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초원의 왕과 권능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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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왕, 카토블레파스는 자신의 영역인 초원의 중간에서 고고하게 홀로 누워 자신의 영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멧돼지 머리에 물소 몸 같은 게임으로 치면 잡몹같은 모양새임에도, 실제로 만나는 순간 약할 것 이라는 생각은 불경하다고 까지 느껴진다. 이것이 신의 아우라 라는 걸까.
머리카락 같은 갈기로 눈을 가렸음에도, 시선을 이쪽으로 돌린 것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든다. 만약 카토블레파스가 원한다.면 그 순간 나와 유니콘은 반항도 못하고 죽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반갑네. 나는 카토블레파스. 발굽 달린 것의 왕이네.]
카토블레파스의 소개는 간결했다. 허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신을 당도한 인간에게 신이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듯이, 그 짧은 인사만으로도 수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위대한 초원의 왕을 뵙습니다..!]
카토블레파스의 정신파에 유니콘 녀석은 즉각 초원에 뿔을 처박아 머리를 조아리며 굽신 거리며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권위를 내세우는 녀석인 만큼, 자신보다 권위가 높은 존재에게는 깍듯한 걸까?
‘사람의 왕한테는 지랄 맞게 굴던 새끼가...’
생각해 보니 이 새끼, 아그네스한테도 아까 했던 처녀의 왕이시다! 이지랄 했던 것 같은데, 제국의 황녀님한테 그래도 되는 거야?
역시 미친 말답게 사람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나보다 하고 그냥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위대한 초원의 왕, 카토블레파스를 뵙습니다.”
나는 적당히 마리안느 스승님한테 했던 정도의 예식을 취하며 인사했다.
내가 초원의 짐승새끼도 아닌데 배를 까뒤집고 인사할 이유는 없으니깐 말이다.
[인간..! 빨리 엎드려 절하지 못할까! 위대한 분에게 고개를 숙이는 걸로 끝나다니!]
유니콘은 옆에서 아까 여기사가 했던 것의 반이라도 따라가도록 공손하라고 닦달한다.. 방금까지는 아르틴이라고 부르던 놈이 왜 인간 거려?
[인간 아르틴 루드비히는 나의 손님, 유니콘 유니코르는 예를 갖추라.]
[앗! 죄송합니다 왕이시여..!]
카토블레파스가 느릿한 목소리로 꾸짖자, 유니콘은 잔뜩 놀라 고개를 조아리며 왕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지랄 맞은 새끼...’
유니콘 녀석이 꼼짝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가 여기에 불린 이유부터 묻기로 했다.
“초원의 왕이시여, 저를 초대한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일단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해서 오기는 했으나, 유니콘에게 들은 설명은 다짜고짜 왕의 힘을 누군가 훔쳐갔으며 그것을 해결한 존재는 나라고 직접 지명했다는 이야기뿐.
‘내가 뭘 했다고 초원의 왕이 나를 알고서 지목해?’
게다가 누가 겁 없이 신의 힘을 훔친단 말인가? 원작에서도 그런 정신 나간 짓 비슷한 건 마왕의 군단장 밖에 하지 않았다.
[유니코르여, 어디까지 설명했는가?]
[네, 왕이시여! 어느 불경한 자가 왕의 힘을 훔쳤다는 것과, 왕께서 이 전례 없는 불경한 사건의 해결사로 저 인간 아르틴 루드비히를 선택하셨다는 것까지 입니다!]
그런 내 질문에 카토블레파스가 느릿하게 거대한 콧김을 내뿜으며 묻자, 유니코르는 잔뜩 긴장한 듯 빠릿빠릿한 목소리로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면 한심하기도 하지만 이해는 됐다. 나도 초원의 왕을 처음 만났을 때는 저 존재감에 압도 되어서 허둥지둥 거렸으니 말이다.
‘초원의 왕도 이런데, 마왕은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하지만, 내가 4회차에 겨우 본 마왕은 아직 고대의 봉인 마법으로 인해 잠들어 있었음에도 카토블레파스 보다도 거대한 존재감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존재를 보다가 카토블레파스를 다시 보고 있으면, 코끼리를 보고 난 후 코뿔소를 보는 것처럼 신기하기는 하지만 경외심은 느껴지질 않는다.
