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13화 (13/266)

〈 13화 〉 대기실

* * *

“아.. 씨발.”

얼굴을 문지르며 더러운 기분으로 눈을 떴다.

현실세계의 꿈을 꿨다. 거기서 나는 이 세계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무력했다.

고아라고 반애들에게 무시당하고, 촌지하나 못 찔러주는 성적 낮은 학생이라고 선생님들에게 무시당하는 생활.

‘결국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 친구라고는 한 십새끼 한 놈 밖에 없었지.’

승후, 그 사람 좋아 보이는 사기꾼 새끼.

따돌림 당하던 나를 유일하게 챙겨줬던, 그래서 친구라고 생각했던 녀석은 사업 하나 크게 해본다며 내가 6년간 열심히 모아온 돈을 빌린 다음, 그대로 해외로 잠적을 타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사람을 믿어본 적이 없다.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씨발, 인생 존나게 고독하구만.”

현실의 생각은 안하고 싶다. 차라리 불타 죽더라도 이 세계가 내겐 더 행복한 편이니깐.

고개를 저으며 벽에 달린 달력을 보니, 오늘이 시온과 결투하는 날이다.

“빨리 씻고 나갈 준비 해야지.”

괜히 뜨거운 물 맞고 있으면 다시 꿈이 떠오를 것 같아, 냉수로 군대식 전투샤워를 5분 만에 조지고 나왔다.

책상 위에는 어제 준비해둔 포션 2개와 영약 1개, 그리고 며칠 전에 공수한 비밀병기,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이 2개가 준비되어있다.

“일단 도핑부터 해보실까?”

훈련하는 내내 마시느라, 마지막으로 1병씩 남은 세니아 선생의 포션을 쭉 들이켰다.

시큼한 향기와 혀를 떨게 만드는 단맛, 공복에 마시려니 헛구역질이 날 것 같지만 참았다.

다음은 영약, 마력초를 먹고 사는 일각우의 심장을 약초에 절인 후 9시간 동안 말린 마력 보충제다.

이건 어제 일찍 합숙 훈련을 끝내고 방에 와서 직접 손질했다.

영약 같은 건 만드는 사람의 지식과 숙련도가 중요한 법, 일부러 복잡한 설비가 필요 없는 일각우의 심장을 고른 건 내가 만드는 영약이 가장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조르바 녀석에게 부탁해서 공수해온 거다. 역시 주인공의 최고 돈줄답게 바로 구해줬다.

누가 보면 친구라면서 등쳐먹는 게 아니냐 싶겠지만, 내가 조르바에게 해준 것에 비하면 약과다.

“목숨만 10번 넘게 구해줬지, 상단 망할까봐 무역까지 같이 가줬지, 그 사기꾼 새끼에 비하면 천사지 천사.”

아 씨발 또 떠올랐네.

그 새끼도 이 소설에 끌려왔으면 진짜 매 회차 마다 열심히 괴롭힐 자신이 있는데.

“됐다.. 그냥 영약 흡수하고 출발이나 하자.”

영약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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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우의 마력이 당신의 몸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마력』의 보유량이 상승합니다! 『1단계 마나의 정수』 특성을 획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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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가 만든 영약답게 먹자마자 바로 효과가 온다.

보통은 먹고 며칠은 스며들어야 하지만, 3회차 당시에는 연금술사 레벨을 8까지 올렸던 몸이다. 이 정도는 쉽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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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르틴 루드비히

칭호 : 아카데미의 붉은 광인[열기]

종족 : 인간

나이 : 17세

레벨 : 마법사 Lv.2, 무술가 Lv.3

잠재능력 : 개화 – 당신은 한계를 넘은 수련으로 벽을 한단계 넘었습니다.

특성 : 『회귀』[열기], 『5회차 특전』[열기], 『1단계 마나의 정수』[열기]

상태 : 포션의 효과로 마나재생력과 신체 회복능력이 높아졌습니다.

루드비히 가문의 삼남입니다.

최근 자신의 한계를 넘는 수련으로 스스로를 바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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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 1단계 마나의 정수 [닫기]

정순한 마나를 받아들인 육체가 더 많은 마나를 품게 됩니다.

