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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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 이후, 마리안느와 대기실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물론 마리안느가 이야기해 주는 것은 전부 내가 아는 이야기뿐이었지만,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으니 대신 맞장구를 열심히 쳐줬다.
“오, 너도 기사 다이무스의 자서전을 읽어봤다고?”
“네, 400년 전 인물이지만, 무에 대한 접근이나 수련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앞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뭘 좀 아는데? 요즘 녀석들은 단순히 근력 운동하고 마나통만 키우면 강해지는 줄 안단 말야.”
정작 본인도 19살이면서, 요즘 애들이라고 말하는 게 좀 웃기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 세상이 미연시 게임이었다면, 지금 시스템 창에선 호감도가 오른다는 알림으로 띠링띠링 울리고 있을 텐데.
“근데 너 말야, 왜 내가 편하게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존댓말 하냐?”
“어? 아..그래도 제가 공주님한테 초면인데 어떻게 말을 함부로 놓겠습니까.”
내 말에 마리안느는 마음에 들지 않음을 어필하려는 건지 삼백안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보통 저런 미소녀가 이러면 귀여워 보여야 하는데, 마리안느가 하니 암사자가 으르렁 거리는 감각이라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이 딱, 어? 내가 마음에 들었으니 누나, 누님 하라 했으면 두 번은 없는 거야. 너도 딱! 말 놓으면서 예! 누님! 하고 남자답게 굴어야지!”
어우 씨, 현실에서 노가다 뛸 때 일 가르쳐 주던 33살 상철이 형님같은 말투에 나는 혼절할 뻔 했다.
마리안느의 이 털털함이 내가 샤오메이의 말투에 익숙해진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샤오메이가 귀염성 있게 형님형님! 거린다면 마리안느는 솔직히 말해서 어디 용병단장이나 범죄조직 두목이 어울린다.
‘내가 정말로 편히 말 놨으면 그건 그거대로 뭐라 했을 거면서.’
전 회차에서 저 말 듣고 바로 말 놨다가 한 소리 들어먹은 적이 있다.
마리안느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이렇게 조심스럽게 높여주는 쪽이 더 마음에 든다 이거겠지.
“그럼... 마리안느 누나?”
“그래, 잘하네! 앞으로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편하게 불러!”
마리안느는 그 말과 동시에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기 시작했다.
관중들 때문에 20분 정도 열심히 만진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졌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마리안느랑 미리 친해질 수 있으면 머리카락 정도야 반삭까지도 쌉가능이지.’
물론 전 회차에서 배울 건 다 배워놓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역 등장인물 중 최강자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다.
거기에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거리감이 한없이 좁혀져서, 뭘 부탁해도 잘 들어주니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말야, 너 시온은 어떻게 이길 생각이냐?”
문뜩 마리안느가 그렇게 말하며 내 위아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마나는... 좀 치는데, 그래 봐야 2써클 될까 말까? 몸은 마법사치고는 다부진데, 요 근래 훈련 좀 했나 봐?”
아직 뭘 꺼내 보이지도 않았는데 마리안느는 마치 내 훈련과정을 보기라도 한 듯이 내 전력을 정확하게 분석해냈다.
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리안느는 무력에 한해서는 이미 완성형에 가까워, 왕국의 노련한 전사들도 가르치는 입장이다.
아카데미가 그녀에게 가르칠 수 있는 건 제왕학과 행정, 천문과 점성술 같은 지식들에 정도라는 원작의 묘사만 떠올려도 그 위치를 알기 쉽다.
“뭐, 대단한 아티팩트라도 숨겨놨어? 아니면 정말 소문대로 악마랑 계약한 거냐?”
“악마랑 계약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까?”
“아니.. 그, 무슨 소리야 누나?”
그제야 다시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전 회차에서는 스승님 거리면서 존댓말 썼던 탓에 익숙해지질 않는다.
“네가 겁도 없이 렉스턴의 기사하고 붙는다고 알려지니깐, 네가 악마랑 계약해서 렉스턴을 담그려고 계획적으로 짠 판이라고 소문이 자자하거든?”
아니 씨발 이게 무슨 소리야?
“악마랑 계약하면 미쳤다고 공개 결투를 하겠어? 차라리 몰래 처리하는 게 조용하고 간편하지.”
“그래서 내가 너 한번 보러 온 거잖아. 진짜 미쳐서 악마랑 계약한 건지 아니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또라이인지.
또라이랑 미친놈은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혹시 뭐 마왕의 보물 중 하나라도 손에 넣었냐?”
