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학생의 본분 #02
* * *
세니아 선생님과의 잠시 동안의 행복한 시간이 끝난 후.
늘 입고 다니는 펑퍼짐한 로브와는 다르게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다이어리를 꺼내 펼친 세니아 선생님은 기분이 정말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손톱을 연분홍빛으로 물들인 네일아트나, 저 화려한 다이어리를 보면 평상시에는 입는 투박한 로브는 역시 취향도 아닌데 폭력적인 몸매를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나.
“그럼, 언제부터가 좋겠니? 다음주? 강의 비운 시간은 있고?”
“아, 거기에 대해서 사실 미리 생각해 본 게 하나 있어요.”
“어머, 미리 생각한 것도 있어? 그렇게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었던 거야?”
세니아 선생님은 내 볼을 문지르며 기특하다는 듯 웃었지만, 사실 이 계획은 세니아 선생님이 개인 수업을 꺼내기 전부터 생각하던 계획이다.
나는 매 회차 마다 카이엔과 다른 친구들을 쉽게 모으고 외부로 나갈 수 있게 동아리를 만들어 움직였다.
아카데미의 학생은 섬 밖으로 향하는 외출에 대해 깐깐한 규정을 받고 있지만,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로운 방법이 학생회와 동아리였고, 그걸 이용해 온갖 기연을 미리 챙기고 다녔지.
물론, 이 방법은 원작에서 쓰이던 방법을 날로 먹은 거다.
“저 말고 제 친구들 중에도, 연금술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걔네도 같이 배우면 좋겠는데, 차라리 동아리를 만드는 건 어떨까 싶어서요.”
“친구? 샤오메이나 조르바 말하는거니?”
“걔네도 그렇고, 카이엔이나, 바이올렛도 연금술에 관심이 크더라고요!”
세니아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학구열이 높은 순수한 아르틴을 연기하고 있자니 세니아 선생님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선생님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바이올렛하고는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거 아니었니?”
그러고 보니 나는 친구 없이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이 컨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죽고 싶다고 부여잡고 징징댔을 때가 바이올렛에게 무시당해서 멘탈이 깨졌을 때라는 것도 떠올라버렸다.
침착하자, 말실수는 적당히 넘기면 된다.
“아하하, 샤오메이랑 바이올렛이 친해졌더라고요. 그래서 대화해보니 그 이후에 친해지게 됐어요.”
“그렇구나.. 잘됐다 아르틴! 정말 잘 됐어!”
적당히 나중에 말을 맞추기 쉬운 이유를 붙어가며 설명하자, 세니아 선생님은 뭔가 과할정도로 잘됐다며 기뻐하는 리액션을 보인다.
뭐지? 반응이 너무 과한데? 내가 그 정도로 사람 사귀기 힘들어 보였나?
“아무리 그래도 짝사랑 하는 여자애한테 미움 받는 건 엄청 힘들었을 텐데, 아르틴이 잘 친해졌다니 선생님은 정말 기뻐!”
“네? 짝사랑이요?”
이게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야?
“후후, 선생님은 다 알고 있어요. 너무 창피해 하지 않아도 돼. 그 나이 때에는 또래의 아이를 좋아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거든?”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무슨 소리냐고 되묻자, 선생님은 오히려 밝게 웃으며 나를 다독이기 시작한다.
마치, 말하지 않아도 어른은 다 알고 있어요라는 이 반응...
‘설마, 저번에 멘탈 깨졌던 걸 짝사랑으로 오해하고 계신건가?‘
“그래도, 선생님이 조언 하나 해주자면 그 나이 때 여자애들은 섬세하니깐, 아르틴이 잘 다가가 줘야 한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 맞는 듯하다. 연애상담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는 말까지 덧붙이는 선생님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 당장 바로잡을 필요는 없겠지.
‘아니,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네. 이걸 핑계로 이런 저런 부탁을 하는 것도 쉬울 거고.’
따단따단띠로리따단~
나는 나중에 바이올렛에게 귀뜸 정도는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조회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벌써 조회시간이 끝났네. 동아리 건은 선생님도 좋은 것 같으니깐 한번 진행해보도록 할게,”
나는 가는 길에 먹으라며 주는 사탕 하나를 받아 바로 입에 털어 넣으며 상담실을 나왔다.
‘아.. 그럼 이 이후에 어떻게 할까.’
나는 사탕을 쭉쭉 빨며 고민에 빠졌다. 카이엔을 만나러 가?
“실망이야 파트너.”
하지만 내가 선생님에게 붙잡혀 상담실로 끌려갈 때, 카이엔이 했던 말을 생각하면 지금 가서 말을 걸어도 긍정적인 반응이 올 것 같지는 않다.
“걔는 무슨 사내 녀석이 그렇게 쪼잔하게 굴고 난리냐 진짜...”
