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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7화 (7/266)

〈 7화 〉 결투 준비 #03

* * *

“아르틴... 괜찮니...?”

바이올렛이 대놓고 아르틴을 무시하고 지나간 이후, 세니아는 죽고 싶다는 아르틴의 말에 황급히 교무실 옆에 있는 상담실로 아르틴을 끌고 왔다.

세니아 본인이 딱히 상담에 대한 무언가를 배우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아르틴의 표정은 절대로 혼자 두면 안될 것 같은 상태였다.

저번에 죽어버리겠다는 말이 자신의 약점을 잡고 휘두르려는 게 아닌가 싶어, 안 그래도 만나면 재량껏 한마디는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바이올렛에게 무시당한 이후 죽고 싶다고 말할 때의 아르틴은 병실에서하고는 전혀 달랐다.

‘눈에 생기도 없고.. 불러도 대답도 매가리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해...?’

보통 이런 경우 선배이자 B반의 담임인 세르게이 선생님께 도움을 청해야 할 테지만, 자신도 입학식에서 무뚝뚝하게 첫 인사를 받고는 바빠서 만나기 힘들거라는 말을 증명하듯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당장 연금술 수업도 교무실에서 준비하는 이유도 반 아이들의 케어까지 전부 자신이 맡은 탓이었으니깐

“저기, 음료수 좋아하는 거 있니? 포도 주스나 오렌지 주스 있는데?”

“저한테 음료수는 과분하지 않나요? 그냥 하수구 오물이나 마시는 게 좋을 텐데...”

정말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속으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자신까지 울면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 말 말고, 상큼하게 오렌지 주스라도 한잔 가져다줄게, 기다리렴?”

조금이라도 숨을 돌리며 생각하기 위해 주스를 가지러 교무실로 돌아왔지만, 도저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선생님에게 상담해? 라는 생각에도, 고개를 내젓는다. 이제 겨우 개학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시점인데, 벌써부터 다른 선생님들에게 우는 소리를 하면 교수로서도 선생님으로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건 어렵다.

당장에 교수만 맡아도 충분하지 않겠냐는 선배님들의 조언에도, 아이들과 친해지는 것은 장기니깐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감 있게 말한 건 자신이었다. 세니아는 그때의 자신에게로 돌아간다면 꿀밤이라도 한 대 먹여주고 싶다고 곱씹으며 오렌지 주스를 챙겼다.

‘내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자.. 차별로 힘들었던 학창 시절..’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기 힘들다면 과거의 자신에게 답을 구해보자는 생각에, 힘들었던 학창시절을 떠올려본다.

“음, 음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세니아 리브스는 종족과 계급에 기반을 둔 질투와 차별을 많이 받았지만, 동시에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좋은 사람들도 주변에 많았고. 꼬투리를 잡는 교수나 선생님들은 성적으로 다시 보게 만들만한 재능도 있었다.

무엇보다 어디를 가도 남자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외모 덕에 남자들에게 늘 배려받아 온 그녀에게 당장 자살하고 싶어질 정도로 절망한 학생과 공감하고 기운 차리게 할 현명한 방법이 떠오를 리가 없다.

“..어라? 잠깐만, 하나 있던 거 같은데?”

무언가를 떠올린 세니아는 마치 풀지 못한 수학 문제의 답을 알아낸 것처럼 박수를 치며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위에 서술했듯이 세니아 선생님이 이런 일에서 현명한 방법을 떠올리는 일은 없었다.

***

‘시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지금 나는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가뜩이나 바이올렛이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서 멘탈이 나갔었다.

자신을 상담실로 끌고 온 선생님이 혼자서 뭐라 뭐라 떠드는 것도 시끄러워서 짜증만 났다. 그냥 다 집어치우고 당장 창문 열고 떨어져서 회귀하고 싶었으니깐.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번 회차에 가치가 있어서?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세계에 커다란 미련 같은 건 없다.

주인공을 조진다는 알량한 목표는 다음 회차에서, 혹은 다다음 회차에서라도 이루면 되는 거다. 그렇지만, 바이올렛이 나를 저렇게 꺼리는 것은 이번 회차에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어려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관심사는 무엇인지, 이후에 그녀에게 벌어질 일까지 나는 전부 알고 있으니깐.

