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아수라장
* * *
망각에서 깨어났을 때 바이올렛이 처음으로 떠올린 기억은 매우 고통스러운 시절의 기억이었다.
바이올렛 본인이 분수에 넘치는 커다란 힘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마왕군의 간부 중 하나가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장벽을 넘어 커다란 전쟁이 일어났다.
끝없이 몰려드는 시체의 군단과 그 군단을 이끄는 아크리치의 강력한 사술에, 왕국과 제국의 주력군까지 소모가 심해지자 아카데미의 학생들 중 골드 클래스의 학생들은 강제로 전장에 투입되어야 했다.
문제는, 지옥의 군주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한 최초의 마녀라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이올렛에게 크나큰 기대를 짊어지게 만들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물량 공세와 멈추지 않는 행진이 장점일 뿐인 언데드 군단을 상대로는 마법사의 마법은 결국 한계를 맞이한다.
시대의 기둥이라 불리는 대마법사도, 단신으로 괴수들을 토벌한다는 왕국의 전사단이라고 할지라도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한다면 그 육체와 정신이 마모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녀는 다르다.
마법사와는 다르게 계약이라는 권능을 다룰 수 있는 마녀들은 정해진 한도 내에서라면 마녀 본인이 지치는 일 없이 계약자의 힘을 쏟아낼 수 있다.
하물며 평범한 마녀가 다루는 임프 같은 악마가 아니라 지옥의 군주라면?
이 전쟁을 끝내는 게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저 장벽 너머의 존재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라고 많은 이들이 기대했다.
‘황태자’ 리처드나 ‘거인살해자’ 마리안느조차도 자신에게 기대한다고 말했을 때, 바이올렛은 첫 전장에 배치된 날 밤. 불도 켜지지 않은 어두운 천막 안에서 홀로 중압감을 곱씹으며 울고 있었다.
가장 친한 동기들인 조르바와 샤오메이는 조국인 군도의 땅을 수호할 것을 명받은 탓에 곁에 있지 않았다.
카이엔 소드실버는 늘 무뚝뚝한 얼굴로 저 아르틴의 말만을 귀 기울여 듣는다. 애초에 자신과 친밀감을 공유하고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인물이다.
얕은 인맥에서 유일하게 남은 아르틴 루드비히는 주변에 사람이 끊이질 않는다.
일찍이 카이엔과 같이 다니며 숱한 위험을 사전에 해결한 공으로, 용사라는 칭호를 얻은 카이엔 만큼이나 명성을 얻어 지금은 용사의 현자라고 불리고 있다.
오늘도 아르틴이 작전지휘부에 불려간 이후 몇 번이고 얼굴이라도 보려고 기웃거렸지만, 자신을 알아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나와야만 했다.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말할까?
사실 지옥의 군주와 계약한 것도 운 좋게 마왕의 간부 중 하나가 가지고 있던 아티팩트를 사용한 덕이고, 그조차도 아르틴의 도움 덕에 계약만 했을 뿐 힘을 제어할 자신이 없다고?
보통 마녀가 계약자의 힘을 다루지 못하면 반푼이 소리를 듣지만, 지옥의 군주쯤 된다면 그 힘을 제어하기 힘들다고 말해도 이해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그 후에 자신에게 올 시선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평생을 받아온 기대감이라는 시선이 실망감으로 바뀔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순간 다시 한번 몰려오는 토기에 옆에 놓은 항아리에 헛구역질을 연신 해댔다.
“내가 왜 이런 곳에서 싸워야만 해..? 나는 그저 할머니에게 칭찬받고 싶었을 뿐인데...”
애초에 위대한 대마녀의 핏줄은 바이올렛 대에서 개화했다고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이올렛의 성격은 평범한 소녀에 한없이 가까웠다.
그런 그녀에게 마왕군과의 전쟁이라는 건 너무도 무섭고 무거웠다. 그녀는 전쟁에 어울리지 못한 사람이었다.
“싫어...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면 안돼... 그건 멍청한 생각이야... 도망치면 안돼...”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바이올렛은 이 어두운 천막 안에서 스스로를 죽이고 있었다.
감정을 죽이고, 두려움을 죽이고, 슬픔을 죽이고,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전쟁이라는 행위에 자신을 맞추고 있었다.
