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샤오메이와 데이트 #03
* * *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말없이 마부에게 요금인 3금화보다 훨씬 많은 20금화를 요금으로 지불했다.
물론 마부 아저씨도 그 돈을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좋은 시간을 보내라며 고고히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분명 꾀죄죄한 마부였을 텐데, 나는 왠지 그 뒷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갈까?”
“흐으아아..네..”
아직도 성행위의 열기에 잠겨있는 듯 몽롱한 표정의 샤오메이가 내 팔에 안겨왔다. 이런 모습을 봤는데 몰랐을 리가 없지.
‘마부 선생님.. 이름은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나는 저 멀리 떠나가는 마차를 향해 꾸벅 인사한 후, 샤오메이를 데리고 번화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
나는 아직 붕 떠 있는 샤오메이를 좀 쉬게 해주려고 했으나, 샤오메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나를 어디론가 끌고 왔다.
“여기는...”
“형님이 가장 좋아하는 곳 중 하나 아님까? 스트레스받으시면 늘 여기서 폭식하셨지 말임다!”
카페 플라워시드.
번화가 외곽에 위치한 이 카페는 내가 대머리 기사라는 칭호로 자존감이 나락까지 떨어졌던 시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발견했다.
나는 매운 음식을 진짜 미칠 듯이 좋아했다. 혀가 아릴 정도로 매운 음식을 잔뜩 먹은 후 단 음식으로 입을 달래는 것을 현실의 나는 야스라고 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세계에 매운 음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공화 연방의 음식중 몇 개가 살짝 매울 뿐, 하바네로 고추 따위로 단련된 내게는 간에 기별도 안 갔으니까.
“여기 좋지..맞아, 아직 여기한 번도 안 왔었네.”
하지만 플라워시드의 매운 음식들은 그런 나를 만족시킬 정도로 매웠다.그 매운 맛에 반해버린 나는 2회차 이후로 언제나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다.
“여기를.. 기억해주고 있었네?”
“여기서는 형님이 늘 행복한 얼굴로 식사를 하셔서 기억에 남았슴다.”
뭔가 가슴이 찡한 감각이 든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기억해주는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자, 머뭇거리지 말고 들어가자고요 형님!”
감동에 취해 머뭇거리는 나를 샤오메이가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빈자리에 편하게 앉으시면 되요!”
카페 주인인 예니카씨가 익숙한 얼굴로 인사해왔다. 마치 동심어린 장소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에 나는 조금 신이나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들었다.
“두 분 다 여기는 처음이시죠? 저희 카페는..”
“일단, 여기 있는 해물 파스타부터.”
꼼꼼한 예니카씨는 카페의 모든 손님들의 얼굴을 외우고 있는 편이다.
그 말은, 나는 매 회차마다 듀토리얼 같은 설명은 전부 들었다는 소리기도 했다. 그러니 나는 과감하게 설명을 스킵하고 중간의 메뉴를 가리켰다.
“그 아래에 있는 메뉴 전부 다 주세요.”
“..네? 전부요? 저희 가게는 양이 많고 매운 요리는 정말 아주 매워서 힘드실 거예요”
“괜찮아요, 다 알고 있으니까. 샤오메이도 배고프지? 애는 연방 해물 볶음밥이랑, 죽순이 들어간 국수 하나 주시면 돼요.”
8가지나 되는 메뉴를 전부 시킨 나를 보고 당황하던 예니카씨가 주문을 받고 머뭇거렸지만, 내가 메뉴판을 접고 샤오메이와 대화를 시작하자 결국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를 시작했다.
“아, 여기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오니 너무 기분 좋다.”
“..오랜만이라니, 형님은 얼마 만에 오시는 검까?”
샤오메이의 질문에 나는 손가락으로 시간을 세며 되짚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1년은 장벽 너머에서 돌아다녔고, 그 전 1년은 계약하고 아티팩트 찾느라 소비하고, 은거 기인들도 만나러 다녔으니... 한 3년? 4년? 그쯤인 것 같네.”
말하고 보니 아그네스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기껏 사귀어 놓고 나는 무척이나 바빴고, 온갖 험지에 같이 따라와 나를 도와줬으니 말이다.
“..제 기억 속에 형님은 늘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보였슴다. 그거, 마왕 하고 관련된 일임까?”
