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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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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아르틴! 가서 내 아침용 빵이랑 우유 좀 사 와라. 물론 네 돈으로 말이야.”
나는 이 빌어먹을 소설이 싫다.
처음에는 정통 판타지인 줄 알고 찍어 먹었다. 별과 바다와 시의 노래라는 제목은 회빙환으로 넘쳐나던 소설중에서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럴듯한 표지도 없고 잘 빠진 일러스트도 없는 조회 수 한 자릿수의 소설이 왠지 모를 내 안의 홍대병을 자극했지.
근데 뚜껑을 열고 보니 그냥 회빙환도 없고 사이다도 없는, 트렌드를 전혀 모르는 40대나 쓸법한 소설이었다.
흔한 아카데미 소재, 틀로 찍어낸 거 같은 고구마형 착한 주인공. 20년 전에나 유행했을 낡은 클리셰들.
시발 내가 이걸 왜 봤던 걸까?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심지어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 소설이 말라죽을까 봐 후원도 하고 주변에 권유도 해 보았다.
그랬더니 세상에, 결말을 조졌길래 댓글로 실망이라고 한 줄 썼더니 자고 일어나니 이 빌어먹을 소설 속의 등장인물되었다?
“내 말 안 들리냐? 가서 빵이랑 우유 사 오라고, 세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안타깝게도, 지금 내 앞에서 같잖게 눈을 부릅뜬 금발 머리랑은 초면이 아니다.
원작 주인공도 없던 회빙환인데, 나는 그 잘난 걸 2개나 가지고 있으니깐.
내가 빙의한 아르틴 루드비히라는 인물은 원작에서 지금도 소리를 빽빽거리는 이 렉스턴 와이즈라는 악역한테 괴롭힘당하는 묘사가 전부다.
그리고 렉스턴이 흑마술 제물로 써서 죽었던가? 기억은 안나지만 대충 그런 역할로 소비되는 놈일 거다. 그래서인지 재능도 미천하고 격도 낮아서 벌써 네 번째 죽었다.
차라리 ‘저 악역입니다.‘하고 얼굴에 쓰여 있는 이 금발 미남 렉스턴 와이즈라는 녀석에게 빙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녀석은 원작에서도 마왕군의 간부 중 하나로 재등장한다. 나쁜 남자 스타트는 분위기 쇄신도 편하잖아.
“지금 감히 내 말을 무시해? 한동안 얌전히 말 듣더니 드디어 정신이 나간 거냐?”
계속 무시하고 있자니, 주변에서 렉스턴을 조금 안쓰럽게 쳐다보기 시작하자 녀석은 그 시선을 의식한 듯 더욱 큰 목소리로 겁박하기 시작한다.
죽기 전만 해도 마왕 대가리를 깨부수려고 북방의 차가운 땅을 누볐는데, 죽고 나니 늘 그렇듯 아카데미 입학 1일 차로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 이 같잖은 악역도련님한테 같은 괴롭힘과 갈굼을 5번째 당하고 있다.
사실, 앞서 4번의 회귀 동안은 일부러 렉스턴을 피해 다녔다. 마왕군 간부도 될 만큼 재능있는 녀석에게 찍히기 싫었으니깐.
그런데 이 새끼는 질리지도 않고 내 앞에 나타난다. 아카데미 밖으로 도망쳐도, 주인공 옆에 붙어 있어도 어떤 형태로든 존나 쌘 악당이 되어서는 나를 방해한다.
애초에 아르틴의 가문은 와이즈 가문의 봉신인 남작가. 어쩌면 이 몸에 빙의한 탓에 부여된 지긋지긋한 악연일지도 모른다.
“이 덜떨어진 머저리가!!”
대뜸 렉스턴이 소리쳤다.
동시에 녀석이 내 배를 걷어찬 탓에 바닥을 볼품없이 뒹굴었다.
“입학 첫날이라고 얌전히 넘어갈 줄 알았냐? 내 친히 네 녀석의 정신머리를 뜯어 고쳐주마.”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피해 봐야 이 새끼는 계속 나타나는데 왜 내가 이 새끼를 피해 다녀야 하는 걸까?
여태까지 더러워서 피한 똥이 나를 열받게 하는데 계속 피해다녀야만 하는 건가?
그 순간에도 렉스턴은 땅바닥에 널브러진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비릿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지금이라도 죄송하다고 빌면서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면, 20대 정도로 용서해 줄 수 있는데?”
그 말에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렉스턴은 만족한 듯 팔짱을 끼고 오만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 네 녀석은 그렇게 고개 숙이는 게 어울려, 음침한 네 얼굴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나빠진다고!”
