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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38화 (38/266)

〈 38화 〉 초원의 왕과 권능 도둑 #03

* * *

‘흠, 뭔가 이상한데.’

잠시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시온은 그냥 악당 렉스턴의 심복이자 검술에 능한 기사 1. 원작에서도 렉스턴과 대립하는 카이엔 일행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다가 카이엔에게 한 번 된통 깨지는, 그 정도의 인물이다.

내가 봐 온 시온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검술가로서는 일류의 실력을 지녔지만, 그 호전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정신 상태가 실력의 발목을 잡는 악당 조연 A.

그런데, 기사로써 깨지고 난 후 스토킹을 시작하자 기묘할 정도로 유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 시온의 미행을 알아차린 것도, 유니코르의 포탈에 시온이 몰래 따라왔지만, 포탈의 특성상 유니코르가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니코르가 나를 태우고 전력으로 달려서 숲을 지났는데, 그걸 그대로 따라와서 포탈을 따라왔다고?’

지금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얼빠진 녀석이지만, 유니코르는 곧 죽어도 신수, 계약하는 것만으로도 초반의 진행은 가볍게 밀 수 있게 해주는 기연인 존재다.

당장 방금만 해도 주변에 시온이 숨어있던 걸 감지한 것도 유니코르 뿐, 제국의 기사들이 전부 이정도로 몸을 숨기는 데에 능했다면 당장 장벽 넘어가서 마왕군을 도륙하고 다녔을거다.

“왜 본좌를 빤히 보는 것이냐? 설마 그 짧은 시간에 본좌에게 반한 것이라면 끄에엑!”

헛소리를 하는 유니콘의 팔뚝살을 꼬집어주고는 시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르틴도 그렇고, 작가는 원작 엔딩 내도록 안 보여준 설정이 존나게 많아.’

이 점은 확신할 수 있다. 등장인물이나 세계관, 심지어 가장 중요한 마왕에 대한 설정도 원작에서 안 까놓고 전부 죽었다고 끝낸 탓에, 나는 마왕을 죽이려면 밑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4회차가 돼서야 알았으니깐.

‘역시, 내가 모르는 자잘한 설정 하나하나에 신경 쓰다가는 끝이 없다. 클리어를 위해서는 간결하게 필요한 설정들만 알아내서 밀어야..’

응? 생각하다보니 나 스스로도 이상한 방식으로 빠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언제부터 이번 회차에서 진심 클리어를 노리고 있었지?

이번 회차는 지쳐서 쉬어가기로 했었지, 마왕 클리어를 하려고 했으면 렉스턴 두들겨 패겠다고 한 달이나 쓰지도 않았고.

‘그날 병동의 침대에서 누워서 스스로에게 했던 맹세는 그런 게 아니었잖아.’

카이엔 그 녀석을 엿 먹인다. 오로지 그 목표 하나로 이 회차를 시작했었다.

지금도 내가 여자랑 잤다고 철벽치기 시작하는 그 놈이 아무래도 엿 같은데, 기억 회귀에 대한 단서를 풀게 하려면 결국 거리감을 좁혀야 한다.

‘아, 그럼 그쪽으로 쓰면 되겠구나.’

어차피 시온이 내 편인걸 아는 사람은 유니코르 뿐이다. 그럼 그걸 이용해 먹어 줘야지.

“시온, 네가 우선 해줘야 할 일이 두 가지인데...”

“하으읏..♡”

“으악! 뭐야 씨발!”

내가 시온의 귓가에 명령들을 속삭이며 말하자, 시온이 갑자기 부르르 떨며 신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한다.

나는 내 귀에 느껴지는 신음을 동반한 뜨거운 한숨에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시온의 얼굴에는 이미 홍조가 떠오른 채 뭔가를 느끼고 있었다.

“본좌가 말하지 않았느냐 아르틴! 저 여자는 남자를 품지만 않았을 뿐, 색녀나 다름없다는 것을! 심과 기가 썩어빠진 여인이다!”

유니코르의 일갈에도 나는 슬슬 정신이 어질어질 거리기 시작했다.

‘길들인다고 진짜로 길들여지기는 할까?’

시온의 부르르 떨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스스로에게 확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휴, 다 치웠다.”

브론즈 기숙사 주변의 창고는 먼지투성이의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내 손을 걸쳐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사실 내가 한 거라고는 약속 시간인 7시 30분 까지 남는 시간을 이용해 청소한 게 전부였지만, 창고치고 꽤 넓은 공간 덕에 어느 정도 회의 할 공간은 만들 수 있었다.

유니코르 녀석은 청소 한다니깐 먼지 날려서 싫다고 하도 징징거려서 약속 시간 전까지 남부 교단의 초원종파 여사제들에게 상황 설명이라도 해두라고 보내 놨다.

“휴, 겨우 좀 조용하네.”

요 근래 사건사고가 계속 터지니 조용한 시간이 너무 그리웠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정말로 샤오메이네 본가나 놀러 갈까..”