그런 생각으로 가만히 상담실에 있었더니, 잠시 후 세니아 선생님이 바구니에 한가득 포션을 담아서는 방안에 들어왔다.

생각이 좀 정리된 나는 머리도 비울 겸 바구니만 받아서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세니아 선생님이 맞은편 소파를 두고 내 옆에 앉았다.

“아르틴, 선생님하고 전에 병실에서 약속한 거 기억나지?”

그 뒤로 이 상태다. 내 손을 양손으로 꼭 부여잡고는 부담스러운 눈으로 내게 밀착해온다.

아까부터 팔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각과 코를 감싸는 향기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향수처럼 인공적인 향기가 아니라 은은하게 기분 좋은 걸로 보아 선생님의 체취가 펑퍼짐한 로브로도 가려지지 않는 것 같다.

뭐지? 이 소설에 19금 요소는 없었던 거 같은데??

바이올렛 반응도 그렇고 히든 루트인가?

“선생님이 네 부탁 최대한 열심히 들어줄 테니깐, 아까처럼 나쁜 생각은 하지 않는 거야? 알았지?”

설마 아까 감정이 격해져서 죽고 싶다고 한 거에 이렇게 과하게 반응하나?

병실에서 적당히 선생님한테 마음의 빚을 얹으려고 말했던 게 이렇게 행복한 상황을 연출한다고?

이제는 죽고 싶다는 생각보단, 다른 나쁜 생각이 마구 밀려온다.

‘지금이 기회인가? 드디어 고구마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짜 남자가 될 수 있는 건가?’

침착하자. 선생님이 스킨쉽은 해오지만, 그 목소리에 유혹하는 기색은 없다.

자신의 외모를 능동적으로 이용해서 나를 조종하려는 느낌은 없고,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는 목소리에 느껴지는 작은 떨림으로 봐서는 최대한 나를 달래려는 거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이 점점 적응된다.

사람이 이렇게 서로 밀착하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생각도 들지만, 이 세계는 독자에게 고구마만 퍼먹이다가 결국 개연성 박살 낸 엔딩으로 사람의 정신을 조져놨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웹소설이 아니라 떡타지나 라노벨 반응 아닌가?’

어쩌면 작가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별의별 설정을 조역들에게 박아놓은 걸지도 모른다.

“선생님이 약속 지켜주는 만큼, 아르틴도 약속 지켜줄 거지?”

“어음...네, 알겠습니다. 뭐..”

떨떠름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약속의 주도권이 선생님에게 넘어간 것처럼 느껴졌으니깐.

그래도 굳이 떨어져 달라고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미녀가 가슴을 비비며 손깍지를 끼는데 거절할 정도로 숙맥은 아니다.

“정말이지? 이제 죽는다 그런 무서운 말 쓰지 않기야? 약속?”

“네, 선생님이 도와주시는 만큼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거기에 내 협박에 의해 선생님이 억지로 도와주던 관계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생님 쪽에서 열심히 도와주기로 바뀌는 건 최고의 전개잖아?

그러니깐, 지금은 팔을 감싸 안는 부드러운 아카데미 최대의 가슴을 즐기기로 했다.

크기로만 치면, 아카데미에서 가장 큰 가슴은 세니아 선생이 아닐까?

이런 질량 병기가 로브에 가려져 나만 즐길 수 있다니. 이 세계의 남자들이 통탄할 일이다.

그래도, 역시 가슴은 개쩐다.

***

렉스턴 와이즈의 기분은 최악에 가까웠다. 사용인에게 듣기로는 아르틴 그 머저리는 벌써 퇴원했다는데, 자신은 아직도 치료 때문에 병동에 갇혀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녀석의 학창 생활을 끝내버리려고 했는데, 그 빌어먹을 한량인 펠카스 상단의 장남 놈이 자신을 방해한 것은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젠장,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펠카스 상단 대신 다른 상단과 거래해야 한다고 밀어 붙어야 해, 거기에 루드비히 버러지 놈들의 장녀랑 차녀도 단단히 굴욕을 줄테니깐..!’

이불 아래에 꾹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만, 화난 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당장 옆에서 자는 척하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리는 시온에게 자신이 깨어있다고 들키긴 싫었기 때문이다.