샤워를 했는데 여자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것도 그렇고, 여자랑 있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짜증내는 것도 그렇고.
이번 회차 들어서 반응이 미묘해진 녀석들이 많다 치면, 카이엔 그 녀석은 전부터도 그렇고 이상하게 내게 집착하는 성향이 강하다. 원작에서는 수많은 여자애들을 꼬셔놓고도 무덤덤했던 애가.
‘아니, 진짜로 나 좋아하나?’
그렇게 생각하자 소름이 확 끼친다. 상대방이 동성애자든 뭐든 상관없지만, 대상이 나라면, 그것도 4회차 째 집착하는 녀석이라면 진지하게 빌런급으로 취급해야 옳지 않을까?
‘안되겠다, 나중에 시약 하나 만들어서 테스트 좀 해봐야지.’
상대방이 나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품는지를 알게 해주는 시약의 레시피는 알고 있다. 재료가 구하기 힘들고 만드는 과정도 어렵지만, 기연 좀 챙기면서 찾다보면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만약 녀석이 정말 내게 인류애를 바라고 있다면, 그때는 혈마펀치의 아르틴으로 돌아갈 때겠지.
‘그럼 카이엔은 보류라고 치고, 빌런이랑 성장이 문제가 되는데...“
안 그래도 방금, 선생님에게 나오기 전에 수업에 대해서 한 소리를 듣긴 했다.
교수님들이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어 하는데, 내가 너무 수업을 빠지는 탓에 문제라나.
괜히 교수나 선생님들한테 밉보이기는 싫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새벽까지 힘쓴 탓에 잠이나 한숨 자고 싶은 생각도 있고. 빌런의 퇴치도 크게 신경이 쓰인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이 세계의 빌런들은 보통 화려하게 날뛰는 걸 선호한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아카데미가 쑥대밭이 되는 건 시간문제.
회귀 그렇게 때린 녀석이 알고 있는 빌런 전부 처리하면 쉬운 일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게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3000자 가량을 소비하여 진득히 설명할 수도 있지만, 두 번 설명하는 것이 귀찮으니 나중에 동아리가 생기면 그때 제대로 설명하도록 하자.
당장 알아야 할 사실은 렉스턴 같은 빌런 확정인 놈들 말고도 빌런은 끊이질 않고 등장하는 게 이 세계라는 점.
“일단 정보를 모아야겠네, 활동을 시작했다면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때니깐.”
“무슨 활동을 시작한다는 말이지?”
“우왓?!”
혼잣말로 앞으로의 계획을 준비하던 나는 갑자기 내 등 뒤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놀라 화들짝 몸을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 온 자리에는 그런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키득거리는 조르바 녀석이 서있었다.
“세니아 선생님하고 단 둘이 밀실에서 상담이라니, 내가 대신 상담 받고 싶었는데.”
“뒤에서 갑자기 놀래 키지 마 조르바..”
“놀래키다니? 나는 그냥 음침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너를 챙기러 온 거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녀석이지만, 분명 노리고 몰래 엿 듣다가 내 반응을 살피려 한건 분명하다. 이 백년 묵은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그래서, 세니아 선생님하고 뜨거운 시간은 어땠냐. 아르틴?”
“그냥 상담만 했어! 무슨 뜨거운 시간을 보내. 오해라고 계속 설명했더니 겨우 믿어 주시더라.”
물론 뜨거운 스킨쉽이 있기는 했지만, 그걸 조르바에게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로 오해야? 그런 것 치고는 카이엔은 엄청 화가 난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나를 의심하는 걸 감출 생각도 없는 건지, 살살 떠보면서 즐거워한다.
물론 세끼 밥보다 여자를 좋아하는 조르바인 만큼 예상 가능한 움직임.
“애초에 내가 여자를 두 명이나 꼬신다고? 조르바 너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음, 그 곱상한 얼굴을 이용하면 동시에 세 명까지는 가능할 것 같은데?”
“나는 조르바가 아니거든. 현실성 있게 생각해.”
그 말에 조르바는 조금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납득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조금 열이 받는다. 내가 뭐 어때서!
“뭐 좋아, 정말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거지?”
“정말이라니깐. 몇 번을 말해야 믿어줄 생각인데?”
나는 슬슬 억울해서 화가 난다는 듯이 조르바를 노려다 봤다.
물론 진짜로 화가 난건 아니고 고도의 연기력을 발휘한 완벽한 연기였다.
만약 현실로 돌아간다면 배우를 해도 되지 않을까? 이 세계에 와서 배운 것 중에 현실에서도 써먹을만한 건 연기랑 구라뿐인데.
“그래 그럼, 그 말을 믿어줄게.”
“...정말?”