아카데미물, 학원물이라고 하면 바다가 왕도인데, 당장 섬에 지내면서 바다에서 놀아본 기억은 오래 되서 가물가물 하다. 아그네스랑 샤오메이도 바다에 간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을까?

“아예 동아리 여름 합숙이라면서 바다로 끌고 가면, 자연스럽게 놀러가기도 좋을 거고..나쁘지 않아.”

어쩌면, 회귀가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 회귀 방법만 찾아낸다면, 최고의 삶이 아닐까?

가장 인생에서 파릇파릇한 청춘을 누리는 시기인 10대에, 사랑하는 여자들과 좋은 친구들과 놀러 다니다가, 일이 꼬이면 회귀하는 식으로 영원히 천국처럼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분명 처음 몇 번은 더할 나위 행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5번이 된다면? 50번이 된다면? 500번은? 5000번은?

늘 즐겁게 노는 삶에 익숙해져, 정신이 마모되는 순간 내가 마왕과 빌런들을 해치우며 벌여야할 혈투를 감당할 수 있을까? 가장 날카롭게 벼려져있던 4회차 조차도 마지막의 순간에는 마음이 꺾이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제 나를 위해 회귀하겠다고 맹세한 이후로도 자신도 모르게 다음을 준비하고 있는 건 나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그런 상황을 방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 머리 복잡하네, 그냥 생각 없이 즐겁게 펑펑 노는 것도 안 되는 거야 나?”

안 돼, 그랬다간 고구마를 피할 수 없어.

“최소한, 이번 회차는 즐긴다. 그 즐기는 걸 방해하는 놈들은 줘패거나 치워버린다. 이거 하나 만큼은 명심하자.”

“누구를 두들겨 팬다는 말씀임까?”

그때, 문이 드르륵 열리며 샤오메이가 창고 안으로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샤오메이! 일찍 왔네? 아직 약속 10분 전이잖아?”

“그야 형님 보려고 일찍 왔슴다! 어제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얼마나 놀란 줄 아심까?”

그렇게 말하며 샤오메이는 사각형 테이블에 준비 된 자리 대신, 의자를 끌고 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앉았다.

코를 간지럽히는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기분이 좋았다. 대나무 숲에 있는 거 같은 상쾌한 향기.

‘또 그 달콤시큼한 향기는 안 나서 다행이네.’

그 놈의 최음제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물론 결과가 좋게 되긴 했지만 아찔한 순간들뿐이었다. 나중에 아그네스 시켜가지고 단단히 단속해달라고 해야지.

“헤헤, 그래도 별일 없어서 다행임다.”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부드럽게 껴안으며 자신의 오른손과 내 왼손의 깍지를 끼는 샤오메이.

뭉클뭉클!

‘가슴은 정말 대단하구나...’

동정을 떼고 나면 가슴의 마력에서 벗어날 줄 알았는데. 아주 단단한 착각이었다.

오히려 하트 모양 가슴 구멍에 팔이 끼어지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헤벌쭉 바뀌며 음흉한 눈으로 샤오메이의 몸을 훑게 된다.

그러다 보면 또 저번에 샤오메이와 있었던 격렬한 추억도 떠오르고...

“앗, 형님 눈이 너무 야함다♡ 팔짱 좀 꼈다고 너무 대놓고 보시는 거 아님까?”

그때, 샤오메이가 살짝 고개를 내민 탓에 내 음흉한 눈빛이 샤오메이의 장난기 어린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샤오메이가 두 손으로 내 고개를 잡고는 자신을 향해 홱 하고 돌렸다.

“후후, 뭘 부끄러워 하심까. 이미 저희는 연인..아니, 그 이상이지 않슴까?”

연인, 맞다. 분명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으니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건 동정 시절에 몰래 몸매를 훔쳐볼 때의 버릇 같은 거였으니깐.

그런데, 연인 이상..?

내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자, 샤오메이가 내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더니 소곤소곤, 나를 유혹할 때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안뜩 해댔으니깐.. 당연히 책임지실 거죠? 오라버니?”

불끈.

그 달콤한 속삭임에 작은 아르틴이 흥분하자, 샤오메이는 작은 아르틴을 바지위로 슥슥 문지르며 내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준다.

오라버니라는 말을 들을 때 마다 묘하게 올라오는 배덕감이 가히 반칙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어떻슴까? 두 사람이 오기 전에 몰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건?”

꿀꺽.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 모솔아다였던 예전과는 다르다. 이미 둘이 마음을 알고 사귀기로 했는데, 연인끼리 애정행각 좀 할 수 있는거 아닌가?

"아직 약속시간 까지 20분 넘게 남았으니.. 그동안 즐겁게에..."

"그, 그럴까..? 오붓하게 둘이..?"

나는 못 이기는 척, 샤오메이와 깍지 낀 두 손을 꼭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가야, 글에 성인만 열람가능 설정 붙여라.

덜컥!

“어머, 두 사람 다 일찍 왔네요!”

“앗...! 안녕하심까, 황녀님!”

“아앗..! 아, 안녕 아그네스!”

“??? 안녕하세요?”

