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대기실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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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보고 고의로 결투에서 패배하라는 말씀인가요?”
마리안느가 좋은 일로 찾아왔을 거라고는 기대하진 않았다.
아니, 사실 아주 조금은 했다.
내 기억 속의 마리안느 공주는, 엄격하면서도 친근하고 믿을 수 있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깐.
“음, 뭐 그런 셈이지.”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나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고, 올곧은 성격을 지닌 마리안느가 왜 나에게 부정을 권하는 건지.
“이유를 물어봐도 됩니까?”
자연스럽게, 방금 전까지 예의를 갖추던 태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런 나를 향해 큰소리를 내기는커녕, 내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마리안느가 너무 짜증이 났다.
“이유라, 너를 위해서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냐?”
나를 위해서? 마리안느는 전 회차에선 나를 위해 불가능한 던전도 도전하라고 다독였던 사람이었다.
“당장 초면이신 공주님이 왜 저를 위해 결투를 그만두라는 건지, 제대로 설명해줬으면 합니다만.”
“아 씨, 나도 사실 딱히 너한테 이런 말 하려고 온 거 아니야, 그냥 학생회장한테 개긴 놈 얼굴이나 보러 온 거였어.”
내 말에 마리안느는 사자의 갈기처럼 빛나는 주황머리를 신경질처럼 긁어댔다.
“오지랖인 거 아는데, 만약 네가 이번 시합에서 이기면, 아마 위센 가문의 리가르도 선배가 너를 제적시키려고 할 거야.”
“위센 가문... 그 리가르도 선배가 말입니까?”
갑자기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던 탓에, 나는 되물어야 했다.
왕국에서 왕실 다음으로 세가 가장 높은 위센 공작가의 둘째 아들인 리가르도는 원작에서도 아카데미의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주인공을 퇴학시키려던 인물이다.
물론, 주인공의 메인 히로인이었던 아그네스 황녀와 마리안느 공주의 활약으로 오히려 다른 학생들을 괴롭힌 것을 고발당해 졸업을 3달 남기고 징계를 받은 후 언급도 없이 아카데미를 퇴장한다.
‘이게 정말로 나비효과라는 건가?’
그저 렉스턴 와이즈에게 괴롭힘 받는 포지션을 입학 첫날부터 거부했을 뿐인데, 마치 커다란 무언가를 망친 듯 지난 회귀들에서는 없었던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단순히 렉스턴을 때린 것 말고도 뭐가 다른 행동을 했던 게 있던가?’
모르겠다. 그 이후로는 병원에 입원하고, 시온에게 시비 걸어서 결투한 것뿐인데.
“남작가의 후계자는커녕, 가문에서 반쯤 버려진 네가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다과회에서 계속 말을 꺼내더라고.”
결국 주인공에게 가야 했을 어그로가 나한테 다 끌렸다는 소리잖아.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말해주는 건가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 문뜩 이상한 감각이다. 오늘 처음 본 신입생을 도와줄 정도로 오지랖이 깊던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왜, 왜라. 글쎄다.”
자신도 정말 이유를 모르겠는지 마리안느는 입술을 비쭉 내밀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따지자면, 직감? 아니, 직감보다도 더 강렬한 감각?”
“직감이요?”
무슨 의미인지 알기 힘든데?
원래부터 직감은 좋던 사람이기는 했지만, 더 강렬하다는 건 무슨 소리지?
“서류의 데이터만 보면, 네가 이길 거 같지가 않아서 미친놈인가~ 했는데, 막상 보니깐... 네가 그 여기사를 이길 것 같다고 가슴이 울린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마리안느는 자신의 커다란 가슴에 개의치 않고 한쪽 가슴을 두드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네가 험한 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가 않아.”
그렇게 말하며, 마리안느는 자신도 모르는 감정에 대해 고민한 것을 포기한 건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어 보였다.
“나도 잘 모르겠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널 보면 동생 녀석을 보는 기분이 나거든, 왜일까?”
그 웃음소리와 어느새 목소리에 담긴 친근함은, 분명 내 기억 속의 마리안느가 맞았다.
바이올렛의 반응을 속에 담아둔 탓일까,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깊은 안도감이 몰려왔다.
