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결투 #02
* * *
아크투라크스의 눈동자.
이름도 거창한 저 팬던트는 보랏빛 보석에 새겨진 흑마법의 술식에 따라서 착용자에게 다양한 저주를 건다.
그래 맞다. 저주를 건다. 버프가 아니라.
존나 쓸 곳 없어 보이지만, 강령술이나 흑마법에 있어서는 천재인 렉스턴 와이즈가 발명한 저 물건은 원작에서도 등장하는 중요한 물건이다.
주인공의 히로인 중 하나를 강령술의 제물로 눈독 들인 렉스턴이 저 팬던트를 이용해서 세뇌로 아군 배신+전투력 약화로 리타이어라는 고구마 전개를 제대로 박았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의 회귀에서도 잊을 만 하면 등장했다. 저 새끼가 먼저 죽지 않는 세계에서는 저 좆같은 물건을 양산해서 악역들한테 뿌리고 다녔거든. 덕분에 나는 300종류나 되는 팬던트를 분해해서 해석한 경험이 있다.
“방금 전까지는 자신만만하더니, 갑자기 안색이 안 좋네? 마주 보니까 네가 감히 누구에게 덤볐는지 알겠어?”
당장 시온만 봐도, 저렇게 악의 조직 여간부 같은 대사를 하지만, 눈은 최면 어플이라도 겪은 건지 눈빛이 탁하고 오로지 원초적인 감정만이 엿보인다.
‘8획의 녹색 선과 오망성, 광증과 살의의 저주잖아.’
물론 이제 겨우 아카데미의 시작인 시점에, 렉스턴이 대단한 저주를 새겨 넣을 수 있을 리는 없다. 놈은 시간에 따라 성장하는 악당 타입에 가깝기 때문.
두 자릿수도 안 되는 저주라면, 정신력이 강하거나 조금만 방어체계를 갖춘 인물이라면 가벼운 컨디션 난조만을 일으킬 것 이다.
그런데 지금 시온의 눈깔을 보면 아마 내가 항복해도 죽이려고 들 것이다.
대가리가 맛간 년이라서 가벼운 저주도 강하게 영향을 받는 걸 테지.
“겁먹기는, 그래도 늦었어. 감히 렉스턴 도련님에게 무례를 끼친 것을 죽음으로 사죄하게 해줄 테니말야.”
“대사 한번 존나 살벌하네, 눈깔 뒤집혀서 내 말도 안 들을 거면서.”
저 봐, 내가 방금 비꼬았는데도 좋다고 깔깔거리며 웃는 것 좀 봐.
‘그래도, 하나 마음의 짐은 덜었다.’
렉스턴 이 새끼를 어디까지 조질지 고민이 많았는데, 이렇게 대놓고 나를 죽이려고 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이번에는 오줌까지 질질 싸게 만들어 줄 테니 기대해라.”
경기장 아래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렉스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시온이 그건 또 들었는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아직도 도련님에게 그런 불경한 말을 해? 지금 당장 목을 뽑아...”
“아이고, 오,오,오래 기다렸겠군요. 두 사람 다 뒤, 뒤로 물러나 주세요.”
익숙한 말 더듬는 소리와 발걸음에 내 목을 뽑아버리려던 시온이 이를 까득 물곤 뒤로 물러났다.
이번 결투의 입회자이자, 아카데미 측에서 심판으로 뽑은 인물은 우르단 헬릭 교수님이었다.
“두, 두 사람 다 준비는 끝났습니까?”
시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관중석에 있는 수많은 사람이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중에는 눈에 띄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위에서 로마의 귀족처럼 내려다보는 학생회와 관중석 사이에 보이는 중요한 인물들, 혹은 독니를 숨긴 뱀 같은 악역 놈들.
그리고 관중석의 중앙, 나와 눈이 마주친 주인공 카이엔 실버소드.
‘이번 회차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내게 고구마 먹인 놈들, 고구마가 될 놈들 하나하나 찾아가서 내가 먹은 만큼 겪게 만들기 위해.
내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이 지긋지긋한 결투를 시작한 거니까.
“그, 그럼, 각자 위치로.”
나와 시온은 등을 돌려 각자의 자리에 서서 자세를 취했다.
“저, 저는 한쪽이 기절하거나 하, 항복하기 전에는 개입하지 못합니다. 명, 명심해주세요.”
나를 보며 걱정하는 눈초리로 말하는 교수님의 답답한 말투도.
승리를 확신하는 시온의 저 태도도.
앞으로는 그 누구도, 함부로 저런 태도를 취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럼, 시, 시작!!”
***
결투의 시작과 동시에 먼저 움직인 쪽은 아르틴 이었다.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시온과 거리를 벌린 아르틴은 직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엉거주춤 물러나는 것이 아닌, 숙련된 보법을 알아본 일부 학생은 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 신입생, 생각보다 자세는 괜찮은데?”
