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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44화 (44/266)

〈 44화 〉 권능 도둑을 추격하다 #02

* * *

마왕을 토벌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아카데미가 설립된 이래, 수많은 천재들이 아카데미를 거쳐 갔다.

그중에는 교수들도 감탄할 만한 천재들이 많았고, 그들은 각국을 지탱하거나 좋든 나쁘든 큰 한 획을 그은 인물이 되었다.

그런 만큼,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다른 마탑이나 대도서관의 학자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그들은 자신의 성취보다 어떤 위대한 제자를 키워내느냐가 자신의 업적이 척도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번 세대는 너무 뛰어난 천재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단순히 천재면 가르칠 때 좋지 않으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미 완성된 천재는 이야기가 달랐다.

“황태자님이 또 새로운 마나 계산식을 창안하셨다는군...”

“학계에서도 이전에 쓰던 계산식보다 훨씬 간편하다고 난리랍니다.”

“마리안느 왕녀님은 홀로 붉은 트롤 군락을 토벌하셨다지..?”

“같이 간 왕국의 전사들은 무기 손질만 했다지요?”

“카이엔 학생은 또! 혼자서! 새로운 중급 정령과 계약했답니다!”

“그 친구는 저번에도 혼자서 마법 써클을 늘리지 않았나요? 혹시 누가 몰래 가르치는 겁니까?”

가르칠 게 없다. 혹은 가르칠 수 없다. 스스로 성장하는 천재들은 같잖은 지식으로 건드리다가는 오히려 망가트릴 수 있다는 걸 아카데미는 알고 있다. 그들은 그저 적절한 과제와 그들이 요구하는 무언가를 내어주는 내어 주기만 해도 영웅이 될 인재들이다.

물론, 아직 타고난 재능에 비해서 미숙한 천재들도 분명 있었다. 스스로 성장하는 천재들과는 다른 미숙한 천재들이야 말로 평상시라면 교수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바이올렛 퍼플크로우 양의 개인지도는 아직도 허가가 안 났답니까?”

“어림도 없겠죠. 대마녀 발부르가가 열심히 가르친 아이를 누가 함부로 손대도록 하겠습니까?”

“조르바 그 친구도 싹수가 참 괜찮아 보이던데, 역사나 군 지휘 쪽으로 꼬셔보는 건..”

“그 친구는 애초에 여자 꼬시느라 수업을 거의 안 듣습니다. 게다가 돈 될 만한 것 말고는 별 관심도 없어 보이고요...”

정말 먹음직한 천재들은 널렸지만, 그들 중 먹을 수 있는 천재는 단 하나도 없다.

개학 이후 1달이 지난 시점에 교수들은 그렇게 판단하고 다른 괜찮은 수재들이나 노력하는 범재들을 찾아 가르치는 것으로 분위기가 정해졌다.

그런 그들의 분위기를 바꾼 것이 바로 아르틴 루드비히의 등장이었다.

“저 마나 운용력..! 어떻게 해야 저 정도 수준의 마나로 제국의 기사를 상대할 수 있는 걸까요?”

“방금, 1써클 마법사가 3써클 보조 마법을 2개나 쓴 것 봤습니까? 그렇다고 회로를 과부하 시킨 것도 아니고. 아티팩트라도 쓴 걸 까요?”

“오오! 저 검 피하는 움직임! 저건 근골이 부족해서 그렇지 타고난 무재요 무재!”

시온 이드리스와의 짧은 결투에서, 아르틴이 보여준 다방면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인 전투술에 많은 교수들은 눈을 반짝였다.

학생기록부에 적힌 아르틴의 입학 성적은 1써클 마법사가 전부라는 소식이 교수 커뮤니티에 퍼지자, 그 흥분은 배가 되었다.

“들었나? 아르틴 그 학생은 가문에서도 버린 셈이라서, 제대로 된 가정교사 한 번 없었다는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그 루드비히 군이 불세출의 천재라도 된다는 건가? 그 아이는 수업도 아직 못 들었잖나! 어디서 그런 걸 배웠겠어!”

“대신 그 무신의 딸이 직접 사사했다는 이야기 못 들었나? 단 3주 만에 보잘것없는 학생이 다이아몬드가 된 걸세! 아니, 애초에 다이아몬드였는데 우리가 몰랐던 거지!”

