녀가 잠시도 쉴 수 없을 만큼 마수가 들끓고 있다.
아무튼 나는 파비안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레 이 셋이 다음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긴. 이대로 2학년이 휴학하게 된다면. 생도들도 그 소속을 잘 정해야 할 테니까.’
제국의 정세가 혼란스럽지 않다면 다들 황도 근위대를 일순위로 생각하겠지만. 생도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의 근위대가 그리우스의 꼭두각시인 건 알고 있다.
‘황도 근위대는 지금 엉망이지.’
반그리우스파. 아슈테리크 황가에 충성하는 기사와 정예병들은 구황도와 인접한 황도의 변경에서 죽도록 구르고 있다.
하지만 그리우스파의 근위대 기사들은. 황도 어디서는 그 권력을 뽐내며 악명만 만들어내고 있다.
치안을 핑계 대며 상인에게 돈을 빼앗고, 여자를 희롱하고 다니기 일쑤니까. 중부 출신인 리프마저도 그 사실에 대해 얘기했다.
“지금의 근위대라면 솔직한 심정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황도의 변경에서 마수를 상대로 싸우는 건 제국 신민으로서 차라리 명예스럽겠지만... 혹시나 배속이 그리우스파 쪽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 부패 기사들의 뒤처리나 하고 다녀야 될 테니까요.”
그래서 리프는 에릭을 내심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뭐, 안 그래도 사실 에릭은 백야 기사단의 견습으로 추천서를 써줄 생각이긴 했지.’
망나니 시절, 그의 형을 매질한 일도 있고, 무엇보다 에릭의 실력이 괜찮다는 건 중간고사에서 직접 확인했으니.
물론 에릭보다 실력이 뛰어난 리프로서는, 백야 기사단에 갈지 모르는 에릭이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리프가 센티악을 택할 수도 없으니.’
남부가 제국으로부터 독립, 즉 반란을 택할 거라는 소문은 이미 모두 퍼졌다. 중부 출신인 리프가 그 쪽을 택할 순 없다.
여러모로 진퇴양난. 그래서 리프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혹시 기회가 된다면 저도 백야 기사단의 견습 기사에 지원을 해볼까 하고...”
그 말에 파비안이 리프의 등을, 탁하고 쳤다.
“호오. 백작님 앞에서 그 말을 한 다는 건. 은근슬쩍 청탁을?”
“그, 그렇지 않아! 그리고 조금 전 줄을 서려고 했던 건 파비안 자네면서...”
“흐흠. 나는 늘 백작님께 충성심을 보였으니 그럴 자격이 있지. 그렇지 않습니까? 이 파비안, 남부인이지만 오늘 부로 에센문트를 제 고향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에, 에센문트인은 너처럼 경박하지 않아!”
그렇게 세 사람이 잠시 투닥거렸다. 하지만 나는 사실 파비안과 리프. 모두 내 밑으로 받아들일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모두 잠재력이 뛰어난 검사들이야.’
이 셋 모두 마연전에서 대활약을 보여준 생도들이다.
자칫 일이 잘못되어 남부로 흘러들어갔다간. 그래서 페드로 공작에 눈에 뛰어 마인이라도 된다면. 레이스터처럼 상대하기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 몰랐다.
오히려 저들이 에센문트에 오기를 원하고 있다면. 나로서는 사실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
기억이 돌아온 나는. 이제 진심으로 변경백의 후계자로서 매순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북부의 미래가 될 인재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얼마 뒤에 저 셋은 다시 활약해줘야 해.’
조만간 또 다시 판테온에 혼란이 생길 거다. 아니, 판테온이 아닌 황도 전체에. 그 때에 이 세 사람은 다시 한 번 내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할 자원들이다.
“뭐, 그래도 일단은 1학기 기말고사 후에 얘기일 테니. 복잡한 얘기는 조만간 술이나 한 잔 나누면서 할까?”
“좋습니다! 저번처럼 문란한... 아니 건전한 파티를...”
그 말에 파비안이 몹시 흥분했다.
그렇게 세 사람과 짧은 얘기를 나눈 뒤, 나는 그들과 함께 연병장으로 이동했다.
***
저녁이 되었다.
판테온의 강의와 훈련이 끝나고도,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릴리아 전하로부터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나는 아틀리에의 소파에 앉아, 에이린이 내게 건넨 편지를 펼쳤다. 수려한 필체. 기억을 잃은 내가 그 직후 보았던 릴리아의 필체 그대로였다.
금방 그 내용을 모두 읽었다. 릴리아는 마연전이 끝난 후 나보다 훨씬 바빴다.
원래부터 바쁜 그녀였지만. 지금 황도의 정세가 몹시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편지의 내용을 짧게 에이린에게 요약해서 말해주었다.
‘그리우스가 황제를 구금했지.’
대외적으로는 몸에 불편함을 느낀 황제가 안정을 위해 잠시 요양 중이라고 발표했지만. 그리우스는 지금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제국의 혼란. 그리고 자신을 겨냥한 암살 기도. 그 이후로 망상에 가까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나의 가짜 신분인 조지. 그리고 그리우스의 측근인 카르멘을 적절히 이용한 결과였다.
“지금까지는 도련님이 생각하신 대로 되었군요. 그러면 모든 반그리우스파가...”
“그렇지. 릴리아를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겠지.”
그리우스는 황제를 구금했을 뿐만 아니라, 그 두려움으로 인해 스스로 황제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는 특별하다. 라미르 왕국을 만들어냈던 3개의 명가 아슈테리크, 라인하르트, 그리고 오르하인.
그 중에서도 용사의 핏줄을 이었다는 아슈테리크 가문은 그 라미르 왕국의 지금의 신성 라미르 제국으로 키워냈다.