“그걸 공개적으로 휘두르면 당장 선생님들이 날 죽일 것 같은데요?”
“요?”
“아니..같은데? 누나?”
마왕의 보물은 마왕이 봉인되기 전에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아티팩트들이다.
각 보물들을 사용한다면 아무리 위대한 영웅도 타락시키거나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원작에서 군단장이나 간부놈들이 하나씩 들고 나온 탓에 이 세계에서도 대부분의 마왕의 보물은 이미 마왕군이 회수하여 보유하고 있다.
덕분에 사실상 보스전은 모르면 죽어야지에 가깝다.
주인공도 매 전투마다 동료를 희생시켜가며 처리해야 했으니깐.
“그런 보물이 저한테 왜 있겠어요? 애초에 그런 위험한 물건을 하나라도 가지고 있으면 북부교단에서 이단자로 잡혀갈게 뻔 한데 있어도 사용 못하죠.”
“아니,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이길 생각인데?”
“누나도 저 이길 것 같다고 말했잖아요?”
“감하고 계획을 듣는 건 다르잖아! 궁금하다고!”
마리안느는 답답한 얼굴로 내 양어깨를 쥐고는 앞뒤로 흔들며 답을 재촉했다.
그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아카데미의 결투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안전한 결투랑은 다르다.
일단 기본적으로 아티팩트를 포함한 모든 기술과 장비 허용, 당연히 진검 같은 무기도 허용이다. 항복하거나 전투불능이 아니면 멈추지도 못하며, 장외나 항복한 상대를 공격하는 것 말고는 반칙패조차 없다. 급소공격? 강령술? 독? 사전에 금지하지 않으면 전부 허용이다.
설명만 들어서는 무슨 뒷골목 지하 결투장에서나 볼법한 규칙이지만, 이게 일반적인 공식 규칙이다. 아카데미 설립 이념인 마왕군을 물리칠 인재를 만들기 위한 실전 중시 대련이라나?
솔직히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결투를 할 이유는 없다. 특히 이정도로 실력차이가 난다면 말이다. 그걸 알기에 마리안느도 이리 궁금해 하겠지만.
삐익─삐익─
대기실에 달려있던 마석으로 만든 준비등이 울리기 시작했다. 곧 결투가 시작된다는 알림이다.
“어라? 말해주려 했는데 시간이 다 됐네! 어쩔 수 없네요, 누나.”
“됐어, 치사해서 안 물어보고 만다.”
내 능청에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마리안느는 자리에서 툴툴거리며 일어났다.
“...진짜 안 알려 줄거야?”
“누나, 추해요.”
마지막 문이 닫히기 전까지 질척거리는 마리안느를 내보낸 뒤 가방에서 준비해 온 물건들을 꺼냈다.
무기는 없이 글러브에, 딱히 갑옷을 챙기지도 않아서 몸은 엄청 가벼웠지만.
“이러니깐 결투가 아니라 가볍게 대련하러 가는 거 같기도 하고.”
다 차려 입고 자세를 취해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더니 날 데려온 선도부 선배가 안으로 들어왔다.
“준비 끝나셨나요? 이제 올라오실 차례에요!”
“아, 알겠습니다.”
“복장은 그게 전부에요? 괜찮으시겠어요?”
내 가벼운 차림에 복도를 따라 걷던 선도부 선배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걱정마세요. 이길 생각 밖에 없으니깐.”
피식 웃으면서 그리 답한 나는 문을 열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
“나는 정말 바보인가 봐...”
경기장의, 그것도 무대에 아주 가까운 특등석에 앉아있던 바이올렛은 머리를 움켜쥐며 자신을 책망했다.
“이 시간에 차라리 과제를 하고 예습하는 게 성적에는 훨씬 좋을 텐데, 뭐가 좋다고 아침부터 줄까지 서가면서 구경하러 온 거야!”
바이올렛은 그리 자책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경기를 지켜보는 게 자신에게 더욱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 며칠 결국 아르틴의 걱정과 데자뷰의 두통에 시달린 바이올렛은 스스로 문제가 있음을 시인했다. 병동에서 진찰을 받아도 그저 단순한 두통으로 치부할 뿐이고, 혹시나 저주에 걸렸나 스스로 테스트를 해보았지만, 저주의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아르틴을 다시 한번 만난다면 이 모를 기시감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훈련을 하고 있다는 개인 훈련실에 찾아가려고도 했었지만, 훈련실에 다가갈 때마다 느껴지는 정체 모를 꺼림칙함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도대체 그 정체모를 감각은 뭐였을까? 결계 같은 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좀 더 원초적인..”
