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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1화 (21/266)

〈 21화 〉 아수라장 #02

* * *

클레어 플라위버는 무척이나 기분이 들뜬 하루였다.

입학식 직후 내내 화제가 되었던, 아르틴 루드비히와 렉스턴 와이즈와의 대결을 운 좋게 앞자리에서 직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해, 브론즈 기숙사면서 제국의 기사였던 사람이랑 대등하게 싸우다니!”

자신과 같은 브론즈 기숙사의 학생에다가, 1써클 마법사인 아르틴 루드비히는 마찬가지로 최하급 정령사로 입학한 클레어가 감정을 이입하기 가장 좋은 대상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악당 귀족!

입학 첫날부터 같은 입학생인 아르틴을 괴롭히다가 된통 혼났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다.

물론, 귀족 출신 학생들은 백작가의 후계자를 두들겨 팬 아르틴을 고깝게 바라보지만, 클레어와 같은 평민 출신이나 하급 귀족 출신들은 자연스럽게 아르틴을 응원하는 기조가 생겼다.

“나도 언젠가 그렇게 강해질 수 있을까?”

보기에는 아르틴이라는 아이도 자신처럼 키도 작고 체구도 마른 편이었다.

어떻게 짧은 시간 내에 그렇게 강해진 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풍문이 생겨나고 있지만, 단순한 클레어에게는 그저 브론즈 학생의 멋진 사이다 썰에 불과했다.

“나도 그렇게 강해지면~ 날 괴롭히는 귀족 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텐데.”

클레어는 작은 한탄과 함께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자신은 입학 첫날에 실수로 발을 밞았다는 이유로, 같은 반의 몇몇 귀족출신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처지다.

다른 사람들은 불똥이 튈까봐, 혹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방관하고 있을 때, 그런 그녀를 도와준 사람은 오직 카이엔 뿐이었다.

“하지만 나도 언제까지 카이엔의 도움만 받을 수는 없어!”

클레어는 언젠가는 아르틴이라는 애처럼 강해지고 말겠다. 그리고 나도 못된 귀족들을 렉스턴 와이즈처럼 마구 때려 주겠다! 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기운차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던 클레어는 곧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자신의 맞은편, 브론즈 기숙사 주변에서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오는 수상한 세 사람이 있었다.

게다가 그 수상한 세 사람은 낙엽을 담는 포대자루에 무언가를 가득 담은채로 셋이서 들고 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도둑이 물건을 훔친 것처럼 보였다.

신성한 아카데미에 도둑이라니!

당장 소리를 질러 경비를 부르려던 클레어는 수상한 사람들이 자신과 가까워질수록 어딘가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라? 저건 아그네스 부학생회장님이잖아?”

수상한 사람들의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은 이 학교의 학생들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3학년의 아그네스 부학생회장님이었다.

“게다가 린 샤오메이에, 바이올렛 퍼플크로우까지?”

그 옆에는 자신과 같은 시기에 입학한 1학년의 천재라 불리는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제국의 2황녀에 무신의 딸, 대마녀의 손녀까지. 클레어 자신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드는 조합이었다.

‘나도 저 무리에 언젠가 끼고싶다!’

저 세 사람이라면 분명 고풍스럽게 티타임을 가지고, 대화도 무척 세련될 것이다.

‘가구의 재질이나, 정치 이야기나, 어... 무슨 디저트가 맛있을지?’

클레어는 세련됨에 대한 자신의 빈약한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저 무리에 끼는 상상을 하면서, 눈이 마주치면 인사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 세 사람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때, 세 사람이 사이좋게 들고 있던 포대자루에서 사람 머리가 튀어나왔다.

“사람 살려! 사람을 납치한다!”

“젠장, 또 깼네! 샤오메이 기절 시켜!”

“아, 알겠어요. 언니!”

놀랍게도 그 포대자루에서 살려달라고 부르짖던 사람은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아카데미 학생들의 주목을 받던, 방금 전 자신의 롤모델이 된 아르틴 루드비히였다.

그런 모습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당황한 바이올렛이 소리치자, 샤오메이는 능숙하게 아르틴이 담긴 모포자루를 향해 발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퍼엉──!!

밀가루 포대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내민 채 살려달라고 외치던 아르틴은 혀를 축 내밀고는 기절하고 말았다.

그런 아르틴의 머리를 포대자루에 우겨 넣는 모습을 보면서, 클레어는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나...납치 현장...?!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저 세사람이 강력 범죄를...?!’

