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유니콘은 살아있다. #02
* * *
“으야앗!”
털썩!
유니콘의 위에 올라타 있던 바이올렛은, 유니콘이 잠시 멈춘 사이 황급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겨, 겨우 탈출했네..!’
방금 전까지 느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엉덩이를 털며 아르틴에게 돌아가려던 바이올렛은 뭔가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어라..? 뭐야? 유니콘님이 왜 피투성이 아르틴한테 다가가?”
“몰라? 재도 유니콘의 적 아닐까?”
“확실히! 오늘 아침에 여자 문제로 싸우던 걸 나도 봤어..!”
수군수군.
학생들의 동요에도 유니콘이 아무런 설명 없이, 오로지 아르틴만을 위해 뿔의 불을 밝히자 웅성거림은 더욱 커져갔다.
“저기? 유니콘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뒤로 물러나서 이 난장판을 구경하던 카르멘 교수도 이변을 눈치 챘는지, 조심스레 다가와 유니콘에게 말을 건다.
[....]
하지만, 여전히 유니콘은 아르틴 만을 바라볼 뿐, 타인에겐 아무런 반응도 해주지 않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유니콘을 데리고 온 여사제들도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피며 다가오자, 어느새 웅성거림도 사라지고 아르틴과 유니콘 두 사람의 사이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류만이 주변을 장악한다.
“형님..? 괜찮은 검까..?”
그 긴장 상태를 바로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샤오메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작게 속삭이는 순간.
[수업은 여기서 끝이다!!]
유니콘의 단호한 외침이 일대의 사람들에게 전부 퍼지더니, 곧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계약자도 아닌 남자가.. 유니콘을 올라탔어!?”
다음 순간, 순결하지도 않고 계약자도 아닌 아르틴이 아무 말도 없이 유니콘의 위에 올라탄다.
그 사실에 샤오메이가 경악에 빠졌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단번에 유니콘의 뿔에 아르틴의 배가 뚫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더 놀라운 사실은, 유니콘은 그런 아르틴이 자신의 위에 올라타는 걸 받아주더니, 그대로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마무리는 본좌의 하렘과 교수가 끝내도록!! 본좌는 중요한 일이 생겼도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누군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유니콘과 아르틴은 학생들의 시야에서 저 멀리 사라졌다.
“..아르틴 형님이 유니콘에게 납치당했슴다!!”
“어라, 유니콘이? 계약자도 아닌 사람을 태워?! 이건 논문감인데??”
“방금 봤어? 붉은 광인이 유니콘을 탔어!”
혼란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탓에 이 상황을 통솔해야 할 교수마저 당황에 빠진 상황.
“이게 무슨 일이야? 아르틴은 괜찮을까?”
바이올렛이 샤오메이에게 다가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가장 당황한 것은 샤오메이도 바이올렛도 아닌, 이 상황을 만든 조르바 펠카스 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조르바는 있는 힘껏 자신의 볼을 꼬집어 봤지만, 꿈이 아닌 탓에 아프기만 할 뿐.
“자, 자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다음 주 까지 신수와 계약자에 대해서 레포트 적어오세요!”
뒤늦게 남부 교단의 여사제들 덕에 정신을 차린 카르멘 교수가 학생들을 통솔하고 나서야, 학생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한 이 사태에 대한 설왕설래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나는 유니콘의 위에 올라타, 사람이 없는 한적한 해안가에 도착했다.
[잠시 기다려라, 포탈을 열기 위해서는 본좌에게도 집중이 필요하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뿔을 보라색으로 빛내는 유니콘을 보며, 나는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
‘빌런 견제를 하나도 안 했더니, 처음부터 이런 대형사고가 나오다니?’
유니콘은, 그저 나를 알아보고 수라장으로 만들려던 게 아니었다.
[묻겠다. 네가 아르틴 루드비히가 맞나?]
녀석이 내뱉었던 첫마디에, 나는 불알이 쪼그라드는 긴장감을 느꼈다.
