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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35화 (35/266)

〈 35화 〉 여기사의 사죄

* * *

포탈에서 나온 시온은 늘 입고 다니던 제복 상의 대신 갈색 거적때기를 두르고 있었는데,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인식 저하? 감지 불가?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한 거지?’

저런 걸 두르고 나를 몰래 쫓아오다니, 그 의도가 불순하게 느껴진 나는 준비 해놓은 마법을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게 마나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도, 시온은 내게 눈웃음을 지으며 적의는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왜 나를 쫓아 온 거지? 또 렉스턴이 시키기라도 했나?”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시온을 향해 외쳤다. 솔직히 그 날 렉스턴이 시온에게 한 짓은 존나 쓰레기여서 아직도 곁에 붙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부스럭. 부스럭, 쿵. 쿵.

어느새 우리의 주변에는 이변을 알아챈 초원의 왕의 권속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냥 본좌에게 맡겨라! 침입자는 죽어 마땅하다!]

내 옆에 서 있던 유니콘도 흉흉한 검은 빛을 뿔에서 뿜어내는 상황. 마왕군 군단장이라도 이건 좆됐다고 판단할 것 이다.

찰칵! 스르륵!

그때, 시온은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집을 바닥으로 풀며, 양손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렉스턴? 그 망할 배신자 애새끼요? 제가 왜 그 애새끼의 말을 듣겠어요?”

“..배신자?”

갑자기 렉스턴을 배신자라고 말하며 분노에 떠는 시온의 눈동자에는, 언제나 나를 향했던 살기 깊은 광증 어린 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네, 배신자. 제 마음을 짓밟고, 제가 패배하게 만든 후 저를 버렸으니, 아무리 키우던 개라도 주인의 대가리를 물 수 밖에 없잖아요..?”

“뭐? 너 설마, 렉스턴을 죽여 버린 거냐?”

현재 렉스턴은 내가 병신을 만들 기세로 두들겨 팬 바람에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그런데 아카데미 내부에서, 그것도 영향력 강한 백작가의 후계자가 병실에서 살해당한다고? 그랬다가는 시온 이 여자를 잡아 넘겨도 수습이 안 될 것 이다.

“풋,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도련님. 그 애새끼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요? 그냥, 작은 경고를 조금 해주고 왔을 뿐이에요.”

당황한 내 모습을 보고 시온이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도리어 웃음을 터트리자, 주변의 괴수들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린다.

[저 필멸자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왕의 거처에 침입했는가..!]

[갈기갈기! 찢어서! 먹어야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아직 물어봐야 할 게 많은데, 이렇게 가다간 시온이 이 자리에서 잡아먹히는 미래밖에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고, 굳이 나서서 살리기에는 시온의 의중을 알 수가 없다. 괜히 살려뒀다가 저 미친개가 내 뒷목을 물어뜯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스르륵.

주변의 괴수들에게 시선을 돌린 채 곤란해 하고 있을 때, 내 뒤통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저, 저거 봐! 침입자가 뭔가를 한다!]

[가죽을 벗었어! 뭘 하려는 거지?!]

[멍청이! 저건 옷이다! 털 없는 녀석들이 입는 거지!]

뭐? 옷을 벗어?!

그 말에 냉큼 고개를 돌리자, 시온이 천천히 자신의 외투를 하나하나 벗어 내리기 시작한다.

방금까지 두르고 있던 거적때기와 늘 단정하게 입던 검술용 복장의 상의를 벗자, 매끄러운 몸매를 과시하듯 몸에 달라붙는 타이즈 형 내의가 눈에 들어 온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지금 당장 저를 믿기는 힘들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나 진심이랍니다.”

딸칵, 스르륵.

벨트의 버클을 풀고는 바닥에 툭 하고 내려놓은 시온은, 마치 스트립쇼를 하듯 천천히 바지를 관능적인 골반 아래로 내려 매끈거리는 쭉 뻗은 긴 다리 아래로 벗어, 옆에 얌전히 곱게 접기 시작했다.

[인간이 뭘 하려는 거지? 뭔가 주술을 쓰는 건가?]

[그런 것 치고는 적의는 안 느껴져, 죽음을 직감하고 얌전히 죽으려나 봐!]

주변에서 괴수들이 웅성거리지만, 시온의 난데없는 스트립쇼에 집중하는 나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샤오메이가 그 풍만함으로 상대방을 압도하고, 아그네스가 균형 잡힌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돋보인다면, 시온의 몸은 조각상의 모델로 쓰일 법한 예술적인 느낌이다.

방금 전까지 경계하던 나조차, 그 아름다운 비율에 감탄하고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니깐.

만약 시온이 기사가 아니라 무희였다면, 왕국의 왕 조차 홀려서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악녀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지리릭.

