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병원에서.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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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맹세 이후 3일이 지났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놀랍게도 평화로운 편이었다.
백작가의 후계자를 박살 냈는데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는 건가 의심도 했다.
물론 따지고 보면 렉스턴 와이즈가 학교폭력의 가해자고 내가 피해자긴 하지만, 왕국의 귀족들 녀석들이 이런 사건을 넘어갈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 평화도 아마 오늘까지 일 거다. 오늘부터 점심 이후에 면회가 가능하다고 아침에 간호사로 보이는 시녀가 말해주고 갔으니깐.
“내 예상대로면 슬슬 들이닥쳐서는 온갖 헛소리를 나열하며 징계위원회를 통보해야 할 텐데.”
쿵쿵쿵
‘이 입이 방정이지 시발. 어떻게 클리셰를 벗어나는 적이 없지?’
노크 소리에 나는 속으로 욕짓거리를 내뱉었지만 동시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번 회차의 목표를 정한이상 다짜고짜 회귀할 생각은 없다. 나는 이미 다회차의 경험으로 귀족놈을 명분으로 구워삶는 법도 어느 정도 익힌 상태니, 쌍방 과실로만 이끌고 갈 수 있다면 정학 처분이나 받고 말겠지.
“들어오셔도 좋습니다.”
그런 생각을 정리하며 문 밖의 사람에게 말하자 문이 벌컥 열렸다.
“늑골이 부러졌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싹수가 좋은 걸. 아르틴?”
놀랍게도 병실안으로 들어온 건 왕국 귀족들의 사람이 아니라 잊을 수 없는 등장인물이었다.
조르바 펠카스는 붉은 머리라는 것만 빼면 이 소설에서 금태양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어울리는 녀석이다. 공화연방의 대상단 펠카스 상단의 차기 후계자인 이 녀석은 원작 소설에서도 주인공의 자금줄이자 조력자로 비중을 꽤 가진 인물.
물론 주인공과 친해지게 된 계기가 렉스턴에게 죽은 소꿉친구인 아르틴, 즉 내 복수를 대신해준 주인공에게 호감을 느껴서였지만.
“그래도 음침한 얼굴은 여전한 걸, 렉스턴을 박살 냈다고 들었을 때는 드디어 좀 사내다워진줄 알았는데.”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렉스턴을 두들겨 패라고 조언한 건 너잖아?”
“훗, 진정한 남자는 절대로 어디가서 얕잡아 보이면 안 되는 법이야.”
그랬으면 진작 네가 두들겨 패주던가. 이 몸의 주인인 아르틴이 심약한 건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능글맞게 웃는 조르바는 보고 있어도 열이 받지 않는다.
다회차의 수많은 사건동안 조르바는 내게 늘 든든한 조력자되어준 사람이다. 혹시나 나를 친구 그 이상으로 보는 건가 의심했을 정도였지만, 늘 여자를 갈아 타며 사는 방탕아 녀석인지라 의혹은 접어둔 상태다.
“그나저나 네가 가장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와이즈 가문에서 보낸 사람이 징계위원회 통보하러 온 줄 알았어.”
내 말에 조르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다.
“늘 그렇듯이 이 조르바 형님이 아르틴 아우의 문제를 해결해줬지.”
“문제를 해결해주다니, 무슨 소리야?”
“말한 그대로지. 아르틴 네가 징계위원회에 호출받는 일은 없을거다.”
설마 또 조르바가 한 건 해낸 건가?
“렉스턴 그 자식이 아르틴 너를 괴롭히고 먼저 때렸다는 걸 본 사람을 모았지. 그리고 와이즈 가문 사람들이 접촉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접촉해서 증언을 다 받아둔 상태다.”
조르바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가져온 서류 한 장을 꺼내 보였다.
받아들어 읽어보니 와이즈 가문과의 협의로 인한 정상참작으로 나와 렉스턴 둘 다 정학 2주를 가처분 받았다는 내용이다.