만약 이 날 아침 해가 뜰 때 까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면, 바이올렛은 자신의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 이다.
그날, 바이올렛이 인격적 자살을 시도하던 날.
그녀가 홀로 있던 천막 안으로 그녀의 구원이 다가왔다.
“또 혼자 숨어서 울고 있구나, 바이올렛.”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바이올렛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지만, 눈물이 번져 시야가 뿌옇게 변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따스하고 익숙했다.
늘 자신을 응원하고 이해해주던 목소리인 만큼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르틴... 나는...”
바이올렛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갑게 식어가던 가슴에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아르틴은 구석에 웅크린 바이올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울지마 바보야, 넌 웃을 때 제일 예쁘다고 몇 번을 말해.”
어릴 때 숨어서 혼자 울고 있으면, 엄마는 늘 자신이 숨어있는 곳을 찾아 어린 자신을 꼭 끌어안아 줬다.
엄마가 죽고 난 후, 내가 혼자 숨어서 울 때 나를 찾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르틴이 내 삶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일어나, 궁상맞게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축 쳐져버리잖아.”
늘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주며, 환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봐준다.
그 미소를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눈앞의 남자에게 기대버리고 만다.
“가자 바이올렛. 내가 도와줄게.”
바이올렛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틴을 따라 환하게 웃었다.
***
“.....”
아르틴과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샤오메이의 젖을 물고 있는 아르틴의 모습에, 바이올렛 시선은 경악감에 물들고 있었다.
자신의 오른쪽 볼을 잔뜩 더럽힌 액체를 만지자, 밤꽃냄새를 풍기는 끈적거리는 액체가 손에 묻어나왔다.
이것은 악몽이 분명했다.
자신의 가장 친한 동생과 좋아하는 남성이 알몸으로 뒹굴고 있는 모습이라니?
바이올렛은 아직도 샤오메이의 손에 쥐어져 있는 저것이 아르틴의 남성기라는 사실을 믿을 수도 없었다.
“...어머, 우리 사이가 들켜버렸네요 오라버니.”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린 바이올렛을 보며, 샤오메이는 부끄러움을 감추고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바이올렛이 오기 전에 씨를 직접 받아내려고 했지만, 이건 이거대로 성공적이다.
아르틴 오라버니와 야한 행위를 한 것은 내가 최초다. 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자신감에 가득 찬 샤오메이는 승리를 뽐내며 아르틴의 고개를 쓰다듬던 중,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오, 오라버니?”
아르틴의 눈은 명백하게 생기를 잃어 절망에 물들고 있었다.
샤오메이는 전생에 이러한 눈을 몇 번이고 봤었다.
사악한 흑마법사나 마왕군에 의해 정신을 붕괴당한 이들의 눈빛이 이와 비슷했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다급하게 아르틴의 입에서 가슴을 떼어내곤 고개를 흔들어 봐도, 아르틴의 초점 잃은 눈에 생기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절친과 모르는 아저씨에게 수유대딸착정플레이를 들킨다는 사회적인 살해를 당한 이후 아르틴이 겪을 패닉을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던 샤오메이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 이다.
“하...학생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 미친 광경을 보다 못한 사감 아저씨는 정신을 차리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 고함에 정신을 차린 바이올렛은 뇌를 번뜩였다.
여전히 상황을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사감 아저씨를 그대로 둔다면 아마 아르틴은 샤오메이와 함께 퇴학처리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마 책임을 핑계로 아르틴과 혼인을 강제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기, 기억삭제!”
“으아아아아악?!”
성큼성큼 방안으로 걸어 들어가던 사감 아저씨의 뒤통수를 마법으로 강타하자, 사감 아저씨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
“오라버니? 오라버니?? 정신차리세요 오라버니!”
“야 저기 무슨 일이야?”
“사감 아저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어라? 저 사람 퍼플크로우양 아니야?”
사감 아저씨는 자신의 마법으로 기절해있고, 방금 사감 아저씨의 고함을 들은 학생들이 무슨 일인지 고개를 기웃거리며 수근 거린다.
쾅!
바이올렛은 일단은 방안으로 들어가 문고리를 잠갔다.