어떻게 이 안도감을 표출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나도 모르게 눈앞의 마리안느를 꽉 끌어안았다.
“어라?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왕국의 공주라고! 예의를 갖춰!”
분명 다른 남자였다면 끌어안는 순간 힘으로 바닥에 메다꽂았을 마리안느는, 이상하게 내게는 그러지 않았다.
“야! 내 말 듣고 있어?! 이거 놓으라고 아르틴 루드비히!!”
그녀의 닦달에 포옹을 놓자, 귀가 빨개진 마리안느가 내게서 황급히 떨어져서는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지금은 왠지 사자라기 보단 고양이 같은 느낌에 더 가깝다.
“고마워요, 걱정해줘서.”
“...너는 고마우면 아무나 끌어안는 변태냐? 무뢰배자식.”
까칠하게 내 말을 받아치는 마리안느의 모습도, 그저 반갑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다.
“저는 결투에서 이길 거에요, 일부러 질 생각은 없고, 질 자신은 더더욱 없거든요.”
“내가 경고하지 않았어? 그랬다가는 귀족파 녀석들한테 단단히 찍힐 거라니깐?”
“상관없어요.”
내 목표는 이 세계관 최강자가 될지도 모르는 주인공이고, 그 전에는 이 세계관 최강자인 마왕에게 4번이나 도전했었다.
그런 나한테 공작가 차남따리는 렉스턴 녀석과 별 다를 바가 없다.
귀찮지만, 덤벼들면 언제든 짓밞아 줄 수 있는 같잖은 상대.
“말했잖아요? 질 자신이 없다고. 그 5학년 선배한테도 마찬가지예요.”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감이 넘쳐? 네 친구 조르바 펠카스를 믿는 거야?”
“아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에 제 스승님이 그러셨거든요. 아직 싸워보지도 않은 상대방에게 겁먹지 말라고. 일단 한번 붙어보면 어떻게든 된다고.”
그 말에, 마리안느의 입이 놀란 듯이 다물어졌다.
그야, 이 말은 내가 4회차를 막 시작했을 때, 마리안느가 나를 격려하기 위해 해줬던 말이니깐.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무식한 근성론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우습게도 혼자서 마족들의 땅을 뚫고 나아가던 1년 동안, 나를 지탱해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말 중 하나였다.
“그래?”
턱.
갑자기 마리안느가 내 옆에 다가오더니 대뜸 어깨동무를 해왔다.
“너, 또라이에 변태 같기는 해도 꽤 마음에 든다? 앞으로는 누나라고 불러.”
그 말에 나도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는, 마찬가지로 어깨동무를 받아줬다.
마리안느는, 회차가 바뀌어도 내가 알던 마리안느인 것 같다.
***
렉스턴은 결국 화장실을 나와 스스로 대기실로 돌아갔다.
어쩌면 자리를 비웠을지도 모른다는 알량한 기대를 배신하듯, 시온은 그런 렉스턴을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어머, 화장실에 좀 오래있으셨네요. 도련님?”
그 이유가 너 때문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렉스턴은 그러지 못했다.
당장 시온의 앞에 일렁이는 검기로 인해, 철로 만든 훈련용 더미가 구멍투성이가 되어서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으음, 몸이 안 좋은지 소화가 잘 안 되서 말야.”
“어머, 아침이 소화가 잘 안되시다니, 요리사를 똑바로 관리하지 못한 제 잘못이에요.”
“아냐! 아냐! 그냥, 그. 아르틴 그 머저리 자식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래!”
요리사를 언급하며 레이피어의 날 끝을 손가락으로 훑는 그 시선에 담긴 살기에, 렉스턴은 손을 내저으며 대충 아르틴을 핑계로 황급히 변명했다.
“아하, 그 망할 애새끼가 도련님의 기분을 언짢게 만든 탓이군요?”
그 변명이 통한 것인지 시온이 눈을 번뜩이자, 렉스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시온의 집착이 광기에 가깝긴 했어도, 자신에게 내보이는 일은 많지 않았다.
따지자면, 적어도 렉스턴에게는 최대한 상냥한 호위이자 사용인의 모습을 연기 해왔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제는 아르틴 루드비히가 자신을 때려눕히고 시온을 도발한 뒤, 그 광증은 눈에 띄게 심해졌다.