“사람 하나 피투성이로 만들고 2주면 유례가 거의 없을 정도로 너그러운 처분이라고. 나를 존경해도 좋아 아르틴?”
“형님! 조르바 형님! 제가 감히 형님을 의심했습니다! 이 못난 아우를 용서해주십시오!”
나이도 한 살 차이 밖에 안나는 주제에 늘 형님 운운하는 조르바 녀석이지만, 이럴 때 보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누님으로 모셔도 좋다고 생각한다.
늘 내가 곤경에 처할 때면 나타나는 참된 호걸..!!
“거기에, 네가 다음부터 얕잡아 보이지 말라고 학교에 소문도 퍼트려놨지. 이제 어디가서 음침한 아르틴이라고 놀림받는 일은 없을 거다.”
그 말에 나는 얼굴이 굳어버렸다. 붉은 광인이 네 짓이었냐?
“조용히 넘어가는 일에 굳이 이상한 소문을 끼워넣어야 해?”
“아르틴, 이런 건 어차피 무조건 소문이 나기 마련이야. 그럴 거라면 이쪽에서 먼저 퍼트리는 게 가장 좋은 법이라고? 소문으로 이익을 보는 건 상인의 기본이거든.”
나는 상인이 아니 거든 십새야..!!
그래도 병신 같은 호칭과는 다르게 능력은 보기에는 꽤 괜찮아 보였으니 뭐라 하기도 그렇다.
하지만 조르바의 우쭐거리는 얼굴을 보니 조금 짜증이 샘솟기는 한다. 나중에 바람필 때 상대방한테 몰래 꼰질러야지.
“이제 가라, 네 우쭐거리는 얼굴을 보니깐 늑골이 더 아파져 오는 기분이야.”
“이런! 안 그래도 20분 후에 제국의 아가씨들이랑 3대3 소개팅이 있으니 곧 가 봐야 할 것 같네!”
누구는 병상에 누워있는데 누구는 매회차마다 소개팅에 문어발 연애라니.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이 세계는 너무 불공평한 것 같다. 언제 한번 식칼로 안찔리나?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아르틴, 곧 있으면 샤오메이도 올 테니깐 말이야.”
“그러고 보니 같이 올 줄 알았는데 왜 혼자 온 거야?”
“나는 소개팅 가려고 수업을 째고 나왔거든!”
인생을 즐기자는 모토를 과시하던 녀석은 그 말을 끝으로 다음에 또 보자고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저렇게 인생을 막살아도 조르바 펠카스는 네임드급 조연, 나하고는 부여받은 혈통도 재능도 다르니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잘 성장하니깐 냅두기로 했다.
“그나저나 샤오메이 녀석은 이번 회차에서는 처음 보네...”
아르틴 루드비히는 두 명의 소꿉친구가 있다. 한 명은 방금 본 조르바 펠카스라면 다른 한 명이 바로 린 샤오메이. 분량도 없는 조연에게 무슨 소꿉친구가 두 명이나??싶지만, 이건 철저히 조르바 펠카스와 주인공을 위한 편의주의적인 전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번 회차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아줄 사람이기도 하고.
“형님! 드디어 제가 왔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때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을 박살 날 것처럼 열리며 한 여인이 들어왔다.
늘 애용하는 노출 심한 검은 차이나드레스를 펄럭이며 등장한 녀석은 내 침대 옆에 걸터앉아 호기심 많은 고양이처럼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한다.
귀여운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공사판 인부 같은 말투에 판다 수인 특유의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찐빵머리, 자기 머리만한 가슴과 임신에 최적화 된 여성적인 몸매를 거리낌 없이 과시하고 다니는 이 미소녀가 바로 란 샤오메이다.
무술에 절대적인 페널티가 될 몸매를 지니고도 이 소설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우월한 혈통과 재능 덕에, 현 시점에서는 아카데미에 한해서라면 교사를 포함해도 순위권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무술가이다.