“야, 너는 신입생이 눈이 들어 오냐? 와이즈 가문의 대리인 좀 봐라. 저게 제국의 기사 클라스지.”
그와 대조되게, 시온은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디며 레이피어를 뽑아 든다.
놀라운 것은, 하이힐이 가볍게 바닥에 또각 소리를 울릴 때 마다 아득한 수준의 마나가 경기장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다.
“흐음, 현역에서 물러난 것 치고는 아직 봐줄 만한 수준인 것 같은데?”
“글쎄요? 저렇게 감정을 조절 못 하고 사방으로 마나를 터트리는 건 실력은 몰라도 정신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입니다.”
아카데미의 교수들 사이에서도 실력의 고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새어 나오는 마나의 양만 가늠하더라도 그녀가 우수한 강자라는 것은 모두가 보기에 명백했다.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이 순간 시온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그건 무대 아래에 있던 렉스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아르틴 녀석도 손봐주고 시온도 쫓아낼 최고의 전개!’
렉스턴의 목표는 단순히 시온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학적인 성격의 시온은 분명 아르틴을 거리낌 없이 잔인하게 가지고 놀 것이다.
정신을 몰아세우며 육체에 고문과도 같은 고통을 주고 나면, 아마 아르틴은 결국 버티지 못할 테고.
거기서 자신이 준비한 아크투라크스의 눈동자를 사용한다.
시온의 광증과 공격성을 증폭시키는 저 팬던트는 시온이 공격을 멈추지 않게 만들 것이고, 결국 헬릭 교수에 의해 제지를 당하며 시온의 반칙패로 경기는 끝날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완벽한 계획이야.”
변수는 심판의 역할을 누가 하는지 였지만, 헬릭 교수라면 시온이 미친개처럼 날뛴다고 할지라도 아르틴이 죽기 전에 제압할 수 있으리라.
“그럼, 우선 양팔에 구멍을 만들어주마!”
선공은 시온이었다.
시온의 하이힐 굽에서 마력이 터져 나오며 단번에 수십 보에 달하는 거리를 좁힌 직후, 레이피어가 날카로운 궤도를 그리며 아르틴을 향해 쏘아졌다.
챙─! 채애앵!
레이피어의 날 끝이 아슬아슬하게 아르틴을 빗나가 바닥을 긁는다.
첫 일격에 끝날 거란 예상한 수많은 도박꾼들을 배신한 아르틴은 1mm의 차이로 공격을 흐리며 수인을 맺었다.
‘예상한 대로, 미친 듯이 공격적으로 나오는데.’
시온은 단순히 마나를 통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법을 구현하지 못하게 마나로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만일 아르틴이 1써클 마법사에 불과했다면 이 순간 결투는 이미 끝났다고 봐야했다.
“가속! 여우불 휘감기!”
그렇기에, 마나에 재능에 깊던 수재들의 예상조차 박살내고, 아르틴은 두 개의 보조 마법을 발동했다.
아르틴의 몸이 이전보다 눈에 띄게 빨라졌으며, 마력의 불꽃을 휘감은 양팔은 날붙이를 쳐낼 위력을 지니기 시작했다.
“뭐? 이제 1써클의 마법사가 각기 다른 학파의 보조 마법을 이중으로 영창 했다고?!”
“말도 안 돼! 자기 단계보다 상위 단계인 마법을 이중 영창 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멍청하긴, 3써클 마법이라면 최대 9개까지 가능하다고’
관중들의 외침에 속으로 비웃으며 아르틴은 시온의 연공을 정면에서 흘려내고 있었다.
단순한 공격속도는 아무리 가속을 더해도 시온이 2배 가까이 빠르지만, 궤도를 선점하고 흘리는 아르틴의 유술에 시온은 침음을 흘렸다.
“뭐냐! 날다람쥐처럼 피하기만 해서 날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아르틴은 그저 피할 생각만 있는 게 아니었다.
포션으로 인해 마나재생력이 증가해있다고는 하지만, 장기전으로 끌고 가기엔 시온과의 신체적인 스펙의 차이는 절망적일 정도로 명확했다.
터어엉!! 챙─! 카앙─!
마나가 연쇄적으로 터지고 쇠가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방금 봤어?”
“나는 못 봤어...”
일순간, 아르틴과 시온은 수십 합의 공격을 주고받았다.
가장 먼저 자세가 무너진 것은 속도의 공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리를 휘청거린 아르틴이었다.
대인전에 있어서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시온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추격했다.
“...저 미친 자식이, 보여주겠다더니 제대로 보여주잖아!!”
시온의 추격과 동시에 무너진 자세에서 역으로 내장기관에 반달 차기를 정확하게 꽂아 넣는 순간, 학생회와 결투를 관람하던 마리안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르틴은 무너진 신체 밸런스를 힘으로 균형을 다잡았다.
