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화 (2/266)

〈 2화 〉 뜨거운 각오

* * *

“낯익은 천장이다.”

눈을 뜨자, 나는 학생병동의 병실중 하나에 누워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몇 번의 회차동안 이곳에 수도 없이 신세진 탓이다.

솔직히 소설 읽으면서 볼 때는 별로였는데 내가 직접 하니 묘한 쾌감이 있는 대사다.

왜 이런 헛소리로 시선을 돌리냐면, 지금 당장에 가슴은 욱신욱신 쑤셔오고 머리는 붕뜬 기분이다.

그런데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예전에 치료받을 때 맞은 마약성 진통제가 딱 이 느낌이었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내 팔에는 익숙한 표시가 그려져 있는 포션통과 연결된 링거가 꼿혀있었다.

“아니 진짜로 마약성 진통제잖아?”

몸을 일으켜 링거를 떼어내려고 했는데, 가슴에 힘이 안 들어간다.

뭔가 다급해진 나는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상태창을 열기로 했다.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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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르틴 루드비히

호칭 : 아카데미의 붉은 광인[열기]

종족 : 인간

나이 : 17세

레벨 : 마법사 Lv.1, 무술가 Lv.0(New!)

잠재능력 : 범인 – 당신의 잠재능력은 10명 중의 9명 꼴로 태어나는 재능입니다.

특성 : 회귀[열기], 5회차 특전[열기]

상태 : 늑골 골절에 의한 상태저하. 약물 복용중.

루드비히 가문의 삼남입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렉스턴의 괴롭힘 탓에 음침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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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를 보니 가관이다. 도대체 무슨 주문을 날렸길래 늑골이 박살 난거지?

캐스팅하는 모습을 제대로 봤다면 무슨 마법인지 짐작이라도 할 텐데, 3회차에 익힌 마법 분석도 사라진 지금으로서는 그저 매직 미사일이라도 처박았나 추측만 해야 한다.

“그나저나, 마법사야 원래 있는 레벨인데 무술가는 뭐야?”

이 세계는 재능도 특성도 타고나야 한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위대한 표어는 없고, 1명의 철인이 999명의 범인을 책임지는 시스템이라 이거지.

그 탓에 원래는 해당 직업의 레벨을 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 특히나 자질이 없는 분야라면 수십 년을 투자해도 3레벨을 넘지 못하는데.

설마 하니 렉스턴을 맨손으로 때려눕힌 게 트리거가 된 건가?

‘4회차에는 전사되겠다고 내가 무슨 고생을 했는데...’

이 세계는 난이도도 개 같은데 시스템에 대한 설명조차 불친절하다.

애초에 원작 소설에서도 제대로 설명안하고 넘어가거나 충돌하는 설정이 넘쳐나니깐 이모양인가 싶기도 하고.

“아니, 근데 아카데미의 붉은 광인은 또 뭐야?”

칭호는 이 선천적 혈통빨 소설에서 몇 안 되는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는 성장 요소다. 어떤 사건으로 얻냐에 따라서 회귀는 우스울 정도로 강한 성능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얻으려면 여간 고생해야 하는 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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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아카데미의 붉은 광인

당신의 피가 흐르는 주먹에 대한 소문은 아카데미에서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몸에 묻은 피의 질과 양에 따라 전투력이 상승합니다.[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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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칭호의 설명을 읽자마자 아찔한 감각에 시야가 흐려지고 말았다.

아카데미 입학식 첫날에 사람 좀 피떡으로 만들었다고 하루 만에 소문이 퍼진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소문이 퍼질만은 한데...”

역시 머리가 차갑게 식으니 어지간히도 좆된 상황인걸 알 수 있다.

여기 아카데미는 북부의 마왕군에게서 대륙을 이끌어갈 희망들과 그들의 예비 부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때문에 아카데미의 위치는 북부와 정반대인 남부의 바닷가에 위치한 거대한 섬 전체를 토지로 쓰고 있다.

물론 제국부터 왕국, 공화연방의 모든 젊은 인재들이 모이는 만큼 오고 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근본적으로는 폐쇄된 작은 사회.

그런 사회에서 입학 첫날부터 신나게 날뛴 덕에 칭호를 얻을 정도다?

“역시 이번 회차는 조졌군.”

그렇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렉스턴 그 잡놈이 나한테 깝친 게 몇 번인데?

정신을 잃기전에 확인했을 때 숨은 쉬는걸 보니 죽진 않았던 거 같은데, 어차피 망한 회차인데 할 일은 정해진 거 같다.

“다음 회차에 가기 전에 렉스턴 대가리를 완전히 박살 내버리는 게 낫겠어.”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전까지 몰려오던 두통이 깔끔하게 낫는 기분이 든다.

어차피 저딴 칭호도 얻었고 무술가 레벨도 생긴 김에 이번 회차에서는 남들 다하는 천마처럼 나도 혈마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오히려 좋아. 마음 내키는 대로 머리도 박살 내고 다니고, 마음에 드는 여자는 전부 하렘으로 만드는 거야.”

이 소설은 내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를 꼽자면 대부분의 주요 등장인물이 선남선녀라는 점이다.

덕분에 상태창에 음침한 성격이라고 적힌 아르틴 루드비히도 살찐 히키코모리가 아니라, 퇴폐적인 미소년이라고 봐도 좋다.