마나의 순도가 미량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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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을 보니 수련의 효과가 꽤 쌓인 것이 보인다.

마음 같아선 단번에 5단계나 6단계까지 올리고 싶지만, 서둘렀다간 마나 자체가 통제가 힘들어진다. 순도가 높은 마나는 사람이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깐.

“중요한 건 마나를 담는 능력이 확실하게 늘었다는 거지. 객관적으로 2배 정도 늘어난 것 같은데.”

이 정도라면 3써클 마법까지는 억지로 운용이 가능하다. 쥐어 짜내면 4써클까지 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는 나머지 병이랑 글러브랑 챙겨서 방에서 나왔다.

샤오메이가 아침으로 싸준 만두를 입에 물고 천천히 걸어가니, 이제 눈에 보이는 제1 대련실이 벌써부터 시끄러운 게 느껴진다.

제1 대련실은 다른 대련실하고는 다르게 외부에 건설된 전용 경기장에 가깝다.

학생회에서 제1 대련실을 제시한 건 그런 의미에선 악취미에 가깝다.

뭐, 나는 이길 생각이니 오히려 좋다. 이걸로 땡깡도 좀 부릴 수 있을 테고.

저벅. 저벅.

대련실이 가까워지자 나를 마중 나온 듯한 선도부원이 다가온다.

멀리서 봐도 저 반짝이는 뱃지 때문에 못 알아보는 게 더 어렵다. 뱃지 만드는 길드랑 제휴라도 맺었나?

“아르틴 루드비히 맞습니까?”

“아, 네 본인입니다.”

선배라서 초면에 반말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공손한 태도에 마찬가지로 공손하게 인사하자 친절하게 나를 대기실로 안내해준다.

주변에 줄 서서 입장하는 학생들의 시선이 따갑다.

“다들 수업은 안 듣고 결투 구경하러 왔나 봐요?”

“아뇨, 교수님들이 직접 휴강하셨습니다. 학생회에서 권고도 해줬고요.”

나 하나 두들겨 맞는 걸 구경하려고 학교가 쉬었다고?

황당한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안내해주던 선도부원이 상쾌하게 웃는다.

“다들 궁금해 하거든요, 학생회에 반항하면서까지 기사랑 싸우는 학생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말이에요.”

“이제 막 1써클인 마법사가 피투성이가 되는 걸 구경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하하, 그런 사람이 없진 않겠지만. 저도 기대하고 있는걸요? 응원할게요.”

이 사람, 기억에도 없던 정말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호인인지 모르겠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선도부원은 대답 대신 눈웃음을 짓고는, 사람이 없는 복도로 들어서더니 딱 봐도 으리으리한 문 앞에 멈춰 섰다.

“여기가 대기실입니다. 심심하시면 돌아다니셔도 되지만, 늦지 않게만 주의해주세요.”

그렇게 호인인 선도부원은 사라졌다.

여자라면 이름이라도 물어봤을 텐데, 남자니깐 연이 닿으면 만나겠지 하고는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실은 단순히 학생 나부랭이가 사용할만한 시설이 아니다.

값비싼 원목을 쓴 의자나 고급가죽을 쓴 소파, 잔잔하게 들려오는 음악에 한쪽 벽에는 몸을 가볍게 풀만한 훈련도구도 비치되어있다.

하지만, 교수나 외부인사, 혹은 왕족이나 황족도 사용하는 공간이니 이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화장실이 없어?”

세수라도 하려고 둘러보니 화장실은 커녕 세면대도 없다.

생각해보니 전에 왔을 때도 비슷해서 복도의 화장실을 사용했었지.

“나가서 오른쪽이었지 아마?”

배낭을 소파에 던져두고 복도로 나와 기억나는 대로 걸었더니 기억이 맞았는지 화장실이 나왔다.

남자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서는, 물을 틀어놓고 잠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요 며칠 잘 먹고 잘 자고 포션까지 들이 부운 덕인지, 160을 조금 넘던 키가 조금 익숙한 눈높이가 되었다. 이정도면 165정도 되나?

