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데자뷰
* * *
“말 안 들리냐? 개인 훈련실은 골드 클래스 전용 시설이니깐 브론즈는 꺼지라고.”
뭐지 갑자기 이 병신들과 뭔가 익숙한 전개는?
기분 좋게 혼자 아침 운동 한번 조지고, 조르바한테 부탁했던 결투에 쓸 비밀병기를 2개 받아 왔다.
그리고 훈련실로 돌아가려니, 웬 얼굴에 곰보가 가득 박힌 남학생과 덩치 좀 있는 학생 둘이 훈련실로 가던 나를 가로막고 섰다.
“누군데 저보고 꺼지라 말라 하는 겁니까?”
“누구냐고? 하!!”
좆같아서 눈을 꼬라보니, 기가 찬다는 얼굴로 탄식을 내뱉는다.
“사고 치는 새끼는 선배도 못 알아보나? 3학년의 우즈 글링턴 선배님이시다. 깍듯이 인사드려!”
옆에 서 있던 모아이처럼 생긴 근육질의 덩치가 곰보 선배 대신 화를 내며 소리쳤다.
‘시발 그게 누구냐고.‘
회귀 내내 한 번도 못 들어본 엑스트라가 갑자기 랜덤 인카운터로 출현했다.
잡으면 돈이랑 경험치 좀 넉넉하게 뱉으려나?
‘잠깐, 글링턴.. 글링턴 후작가는 들어본 거 같은데.’
왠지 가물가물한데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 저 곰보 얼굴은 기억 안 나는데 뭐였더라..?
“이 새끼가 진짜 못 알아봐? 우즈 선배님은 왕국의 대 귀족인 글링턴 가문의 차남 되시는 분이다!”
애매한 알 듯 말 듯 한 느낌에 내가 지그시 바라보자, 모아이 옆에 서있던 두꺼비 닮은 뚱뚱한 덩치가 대신 설명해준다.
그리고, 저 말을 들으니 존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3회차 때 주인공 존나 방해하던 두꺼비 닮은 년 가문이잖아.’
주인공인 카이엔이 쳐먹던 고구마 중 하나였다.
원작에는 없어서 예방도 못했는데 웬 두꺼비 닮은 악역 영애가 주인공의 친구를 시기해서 왕따를 조장했었다.
글링턴 후작가 자체는 왕국에서 꽤나 영향력이 커서 왕따는 심해졌고, 친구가 괴로워하던 걸 보던 주인공이 오지랖 넓게 구해주다가 원수 박았다.
심지어 간신히 떼어냈더니 그 두꺼비 닮은 년이 조르바한테 반해서 약혼하겠다고 난리 쳐서 개빡쳤던 기억이 선명하다.
“정말, 그 글링턴 가문의 차남이신 우즈 글링턴 선배님입니까...?”
“하! 그래, 감히 너 같은 하급귀족은 쳐다도 볼 수 없는 사람이지!”
내가 짐짓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히 묻자, 기고만장해진 곰보가 우월감에 찬 표정으로 지 소개를 줄줄이 이어나간다.
“그럼 혹시, 올해 입학하신 글링턴 영애의 오라버니 되시는...?”
내가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 그 두꺼비 닮은 년을 언급하자, 갑자기 곰보가 구겨져 더욱 못생김을 과시해온다.
“이 새끼, 설마 내 동생을 노리는 거냐? 내 동생이 아무리 아름답고 교양이 있다 해서, 너 같은 하급 귀족이 넘볼 수 있는 꽃이 아니야!”
이 십새끼가 진짜로 뭐라는 거지? 내가 누구를 노려?
아니, 어찌 보면 노리고 있다. 그 년도 네가 떠올리게 해준 덕분에 이번 회차의 복수 대상 중 하나로 선정되었으니깐.
“그런 두꺼비 닮은 년 줘도 안 먹으니깐, 훈련하게 비켜주실래요?”
내가 귀찮다는 얼굴로 그리 말하자, 곰보 선배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악역귀족들 특유의 좆박은 말투 탓에 길게 대화하는 건 사양이다.
옆에 개구리 닮은 돼지 덩치도 얼굴이 토마토가 되는 걸 보니, 저 새끼는 진짜로 그 두꺼비 닮은 년을 좋아했나?
존나 끼리끼리 노네.
“감히 학생회의 권위에 도전한 하급 귀족이 어떤 놈인가 했더니, 이런 근본도 없는 쓰레기가 내 동생과 내 명예를 모욕해?”
...? 방금 그건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데.
“잠시만요 선배님. 그건 이상합니다.”
“...?”
“제가 여동생 분의 얼굴을 모욕한 게 아니라, 여동생 분의 두꺼비 닮은 얼굴이 모욕 그 자체가 아닐까요?”
내 말에 잠깐 생각이 멈춘 듯 눈이 동그래진 곰보는, 이내 허리춤에서 칼을 뽑으며 내게 노호를 터트렸다.
“이 건방진 새끼를 작살내버려! 감히 나를 이리 우롱하다니! 학생회에 잘 보이는 건 다음이다!”
그 말에 덩치들이 바닥에 내려놨던 쇠방망이를 들고는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처음 본 엑스트라들이 왜 등장했나 했더니, 학생회에 잘 보이려고 건방진 후배 좀 교육하려고 찾아 온 건가.
‘이거 귀찮아 졌는데.’
3회차의 기억 탓에 일단 시비는 걸었는데, 정학 중에 한 번 더 사고를 치면 이번에는 정말로 퇴학을 당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글링턴 후작 가문은 와이즈 가문처럼 귀찮은 집착이 심한 가문.
‘그냥 셋 다 반병신 만들고 회귀나 할까? 하지만 이번 회차에 할 게 많은데.’