상의의 지퍼를 내리자, 한 손으로 쥐면 딱 손에 가득 찰 것 같은 매끄러운 가슴이 속옷에 감싸진 채로 드러났다.

‘붉은색...’

본래라면 여성의 가슴이 쳐지는 걸 막아주고 흔들리는 거 막아줘야 할 시온의 속옷은, 천이 너무 작아서 오로지 남자를 유혹하는 용도로 밖에 쓰지 못할 것 같았다.

시온은 자신의 몸을 훑는 내 시선을 인식하고도 불쾌한 표정을 짓기는커녕, 공손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자신이 벗은 옷을 개서 옆에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는 더는 버림받기 싫어요. 그러니, 저를 절대로 버리지 않을 주인님을 찾아왔답니다.”

늘 나를 매도하고 깎아내리던 거친 말투 대신, 렉스턴에게나 쓰던 공손한 어투로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정신 차려라 아르틴! 저 자는 체는 처녀일지 몰라도 심과 기는 처녀가 아니다!]

‘핫, 시발 내가 뭘 하려는 거야?!’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소리치는 유니콘의 일갈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왠지 동정일 때 보다 여자를 배우고 난 후에 오히려 야한 것에 면역이 떨어진 기분이 든다.

“크흠, 내가 왜 너의 주인님이야? 네가 나한테 여태까지 한 걸 잊었어?”

나는 내가 직접 겪은 것은 아니지만, 시온 이드리스가 아르틴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도저히 이 태세 전환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저를 위해 그렇게 진심 어린 분노를 보여준 건, 아르틴 도련님이 처음이었어요. 제가 살면서 남자들에게 느껴온 한심한 정욕과는 다른 저를 위한 진심..”

시온은 아마도 렉스턴을 두들겨 팼을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시온에게 좋은 감정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때는 시온 때문에 렉스턴에게 열이 받은 것도 크긴 했다.

정말 유일하게 믿던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던 모습은, 현실에서 내가 6년간 모은 전 재산을 들고 해외로 도망쳤던 그 때가 떠올랐으니깐.

­ ‘사람이, 사람을 그 따위로 뒤통수쳐? 이 쓰레기 같은 자식아!’

‘자기를 믿는 사람을 그렇게 써먹고 버리는 놈은 최악의 인간쓰레기다! 그냥 뒤져!’ ­

렉스턴에게서 내게 사기를 쳤던 승후가 겹쳐 보였던 그때의 나는, 현실에서 풀지 못한 울분을 잔뜩 담아 아픈 부분만 골라서 돼지 멱딸 기세로 두들겨 패긴 했다.

“그렇지만, 제가 못난 암퇘지처럼 주인님에게 꿀꿀거렸던 과거를 지울 수는 없겠죠...그러니 제가 보여야 할 정성을 보여드릴게요. 도련님.”

딸칵.

시온은 그리 말하며 자신의 속옷을 벗어, 고이 개놓은 옷 위에 올려놓고는, 란제리 팬티의 끈을 풀어 벗는 것으로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침입자가 완전히 알몸이 되었어!]

[잠깐, 침입자가 초대받은 인간을 습격하려나 봐!]

[아니야, 저건..]

대부분의 짐승들은 지금 시온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곡해하여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야, 나도 이런 광경은 처음 봤으니.

“제가 끼친 모든 무례를 사과드리고자 합니다. 이 어리석은 암퇘지를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시온은 전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공손한 어투로, 자신의 머리를 땅바닥에 박으며 사죄의 알몸도게자를 시작했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앞으로 도련님께서 시키시는...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마지막 말까지 부끄러움을 삼키고 전부 끝낸 시온은, 내가 용서해주기 전까지는 고개를 들지 않겠다는 듯 그 자세 그대로 계속 도게자를 이어나갔다.

‘와 시발 좆된다.’

그 모습에 나는 참을 수 없이 흥분하고 말았다.

나를 꾸준히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던 여자가 내게 알몸도게자를 하며 굴욕적으로 사과해오는 모습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가학성을 깨우는 위험한 자극이었다.

[존나 한심하구나 인간. 저런 비처녀에 흥분한 것이냐? 왕께서 기다리는데 이런 흉한 복종의식이나 봐야 한다니!]

내가 작은 아르틴을 커다랗게 부풀리고 있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유니콘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크흠, 일어나. 일단 돌아가서 마저 이야기하자고.”

나는 그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물론 이 엄청난 사죄가 내 마음을 흔들기는 했지만, 바로 용서해줄 생각은 없었고 초원의 왕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한 발 뺄 수도 없지 않는가.

“감사합니다! 앞으로 목숨을 다 바쳐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 말을 용서의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시온은 감격한 목소리로 쿵, 쿵, 하고 머리를 몇 번이고 땅바닥에 박으며 감사해왔다.