[그런가. 그럼 나의 힘을 훔쳐 간 이에 관해 설명하겠네.]
카토블레파스는 유니콘의 설명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가만히 있다가. 내게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문제는 너무 천천히 설명을 해대는 통에 내게 주면 3분이면 충분할 설명을 1시간이 넘게 하고 있다.
얼마나 말이 느리고 긴 지 고개를 처박던 유니콘도 30분 정도 지나자 목이 너무 아픈지 조아리던 고개를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결국, 나는 카토블레파스가 말을 멈춘 틈을 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깐, 누군가 마왕의 군단장의 힘으로 카토블레파스님의 권능, 마안의 힘을 조금 훔쳐갔다는 겁니까? 그리고 그 힘이 아카데미에서 느껴지니 찾아달라는 소리고?”
내 요약에 카토블레파스는 조금 흠칫 거리더니 이내 그 거대한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끄덕였다. 물론 그 미세함으로도 거대한 바람이 불어오는 탓에 못 알아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 말이 맞네, 내 힘의 일부라고는 해도, 그런 힘을 함부로 사용했다간 감당하기 힘든 재앙을 일으킬 테니. 누군가 나서서 회수해 줘야 하네.]
나는 카토블레파스의 말에 납득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카토블레파스의 주된 권능은 독기와 마안.
자신의 눈으로 상대방을 주시하는 것만으로도 생명체를 죽일 수 있는 즉사의 마안과, 자신의 숨결에 마나를 담는 것으로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지 못할 독을 뿜는 능력.
같은 격의 존재나, 혹은 해당 능력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라면 생각보다 별로 대단하지 않은 권능이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휘둘러지는 순간 현실의 독가스보다 흉악한 대량살상병기가 되는 힘이다.
하물며 그걸 들고 마왕군에 맞설 인재가 모여 있는 아카데미에 숨어 들었다?
‘이거 생각보다 큰일이잖아??’
카토블레파스의 권능을 전부 훔친 건 아니라지만, 힘의 편린을 휘두르기만 해도 학생들 수백 수천명이 죽는 대형사고가 발생할 거다.
‘간부 후보였던 렉스턴을 조져놔서 그런가, 대타로 나온 빌런이 너무 미친 규모잖아?’
이 세계에는 일종의 빌런 보존의 법칙이 있다. 하나의 에피소드로 분류되는 기간 동안에는 3명에서 6명 정도의 빌런이 나오도록 정해져 있다.
물론 그 중에는 무조건 등장이 정해진 빌런도 있고, 사건과 인과의 전개에 따라 빌런이 되는 유동적인 인물들도 있다. 이 중 등장이 고정인 주역 빌런을 미리 처리하면?
완전 랜덤이다. 빌런의 수가 충분하다면 후발주자가 등장 안하고, 부족하다면 대신할 빌런, 악당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후에 나온 빌런이 미리 처리한 빌런보다 악하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규모가 작거나 처리하기 쉬운 경우도 많아, 정말 악질인 새끼들은 미리 처리하는 것을 선호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꽝에 걸린 것 같다. 신의 힘을 훔친 것도 모자라 마왕의 군단장하고 계약한 녀석이라고?
“초원의 왕이시여, 일의 중함은 이해했지만 왜 제가 선택받은 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가장 궁금한 건 왜 내가 선택받았냐는 것 이다.
주인공 카이엔, 학생회장인 리처드 황태자, 왕국 최강 후보인 마리안느 스승, 샤오메이나 하다 못해 아그네스도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강할 텐데 말이다.
[내가 그대를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내 질문에, 카토블레파스는 방금까지 주변 일대를 전부 뒤덮듯이 발산하던 정신감응을 오로지 나만 들을 수 있게 줄여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대가, 이미 한 번 우리를 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네?”
담담하게 충격적인 사실을 말하는 카토블레파스, 그 대답을 듣고 충격에 빠진 나.
