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폭풍전야 #02
* * *
내 대답을 들은 아그네스는 별 반응 없이 훈련실을 떠났다.
이 정도로 단호하게 싫다고 하면 아그네스가 보일 반응들에 맞춰 대답까지 생각해놨는데.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간 탓에 나는 조금 벙쪄 버렸다.
“뭐지? 내가 알던 아그네스의 반응이 아닌데..”
조금 의아했지만, 그래도 저 반응에 짚이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
“아마도 지금 학생회장이 시킨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 엉덩이 무거운 학생회에서 무려 부회장을 보낼 리가 없다.
여하간, 지금 시점에서 학생회랑 엮이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다.
전 회차 롤모델에, 스승님에, 라이벌이라 말하던 놈에, 지금 학생회에 엮이면 웹소설이 아니라 라노벨 전개에 휘말려 버린다.
원작에서도 정상적으로 학생회랑 엮이는 건 1학년 중간고사 이후 학생회 선거.
“소설에서는 주인공 녀석이 학생회장 후보들하고 엮여서 고구마는 다 쳐먹었지..”
생각해보니 열 받는다. 나는 주인공 모르게 그 빌런 놈들 싹을 다 잘라놨는데.
나는 여자랑 진도 좀 빼려고 하면 귀신같이 와서 방해해?
“아무튼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뭐가 다행이라는 검까? 형님?”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까 놀래킬 때보다 더 깜짝 놀랐다.
뒤를 보니 생도복에서 노출 많은 차이나 드레스로 갈아입은 샤오메이가 5단 도시락을 세팅하는 게 보인다.
다른 생각 하느라고 집중했더니 감지가 풀려버렸나?
“아니, 방금 부학생회장이 다녀갔거든.”
“헤에~그 공주 기사님 말임까?”
아그네스의 이야기를 꺼내자, 샤오메이의 큼지막한 초롱거리던 눈망울이 가늘어진다.
그런데 샤오메이가 이 시점에서 아그네스를 알던가?
“아그네스...님을 알아?”
“물론임다. 조르바 도련님이 언젠가 꼬실 거라며 이야기 하셨슴다!”
조르바 펠카스 또 너야?
사실 바이올린이 그런 반응인 것도 그 녀석 탓 아닌가 의심이 크게 들기 시작한다.
“아무튼, 나보고 결투 포기하라고 하더라고. 학생회에서 수습한 일을 질질 끄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
“...그게 전부임까?”
“응? 그거 말고 할 만한 대화가 뭐가 있어?”
지금 아그네스랑 나는 방금 처음 만난 완전 초면, 그 외에 용건이 있는 게 이상하다.
이쪽에서야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지금 회차에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러게 말임다! 우리 방구석 외톨이 아르틴 형님이 제국의 황녀님하고 대화 주제가 맞을 리도 없잖슴까!”
샤오메이는 갑자기 기분 좋게 웃으며 내 말에 맞장구를 친다.
근데 전부터 은근히 돌려 까는 거 같은데, 사실 나 싫어하나?
하지만 대련실 바닥에 담요와 함께 깔린 휘황찬란한 5단 도시락을 보면 그 생각도 사라진다.
이런걸 준비해주는 애가 나를 싫어할 리가 없지! 아마 저것도 다 조르바 탓이 분명하다.
“아르틴 형님”
샤오메이의 옆에 앉아 식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활기차게 웃던 샤오메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결투, 그만두실검까?”
그렇게 묻는 샤오메이의 말에, 나는 샤오메이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야 옆에서 보면 미친 짓이겠지만, 이제와서 포기할 생각은 없다.
“포기할 거였으면 애초에 결투를 걸라고 도발하지도 않았지. 렉스턴하고는 이번에 끝을 볼 거야.”
물론 두고두고 씹어 먹어도 괜찮겠지만, 당장 렉스턴 말고도 빌런은 차고 넘친다.
내 목표는 그중에 띠꺼웠던 녀석들만 골라 머리를 부수며 사이다 라이프를 즐기는 것.
렉스턴 하나에 회차 하나를 전부 쏟아붓는 건 너무 무의미한 시간 낭비잖아?
“후후, 그래야 멋진 형님임다! 저도 결투 전까지 최대한 도와드리겠슴다!”
내 대답에 어느새 싱글거리며 웃는 샤오메이는 젓가락으로 거대한 고기 완자를 집어 들었다.
“자! 상으로 후배의 먹여주기 임다! 도련님한테도 안 해준 거니깐 감격스러워 하셔도 좋슴다!”