“도련님, 제국의 황태자보다도 아름다운 얼굴에 상처라니, 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배를 가르고 내장을 도려내 참회를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시온이 파르르 떨리는 손길로 렉스턴의 얼굴을 어루만지자, 렉스턴은 소름이 끼치는 감각을 참아야만 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도련님... 그 모자라고 비천한 꼬맹이를 3주 후에 혼내주기로 했으니까요... 도련님이 흘리신 피의 10배... 아니, 100배는 흘리게 해줘야 마음이 풀리시겠지요?”

어렸을 때 자신의 검술 교사로 고용된 시온 이드리스는 검에 초짜였던 자신이 보기에도 가르치는 데에 재주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와이즈 가문은 그녀를 해고하지 않았다.

시온 이드리스는 10년 전 제국에서 이름을 떨친 실력 있는 기사였다. 당시에 10대였던 시온이 직접 베어낸 도적의 목이 네자릿수가 넘었으며, 장벽 근처에서 왕처럼 호령하던 도적왕의 양팔을 도려내곤 말에 매달아 수도까지 끌고 온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결국, 그녀의 가학적인 성미를 견뎌내지 못한 기사단장이 그녀를 내쫓은 것을 주워낸 것은 왕국의 중견 가문인 와이즈 가문에게는 행운이었다. 단순한 호위 따위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 여긴 렉스턴의 아버지가 검술 교사라는 직위까지 준 것이다.

“실수로, 아니 실수를 가장해서 그 녀석에게 치명상을 입히면 어떨까요?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면 벌레처럼 빌빌 기게 만들면서 도련님에게 머리를 숙이게 해도 좋겠죠? 그 멍청한 수인년 이랑 돈놀이 가문의 얼간이가 질색하는 표정을 오랜만에 볼 수 있겠죠?”

렉스턴도 그녀에게 별 불만은 없었다. 제국에서의 나쁜 소문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충성스러웠으며, 꼴 보기 싫은 아르틴을 자신은 상상도 못 할 창의적인 방법으로 괴롭혀주기도 한다.

거기에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무척 아름다운 20대의 강한 여기사는 데리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또래 귀족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요소였다. 흔들리는 말총머리에 헤벌쭉한 얼간이 녀석들을 보면 우월감이 샘솟았으니깐.

문제를 알게 된 건 2년 전 15살 생일이었다. 성대한 생일파티 날 아버지가 권해 준 포도주를 사양 않고 홀짝홀짝 받아먹던 렉스턴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잠들었다.

운이 안 좋았던 것은, 렉스턴 자신은 몰랐지만, 강령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육체는 해독과 면역력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새벽 일찍 잠에서 깬 렉스턴은 고개를 뒤척이다가 소스라지게 놀라 기절할 뻔 했다.

자신의 침대 옆, 달빛이 비추는 창문 옆에 서 있던 시온은 자신의 자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자신이 알던 상냥하고 충성스러운 여기사 시온의 눈이 아니었다.

음욕으로 가득 찬 눈은 집념과 광기로 그 눈은 살면서 본 적이 없던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어붙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감사함을 느껴야 했다.

그 후로 렉스턴은 그녀를 꺼려왔다.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해보아도, 술에 취해서는 꿈도 분간 못하는 거냐고 꾸짖음을 들어야 했다. 거기에 자신이 자연스레 그녀를 멀리하자 검술 연습을 핑계 삼아 자신의 스케줄까지 통제하기 시작했다.

결국 렉스턴은 아카데미로 도망쳤다. 그래도 이 여자는 계속 쫓아왔다. 출발일도 다르게 알려주고 몰래 출발했는데 아카데미로 가는 배에 먼저 타고 있었다. 이런 일을 상담할 친구조차 없던 렉스턴은 스트레스와 공포심에 말려 죽어가고 있었다.

“도련님, 사랑하는 도련님, 제가 꼭 복수해드릴게요. 그러니깐 푹 쉬시고, 또 상냥하게 저를 보며 웃고 칭찬해주셔야 해요. 아셨죠 도련님? 우리 귀여운 도련님...”

신이시여, 신이 없다면 마왕이라도 좋다. 저 여자를 내게서 치워주기만 한다면, 나는 어떠한 대가도 치룰 수 있다.

그러니, 제발 이 끔찍한 상황을 벗어나게 해주세요.

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겨도, 잠든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시온의 손길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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