“렉스턴 그 잡놈을 패다가 다치시다니, 때리고 싶다면 제게 부탁하라고 늘 말하지 않았슴까!”
“아니 나도 날 잡고 패려고 했는데 그 녀석이 너무 열받게 해서...”
“그래도 잘하셨슴다! 그 호로자식은 도련님이 늘 말했듯이 한번즈음 두들겨 패놔야 못 기어오르는검다!”
샤오메이는 그렇게 말하며 장하다는 듯 내 어깨를 두들기며 칭찬했다.
물론 여리디 여린 아르틴의 육체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진통제가 아니었다면 눈물이 찔끔 날 거 같았지만, 녀석이 거리낌 없이 한쪽 팔을 끌어안아오자 풍만한 촉감에 아픔과 짜증이 동시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래도 며칠씩이나 입원하셔야 한다니, 무척이나 지루하실 것 같슴다. 도련님께 듣기로는 형님이 정학처분까지 받았다고 들었는데 말임다!”
“뭐, 조르바도 말했지만, 이렇게 사고 치고도 정학 2주면 얌전한거로 생각해.”
처음 만날 땐 샤오메이의 이 거리감 없는 스킨쉽과 걸걸한 말투에 많이 당황했다. 조르바 녀석에게 들은 바로는 어린 시절에 아르틴이 샤오메이를 구해준 뒤로 이렇게 따른다고 했었지.
더불어 렉스턴 와이즈의 첫사랑이 샤오메이라고 했으니 어찌 보면 원작에서 아르틴이 죽은 이유는 샤오메이의 업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침 잘 왔어, 너한테 부탁하고 싶던 게 있었거든.”
그 말에 샤오메이는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 씩 웃어 보인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동그랗게 말고는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기 시작한다.
“한 발 빼주면 되는검까?”
그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란 눈으로 샤오메이를 바라봤다.
말만한 처녀가 도대체 뭐라는 거야?
그런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샤오메이가 얼굴을 살짝 붉힌다.
“원기 왕성한 남자가 며칠이나 침대에 누워있으면 잔뜩 쌓여서 힘들다고 들었슴다.”
히토미 세계관도 아니고 그럴 리가 있냐?
“그런 걸 도대체 누가 알려준건데?”
“도련님이 병문안 간다고 하니깐 알려주신거니깐 틀림없슴다!”
혹시나 아카데미에서 나쁜 물든 게 아닌가했더니, 원흉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물론 나는 올바른 성적 취향을 가졌기에 샤오메이 같은 미소녀의 권유를 거부하고 싶지 않았으나. 약기운 탓에 몸도 가누기 힘든 지금은 아쉽게도 성적인 욕구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라 나 이제부터 무술을 배워 보려고 하는데, 가르쳐줄 수 있을까 해서.”
샤오메이는 그 말에 놀란 듯 에엑 소리를 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몸 움직이기 싫어하는 은둔형 외톨이 타입인 아르틴 형님이 말임까?”
이 녀석 놀란 척 자연스럽게 매도하는 거 같은데?
물론 원래 샤오메이가 알던 아르틴은 내가 아니라지만 1살 어린 동생에게 은둔형 외톨이 소리를 듣는 건 기분이 묘해지기 마련이다.
“흠... 이상함다. 갑자기 렉스턴을 때려눕힌 것도 그렇고, 저에게 무술을 배우고 싶다는 것도 그렇고...”
내 말에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곰곰이 생각하던 샤오메이는 눈길이 가늘어지더니 나를 향한다.
“당신, 제가 알던 형님이 아닌 것 같슴다! 정체를 밝히십쇼!”
그 말에 나는 심장이 덜컹! 하고 내려앉는 일 따위는 없었다. 1회차를 제외한 모든 회차에서 샤오메이는 가장 먼저 내 변화를 눈치채는 아이였으니깐.