도망쳐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클레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상황을 정리하고 주변을 살피던 아그네스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저기 목격자에요! 처리하세요! 바이올렛 양!”

“앗, 미안 해요! 구시온─!”

아그네스의 다급한 외침에, 바이올렛의 손끝에서 보라색 섬광이 번쩍였다.

일찍이 기숙사 사감 아저씨에게도 사용했던 기억삭제 마법, 『구시온』 이었다.

“껙!”

경비를 부르려다 피할 틈도 없이 주문에 직격당한 클레어는 그대로 바닥에 꼴사납게 널브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제서야 세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 몇 명 째죠?”

“벌써 12명 째에요, 이러다 들키겠어요! 아그네스 황녀님!”

“어쩔 수 없네요, 아르틴은 샤오메이가 혼자 들쳐 메고 따라오시겠어요? 이 주변에 학생회의 창고가 있어요.”

“네? 네...! 알겠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아그네스가 마나를 터트려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자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초고속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한 탓에 마법을 맞고 쓰러진 애꿎은 희생자들 뿐이었다.

***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흙냄새가 가득한 포대자루 안이 아니었다.

대신, 철제 의자에 팔과 다리가 노끈으로 묶여 있는 상태였다.

욱씬.

가슴이 엄청나게 아팠다. 들춰보지 않아도 가슴팍에 엄청 커다란 멍이 새파랗게 들었을 것 같다.

분명, 내가 창문밖으로 뛰어내려 원찬스 다이빙을 했던 건 기억나는데...

“내가, 얼마나 오래 기절해 있던 거지...?”

“정신이 들어, 아르틴?”

고개를 들어 올리자, 바이올렛이 나를 감시하고 있던 건지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었다.

“내가 왜 여기 묶여 있는 거야, 바이올렛?”

“...그야, 네가 갑자기 창문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하려고 했으니깐 그렇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맞다, 그 이후 창문에서 같이 뛰어내린 바이올렛과 샤오메이가 뭐라고 소리치자, 아그네스가 내 뒷목을 후려쳐 기절시켰다.

정신이 혼미해진 탓에 그 뒤로 살려달라고 막 외쳐댄 것도 살짝 기억이 난다.

뭐야.

나 그럼 지금 세 사람 한테 납치 당한 거야?

“너네도 샤오메이처럼 나한테 나쁜 짓을 할 생각이지...!”

조금 전 겪었던 그 수치스러운 플레이 때문에 치욕감에 사무친 내가 눈매를 치켜세우자 바이올렛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우린 그냥 아르틴 네가 이상한 짓을 할까 봐 묶어둔 거라고!”

이상한 짓이라니, 나는 수치심을 못 이긴 탓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뿐인데.

아, 아까 바이올렛하고 눈 마주친 게 다시 생각났어.

“그냥 차라리 죽여줘...”

내 첫 야한 짓이 그런 수치스러운 행위라니, 게다가 그걸 바이올렛에게 들켰다니 진짜로 죽고 싶어졌다.

“아, 아무리 민망한 일이라도! 죽는 다는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돼. 아르틴!

그런 나를 보고 상냥히 달래주는 바이올렛의 소리에 오히려 더 비참해지고 있을 무렵.

그 소리를 들었는지 아그네스와 샤오메이가 어두운 공간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라 형님! 일어나셨슴까!”

어느새 슴까체로 돌아온 샤오메이를 보자, 나는 내 안에 샘솟는 분노를 담아 샤오메이를 노려보았다.

무력한 상태의 사람을 겁탈하다니! 믿었는데! 믿고 있었는데!

“왜,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세요 오라버니....”

그런 내 시선을 마주한 샤오메이는 눈을 내리깔며 다시 오라버니 체로 돌아왔다.

애초에 형님체랑 오라버니체 중에 어느 쪽이 진짜 샤오메이의 말투인지 구분도 안 된다.

“아르틴이 화날 만 하지! 우리 중 누군가가 다른 사람한테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봐!”

“...저, 저는 오라버니라면 괜찮은데..”

“그건 네 입장이고! 연인 사이에서도 동의 없이 그러면 범죄라고 범죄!”

나를 나데나데 달래주던 바이올렛도 화가 난 건지 샤오메이를 혼내자, 샤오메이는 더욱 기가 죽어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던 건가요, 세 사람?”

맨 마지막에 등장한 탓에 혼자 상황을 파악 못 한 아그네스만이 나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다.

“...”

“...”

“....샤오메이가 아르틴에게 아주 못된 짓을 했어요.”