유니콘 새끼를 이번 회차에서 본적이 없은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알아본단 말인가?
[맞아,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고 있지?]
이건 저 새끼도 기억 회귀다. 그렇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다 확정하려던 찰나.
[우리의 왕께서 너를 찾는다. 아르틴 루드비히! 본좌의 등에 타거라!]
[..그게 무슨 소리야?]
예상도 못한 발언에, 나는 조금 벙찌고 말았다.
[누군가, 우리 왕의 힘의 일부를 훔쳐갔다. 우리의 왕께서는 이번 사태를 해결할 존재로 아르틴 루드비히 너를 선택하셨다!]
그 이후 급한 사정 설명은 직접 듣는 것이 좋겠다며, 동정도 아닌 나를 태우려 드는 유니콘의 닦달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이 녀석을 따라 초원의 땅을 향한 포탈을 기다리고 있다.
‘남부 교단, 초원의 왕...’
같은 교단이라고 칭하지만, 남부 교단은 유일신을 믿으며 엄격한 교리를 세운 북부 교단과는 성질이 전혀 다른 집단이다.
정통 강자인 제국에 의해 강력한 마수나 몬스터들이 토벌당한 북부와 달리, 남부의 드넓은 자연에는 아직도 수많은 몬스터와 정령, 이종족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 세계의 설정으로 치면 격을 끝없이 높여, 신에 준하는 단일 생명체가 된 것이 바로 남부교단의 신들.
즉 남부교단이란 극한의 애니미즘과 샤머니즘, 토테미즘의 집합체인 종교연방과도 같은 셈이다.
그런 만큼 정말 여러 신들이 존재하지만, 남부 교단을 대표하는 존재들이라면 또 손에 꼽을 정도로 줄여진다.
남부 산맥의 황제 드래곤 로드, 동쪽 바다의 폭군 베히모스, 창공신 썬더버드.
그리고 발굽 달린 것들의 왕, 카토블레파스. 초원의 왕이라고도 불리 우는 존재.
마주치는 모든 것을 즉사시키는 눈을 지닌 초원의 왕은 일찍이 마왕군의 침략조차 몇 번이고 격퇴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신 중 하나다.
‘그런 초원의 왕의 힘을 누가, 어떻게 훔쳐갔다는 거야?’
물론 마왕보다 격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곧 죽어도 신이다. 그런 신의 힘을 훔쳐 갈만한 간 큰 짓을 벌일 녀석은?
나도 모른다. 원작이나 다른 회차에서도 없던 사건이니깐.
즉, 좆같은 이 세계의 ‘스토리 진행’이 벌어졌다는 소리. 이 부분은 나중에 설명하자.
[자, 포탈이 열렸도다! 꽉 붙잡거라!]
내가 생각에 빠진 사이, 검푸른 포탈이 우리의 앞에 피어올라 원형 문을 그린다.
[미리 말해두마, 포탈에서 마나를 쏘아대면 위험하니 조심 하거라!]
“말 안 해도 알고 있어, 출발해!”
[감히 누구 몸통을 발뒤꿈치로 차느냐! 왕의 명만 아니었다면 네 녀석의 몸을 짓밞았을 것 이다!]
내가 박차가 없을 발로 신호를 보내자, 녀석은 온갖 짜증을 부리면서도 포탈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샤아아아──
포탈의 입구로 들어서자, 마치 바다에 비친 은하수처럼 검푸른 공간에 가득 찬 별빛무리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출구를 가리킨다.
‘여긴 언제 봐도 참 몽환적인 광경이란 말이지.’
공간을 접어달리는 포탈의 구조상, 포탈과 포탈 사이를 건너는 동안에는 언제나 이 공간으로 오게 된다.
마치 시간도 물리 법칙도 무시하는 것 같은 이 마법적인 공간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너무 환상적인 광경에 입을 벌리다가 실수로 유니콘의 위에서 떨어질 뻔 했다.
그때 단단히 혼났지, 지금도 이 별빛무리의 길을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알고 싶지는 않다.