쿨럭.
먼저 나온 음료수를 빨대로 쪼륵 들이키던 순간 들려온 마왕에 대한 질문에, 나는 조금 당황해서 사례가 들릴 뻔했다.
“사람들은 용사 카이엔 이라면서 그 기생오라비만 칭찬해주지만, 전 기억하고 있슴다. 매번 마왕 하고 싸우기 위해 열심히 움직인 건 형님 아님까?”
그게 그렇게 되나?
생각해 보니 나야 어차피 마왕을 토벌할 주인공을 질질 끌고 다니다 답답해서 내가 했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나 혼자 마왕 잡겠다고 안달이 난 걸로 보일 수도 있었겠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그래도, 나 아니어도 그 녀석이 움직이긴 했을 테니까...”
별생각 없이 말하던 나는 문뜩 샤오메이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래 샤오메이?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졌는데..”
“왜 늘 오라버니는 혼자서 고생을 사서하고 다니는 거예요?”
갑자기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말투에, 나는 순간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했나 싶었지만, 화가 났다기보다는 슬픔이 담긴 표정에 머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매번 혼자서 알고 움직이고, 혼자서 고생하고, 주변에 오라버니보다 훨씬 강하고 대단한 사람들이 넘치는데 왜 오라버니가 굳이 나서는 건데요!”
“..아니, 카이엔이 답답하고, 주변 애들 설득하기도 힘들면 내가 먼저 움직이는 거지..”
“답답한 건 오라버니가 가장 답답하다고요!”
쾅! 샤오메이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나를 울먹이는 눈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나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샤, 샤오메이. 일단 진정하고..”
“마수들이 우글거리는데, 혼자 식량 찾겠다고 맨날 다쳐서 들어오고! 바이올렛 언니 도와주겠다고 악마랑 계약했다가 마왕과 내통했다고 몰려서 처형당하고! 혼자 마왕 죽이겠다고 우리 다 떼어놓고...혼자 장벽 넘어가고...스트레스받아서...대머리되고...히극...”
샤오메이가 내가 잘못 한 걸 일일이 나열하자 나는 할 말이 적어져갔다.
‘아니, 근데 왜 대머리가 된 부분에서 우는 건데..?‘
탈모는 내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닌데. 왠지 많이 억울했다. 탈모는 전부 카이엔과 유니콘 탓인데.
하지만 펑펑 울기 시작한 샤오메이에게 말할 수는 없어서, 속으로 삭히며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줬다.
커플들이 싸우나 싶어서 화들짝 주방에서 뛰어나온 예니카씨는 내 품 안에서 울고 있는 샤오메이를 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를 보지 마세요. 제 잘못 아니에요.‘
하지만 주변에 있던 손님들과 예니카씨 모두, 나 보고 무슨 잘못을 했냐며 눈빛으로 묻는 것 같았다. 억울해.
**
“그러니까, 저는 이번 생은 오라버니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면 좋겠어요.”
조금 펑펑 울고 난 후, 다시 진정한 샤오메이는 내가 건넨 손수건으로 눈을 닦으며 품 안에 안겨있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라고 해도.. 어떤 걸?”
물론 카이엔에게 한 방 크게 먹여준다는 계획은 남아있었지만, 이건 아직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은 없다. 그 녀석의 귀에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큰일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그네스 언니랑 아예 공개적으로 약혼하는 건 어때요? 그 이상한 소문도 한 번에 사라질 것 같은데.”
“쉿!..약, 약혼? 그건 저번에도 말했듯이 나중에 천천히..”
갑자기 샤오메이가 대형 폭탄을 꺼내 들자, 나는 누가 을까 봐 목소리를 낮추게 하고는 소곤거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가짜 소문에 대형 스캔을 던지면, 빈대 잡겠다고 집에 불 지르는 거랑 다를 바가 없잖아.
“왜 숨기려고 해요? 전 회차에서는 잘도 당당하게 연애하고 다녔잖아요. 오라버니가 뭐가 부족해서 고개 숙여야 해요?”
“아니, 내가 많이 귀찮고 힘들어 지니까 그래... 저번에도 들켜서 반강제로 공개 연애 한 거였고...”