“아직 모자라, 185 정도는 돼야 피지컬이 맞을 거 같은데.”

다음 영약은 육체 쪽으로 구해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뒤쪽의 변기 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목소리, 렉스턴 인가?’

대기실에서 시온한테 오구오구 받아야 할 놈이 왜 여기 있어?

조용히 집중하자, 틀어놓은 물소리는 음소거 된 것처럼 감각에서 사라지고, 렉스턴의 목소리가 온전히 들려왔다.

“..라도 좋습니다, 제발. 저 여자에게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제 영혼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씨발, 깜짝이야.

뭐하고 있나 들어봤더니 기도문이라도 읊듯이 중얼중얼 이상한 걸 조잘거린다.

‘저 여자? 누굴 말하는 거지?’

녀석은 겁에 질린 듯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계속 웬 여자를 없애 달라고 빌고 있는데, 누군지 감이 안 잡힌다.

“전능하신 우리의 아버지시여, 제발 저에게 안식과 평화를 주시옵소서, 그걸 위해서라면 저는 마왕에게 영혼이라도 팔겠습니다...”

뭐? 마왕?

‘이 새끼가 불길하게 마왕을 운운하고 있어?’

렉스턴은 전에 말했듯이 원작에서도 마왕군 간부가 되는 악역귀족.

하지만 원래라면 1학기 중간고사 끝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흑화 하는 놈인데?

‘아아...그런가.’

내가 저 새끼를 두들겨 팬 탓에, 그 흑화가 조금 앞당겨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저 새끼를 덜 팼거나.

‘기다려라, 시온 끝나면 너도 참교육 들어간다.’

마왕군은 커녕 아카데미에서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야 되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화장실에서 대기실로 돌아갔다.

‘괜히 애매하게 죽이면 유령 강령술사 같은 걸로 등장할 테니 죽지 않게만 존나 패야지.’

렉스턴을 몰래 조져놓을 방법들을 생각하며 대기실 문 앞에 섰다.

“거기 붉은 머리, 동작 그만.”

그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해짐과 동시에 척추 반사적으로 자리에 멈춰 섰다.

이 목소리, 너무 익숙한 이 목소리, 내가 어느 순간 군대 꿈을 안 꾸게 된 가장 큰 이유.

“너지? 그 건방진 신입생이.”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 만나고 싶진 않았다. 나중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만나려고 했는데. 나를 찾아오다니.

태양처럼 반짝이는 주황색 머릿결에, 생명력 넘치는 오라라도 뿜는 것 같은 존재감은 강함과 카리스마를 고고하게 과시한다. 그 모습에 나는 사자가 떠올랐다.

여전히 포식자의 눈처럼 위압감이 가득한 시선은 조금 힘을 주는 것으로 마주 보는 사람을 마치 겁먹은 토끼처럼 위축시킨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마리안느 공주님.”

“학생회에 겁 없이 덤볐길래 미친놈 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완전 또라이는 아닌가 봐?”

귀족의 예법으로 정중히 인사하자, 마리안느 공주는 마치 전사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겉모습만 본다면, 바이올렛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미녀이지만, 나는 그 겉모습 안에 담긴 모습을 알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압도적인 마력과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10살에 곰을 때려죽이고, 15살에 거인을 베어 죽인, 원작에서도 후반까지 강함을 과시하는 최강의 동료.

왕국의 제1왕녀, 거인살해자 마리안느 드 레크투르. 그리고 내 4회차 시절의 스승님.

‘오랜만에 보네요, 스승.’

지난 회차에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진 탓에 직접보니 너무 반가웠다.

계획을 말하면 혹시라도 따라온다고 할까봐, 나는 편지 한장만 남기고 장벽으로 갔다.

"그런데 저를 만나러 오신건가요?"

"아 그래, 초면에 이런 말은 좀 그럴지도 모르는데."

마리안느는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으며 내 눈을 조금 피하기 시작했다.

"이번 결투, 한번만 져줄 수 있냐?"

내 전 회차 스승님이 초면에 패작을 의뢰하러 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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