살기에 가까운 감각,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던 바이올렛의 옆자리에 누군가 다가와 앉았다.
“어머, 결국 경기를 보러왔네요. 바이올렛 언니?”
분명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 그 목소리에서 느껴진 것은 이전의 아르틴에게 느꼈던 기시감이기도 하며, 동시에 자신을 내쫓던 살기에 가까운 꺼림칙함이기도 했다.
바이올렛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늘 묶고 다니던 만두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흰색과 검은색이 반짝이며 섞여 있는 여인이 있었다.
“...어라, 분명 B반에 이름이..”
“저는 아직 기억하지 못하셨어요? 조금 서운해라. 샤오메이잖아요.”
그제서야 바이올렛은 여인이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린 샤오메이. 무신의 후계자이자 조르바 펠카스의 호위. 그리고 아르틴과 요 근래 같이 다니던 아이였다.
머리 좋고 관찰력이 깊은 바이올렛이 섣불리 바로 떠올리지 못한 것은, 평상시에 아르틴이나 펠카스와 같이 다니던 샤오메이 만을 보던 바이올렛에게, 지금의 샤오메이는 너무도 낯설었다. 곰 같은 인상이라기 보단, 여우와 비슷했으니깐.
거기에 분명 직접 만난 것은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렛을 익숙하다는 듯이 대하던 샤오메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설명했지만, 오히려 그 눈웃음에서 바이올렛은 싸늘함을 느끼고 있었다.
“기억하다니, 우리 개인적으로는 처음 만나는 거 아니야?”
혹시나 전에 만난 적이 있나 생각을 되짚는 바이올렛의 태도에 샤오메이는 되려 만족스러운 얼굴로 경기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처음이죠, 그런데 처음이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면 알까요?”
처음인데 처음이 아니라니, 바이올렛으로썬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 우리가 편지라도 주고받았나? 왜 자꾸 그렇게 친한 척 구는 거야? 별로 반가워 보이지도 않은데.”
“반갑지 않다니요? 제가 얼마나 바이올렛 언니가 반가운지 모르셔서 하는 말이에요. 도련님이나 아르틴 오라버니 다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인걸요?”
“네가? 나를? 그렇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으면서?”
시비라도 걸러 온 것 인가, 하고 슬슬 바이올렛이 짜증을 담아 묻기 시작하자, 샤오메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쩔 수 없잖아요? 바이올렛 언니가 자꾸 아르틴 오라버니에게 접근하려고 하니깐, 자기 남자를 노리는 하이에나에게는 어떻게 하더라도 억누르기가 힘들더라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고 듣던 바이올렛은, 스스로 아르틴을 자기 남자라고 칭하는 샤오메이에게 문뜩 짜증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불쾌감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나는 모르겠는데, 너만 아는 이야기만 하지 말고 제대로 설명이나 해주던가.”
“음.. 뭐, 좋아요. 저도 용건이 있어서 찾아 온 거니깐.”
샤오메이가 그리 말하며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문뜩 바이올렛은 자신이 이 여자에게서 느끼던 위화감이 뭐였는지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무에게도 양보하지 않아요, 그 뇌근공주나, 도도한 척하는 푼수년이나, 바이올렛 언니한테도.”
이 여자는 ‘어긋나‘있다. 육체는 이제 막 사춘기가 끝난 어린 아이지만, 그 속은 수많은 경험과 기억으로 뒤엉킨 탓에 마치 노련한 마녀가 어린 아이로 변신했다고 해도 믿어 의심치 않으리라.
“너, 정체가 뭐야.”
그 말에 샤오메이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순간, 주변의 학생들이 큰 소리로 환호성을 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아르틴 루드비히와 렉스턴 와이즈의 결투가 시작됩니다.]
차분한 안내 목소리와 동시에 이번 결투의 당사자들이 경기장으로 올라왔다. 바이올렛 또한 아르틴의 등장에 자신의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린 바이올렛이 아르틴에게서 옆자리로 시선을 옮겼을 때는, 방금전까지 옆에 있던 샤오메이는 사라진 후였다.
***
“이런 개 미친새끼.”
경기장 위로 올라온 나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시온의 모습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가슴에 달린 팬던트가 문제였다.
“선넘네, 이새끼가.”
렉스턴이 드디어 미쳐버린 것이 틀림없다.
관중석까지 느껴질만한 섬뜩한 살기를 뿜는 시온의 웃음을 보며, 그리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렉스턴이 준비한 저 팬던트 때문에, 어느 한쪽은 피를 보게 생겼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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