우연히 아그네스의 집무실에 들린 카이엔과 황태자에게 나랑 아그네스가 입 맞추는 모습만 들키지 않았어도, 우리는 좀 더 스릴있는 비밀 연애를 쭉 이어갈 수 있었을 거다.
조금 가슴이 답답해진 나는, 식어가는 음식을 뒤로하고 레몬에이드를 빨대로 쭉 빨았다.
“..그리고 바이올렛 언니. 어떻게 하실 거예요?”
“쿨럭! 쿨럭!”
이번에는 제대로 사례 들렸다. 샤오메이가 등을 탁탁 두들겨주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사례를 진정할 수 있었다.
“바, 바이올렛은 내가 가서 그냥 사과해야지..”
“사과로? 그냥 사과로 끝낸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샤오메이의 눈은, 마치 그걸로 잘도 해결되겠다고 나를 타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왜 화내는 건데 샤오메이..”
“지금이야 그냥 바이올렛 언니죠, 성녀님이 오면 어쩌게요? 둘이 3번째 때 사이좋았잖아요? 지하도시의 창녀는요? 걔랑은 2번째에 반쯤 사귀었으면서.”
말로 명치를 너무 세게 맞은 탓 일까.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설마 여기서 옛날에 썸탔던 여자들이 전부 거론 될 줄이야.
“..아니, 걔네는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잖..”
“그러다가 뭐, 또 만나서 머뭇거리고, 상처 주고 미안해하고? 그런 게 답답하다는 거예요! 누가 누구보고 답답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샤오메이는 얼음컵을 들어 올리더니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켜 속에 화를 식히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선생님께 혼나는 학생처럼 다소곳이 앉아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고.
“오라버니가 여태 동정이었고, 로맨스 같은 거 좋아하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온갖 여자들한테 그렇게 꼬리 치고 다녀놓고, 이제 와서 책임 못 진다고 하면 무슨 난리가 일어날지 생각해 보셨어요?”
“..아니 내가 언제 꼬리를 치고 다녔...미안해.”
억울한 마음에 항변하던 나는, 샤오메이의 노려보는 눈에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진짜 아닌데. 힝.
“제가 성녀나 창녀까지 챙길 생각도 없고 의무도 없지만, 바이올렛 언니는 아니잖아요.”
조금 목소리가 누그러진 샤오메이가, 내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러니깐, 눈 딱 감고 이번 생에만 그냥 3처 4첩 가져도 봐줄게요. 즐겨요 오라버니.”
...응?
“3처 4첩..?”
“네, 아그네스 황녀님이랑, 저랑, 바이올렛 언니까지가 본처. 나머지는 첩으로. 아시겠죠?”
어디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단어의 등장에, 나는 굉장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왕국에서도, 처 하나에 첩 하나만 들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아니면, 설마 그 모든 여자을 다 자기 정식 아내로 들일 생각인가요?”
“아니, 아냐! 나는 오히려 3처니 4첩이니 하는 게 너무 당혹스러워서 그렇지!”
다시 나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하는 눈에, 나는 놀라서 손을 내저으며 진정하라고 달랬다.
그런 내 말에, 샤오메이는 한숨을 내쉬더니 내 손을 움켜쥔 손에 약간 힘을 주기 시작했다.
“믿으세요 오라버니, 나중에 가서 쩔쩔매다가 이도 저도 못할 바에는, 그냥 당당하게 3처4첩 꾸린다고 선언하고 즐기세요. 안 그러면 누구 하나한테 칼 맞고 죽어도 욕 못하니까.”
“...내가 그 정도로 여자를 홀리고 다녔다고? 그런 건 조르바 특기 아닌가..?”
아니, 내가 금태양 짓한 적은 없는데, 조르바가 곁에 있으면서 악영향을 준 탓에 선입견이 생긴 게 아닐까 싶었다.
“조르바 도련님은 선 긋는 건 잘해요. 오라버니처럼 선 못 그어서 오만 여자 다 꼬시고 다니지는 않는다고요.”
“....”
내가 조르바보다 심각하다고?
“기억하세요. 저랑, 아그네스 황녀님이랑, 바이올렛 언니까지만. 나머지는 엔조이. 아니면 첩까지만.”
꽈아악,
내 손을 움켜쥐는 샤오메이의 손아귀의 힘이 무척이나 아프다고 생각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