“그만! 이제 그만 일어나! 이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고!”

당황한 내가 다가가서 잡아 일으키고 나서야, 시온의 도게자를 말릴 수 있었다.

어떻게 사과를 하겠다면서 몰래 뒤를 쫓아와서 알몸도게자를 하겠다고 생각하지? 사고방식이 정상은 아닌 게 분명해 정신이 어질어질 해졌다.

**

[그럼 이제 그 흉한 복종의식은 끝난 거겠지, 아르틴?]

“아니, 내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당한 건데..”

자신의 왕의 영토에서 시간을 허비한 탓인지, 묘하게 유니콘의 정신감응이 날카롭게 뇌를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억울했다. 누가 거기서 알몸도게자를 예상해??

[이래서 비처녀들은 안 된다는 거다. 천박함을 모르고 저리 나신을 보이는 게 말이나 되더냐?]

일단 시온을 아카데미로 돌려보낸 유니콘은 방금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자고로 여성이랑 순결하고 지고지순해야 하는 것, 심기체가 온전히 처녀임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셈이다.]

‘내가 보기엔 너랑 쟤랑 비슷한데.’

둘이 어느 한쪽으로 미쳤다는 점이 확실하게 비슷했다.

아까 바이올렛을 위에 태우고 처녀임을 과시하던 미친 짓거리랑 알몸 도게자랑 뭐가 크게 다른지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애초에, 왜 그렇게 처녀에 깐깐한 거야?”

[어리석은 소리! 모든 여성은 처녀임으로써 완전하고, 처녀를 잃음으로써 생기는 불완전함은 전능한 신들조차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또 정신 나간 소리를 당당하게 외치는 유니콘 때문에 정신이 어질어질 거렸다.

‘북부 교단에도 이런 비슷한 소리를 하는 또라이가 있었는데.’

­ ‘신은 정절을 잃은 여인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모든 타락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타락하였다는 사실만큼은 신조차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는 바! 죄인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 또는 신의 자애를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이를 없었던 것으로는 할 수 없다!’ ­

3회차 당시에 교단에서 자리 잡고 있을 때, 저런 소리를 당당하게 하던 사제가 한 명 있었다.

천사 박사라고 불리던 고결한 사제가 주교 회의에서 저런 소리를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북부 교단이 제정신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었다.

만약 유니콘 녀석과 만난다면, 교파가 다를지언정 처녀에 대한 신념 하나로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너도 암컷이잖아. 계약자도 아닌 남자를 몸에 태우는 것은 심기체 처녀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무슨 그런 해괴망측한 소리를, 너는 염소나 박쥐, 독수리에게 발정하는 거냐? 시골 처녀가 기르는 개와 뽀뽀한다고 처녀가 아닌 것은 아니다!]

내 말에 갑자기 화들짝 놀란 유니콘은 무슨 괴상한 소리를 하냐는 듯 맹렬하게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은근히 맞는 말이다. 같은 휴머노이드도 아니고 종이 완전히 다른 생명체끼리 사랑하는 건 특이 취향. 보통은 인식도 못할 테니깐.

[그런데, 네 녀석은 본좌가 여성인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아, 실수했다. 이거 2회차 때 들은 거지.

“내가 고향에서 말을 좀 공부했거든, 너는 갈기가 딱 암컷 상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감히 고결한 순종 유니콘을 말 따위랑 비교하는 것이냐!]

“아, 저기 보이는 게 설마 초원의 왕, 카토블레파스 님이신가?”

나는 녀석이 가장 싫어하는 말과 비교하기로 대충 넘기며,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형체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듯이 연기했다.

[수상한 녀석... 그렇다, 저분이야 말로 초원과 발굽 달린 것들의 왕. 만물을 내려다보는 카토블레파스님이다.]

수십 미터는 될 법한 커다란 크기의 네발짐승의 형상. 물소의 몸과 하마의 다리, 멧돼지의 머리를 한 잡종 같은 생김새지만.

‘역시, 신은 신인가...’

전에도 만난 적은 있지만, 마왕과 대면한 후 다시 만난 신의 존재감은 확실히 체감이 되었다.

‘마왕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강하네.’

한마디로 나와 생명체의 격이 다르다.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이 공간을 왕의 영토라고 부르는 이유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주변 전체를 장악하고 있어, 장벽너머를 전부 자신의 영토로 삼은 마왕처럼.’

그때, 땅을 향해 머리를 처박고 자는 것처럼 보였던 카토블레파스가, 갈기로 뒤덮인 얼굴을 살짝 내 쪽으로 돌리자 수백 미터는 떨어져 있음에도 강렬한 정신파가 밀려왔다.

[왔는가. 아르틴 루드비히. 내게 초대받은 인간이여.]

남부의 신이 내게 말을 걸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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