그 신성은, 당연히도 용사의 후예이자 제국의 정점에 오른 자. 황제를 일컫는 말. 그리고 황제는 주신 제딘의 사도로서 제국민들에게 칭송 받아왔다.
‘물론 그건 아주 먼 얘기지.’
황제는 그 자체로 신성하다는 믿음은 대전쟁, 아니 그 이전의 케이아틱 게이트 등장 이후로 크게 희석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리우스는 그 전설을 지금 열렬히 믿고 있었다.
자신은 아슈테리크 황가의 인물이 전혀 아니지만. 스스로 황제에 오름으로서 제딘의 사도가 될 거라는 망상증을 가지게 된 것.
이미 그런 야욕은 충분한 사내였지만. 신분을 위장한 내가 그 망상을 더욱 부추겼다. 조만간 그리우스가 아슈테리크 황가 대신 새로운 그리우스 황가를 선포하게 되는 일도. 머지않았다.
“그리고 그 부패 사제의 반란은 릴리아가 제위에 오를 명분을 더욱 확실히 해주겠지.”
이미 그리우스는 내 손아귀에 있으니. 그가 세운 반란 계획은 모두 내게 들어왔다. 자신의 사병이 된 황도 근위대를 통해, 황도 테리아에서 일으킬 반란.
글고 그 반란을 릴리아의 이름으로 제압한다. 그리고 지금의 황제는 그리우스에게 구금 당한 뒤로 이미 반 폐인이나 다름없게 됐으니.
선황제의 딸인 릴리아. 그리고 반란을 제압한 릴리아라면 차기 황제에 오를 모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선황제의 자식은 총 넷이다. 1황녀는 현재 오르하인가의 공작부인. 그리고 1황자는 지금의 황제다. 2황녀는 예술 종단, 헤소스의 신성 사제로 독신으로 예술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지금의 황제는 자식이 없으니. 실질적으로 1황녀와, 3황녀인 릴리아의 싸움이었다. 물론 아슈테리크 황가의 피를 가장 강하게 이어 받은 건 릴리아다.
그리고 나는 릴리아에게 그리우스가 일으킬 반란을, 미리 얘기해주었다.
그래서 황도 인근 중부의 제후들과, 반그리우스파 근위대 지휘관들을 포섭 중이니. 릴리아는 바쁠 수밖에 없다.
“사실 페드로 공작은 그런 명분에 상관없이 제국을 차지할 생각이었으니. 어떻게 해든 제국에 큰 전쟁이 벌어지겠군요.”
에이린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녀 역시, 전쟁으로 인해 조국을 잃은 몸이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전쟁조차도 약속된 파멸에 비하면 별일이 아닐 테지.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뿐이야.”
페드로 공작을 막는 일. 어머니께서도 파멸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로 예언했던 인물. 그리고 그 자에 대항할 사람은 제국에서 오직 나뿐이다.
‘어머니께서 그토록 놀라운 신성력을 내게 사용할 수 있었던 건...’
아그네스가 역사에 남을 대성녀였기 때문이지만. 사실 그 뿐만으로 내가 빙의로 착각했을 만큼 대규모의 미래 예지를 할 수는 없었을 거다.
[당신의 생각이 맞아요. 율리안.]
그리고 제딘의 성검, 에르티. 그녀가 내 생각에 동의했다.
어머니에 못지 않게, 아니 어머니 이상으로 내가 신에게 선택 받은 인간이라는 걸.
'어머니의 예지 역시 신에게 축복 받는 나에 대한 예지였으니. 그 정도의 기적 같은 일이 가능했겠지.'
제딘의 축복을 받은 종족인 인간. 그리고 유니르의 축복을 받은 종족인 마족의 혼혈이 나다.
아마도, 이 세계에 존재 하면 안되는 이계의 힘. 그 혼돈의 힘인, 목소리에 대항할 자는. 두 주신의 축복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나만이 유일할 테니까.
황제의 남편. 그리고 마왕국을 대표하는 마왕으로서 말이다.
무엇보다 마왕국을 내 아래로 두면. 마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부를 직접적으로 견제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직 내가 마왕이 될 자격을 증명하진 못했어.’
나는 레메게톤을 확인했다. 익숙한 세 명의 대공. 그 아래로 달갑지 않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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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대공의 계약자 - 악마의 서 레메게톤」
* 현재 계약중인 악마 대공의 이름을 표시합니다.
## 목록
* 음욕의 여대공 루이릴
* 질투의 여대공 바이디
* 식탐의 대공 일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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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불가」
* 아래의 대공들이 다른 계약자를 선택하였습니다.
: 분노 / 교만
* 아래의 대공들이 계약에서 중립을 선택하였습니다.
: 인색 / 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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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불가라.’
마왕으로 등극하는 길이 간단하지 않게 됐다. 아버지 루시피엘의 냉혹의 마왕이라는 이명을 얻을 수 있던 근원. 분노의 대공.
그가 다른 계약자를 선택했다. 교만의 대공도 그와 합세했다. 나머지 둘은 중립이었지만. 적어도 현재의 나로서는 모든 대공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지만.’
나는 순혈 마족이 아닌 인간의 혼혈. 그리고 인간 중에서도 제딘의 축복을 받은 대성녀의 핏줄을 가지고 있으니까.
제딘과 유니르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나의 존재로 증명 가능하지만. 모든 대공들이 제딘과 그 휘하의 6신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특히 분노의 대공. 그는 그가 만족할만할 무력을 갖지 않은 자를 계약자로 택하지 않으니.
‘나로서는 불만족스럽다는 거겠지. 여러모로.’
하지만 나는 조급하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이 퀘스트가 마왕으로서의 길을 열어 줄 테니까.
나는 최종 메인 퀘스트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