내가 행복한 꼴은 보기가 싫은 걸까, 하필 그 순간 아그네스가 활기차게 인사하며 창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당황한 나랑 샤오메이가 다급하게 손을 놓고 과하게 밝게 인사하자, 아그네스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준다.

‘아그네스는 늘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아이였지...’

속을 까보면 덤벙거리는 면모가 있는 아그네스지만, 제국의 황녀라는 입장에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늘 성실하게 움직이는 자세가 몸에 베여있다.

게다가, 정식 연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그거 가지고 아그네스랑 대화도 제대로 못했지..?’

거사를 치룬 당일 날, 아그네스와 샤오메이를 동시에 내 여자로 만들기는 했지만. 그 당시 아그네스의 방 안에 있던 인물들은 샤오메이의 최음제로 이성이 어느 정도 마비가 되어 있었다.

밤새 거사를 치른 후에는 아침 인사도 없이 나왔고, 유니콘에게 바로 납치당했으니깐...

“두 사람 다 왜 그렇게 땀을 흘려요? 창고 안이 그렇게 더운 것도 아닌데?”

뜨끔 하는 내게로, 아그네스가 총총 걸어오더니, 갑자기 내 머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창고가 전 보다 엄청 깨끗해 졌네요! 아르틴이 청소한 건가요?”

“으응, 새벽 5시에 깨서 할 일이 없었거든. 여기서 만났다가 바로 아침 조회 가야하는데 먼지 투성이면 이상하기도 하고.”

“역시, 아르틴은 근면하네요.. 그렇지만, 저희랑 같이 청소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아그네스는 그렇게 말하며 청소 때문에 약간 헝클어진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스윽 스윽 빗어준다. 섬세하게 담긴 애정이 손길을 기분좋게 만들어준다.

“아르틴은 늘 혼자서 일을 해결하려고 하니까요, 앞으로는 저나 다른 사람들도 의지해주면 좋겠어요.”

상냥한 아그네스의 말 한마디에, 나는 가슴이 쿡 쑤셔왔다.

분명 그 날 허락도 없이 샤오메이를 품은 걸 아그네스도 기억할 텐데, 만나자마자 나를 걱정해 주다니...

“저도 그렇게 생각함다 형님, 황녀님은 형님의 약혼자가 될 분이잖아요..?”

그때, 옆에서 샤오메이가 쭈뼛거리며 아그네스의 말을 얌전히 거든다. 그런데 그 표정을 보니 복잡한 감정이 담겨져 있는 게 느껴진다.

그건 아마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감정일 거다. 저렇게 사람 좋은 아그네스 모르게 나를 먼저 덮치려고 했었고, 실제로 방까지 찾아와서 내 두 번째 연인이 되기를 자처했으니깐.

나보다 가슴이 복잡할 거다. 바이올렛이라면 몰라도 아그네스는 샤오메이랑 친하지도 않은데, 내 첫 번째 연인이 되었으니 얼굴을 부대끼며 살아야 하니깐.

“샤오메이, 너무 주눅들지 말아요.”

그런 샤오메이를 보더니, 아그네스가 샤오메이를 자신에게로 가볍게 끌어와 나랑 샤오메이를 동시에 안아준다.

“두 사람 다 아마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죠. 저는 다 이해해요. 저는 2번의 삶이었지만, 두 사람은 4번의 삶이나 이어지지 못했다고 했잖아요?”

“...아그네스 황녀님...”

“물론, 제국 사람인 저로서는 일부다처가 이해하기 힘든 제도긴 하지만.. 아르틴이 생각 없이 샤오메이를 받아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니, 저보다 더 많은 고민 끝에 받아들였겠죠.”

죄책감과 미안함이 뒤섞여 내가 눈을 못 마주치고 샤오메이가 훌쩍거리자, 아그네스는 샤오메이의 머리를 내게 했던 것처럼 다정하게 쓰다듬어줬다.

“대신 앞으로 이런 큰일은 저랑 상담해줬으면 좋겠어요. 약속해줄래요. 아르틴?”

이것의 정실의 품격인가? 다정하게 우리를 포옹하며 받아들여주는 아그네스를 보고 있으니 음욕에 가득차서 몰래 둘이 야한 짓을 하려던 내가 스스로 반성이 된다.

“앞으로는 중요한 일이 있으면 꼭 아그네스랑 상담할게...”

내가 얌전히 대답하며 수긍하자, 아그네스는 장하다는 듯 어깨를 토닥여준다. 그 토닥임에 무언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게 느껴진다.

이런 소소한 따뜻함도.. 때로는 좋은 것 같다.

콰앙!!!

그때, 창고의 문이 다급하게 열리며 우리의 훈훈한 분위기를 박살냈다.

“아르틴! 아르틴이 남장 여자라는 소문이 진짜야?!”

아니 시발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셋이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왔는지 놀라서 다급하게 들어오던 바이올렛은 우리 셋이 다정하게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듯이 눈을 껌뻑거렸다.

아니 그보다, 무슨 소문이 돌고있다고?

“내가 남장 여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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