“맞아, 나는 사실 아르틴의 몸을 대가로 렉스턴에게 복수해주기로 계약한 악마야.”
“역시나! 나쁜 악마임다! 어서 썩 물러가고 은둔형 외톨이 아르틴 형님을 돌려주십쇼!”
그렇지만 판다 수인이라도 결국 곰이라고 해야 할까. 순박한 면이 있어서 이렇게 장난으로 받아쳐주면 쉽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녀석이다.
머리 좋은 조르바나 다른 귀족들과는 다른 맛이 있다고 할까.
어깨를 장난스럽게 토닥이는 녀석을 진정시키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냥 침대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깐, 내 몸을 지키려면 재능 없는 마법으로는 힘들 것 같아서 말이야. 차라리 너한테 무술을 배우면 더 강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샤오메이는 그 말에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엣헴 하고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저만 믿으십쇼! 형님 같은 몸치도 저희 가문의 호위무사들처럼 듬직하게 만들어 드리겠슴다!”
“그래, 너만 믿고 있을게, 몸이 나으면 정학 2주 동안은 무술 훈련만 해 보고 싶거든.”
“2주..2주나 말임까! 늘 운동하자고 강제로 끌고 나와도 3일 만에 포기하고 처박히던 방구석 찐따 아르틴 형님이!!”
아니 말이 좀 심한 거 같은데?? 반응이 과한 거 아닌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다른 회차에서 전위로 나설때에도 조르바와 샤오메이는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오늘처럼 이렇게 기뻐하는 샤오메이는 처음 보는 것 같지만 말이야.
“그럼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슴다! 형님이 나으시면 바로 시작할 수 있게 커리큘럼을 짜야함다!”
의욕이 차오른 듯 샤오메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훈련을 준비하겠다며 손을 흔들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사람 두 명이 연속으로 방문한 탓일까 조금 피로감이 몰려온다.
“일단 2일후면 퇴원해도 좋다고 했으니...조르바한테 부탁해서 영약이라도 구해달라고 해 볼까.”
현실에서 늑골 골절이면 몇 주는 입원해야 할 테지만, 치료 마법과 기적과 연금술이 있는 판타지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상식이다.
적절한 영약과 물약만 있다면 신체의 비약적인 상승도 꿈은 아니고, 그러다 잠재능력이 올라가면 아카데미 1학기 정도는 수월하게 넘길 수 있을 테지.
“뭐, 일단은 푹 쉬어보도록 할까!”
푹신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노곤노곤 잠이 몰려온다.
전 회차는 마왕성 백도어한다고 이렇게 느긋하게 자본 기억이 얼마 없는데..
특히 후반부에는 대부분이 철야 이후 야영이 반복되다 보니 이 포근함이 너무 그리웠다..
그래, 이 병원에 있는 기간은 휴가로 쳐도 좋겠지. 다음 회귀에는 조르바 따라 놀러 다니면서 지내는 것도 좋겠는데...
마왕이니 용사니, 그런 거 전부 잊고....
똑똑똑
아 씨, 방금 딱 좋았는데 누구야?
회차 초반이라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더 올 사람이 있던가?
뭐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휴가니깐 오늘은 더 이상 면회는 사절이다.
‘용건 있으면 내일 또 오겠지 뭐...’
곧 면회도 끝날 시간이니 자는 척 하면 알아서 갈 테니깐...
똑똑똑똑
“아 진짜! 누구세요!!”
또 잠들만하니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열 받아서 몸을 일으켰다.
월차냈는데 전화해서 일 물어보는 상사가 이런 기분인가?
누가 들어오나 팔짱을 끼고 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들어온 것은 정말로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저기이..여기가 아르틴 루드비히군의 병실 맞나요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사람이 아닌 엘프였다.
그것도 내 늑골을 부러트린 마법을 쏴 갈긴 장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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