“물론이지, 증거도 없는데 친구를 더 몰아붙여서 어쩌겠어? 이 형님은 그런 속좁은 사람이 아니라고.”
역시 내 혼신의 연기가 먹혀들었는지, 조르바는 조금 전까지 보이던 의혹이 가득 담긴 눈초리를 거뒀다.
“믿어 준다니 다행이네, 카이엔 그 녀석은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왜 그렇게 카이엔을 챙기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곧 있으면 수업인데. 나랑 같은 수업이나 들으면서 생각하는 건 어때?”
어라? 그 노는거 좋아하는 조르바가 땡땡이 치고 놀자는 게 아니라 같이 수업을 듣자고 말하고 있다고..?
“너 조르바 맞아? 조르바로 변장한 다른 사람 아니야?”
“이번에는 아르틴 네가 생사람 잡네. 나라고 모든 수업에 흥미가 없는건 아니거든?”
호오, 조르바가 흥미를 가지는 수업이라.
“괜시리 나도 흥미가 생기는데, 같이 듣지 뭐.”
“오, 정말이지? 나중가서 싫다고 말하기 없기다?”
뭐 좀 어려운 강의라도 되는 건가? 라고 생각한 나는 아무래도 좋다며 조르바를 따라 강의실로 향했다.
“원래는 붉은 별관에서 진행하는 강의인데, 오늘은 외부에서 진행하거든. 그리 멀진 않으니 걸어가면 충분할 거야.”
붉은 별관이라면... 보통 마법에 관해서 공부하는 강의들이 몰려있는 별관.
애가 원래 마법에 관심이 있던가? 하고 의아해 하던 도중, 나와 조르바는 맞은편에서 헐래벌떡 뛰어오는 샤오메이를 발견했다.
“앗!! 형님! 도련님! 저 늦은 거 아님까? 실수로 늦잠을 자버려서 그만 지각했슴다!”
샤오메이는 오늘도 특유의 노출 많은 차이나드레스를 입은 탓에, 전력질주로 인한 가슴의 흔들림이 영보기 좋아 가슴이 훈훈해졌다.
“아냐 아냐, 안 늦었어 샤오메이. 그나저나 별일인데? 네가 지각을 다 하고 말야?”
“아, 그. 본가에서 보내준 무술서를 읽다가 그만 늦게 자버렸슴다! 헤헤.”
조르바의 질문에 단번에 대답하려는 샤오메이에게 내가 격렬히 윙크하자, 샤오메이는 쪼르르 눈알을 굴리더니 썩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렸다.
“그래? 뭐 그럴수도 있지. 그보다 나랑 아르틴은 지금 수업 들으러 갈 건데, 너도 당연히 올 거지 샤오메이?”
“수업? 무슨 수업 말씀임까?”
“너도 따라 와 보면 재밌어 할거야. 기대해도 좋다고?”
조금 의외였다. 샤오메이를 보자마자 어제 왜 사라졌냐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변명에도 추궁하지 않고 담담하게 넘기는 모습은 정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이제 포기 한 건가? 방금 전까지 떠보던 녀석이 무슨 일이래?’
뭐, 포기했으면 좋은 거지. 라고 생각하며 조르바를 따라 다시 강의실로 향해 걸으며 이런 저런 수다를 떨었다.
오랜만에 조르바랑 샤오메이랑 의심 없이 놀고 있으니 마음이 참 편해진다.
***
이 십새끼가 날 속였다.
“왜 그래 샤오메이, 아르틴?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프기라도 한건가?”
“....아니, 너무 튼튼해서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녀석이 단순한 금태양이 아니란 걸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방심했다.
‘형님..저희 어떻게 함까...?’
샤오메이가 입으로 뻐끔거리며 전음을 날리지만, 나도 솔직히 감이 안 잡힌다.
조르바 이 녀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계를 한 거지?
“자, 오늘 강의를 위해 특별히 모셔온 귀중한 존재니, 다들 졸거나 딴 짓 하면 안 됩니다?”
“네─!!”
그때, 이 강의를 진행하는 고양이 수인인 신비생물학 교수님이 학생들을 향해 주의를 주자, 나와 샤오메이를 제외한 모든 강의에 참가한 학생들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물론 교수님을 바라보는 학생은 단 한명도 없었다.
교수님의 뒤편에서 신비로운 은빛을 뿜어내며 젊은 여사제들의 빗질을 받는 한 마리의 신수에 모두 홀린 듯이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으니깐.
“자, 남부교단의 초원사제 분들의 신수이자 계약체. 유니콘 입니다!”
고양이 수인의 소개에, 새하얀 유니콘은 자신의 갈기를 부드럽게 목뒤로 넘기며 신수라는 이름에 걸 맞는 아름다운 자태를 과시하였다.
‘아 시발 좆됐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