이런 좋은 외모를 가지고도, 나는 4번의 회귀 동안 단 한 번도 여자랑 자지 못했다. 심지어 사귄 여자도 있었는데!

거사만 치루려고 하면 나타나 습격하는 마왕군에 분위기 못 읽고 훈련하러 가자고 재촉하는 주인공 녀석까지.

“마음 같아서는 주인공 새끼도 머리를 박살 내버리고 싶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다시 짜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라고 주인공자리를 탐내지 않는 게 아니다.

카이엔 실버소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정말 흔하디흔한 설정의 용사다. 평민 출신이지만 마족에게 부모를 잃은 녀석은 마족에게서 도망치다가 숨은 곳이 우연히도 마왕군 때문에 죽어가던 드래곤의 지하 레어.

덕분에 마왕을 물리치고 드래곤의 복수를 이루기로 약속한 녀석은 드래곤의 심장과 피를 온전히 섭취해 강해지고, 어린 나이에 혼자 모험가 노릇을 하다가 아카데미에 초청받게 된다.

문제는 정 많고 악행을 무시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온갖 고구마 전개를 좋다고 주워대는 탓에 주변인으로 하여금 답답함에 암조차 암에 걸려 죽을지경이라는 것.

나도 아카데미에서 도망친 1회차 빼고는 어떻게 잘해 보려고 노력은 했는데..

“말로 해서 들어 먹었으면 그 고생을 안 했지.”

2회차에서는 주인공에서 떨어지면 배드 엔딩 뿐이란 걸 깨닫고는 열심히 적당히 정의로운 기사이자 이해자인 친구인척도 했다. 가끔 기연 부스러기도 주워 먹으면서 꽤 괜찮게 컸었지.

문제는 마왕 물리치기에만 전념해도 모자랄 판에 자꾸 서브 퀘스트 하겠다고 돌아다니는 녀석 때문에 스트레스로 밤낮을 지세우던 나는 아르틴의 나이로 22살에 정수리에 커다랗게 탈모가 왔다.

'덕분에...내 2회차 메인 칭호는 탈모기사였지...'

까드득, 나도 모르게 이가 갈린다. 그것만으로 끝났다면 이렇게 화나지도 않았을 텐데.

3회차에서는 아예 최대한 말을 잘 듣도록 비선실세했더니, 주변에서 착한 용사 등쳐 먹는 나쁜새끼라고 악명이란 악명은 전부 뒤집어썼다.

물론 2회차에서 전위에서 구른 탓에 전열서기 싫었던 내가 강령술사이자 연금술사로 성장한 게 조금 문제였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 탓에 나는 반란도 진압하고 내부의 배신자도 전부 청소한 악명을 뒤집어쓰고 교단놈들에게 끌려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고문을 전부 당하고 마지막에 불타죽었다.

으,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하지만, 그래도 카이엔 이 계륵같은 놈을 버리고 가면 안 돼.”

이건 내가 전 회차인 4회차에 뼈저리게 느낀 문제다.

3회차의 PTSD에 시달리던 나는 카이엔이 얻어야 할 기연까지 전부 먹어 치우면서 하나의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름하여 ‘마왕성으로 백도어가서 넥서스 터트리기 대작전‘.

다른 등장인물들이나 걸림돌되는 이벤트는 전부 스킵하고 알짜배기 기연만 긁어모아서 마왕을 죽이러 가는 작전이다.

심지어 꽤 성공적이었다. 마왕군 간부들이 전부 깨어나거나 임명되는 것은 5학년 후반부. 3학년 초반부만 돼도 직접적으로 활동하는 간부는 드물었으니깐.

“문제는..나 혼자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거였지.”

그래, 내가 마왕성 직전까지만 해도 성공적이라 여겼던 4회차를 포기하고 남은 시간도 버리고 회귀한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마왕의 대적자 칭호가 없으면 마왕한테 피해도 못 준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RPG로 치면, 마음에 드는 캐릭터한테 장비도 맞추고 스킬도 맞추고 레벨도 열심히 올려놨더니, 최종전에서 보스한테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건 오직 주인공뿐이라는 거다.

솔직히 말해서 저딴 보스 보정없어도 이길 가능성이 희박했는데, 저런 알림창을 목도해버린 나는 정신을 놓고는 그대로 챙겨간 맹독을 들이켜서 이번 회차로 도망쳤다.

“하지만...뭐 어때?”

이제 모른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다음 회차 가면되는데 주인공 머리 박살 내기 시도도 해볼 만 하지 않을까?

안 그래도 친해질수록 나를 보는 시선이 끈적한 탓에 이 소설 태그에 BL이 있었나하고 몇 번이나 걱정했다. 내 2회차 머리카락중 30%는 그 시선 탓일지도 모르지.

“물론, 지금은 재능도 칭호도 레벨도 차이가 크지만...언젠가는...”

그리고 이 순간 나는 학생병동 침대에 누워 이번 회차의 엔딩을 결정했다.

이 회차의 끝에서. 마왕이 깨어나 인류가 마족들에게 지배당하는 미래가 도래하기 전에.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을 참교육하고야 말 것이다.

나는 천장의 등불을 향해 손을 뻗어 주먹을 꽉 움켜쥐며 다짐했다.

“내가 이 세계의 블러드 펀치가 되겠어...”

이름하여 혈마펀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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