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폭풍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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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을 시작한지 5일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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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놀래킬 만한 천재가 정성을 담아 당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술가』 레벨이 상승합니다! 『Lv.0』 > 『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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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전에는 무술가 레벨이 상승했다는 상태창이 떠올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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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훈련으로 인해 육체의 잠재력이 한계를 돌파합니다.
『잠재능력』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범인』 > 『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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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아침 트레이닝을 끝내자 잠재능력이 개화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상태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사실 별 감흥은 없었다. 상태창이 알려주는 건 내가 뭘 해냈다는 알림창에 가깝다.
초반에 회귀했을 때는 상태창의 숫자 하나, 글자 하나에도 엄청나게 연연했다.
아무리 죽을 것 같아도 강해졌다는 알림이 떠오르면 기뻐서 몸부림을 치며 고통을 이겨낼 원동력이 되어줬지.
하지만 이제 와서는 상태창에서 강해졌다는 알림이 떠도 별 감흥이 생기질 않는다.
그나자 육체적인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잠재능력의 성장이 조금 기쁠까. 개화 정도로는 기별도 안 오지만.
“상태창이 모든 걸 알려주는 건 아니니까.”
예를 들어, 지금 내 마법사 레벨은 1이다. 이제 막 매직 미사일 쏘고 화살 몇 번 막으면 깨지는 쉴드 같은거 만드는 수준이란 소리.
하지만, 실제로는 나를 1레벨 마법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장담컨대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당장 내 마법사 특성과 칭호는 사라졌어도, 3회차 당시 연구한 연구 자료와 계약으로 얻은 지식의 편린들은 내 머릿속에 잠들어있다. 게다가 이건 내가 가진 경험의 일부에 불가하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상태창에 나타나지 않는다. 설령 내가 무협식 깨달음을 얻어 단번에 혈마펀치를 구사하는 경지에 이르러도 내 무술가 레벨은 1에 불과할 것임을 알고 있다.
“시스템을 파악할 수 있는 것 말고는 애물단지라니까...”
가장 큰 이유는 2회차 당시 겪었던 슬럼프였다. 당시에도 강해질수록 성장이 느려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장 눈으로 레벨업이 안 뜨니까 몇 달이 지나자 수련이 끔찍하게 지루하게 느껴졌다.
“상태창에 적힌 글자 몇 개가 나를 판단하는 게 아니야, 나 스스로 과정에서 뭔가를 얻어야지.”
지금만 해도 그렇다, 지옥 같은 하드 트레이닝으로 온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후, 포션으로 회복시키는 과정은 끔찍한 고통과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지금은? 팔굽혀펴기 10개도 무리였던 아르틴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아마 현실세계로 돌아간다면 특수부대에 지원해도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아직 부족해. 여긴 맨손으로 바위 부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세계니깐.”
아마 시온은 총알을 눈으로 보고 피하거나 베어낼 수 있지 않을까? 테스트는 해보지 않았지만, 전에 본 제국 기사 평균을 생각해보면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내가 녀석보다 앞서는 건 실전 경험이야, 그걸 최대한 살리기 위해선 오늘부터는 단순 훈련에 대련까지 병행해야겠어.”
슬슬 샤오메이가 수업이 끝나고 올 시간이니, 식사 후에 대련좀 해달라고 말이나 해봐야겠다.
...음?
등 뒤에서 누군가 살금살금 기어오는 게 느껴진다.
‘이 발걸음.. 거기에 이정도 수준의 기척 숨기기면, 샤오메이 녀석 인가?’
역시 양반은 못되는 녀석이라 그런가, 생각하니 바로 다가오네.
미리 알아챈 걸 이용해서 홱 놀래 켜볼까?
아니지, 가만히 있으면 또 평소처럼 스킨쉽 해오지 않을까?
“형님! 수련은 잘 하고 계셨슴까!”
그런 내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고, 샤오메이는 등 뒤에서 나를 와락 끌어안으며 놀래켰다.
솔직히 놀라진 않았지만, 등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물컹함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화들짝 놀란 척 했다.
“으아악!!! 깜짝 놀랐잖아! 언제 온 거야?”
그런 내 리액션에 만족했는지, 샤오메이는 나를 놔주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사실 방금 도착했슴다! 그래도 땀이랑 근육 상태를 봐서는 제가 없는 동안에도 열심히 한게 보임다~?”
샤오메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쿡쿡 내 팔뚝을 찌르자, 방금까지 혹사당한 내 몸이 울부짖듯이 팔 근육이 파르르 떨린다.
“힘들어 죽겠다. 나 씻을 동안 밥 먹으러 갈 준비나 해둬.”
“후후, 오늘도 고기를 꽉꽉 눌러 담은 훈련용 식단임다. 식사도 훈련이니 각오하십쇼 형님!”