“조용해진걸 보니 겁먹었나 보지? 다리 하나는 병신을 만들어 줄 테니 각오해라!”
내가 자세도 안 잡고 가만히 서있자, 겁먹은 줄 안 모아이가 호쾌하게 외치며 내게 달려 들었다.
이건 정당방위인데, 정학이라도 봐주지 않을까? 순간 생각한 찰나.
콰앙~!!!
내게 덤벼들던 모아이 얼굴의 덩치가 내 뒤에서 날아온 무언가에 머리를 찍혀 바닥에 쳐박혔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무표정의 샤오메이가 드레스를 흩날리며 아름다운 각선미를 뽐내고 있다.
“지금, 저희 형님께 뭐하시는 건가요 여러분?”
냉기가 줄줄 흐르는 샤오메이의 목소리에, 방금 전까지 나를 두들겨 패려던 나머지 두 사람은 식겁해서 뒤로 물러난다.
“리...린 샤오메이! 끼어들지 마라! 이건 우리랑 아르틴의 문제야!”
아니 나는 그 문제에 동의한 적이 없는데?
애초에 먼저 시비 걸고 덤빈 녀석들이 왜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아, 아르틴 형님과, 여러분의 문제요?”
“그..그래! 이건 아르틴 루드비히가 글링턴 가문을 모욕해서 생긴 일이다! 왕국의 귀족인 루드비히 가문과 글링턴 가문의 일이야! 연방 출신인 네 녀석은 빠져!”
또박또박, 자신의 말을 무표정으로 되씹는 샤오메이를 향해 곰보 선배가 소리쳤다.
어떻게든 샤오메이의 개입을 막으려는 몸부림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물론 심정은 이해한다. 샤오메이를 상대하려면 지금은 주인공을 데려와도 무리일 테니깐.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렇게 나오는 샤오메이는, 화가 난 샤오메이라는 걸.
“가문 사이의 일이라면, 부외자가 끼는 건 무례한 일이겠네요.”
“그래! 그러니깐 너는 지켜보고 있어라! 이건 결투나 마찬가지──”
“그런데”
우득.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가는 샤오메이의 발걸음은, 얼마나 진기와 힘이 담긴 건지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금이 가고 있다.
“아르틴 형님은 지금 저의 ‘수제자’나 마찬가지거든요.”
지금 샤오메이가 곰보 선배와 개구리 덩치를 향해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모르지만, 하나 확실한 건 있다.
그 표정이 나를 향하지 않는 건 다행이라는 사실이다.
“저희 가문에서는, 제자에 대한 모독은 그 스승에 대한 무례나 마찬가지라고요?”
그 말을 끝으로, 더 무언가를 말하려던 곰보 선배는, 샤오메이가 뒤통수를 움켜쥐고 벽에 쳐박는 것으로 파르르 떨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죽은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도망치려고 등을 돌리던 개구리 덩치는 그대로 턱에 꽂힌 샤오메이의 발차기에 천장에 쳐박히고 말았다.
“....”
이 광경을 직관으로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화난 샤오메이를 마지막으로 본 건, 아이들을 잡아먹으려던 마귀할멈의 골통을 부수던 4회차의 모습이었다. 마귀할멈이 사역하던 마족들이 샤오메이의 기세에 벌벌 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에헤헤, 형님. 괜찮으십니까?”
나를 향해 빙글 몸을 돌렸을 땐, 조금 전까지의 모습이 어디 갔냐는 듯 활짝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양 손에 피가 안 묻은 걸로 봐서는, 화난 것 치고는 힘 조절은 제대로 한 것 같다.
“3일 후면 결투인데, 다치시면 큰일임다! 저런 날파리들이 안 꼬이게 주말동안은 제가 쭉 곁에 있겠슴다!”
“으음... 뭐, 합숙훈련 한다고 생각하면 되려나? 고마워 샤오메이.”
내 대답이 마음에 든 건지, 샤오메이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껴왔다. 풍만한 가슴이 팔을 감싸주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다.
“후후, 3주도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생각보다 아주 잘 따라와 주셔서 스승인 저는 기분이 아주 좋슴다!”
“샤오메이가 잘 가르쳐준 덕이지. 나도 이정도로 강해질 줄은 몰랐는 걸?”
내 칭찬에 샤오메이는 기쁨의 표시로 어깨에 말랑한 볼을 부비적거렸다. 하지만 진짜로 진심에 가까웠다.
원래 계획했던 것은 최대한 비밀병기를 활용해서 몰아붙이는 전략이었는데, 이 정도라면 정면승부를 해도 이길지도 모르겠다.
시온이 얼마나 강한지 확실하게는 몰라도, 데스나이트 시온은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만 했을거다.
그때, 샤오메이가 콕콕 어깨를 찌르더니 귀를 가져다 대라고 손짓한다.
기분 좋은 샤오메이의 분위기에 맞춰주기 위해 무릎을 숙였다.
“만약, 결투에서 이기면, 포상을 해드리겠습니다. 형님이 아주 좋아하실 만한걸로.”
그 말에 나는 두 눈이 커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포상..? 어떤 포상인데?”
“그건, 결투에서 이길 때까지 비밀임다.”
그렇게 말하고는, 팔짱을 풀고 쪼르르 앞으로 달려 나간 샤오메이는 훈련실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니깐, 남은 시간도 열심히 훈련하는 검다! 빨리 오십쇼 형님!”
차이나 드레스의 면적이 넓지 않은 탓에, 옷 위로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는 골반이 나를 유혹하는 것처럼 흔들린다.
포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이겨야겠다고 다시 한 번 의욕이 차오른다.
‘그나저나, 샤오메이가 이런 성격이었던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긴 하는데.
오히려 좋다. 남자답게 변한 내 모습에 반한거라 여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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