[...무엇이냐? 왜 갑자기 대화가 끊긴 것 이냐?]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유니콘은 대화를 듣지 못한 탓에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두리번거리지만, 이 상황을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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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로 돌아온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일단 어디부터 조사해야 하나...탐지기 만들 시간을 남으려나?”
당장 언제 사고가 터질지 모르니깐, 바로 해결하러 움직여야 할 텐데, 방금 들은 충격 발언에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그대가 어떻게 그런 힘을 얻었는지는 모르나, 나와 같은 초월자들 중 일부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
[그대가 얻은 권능은 강력하나, 그만큼 인과에 영향을 줄 터, 마왕을 조심하게.]
‘기억 회귀가 아니라, 격이 높은 신에 가까운 존재들은 시간의 흐름이 바뀌는 걸 인지할 수 있다니...’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옛날에 본 ‘닥터 스트X인지‘라는 영화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기억이 난다.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최종 보스는 주인공이 아무리 회귀해도 알아챌 수 있었지. 결국 주인공은 그 점을 노려서 최종 보스를 내쫓았고.
‘결국 기억 회귀랑은 다른 사례니깐. 참고가 안 되네..’
일단 진정하자, 내가 정한 행동 방침은 기억 회귀의 실마리 찾기와 빌런 조지기.
그 빌런을 찾아서 조져야 할 대상이 가시권 안에 들어왔을 뿐이다. 실패하면 바로 회귀 각이여서 그렇지.
“인간! 언제까지 여기 멀뚱히 서 있을 셈이냐! 본좌는 어서 본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으니 본좌를 위한 방으로 안내 하거라!”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흰색 머리에 반짝이는 별빛이 박혀있는 것 같은 여자가 나를 마구 타박하듯이 다그쳤다.
물론 흐름을 보면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미소녀의 정체는 유니코르다.
“내 방은 좁아서 말로 생활하는 건 무리일 텐데?”
“그게 무슨 소리냐! 설마 본좌보고 이 답답한 모습으로 계속 지내라고 말할 셈이냐!”
“꼬우면 나가!! 나도 너랑 같이 살기 싫어 처녀충아!!”
“뭐, 뭐어?! 지금 본좌보고 처녀충이라고 한 것이냐! 감히 인간 주제에!”
말의 본능은 못 버리는 지 땅을 마구 발로 차는 녀석. 나는 정말로 이 녀석하고 엮이기 싫었다. 2회차에서 엮인 것만 해도 지긋지긋 했으니깐.
[유니코르, 너는 인간의 모습으로 임하여 인간을 따라가도록 하거라.]
[네?! 왕이시여,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 같은 고귀한 신수보고 폴리모프 해서 인간 돌보기를 하라니요!]
[인간 혼자서 나의 권능을 감당하지 못할 것 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야 나의 권능도 회수하지 않겠느냐?]
공손하게 머리를 처박던 모습은 어디를 갔는지, 카토블레파스에게 겁 없이 대드는 유니콘의 태도에도 카토블레파스는 노여움을 보이는 일 없이 다정하게 설명했다.
결국 유니코르 녀석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나를 따라와 한 동안 같이 빌런을 추적하는 신세가 되었다.
“비동정에 비처녀를 흠모하는 녀석과 같이 다니라니, 왕의 명만 아니었다면 본좌는 네 녀석을 뿔로 찔러 죽여도 시원찮았을 것 이다!”
벌써 옥구슬이 굴러 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존나 듣기 싫게 쨍쨍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 세계에는 없는 K질병인 화병이 생길 것만 같다.
“아...존나 싫어 진짜...”
“지금 설마 본좌가 싫다고 한 것이냐! 본좌 같은 위대한 존재랑 같이 다니게 된 것을 가문 대대로 영광으로 삼아라 무엄한 것!”
좆토피아에서 온 시끄러운 암살자를 뒤로하고, 나는 내 기숙사를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자, 잠깐! 본좌를 두고 어디 가느냐! 본좌에게 예의를 갖춰라!!”
유니콘 녀석은 내가 떠나는 모습을 보더니 빼액 거리며 쪼르르르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쫑알 쫑알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멈출 기미를 보이질 않는다.
‘회귀 마렵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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