훈련이 시작 된 이후, 내 식사는 샤오메이가 도시락으로 준비해주고 있다.
원래는 기숙사에서 나오는 고기 정식을 여러 개 시켜서 꾸역꾸역 먹으려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샤오메이가 자신이 식사를 준비해주겠다며 첫날 이후로 매일같이 도시락을 싸준다.
성인 남자 5명은 먹을 만한 분량을 맛까지 신경 써서 매일같이 준비하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닐 텐데, 자신이 도맡겠다며 가슴을 탕탕 치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거절도 하기 힘들었다.
‘이번 회차에서는 샤오메이 엄청 챙겨줘야겠다. 여름 방학 때는 공화연방에 놀러가자고 해볼까?’
공화연방으로 바캉스를 가자고 매 회차 마다 샤오메이가 졸랐지만, 생존과 클리어가 우선이었던 나는 매번 여름 특강을 핑계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적당히 즐기는 것이 목표.
솔직히 수영복 차림 샤오메이도 보고 싶다. 솔직히 아카데미 물에 바캉스는 국룰 아니냐?
“씻으시는 동안, 기숙사에 도시락 가지러 가겠슴다! 기다리십쇼! 누가 사탕줘도 따라가면 안 됨다!”
“내가 어린애냐, 빨리 다녀와.”
샤오메이가 손을 흔들며 다녀오는 동안, 나는 개인 훈련실에 딸린 샤워실에 들어가 후끈거리는 육체를 냉수로 식혔다.
훈련실에 딸려 있다고 하기에는 브론즈 기숙사의 샤워실보다 몇 배나 큰데다가 설비도 잘되어 있어 조금 꼬운 감각이 슬금슬금 몰려온다.
“아예 1학기에 골드 승급 한번 노려봐?”
개인 훈련실은 골드 기숙사 학생들이 누리는 아주 작은 특혜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숙집과 5성급 호텔의 차이가 그 정도일까?
“호텔은커녕 모텔도 안 가봤는데 알 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몸을 씻고 나오니 5분도 채 안 걸렸다.
역시 훈련 후 전투 샤워는 국룰이지.
“15분 정도 남았으니까, 한숨 자면서 좀 쉴까..”
바나나 우유 대신 포션을 벌컥벌컥 마시며 훈련실 바닥에 담요라도 깔기로 했다.
바닥에서 자고 있으면 샤오메이가 무릎베개라도 해주지 않을까...
끼이익.
드러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샤오메이가 벌써 왔나? 아니면 그새 깜빡 잠든 건가?‘
하품을 내뱉으며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보니, 대련실에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부드럽게 양쪽으로 땋아 올린 은발 머리는 장식된 파란 리본으로 그 아름다움이 돋보였으며, 날씬한 몸매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생도 복에 싸여 있었다.
아름다운 목선에는 제국의 황녀라는 신분을 드러내는 금색 펜던트가 걸려 있으며, 마지막으로 봤을 때 루비같이 빛나던 붉은 눈에 담겨있던 미련의 부재는 내가 새로운 회차에 도달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자각하게 했다.
“아그네스 에르멘가르트...”
바이올렛과 같은 이 소설의 또 다른 히로인, 제국의 2황녀, 아카데미의 부회장.
그리고 이 모든 수식어보다 내 가슴을 욱씬 거리게 만드는 단 하나의 수식어. 지난 회차에서 헤어졌던 내 전 연인.
“당신이 아르틴 루드비히 인가요?”
그리고 그녀는 내게 초면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
아르틴의 얼굴이 굳은 것을 본 아그네스 에르멘가르트는 자신이 사람을 햇갈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방금 자신의 이름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신입생인 눈앞의 소년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이 확실했으니까.
학생회에서 검토한 자료에 따르면, 아르틴 루드비히는 왕국에서도 작은 남작가 출신이며, 후계자도 되지 못한, 평범하게는 자국의 왕족의 얼굴을 독대하는 것조차 힘든 널리고 널린 귀족이다.
하물며 대륙을 수호하는 제국의 황족은 만나는 것 자체가 황송한 일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아그네스는 자신의 눈을 말없이 똑바로 쳐다보며 예를 갖추는 것도 잊은 무례함은 관대하게 눈감아 주기로 생각했다.
“다시 묻겠어요. 당신이 아르틴 루드비히 맞죠?”
“..아, 네 맞습니다. 아그네스 황녀님.”
반복된 물음에 정신을 차린 아르틴이 옷매무새를 고치며 일어나자, 그제서야 아그네스는 만족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저를 알고 있으니, 피차 복잡한 예식이나 미사어구는 생략하는 것을 허가하겠어요.”