“못된 짓? 어느 못된 짓이길래 그 상냥한 아르틴 루드비히가 샤오메이를 노려보는 건가요?

“...”

그 말에 어떻게든 온건하게 상황을 설명하려던 바이올렛 조차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내가 피해자지만,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든 제 3자든 이 사건을 온건하게 설명하는 건 무리다.

마나 탈진과 전신의 과부하로 인한 근육통으로 쓰러져 있던 이성을 덮쳐서 강제로 야한 행위를 했습니다?

그 명예를 중시하고 올 곧은 아그네스라면 이 자리에서 샤오메이에게 결투를 신청할 것이다.

“...그런데, 바이올렛하고 아그네스도 기억이 남아 있는 거야?”

화가 난 탓에 샤오메이를 엉망진창 혼내주고 싶었지만, 이 자리에서 아그네스에게 죽는 모습은 보기 싫었던 나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아니, 애초에 이 부분도 중요사안이다.

샤오메이에 이어서 두 사람도 기억이 남아있다니? 전 회차까지만 해도 없던 일이다.

“어라..? 내가 기억이 남아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아르틴?”

내 질문에 바이올렛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샤오메이와 말다툼을 할 때, 내가 아그네스와 사귀었다고 기억하고 있었잖아?”

“그, 그때 기절한 거 아니었어?”

“...기절한 게 아니라 그냥 넋이 나간 것뿐이야.”

나와 아그네스가 사귄 건 4회차, 이번 회차 에서는 결투를 말리기 위해 학생회 대표로 찾아온 게 전부다.

전 회차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아그네스와 나만의 관계.

“그러니깐, 바이올렛이 기억이 남아있다고 확신했지.

“...맞아요, 저도 기억을 되찾았어요, 저는 어떻게 알았나요? 저는 별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추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그네스도 궁금한 듯 질문을 해왔다.

하지만, 이게 가장 쉬웠다.

“나보고 상냥하다고 말한 것도 있지만, 날 바라보는 네 눈빛이 저번하고 달랐거든.”

“...아르틴은 묘한 곳에서 예리한구석이 있다니까요.”

그제서야 아그네스는 거리감이 있게 풀네임으로 부르는 것을 관두고는 나를 아르틴이라고 불러줬다.

뭐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장 큰 힌트는 마찬가지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요조숙녀를 지향하는 아그네스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가슴을 주무른 남자를 얌전히 납치해 올 리가 없다.

애초에 황녀인 만큼 황족 모독죄로 즉결처분해도 아카데미에서 무죄라고 인정해주지 않을까?

“그래서 샤오메이가 한 나쁜 짓은 뭔가요 아르틴?”

“...”

주제를 잘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말을 이어나가기도 전에 아그네스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뒤를 힐끔 보니, 샤오메이가 양손으로 열심히 X자를 그리고 있다.

이 치욕스러운 강제모유수유대딸플레이를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도 죽고 싶은 일이지만, 만약 전생의 애인을 누군가 강제로 겁탈하려고 한 탓에 그 애인이 자살을 시도했다?

자신이 구하지 않았다면 전생의 애인은 다시 만나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명예가 문제가 아니라 귀족이든 평민이든 죽이려고 들 것이다.

“...그”

“그?”

“그게 그러니깐.”

“빨리 말해줘요, 아르틴.”

아그네스는 부담스러운 맑고 아름다운 붉은 눈으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자신감 있게 마주 봤던 그 눈동자에, 나는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내, 내가 자는데 몰래 입맞춤했어...”

그리고 나는 최대한 요조숙녀의 니즈에 맞춰 수위를 잔뜩 깎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머 세상에! 그런 망측한 짓을!”

아그네스는 경악하며 입을 가렸고, 바이올렛과 샤오메이는 그런 아그네스를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렇다.

내가 연애에 로망을 가진 만큼이나.

내 전 애인 되시는 이 황녀님은, 사실 남들 모르게 로맨스 소설에 푹 빠져있는 나사 빠진 아가씨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더 자세한 건 난 창피해서 못 말하겠어... 샤오메이에게 물어봐...”

내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떨구자, 로맨스에 뇌가 절여진 아그네스의 흥분에 찬 시선이 샤오메이를 향했다.

잘 가라, 샤오메이. 뒷마무리는 네가 수습해.

‘그런데 참 개판이네.’

셋 이나 기억을 되찾다니

샤오메이가 시달리는 동안 어떻게 수습할지 생각해봐야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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