우선 이 상황을 이끈 장본인인 샤오메이를 바라보며, 추궁하듯이 입을 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샤오메이?”
“무슨 짓 이냐니... 전 그냥 오라버니랑 달콤한 시간을...”
“거짓말! 순진한 아르틴을 꼬셔서 이런 야...야한 짓을 하다니!”
“정말이에요! 오라버니도 즐겼다고요!”
“거짓말 마! 아르틴은 아그네스하고 사귈 때도 이런 망측한 건 안했어!”
그 말에 샤오메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대로 말싸움에서 질 수는 없었다. 이미 아르틴 오라버니의 첫 사정은 자신이 쟁취했으니 두 사람의 관계는 확고하다고 샤오메이는 굳게 믿고 있었다.
***
뭔가 악몽을 꾼 것 같다.
샤오메이에게 강제로 붙잡혀서 모유수유대딸 플레이를 당한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악몽이다.
‘휴, 현실이었으면 자살했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변이 시끄러웠다.
뭐지? 옆방에서 친구 불러서 놀기라도 하나?
“물론 시작은 제가 했지만, 오라버니도 좋아했어요! 그러니깐 사정한 게 아니겠어요?”
“애가 정말 웃기는 소리를 다하네, 그럼 강간은 순애라고 주장할 셈이야?”
이상하다.
눈을 떠보니 샤오메이와 바이올렛이 내 방에서 말싸움을 하고 있다.
뭔가 몸이 으슬으슬 추워서 내려다보니 나는 알몸이었고, 바닥에는 사감 아저씨가 뒤통수를 보인채 쓰러져있다.
‘이상하다. 마치 방금 있던 일이 현실 같잖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통속의 뇌가 아니라면?
내가 실제로 모유수유대딸 플레이를 강제로 당했다면? 실제로 인생을 조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0.2초의 찰나, 최악의 상태까지 가정해 지금 상황을 파악한 나는 곧 바로 행동에 임했다.
우선 침대 옆에 떨어져 있던 샤오메이가 벗긴 것으로 추정되는 내 옷을 주워 입었다.
“강간이라니요! 저는 그냥 움직일 기력이 없는 오라버니를 위해 대신 성욕을 풀어드린 것 뿐이라고요!”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을 강제로 성추행 한 거잖아! 정말 믿을 수가...아르틴?”
“어라, 오라버니?”
내가 옷을 전부 챙겨 입을 때 즈음, 바이올렛과 샤오메이는 내가 깨어난 것을 알아차렸는지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나, 나는 이미 어떻게 할지 마음을 굳게 먹은 상황.
“씨발 이번 회차는 망했어!! 원찬스 다이빙!!!”
이 일련의 과정동안 조금이나마 회복한 마력을 폭발적으로 일으켜, 나는 내 방의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쨍그랑!!!
“오라버니!!!”
“아르틴!!!”
창문이 깨지고, 두 사람이 나를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이번 생을 마감하고 다음 생을 찾아 떠날 것 이다.
이 미친 상황의 뒤처리에 대한 중압감을 전부 벗어던졌다는 해방감에, 나는 나지막이 미소를 지었다.
덥썩──
내 육체는 추락하여 이내 대지에 닿았다.
마치 누군가 내 몸을 감싸 안아 받은 것처럼 고통도 없이 따스한 죽음.
고문이나 칼맞아 죽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안락하다.
뭉클!
‘...?’
그런데 팔에 닿는 감각이 뭔가 이상하다. 흙이라기엔 너무 부드럽고 따뜻하다.
마치 사람의 체온같은데?
뭉클! 뭉클!
이 한손에 딱 들어오는 크기에 몇 번을 주물러도 질리지 않는 감촉... 뭔가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 추락했는데 효과음이 덥썩이 될 수 있나?
나는 뭔가 아주 단단히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천천히 눈을 떴다.
내 몸은 바닥에 널부러져있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의 품에 공주님 안기로 안겨 날 받아낸 사람의 가슴을 양껏 주무르고 있던 것이다.
“아..아르틴 루드비히? 지금 뭘 하는 건가요?”
고개를 들어보니, 아그네스 황녀님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좆같은 내 인생’
자살조차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