“황송할 따름입니다.”
긴장해서 굳은 건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신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래도 아그네스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으레 자신을 내면의 탐욕이나 음욕에 투영해 훑듯이 바라보는 남자들에 비하면, 소년은 자신을 처음 마주하고 있음에도 똑똑히 자신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당신을 찾아온 건, 아카데미의 부회장으로서 학생회의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기품 있는 말씨로 사근사근 말하는 아그네스의 말투에, 아르틴은 바이올렛에게 느꼈던 것과는 조금 다른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 회귀 속에서 바이올렛이 자신을 적대한 적이 한 번도 없듯이, 아그네스가 자신을 먼저 찾아오는 일은 이번 회차가 최초였다. 대부분 그녀를 만나게 되는 건 주인공 녀석 때문에 강제로 만나게 되거나, 혹은 자신이 먼저 찾아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학생회의 뜻이라니.. 어떤 일입니까?”
하물며 자신이 학생회와 엮일 만한 일은...
있었다. 아르틴은 애초에 이번 렉스턴과의 폭력사태를 무마한게 학생회 라는 것을 방금 떠올렸다.
“그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일로 왔는지는 알아차린 것 같군요.”
“...”
“나쁜말은 하지 않겠어요. 아르틴 루드비히. 학생회는 이번 정식 결투를 당신이 취소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입학 첫날부터 사고가 터지는 것은 학생회나 학교 측에서나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걸 간신히 조르바로 쌍방 과실로 무마해준 것도 왕국의 왕녀와 왕자가 학생회에 있기에 가능한 영향력이다.
그리고 아르틴은 스스로 학생회의 합의를 거부하고 렉스턴에게 맞짱 한번 뜨자고 했으니, 학생회가 움직이는 것은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순리에 가까운 일이었다.
“왜 저한테 찾아 온 겁니까? 렉스턴이나 시온 이드리스에게 직접 찾아가지 않고?”
하지만 고까운건 어쩔 수 없었다. 아르틴의 입장에선 세가 작고 다루기 쉬운 자신을 찾아왔다는 생각이 계속 들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무례하게 언성을 높이지 않은 건 상대방이 아그네스라는 이유 하나였다.
“착각하지 말아주세요, 아르틴 루드비히. 저희는 당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거에요.”
“구원의 손길 말입니까?”
그 말에 아그네스는 확신에 차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확실히 아르틴 루드비히에게 손해될 게 없는 제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이..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은 제국에서도 명성을 떨친 바 있는 기사 출신입니다.”
“...”
“두 사람이 과거에 무슨 원한이 있는지, 저희로써는 전부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당신은 전교생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아주 크게 다칠지도 모릅니다.”
아그네스가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던 건, 현재 자신의 호위인 여기사가 시온의 일을 기억하는 인물로 시온의 품성이나 검술 실력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 있던 기사인 시온 이드리스는 품성의 결격이 너무 심했다. 잔혹하고 가학적인 그 성정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주인을 다치게 하여 호위인 본인의 명예를 더럽힌 아르틴을 제압하고 만족할리 없었다.
“학생회는 당신을 걱정해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겁니다. 이 대등치 못한 결투를 거절하고도 최소한의 명예를 챙길 수 있는 명분을 내주는 거죠.”
물론, 학생회가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것에는 헬릭 선생님의 입김이 컸다는 부분까지 입에 담지는 않았다. 아그네스 자신도 1학년에는 헬릭 선생님의 가르침 덕에 많은 성장을 이뤘기에 스승으로 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회의 대표로써 자신이 직접 찾아온 것 또한 그러한 존중의 연장선에 가까웠다.
“귀찮은 서류 작업 필요 없이, 여기서 그냥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하면 됩니다.”
아그네스는 당연히 눈 앞의 신입생이 제안에 응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후에는 학생회에 돌아가 가벼운 티타임을 즐기며, 잠깐 신경 쓰이게 했던 소동을 정리하면 끝날 일이다.
“싫습니다.”
“네, 그럼 그렇게 하는걸로...?”
그래서 순간 신입생의 입에서 나온 대답을 제대로 듣질 못했다.
분명 긍정의 대답을 했을 터인데, 싫다고 대답한 것처럼 들어버렸으니 이건 상대방에게 큰 실례다.
“제가 실수로 잘못들은 것 같군요, 아르틴 루드비히. 다시 한번 대답해 줄 수 있나요?”
“저는 싫다고 대답한 게 맞습니다. 아그네스 황녀님.”
이상한 일이다. 거절해서는 안 되고, 거절 할 이유도 없는 제안을 이 당돌한 신입생은 당당하게 거절하고 있다.
그렇기에 본래라면 불쾌해야 할 아그네스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작게 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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