저 빈약한 육체로 그런 무모한 행위가 가능한 이유는, 마나를 고체화시키며 근육과 동조시키는 것으로, 마나로 이루어진 근육을 만들어 신체 능력을 대폭 강화했기 때문이다.
“마나로 근육을 생성하는 건, 왕가의 전사단이나 가능한 기예인데!”
게다가 반달차기로 인해 비틀거리는 시온의 상반신에 추가타로 내지른 주먹은 마치 유성처럼 빛나는 직선의 궤도를 그리며, 시온을 수십 미터 밖으로 나뒹굴어지게 만들었다.
“린 샤오팽의 유성권...! 그것도 부족한 위력은 마나 방출이 만드는 폭발력으로 보조하고 있어!”
지금 아르틴이 보여주는 전투술은 세 나라에 전해지는 마나 활용법을 모두 사용하는, 정진정명 완벽에 가까운 체술이다.
마리안느는 5년, 아니, 3년만 지나도 본인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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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흑.. 쿨럭!”
시온은 자신의 배를 부여잡고 거칠게 기침하면서도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나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다.
그 짧은 공방사이에 마나의 정수로 끌어올린 마나마저 전부 사용해버린 탓에 눈앞이 어지럽다.
‘오우거의 피를 글러브 안쪽에 채워두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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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아카데미의 붉은 광인
당신의 피가 흐르는 주먹은 아카데미에서 멀리 퍼져 있습니다.
몸에 묻은 피의 질과 양에 따라 전투력이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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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기조차 들지 않고 글러브만 착용하고 나온 건 이 칭호의 효과를 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미리 글러브 안쪽에 조르바를 통해 공수한 붉은 액체, 검은 숲에 서식하는 검은 오우거들의 피가 담긴 앰플을 연결해놨다.
중간에 내 마력으로 앰플을 터트린 덕에, 중간부터 내 주먹은 시온조차도 무시하기 힘든 묵직함을 겸비한 상태.
덕분에 유성권이 제대로 먹혀들어 갔지만, 한번 전부 쏟아낸 마나는 포션의 힘으로도 제대로 채워지지 않는다.
“케흑, 이 망할 애새끼가. 용서 못 해..!”
조금 회복한 것인지, 아니면 아픔을 광기와 아드레날린으로 억누르는 건지.
시온이 떨어트렸던 레이피어를 들어 올리며 다시 한번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진짜, 더럽게 독하네. 데스 나이트일 때 보다 더 끈질겨.”
물론 당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나는 허리춤에 있던 다른 병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뚜껑을 열고는 머리 위에다 들이부어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무슨 헛짓거리를 준비한 건진 몰라도, 그냥 얌전히 죽어!!!”
충혈된 양 눈을 부릅뜬 시온의 형태가 순간 흐릿해지며, 푸른 마나의 빛이 경기장 가득 점멸했다.
빛으로 인해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나는 내 왼쪽 가슴을 깊이 찌른 레이피어를 볼 수 있었다.
“이 망할 애새끼..! 너 때문에 감히 도련님 앞에서 추태를 보이게 하고...! 그냥 절명해버려라!!”
시온은 방금의 일격에 마나를 어지간히도 쓴 건지, 가슴의 통증에 눈을 찡그리면서도 광소를 짓는다.
하지만 나는 내 죽음을 확신하며 소리치는 시온이 조금 안타까웠다.
만약 그녀가 저 팬던트가 없었다면, 그래서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을 했더라면 이 결투는 좀 더 힘들었을 것 이다. 아마 내 주먹의 비정상적인 위력조차 깨닫지 못한 걸 테지.
“끝내자, 시온아.”
파직, 하고 레이피어가 자루만을 남기고 박살이 나자 시온의 얼굴이 급격히 당혹감에 물들었다.
그야, 내가 온몸에 끼얹은 것은 공화 연방에 서식하는 불가사리의 피.
쇠를 먹고 자라는 녀석들은 어지간한 금속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외피를 지닌다.
하물며 이런 적당한 레이피어로는 아무리 제국의 기사라도 공략법을 모르면 무리지.
게다가 불가사리들은 코끼리보다 강한 힘으로 암석 지대를 헤엄친다.
당연히, 지금 내가 움켜쥔 주먹은 오우거의 피랑은 비교가 우습게 강하다.
”내가 빌빌 기어 다니게 해준다고 했던가? 좆같은 갈보년아.“
퍼억──
내 주먹이 시온의 배를 전력으로 후려치자, 시온의 몸을 감싸던 마나가 깨져나가는 감각과 동시에 시온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
그 순간, 제1 대련장은 적막에 감싸였다.
심판으로써 승리를 선언해 줘야 할 헬릭 교수마저, 넋을 잃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승리 선언 안 해줘요? 기절한 사람 때리면 반칙이잖아요.”
나는 무대 위에서 경악한 표정을 짓는 렉스턴을 바라보며, 이다음을 상상하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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