물론 나는 부끄러워서 사양하는 라노벨 전개 따위는 거부하고 단번에 받아먹었다.
음! 군도의 향신료를 사용한 건지, 다채로운 풍미를 자랑하는 고기 완자는 한번 씹자마자 농후한 육즙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고기는 고급 소고기를 쓴 건지 깊은 맛이 인상적이다.
전 회차에서 몬스터 고기 뜯어먹다가 회귀하니 이런 지극 정성의 대접을 받다니, 진짜 존나게 행복하다.
“맛있다, 너무 맛있다!”
샤오메이의 흐뭇한 미소를 받으며, 나는 도시락을 이것저것 우겨넣기 시작했다.
**
“아르틴 루드비히는 저희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학생회장님.”
학생회에 돌아온 아그네스는 원탁의 반대편에 앉은 은발머리의 미남을 바라보며 말했다.
“학생회장님 이라니, 너무 딱딱한 호칭 아니야 아그네스? 리처드 오빠라고만 불러줘도 나는 만족인데.”
능글맞게 웃는 남자, 아니, 자신의 오빠이자 제국의 황태자를 보며 아그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 저희만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언제나 체통을 지켜야 합니다. 학생회장님.”
“딱딱하게 굴기는, 아그네스가 밤마다 몰래 보는 책에서는 그런 딱딱한 여자아이는 안 나오면서!”
그 말에 쉿! 쉿! 하고 조용히 하라는 아그네스의 새빨개진 얼굴에, 리처드 에르멘가르트는 만족한 표정으로 원탁에 둘러앉은 다른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하네, 우리 당돌한 신입생은 학생회의 배려를 거절한 거 같아.”
그 말에 몇몇 학생회의 임원들은 혀를 찼다.
가문도 하찮고 재능도 하찮은 브론즈 기숙사의 신입생이 학생회의 권위를 거부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큰 소리로 불평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현 학생회장인 리처드의 변덕으로, 기존에 있던 책상들을 밀어내고 고급 마호가니 원목으로 만든 원탁을 설치했지만 무의미한 변덕이었다.
아카데미의 학생회는 단순히 학생들의 대표를 뽑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 건 허울 좋은 명분일 뿐.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아카데미에서 해결하지 못할 학생들의 분쟁을 억누르는, 일종의 권력 집단이라고 하는 게 옳다.
당연히 학생회에 말석으로라도 들어오게 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쟁쟁한 귀족이거나, 무시할 수 없는 가문이나 부모를 둔 학생뿐이다.
간혹 아주 뛰어난 재능을 보여 그 간극을 넘는 학생이 있지만, 이번 학생회에선 그런 이레귤러는 없었다.
게다가 이번 학생회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의 파워를 자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의 심장을 타고 태어났다고 비견되는 저 우르단 헬릭을 뒤 잇는 현세대 왕국의 거인살해자.
12살에 자신을 납치하려던 암살자를 때려 죽였다는 거인살해자의 동생이자 왕국의 왕자.
공화연방의 맹주 이시쿠로 가문의 차남, 신들에게 신통력을 받았다는 차기 음양두.
제국의 황태자이자 재능으로써도 현 시대 최고에 꼽히는 학생회장.
그런 학생회장의 여동생이자 저 거인살해자에게도 밀리지 않는 기사인 부회장까지.
전부 미래에 각 나라의 중역 수준이 아니라, 통치자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구성이다.
그런 학생회의 파워는, 어중간한 왕국의 백작가의 불만정도는 가볍게 짓이겨 눌러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
‘신입생 걔는 완전히 미쳐버린 건가? 주제 파악도 못하네.’
‘나 같으면 오히려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을 텐데, 귀족으로써 몸가짐도 못 배워먹기는.’
‘아르틴 그는 신인가? 아르틴 그는 신인가? 아르틴 그는 신인가?’
생각은 많지만, 함부로 꺼냈다가 잘 못 보이면 가문에서도 버려질 수 있는 중압감에 늘 시달리는 것이 이번 학생회다.
“어떻게 생각해, 네가 기껏 찾아와 줬는데 의미가 없게 됐네, 조르바 펠카스?”
그런 죽상인 임원들 사이로, 학생회장의 시선이 원탁의 옆에 선 채로 상황을 바라보던 조르바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마주치는 순간 위가 쓰려올 시선의 몰림에도, 조르바는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다.
“글쎄요, 전 아르틴을 도우려는 거지, 아르틴의 대변인은 아니니까요?”