서열정리에 성공했다고 생각해 녀석이 기뻐하는 그 순간.
─퍼억. 내 왼손에서 쏘아져 나간 자갈이 렉스턴의 이마를 때렸다.
충격 탓에 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거리는 녀석의 허리를 끌어안아 태클을 걸어 그대로 바닥에 넘어트리곤, 허리를 다리로 끌어안은 채 몸 위에 올라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녀석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나를 힘으로 떨쳐내려고 하지만, 놈의 재능은 육체나 무투쪽이 아니라 강령술과 연금술. 지금의 내 기술을 떨쳐낼 능력은 없다.
그 사이 나는 자갈을 움켜쥔 주먹으로 놈의 면상을 후려쳤다.
팔을 휘저으며 주먹을 막으려는 놈의 손목을 돌부리로 찍어버리자 렉스턴 새끼는 기분 좋은 비명로 울부짖는다.
“내가 여태까지 니가 무서워서 피한줄 알아?”
렉스턴의 얼굴을 후려갈기는 소리가 반복되자, 분노에 찬 목소리가 어느덧 구슬픈 살려달라는 소리로 변한다. 주먹에 뜨끈한 액체가 튀기는 기분이 참으로 상쾌하다.
“마왕군의 앞잡이되어서는 도시를 불태우려고 마족을 끌고 왔을 때도.“
나를 보는 렉스턴의 시선에 공포가 서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녀석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기자 코뼈가 부러지는 감각이 손가락을 타고 전해진다.
“나한테 복수한답시고 스스로 키메라로 합성해서 나타났을 때도!“
“사이비 십새끼들한테 들러붙어서 사사건건 우리를 방해했을 때도!!!“
어느새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진 놈의 얼굴을 계속 뭉개고 있자니 주변에서 나를 부여잡고 말리기 시작한다.
양팔을 붙잡은 억센 손길에도 나는 놈의 턱주가리를 발로 후려 찼다.
“니 새끼가 마왕한테 혼을 팔아서 리치가 됐을 때도 난 너한테 진적이 없어 이 좆만한 새끼야!!!!!”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전개가 망가져 버릴 게 분명하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망친 기연만 5개는 될 거고, 고구마의 화신인 착한 주인공하고 호감을 쌓기도 어려워 질 거다.
어긋나버린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을걸 알고 있다. 그래서 여태 참아온 건데.
그런데 내 차가워진 이성과는 다르게 머리는 후련한 쾌감이 지배한다. 심장을 요동치는 아드레날린은 고생 끝에 간신히 마왕군 간부 놈의 뚝배기를 부숴버릴 때랑은 차원이 다른 흥분을 선사한다.
그래, 뭐 망하면 어쩌겠어? 이미 4번이나 망해서 다시 시작했는데.
좆되면 새로 회귀하지 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아무도 내 실패를 기억하지도 못할 거고,새로운 회귀를 막을 수도 없을 것 이다.
회귀란 힘은 이 세계에서 오로지 나만을 위해 준비된 거고 나밖에 알지 못 한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가슴에서 끓어 올라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터트렸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참기 싫었다.
그런 나를 보고 겁에 질린 듯 조금 전까지 말리던 학생들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한다.
하긴 사람을 피가 터지도록 두들겨 패던 놈이 미친놈처럼 웃으면 나라도 무서울 거다.
그렇지만 이 쾌감은 끝내준다. 괜히 사람들이 사이다패스를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아버렸다. 인생의 절반을 손해 봐버렸는걸.
“거기 1학년들! 입학 첫날부터 무슨 소란입니까!”
뒤늦게 상황을 알고 소리치며 달려온 여선생이 바라보는 광경은 어떤 느낌일까?
얼굴이 곤죽이 난 채로 눈을 까뒤집고 기절한 남학생 하나.
오른손과 옷에 피가 잔뜩 튄 채로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나.
잠시 혼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던 여교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로 손을 덜덜 떨며 허리춤에서 지팡이를 꺼내 든다.
“부, 붉은 머리 소년! 꼼짝 말고 손들어! 저항하지 말고 얌전히 투항하는 거야!”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은 듯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주변의 학생을 지키려는 마음이 용기를 만드는 건지, 여교사는 내게 지팡이를 겨눈 채 앙칼지게 소리친다.
고양감이 슬슬 가라앉기 시작한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아져서, 양팔을 들어 올리며 얌전히 투항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팡이가 번쩍하고 빛나기 시작했다.
“꺅! 꼼짝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내 가슴팍에 쏘아진 녹색의 광선과 동시에 정신이 블랙아웃 되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시발년아 네가 손들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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