[아르틴 루드비히]
“왜? 꽉 잡고 있다니깐?”
[누군가 본좌의 포탈에 침입하여 뒤 따라오고 있다. 경계하도록.]
뭐? 나는 놀라서 뒤쪽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유니콘의 말대로, 우리의 뒤쪽에서 누군가 별빛무리의 인도를 받아 우리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네가 아는 존재인가?]
“잠깐만...잘 안 보이는데...”
나는 최대한 눈에 힘을 모아 집중하여 감각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별빛무리에 감싸진 탓에 너무 환하게 빛나 그 얼굴이나 형태를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윤곽만 보여...인간?? 인간인거 같은데?”
[누군가 포탈을 그냥 침범했거나, 고의적으로 우리를 쫓아온 것이군.]
누가 겁도 없이 포탈을 침범한다는 거지? 포탈을 만든 존재가 어중이떠중이 마법사도 아니고 유니콘인 이상, 아무리 기척을 숨겨도 들킬 수밖에 없는데.
[포탈에서 나간 직후 포탈을 닫아버리겠다. 초원의 땅에 감히 허락받지 않은 외부인을 들일 수는 없는 일!]
침입자를 포탈 공간의 미아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유니콘의 발언에,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잠깐, 그러지 말고, 만약 왕의 힘을 훔친 녀석과 한패거리라면 붙잡아서 심문하는 게 편할 거야.”
[감히 왕의 힘을 훔친 존재가, 함부로 입을 열겠느냐?]
“걱정 하지 마, 내가 방법을 알고 있으니깐.”
북부 교단에서 내 몸으로 직접 배운, 수십 가지 고문 법을 잊을 수야 없지.
[네가 방법이 있다면, 포탈 속에 가두는 건 보류하도록 하마. 하지만 저항한다면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유니콘이지만, 오래 같이 지내봤던 나는 알 수 있다.
이 자식, 침입자가 반항하는 즉시 자비 없이 죽여 버리려고 기대 중 이라는 것을.
‘뭐, 너무 강하면 지금의 나로는 제압이 무리니, 차라리 죽이는 게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포탈을 빠져나오자, 마치 몽골의 초원처럼 드넓은 초목이 펼쳐진 들판의 한가운데에 우리는 서있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그리폰, 마치 방목한 젖소처럼 풀을 씹어 먹는 고르곤에 온갖 몬스터랑 신수들이 돌아다니는 풍경.
[여기가 바로 초원의 땅. 우리의 왕의 영지다.]
녀석은 내게 경외하라는 듯이 자랑스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이미 몇 번 여기 와봤던 나로서는 차라리 포탈 공간이 더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마음에 들었다.
“자, 곧 침입자가 올테니깐 거기에 집중하자.”
[응? 아, 그래야지. 그런데 너는 왕의 영지에 아무런 감흥도 없는 건가?]
“아니, 이쪽이 더 급하잖아?”
자신들의 종족에 대해 자부심 쩌는 녀석의 자랑을 일일이 들어줬다간 끝이 없다.
나는 유니콘 녀석에게서 내려, 포탈을 향해 손을 뻗고 마법을 미리 영창하기 시작했다.
[곧 나온다, 준비하거라!]
유니콘의 외침 직후, 포탈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유니콘의 뿔이 파랗게 빛나 포탈이 닫히자, 침입자를 감싼 별빛무리가 사라지며 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침입자! 감히 누구의 영지를 허락도 없이 발을 들이는가! 죽음을 각ㅇ..]
“..자..잠깐만, 네가 왜 여깄어?”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분노하는 유니콘의 말을 끊고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아르틴 도련님?”
이걸 어떻게 예상해야 할지, 왜 저 녀석이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는지, 어디서 꼬였는지 감도 안 잡힌다.
“이렇게 마주 뵙게 되어서, 조금 저도 당황스럽네요. 후훗...”
시온 이드리스, 갈색 머리의 여기사는 홍조를 붉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