“그래? 저번에는 친구를 위해서 대변인을 자처하길래,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지.”
“친구가 불합리한 폭력에 휘말리는 걸 바라만 보는 건, 조르바의 방식이 아니거든요.”
그런 조르바의 능청스러운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리처드의 입가에 미소가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제국의 황태자인 자신의 권위에도 저렇게 여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쉽네, 역시 학생회에 들어올 생각은 없는 거야?”
“저는 머리 아픈 학생회 보다는 여학생들과의 교류를 더 중시해서 말입니다.”
“이런, 두 번이나 거절당하는 건 처음인데. 눈물이 나는걸.”
애초에 학생회의 모임에 부외자가 끼는 것은 흔하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조르바 펠카스는 펠카스 상단의 후계자이자 뛰어난 재능으로 학생회에 들어올 것을 거절한 바 있는 이레귤러.
그런데도 학생회장은 그런 조르바가 마음에 든 건지, 이번 조르바의 부탁까지 응해준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건데? 그 애송이가 거절했으니깐 그냥 넘어가 잔 거야?”
그런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뚱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성질 사나운 왕국의 왕자가 여태까지 참은 것도 용하다고 생각하며, 아그네스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흐름은 학생회가 권위를 명분으로 아르틴 루드비히라는 개인을 찍어 누를 수도 있는 상황이니깐.
“그냥 넘어가는 것도 좀 그렇지, 아무튼 우리의 제시를 거부했잖아?”
“그럼 내가 가서 두들겨 패기라도 해줄까? 깝치지 말라고 경고한번 해줘?”
주먹을 풀기 시작하는 왕자를 바라보며 아그네스가 한숨을 쉬고 말리려는 찰나, 황태자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우리의 배려를 거절한 그 기백, 제대로 확인하고 싶지 않아?”
“...? 어떻게 말야?”
학생회장의 말에 아그네스는 위가 쓰려오기 시작했다. 보통 이렇게 말을 하는 건 리처드 오라버니의 변덕이 시작됐다는 거니깐.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지난번에 입학식 때 화려하게 시작하겠다고 구매한 불꽃놀이 예산 때문에 예산 부족한 거 모르시나요?”
“이상한 짓이라니! 아카데미는 새로운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혁신을 늘 중시해야 해. 나는 권태에 빠진 아카데미의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늘 노력하는 거라고?”
확실하다. 또 무언가 이상한 꿍꿍이를 떠올렸다는 반응이다.
머리를 부여잡는 아그네스를 뒤로하고, 학생회장은 조르바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크게 해보자고, 제2 대련실 말고 제1 대련실을 대여해줄게, 누구나 볼 수 있게 관중석도 공개하고.”
그 말에, 자리에 있던 대부분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국 기사와 브론즈 신입생의 결투를 제1 대련실에서? 그것도 공개적으로?
‘신입생, 좆됐구나...’
‘와, 학생회장에게 제대로 찍혔네’
이건 대대로 망신을 줘서 알아서 아카데미에서 나가게 하겠다는 말밖에 안 된다.
최소한 팔다리가 박살나는 신입생을 보면서 다른 학생들은 두고두고 즐거운 대화 화제로 삼을 거다. 고대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을 지켜보던 백성들이 그랬듯이.
“그런 제안을 아르틴 루드비히와 조르바 펠카스가 받아들일 리 없지 않습니까. 학생회장님!”
“아뇨, 제가 아르틴에게 전해두겠습니다.”
“...?!”
그리고, 아그네스가 그런 권위에 의한 폭력을 막고자 했을 때, 오히려 조르바가 제안을 수락한 것에 대해서는 학생회장을 제외한 모두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조르바 펠카스... 당신, 아르틴 루드비히의 친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입니다, 샤오메이와 더불어 딱 둘 있는 소중한 소꿉친구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멍청한 제안은 거절해야...!”
타인인 아그네스가 당황하고 지인인 조르바가 여유로운 상황.
허나, 조르바는 아르틴을 사실 질투했다거나 샤오메이를 NTR하겠다는 그런 망측한 생각따위를 품은 게 아니었다.
‘이 제안을 들고 갔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그리고 이 결투를 어떻게 해결할지...’
조르바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과연 전혀 다르게 바뀐 아르틴이 어떻게 행동할지.
그리고 정말로 샤오메이의 말대로 지금의 아르틴을 내버려둬도 되는 게 맞는지.
‘네가 정말로 내 친구인 아르틴이 맞는지 알고 싶어, 아르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