입학식 날의 사건을 명분 삼아, 24시간 내내 호위라는 핑계로 렉스턴을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아니, 관음한다고 해도 올바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식사부터 잠자는 시간까지, 화장실과 목욕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같은 공간에 있을 것을 주장하며, 동시에 시온 자신의 흉폭함과 가학심을 숨기지 않기 시작했다.
렉스턴의 시중을 들던 시녀중 하나가 실수로 렉스턴의 찻잔을 테이블에 엎었을 때, 시온은 진심으로 눈빛으로 시녀를 죽이려고 들었다.
그 자리에 자신이 없었다면 눈빛이 아닌 시온의 레이피어가 그 어린 시녀의 얼굴을 관통했을 거라고 렉스턴은 생각했다.
학생회의 제안을 아르틴이 거절했다는 소식이 들렸던 날에는, 밤에 몰래 가서 죽여버리겠다고 속삭이는 것을 엿들은 탓에 시온을 옆에 붙잡아둬야 했다.
렉스턴은 자신의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던 아르틴을 사지의 하나 정도는 장애인으로 만들고 싶다는 사악한 열망을 지녔지만, 동시에 아직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루드비히의 병신 꼬마는 오늘 살려달라고 울부짖도록 아주 잔뜩, 괴롭혀드릴 테니까요?”
천천히 자신을 향해 걸어와 손을 꼬옥 잡는 시온의 손길은, 왠지 모르게 놔주지 않겠다는 듯 힘이 잔뜩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다.
‘차라리...차라리 아르틴 그 머저리가 이기면 좋을 텐데.’
렉스턴은 지난 3주간 몇 번이고 아르틴 루드비히의 무례함, 조르바 펠카스의 오만함, 무엇보다도 시온 이드리스의 광증에 대해 본가에 알리고자 편지를 썼다.
하지만, 돌아오는 아버지의 답장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여러 통의 답장의 내용은 결국 루드비히와의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펠카스와는 친하게 지낼 것 이며, 시온 이드리스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며 우수한 학생이 되라는 말의 반복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가문의 힘으로 시온을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진 순간, 한가지 불가능한 방법이 떠올랐다.
만약, 저 얼간이 아르틴이 정말로 시온을 이기는데 성공한다면, 시온은 높은 몸값을 받고 있음에도 1레벨 마법사에게 패배하여 결투를 망치게 된다.
이는 귀족인 렉스턴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며, 와이즈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셈이다. 그리고 제 일을 해내지 못한 호위를 해고하는 것은 아버지조차 간섭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허나 얄궂게도, 여전히 그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르틴이 아무리 기를 쓰고 온갖 아티팩트를 구해와도, 시온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갑작스럽게 돌에 맞고 쓰러진 탓에 패배한 자신과는 다르게, 시온에게는 도적이 몸을 숨기고 쏜 화살도 눈으로 보지 않고 쳐낼 실력이 있는 손에 꼽히는 강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르틴이 스스로 시온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열 번은 죽었다 살아나야 가능성이 조금 생기는 정도로 말이다.
‘잠깐, 아르틴이 이기게 만드는 것 보다 쉬운 방법이 있잖나?’
아르틴의 어디를 도려낼지 고민하는 시온을 공포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던 렉스턴은, 마치 계시를 받은 듯 묘책이 떠오름을 느꼈다.
‘아르틴이 이기게 만드는 건 무리지만, 시온이 지게 만드는 건...그래,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필요한 것은, 촉매와 시간.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
“시온, 잠깐 심부름 하나만 할 수 있겠어?”
생각을 끝낸 렉스턴이 공포를 이겨내고 시온을 마주보고 말하자, 시온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왜, 결투 전이라서 내 말을 거역할 셈이냐?”
풋, 하고는 시온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련님이 원하신다면, 저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걸요.”
그 말에 렉스턴은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서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쌓였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저 눈웃음에 담긴 광기와, 아르틴을 향해 보이는 살의가 자신으로 향하는 순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렉스턴은 방금 떠오른 계획이 제대로 먹히기를 간절히 신과 악마와 마왕에게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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