혼자서 성장하는 천재라면 이 나이가 되도록 성장을 못 했을 리가 없다.

미숙한 천재들 중에서 유일하게 먼저 가르친 스승은커녕, 자신이 직접 사사하여 뒷배가 되어줄 기회다.

한 차례 열기가 잠들었던 교수들 사이에서 새로운 열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들박이 가능한 천재가 나타난 것이다.

“이보게 엘빈 교수, 자네는 1학년 담당이니 아르틴 학생을 보지 않았나? 나 좀 한번 소개시켜 주게!”

“죄송합니다 수석교수님. 지금 저희도 아르틴 학생이 언제 수업에 나오나 전전긍긍하고 있는 터라.”

“허어, 그 학생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한다는 말인가!”

문제는 수업을 안 나온다. 강제로 호출할만한 명분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아카데미의 자유로운 교육철학은 수업에 나오지 않는 학생을 강제로 출석하게 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먼저 개인적으로 접근했다가는 다른 파벌의 교수, 혹은 늙었지만 이빨이 빠지지 않은 입맛을 다시는 호랑이 같은 노교수들에게 찍힐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기묘한 상황이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런 답답한 상황에서, 유난히 눈에 띈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이네 세니아 교수! 학창시절에 내가 자네를 참 예뻐했던 거 기억하나?”

“어허, 세니아 교수는 내 수제자나 다름없는 학생이었는데, 자네가 뭘 챙겼다고 하는 건가!”

“우리 학회에서 만났던 것 기억하나? 여자 교수들끼리 뭉쳐서 으쌰으쌰 하기로 회식 때 의기투합 했었지?”

“자, 잠시만요! 한 분씩 천천히 이야기 해주세요!”

아르틴이 소속된 1학년 B반의 세니아 교수는 이제 막 교수로 발탁 된, 파벌 문제 같은 복잡한 정치에도 끼지 않았으면서도 인맥은 넓은 젊은 부교수를 향해 쏟아진 관심과 러브콜은 대단했다.

심지어 아르틴을 데리고 오면 주임교수 까지 밀어주겠다는 노골적인 제안까지 나오자, 파벌의 수장 격이나 그 자체로 영향력 높은 노교수들은 이 열기 가득한 사태의 절충안을 내놓았다.

**

“아무튼, 아르틴 학생을 수업에 나오게만 해주게, 누구를 선택할지는 아르틴 학생에게 맡기자고.”

세니아는 여태껏 흘려온 식은 땀 보다 더 많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늘 사람들에게 불쾌함만 주었던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해 두꺼운 투박한 로브를 입느라 땀을 흘리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등골이 서늘해지는 식은 땀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알겠습니다 학장님...제가 잘 설득시켜 볼게요...”

눈앞에서 방금 자신에게 말을 꺼낸 것은 아카데미의 학장이었으며, 그 옆으로 펼쳐지듯 앉아있는 교수들은 한명 한명이 젊은 시절 전설을 세운 전대의 영웅들이나, 혹은 불세출의 천재로 이름을 떨친 학계의 선구자들 뿐.

“이런, 학장님. 세니아 교수가 너무 얼어붙었잖아요? 젊은 부교수가 이 늙은 사람들한테 불려왔으니 얼마나 긴장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이 늙은이가 우리 젊은 교수를 배려하지 못한 것 같구만,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자리에 부,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어디에 눈을 둬도 부담스러운 얼굴뿐이다. 자신이 어쩌다 이런 자리에 불려오게 된 걸까...!!

“너무 부담 갖진 말게, 세르게이 선생이 자리를 비웠으니 부담임인 자네에게 말하는 거야.”

이 순간, 세니아는 늘 자리를 비우는 세르게이 선생님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연금술 학부의 예산을 전부 횡령해도 이런 초호화진의 청문회는 열리지 않았을 텐데.

“세니아 교수 자네가 이해해주게, 젊은 자네가 보기에는 늙은이들이 참으로 주책 맞다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다들 때 묻지 않은 원석이 혹시 흠집이라도 날까 걱정인 게야. 다들 학자 이전에 교육자가 아닌가.”

그 말에 동의하는 말이 웅성거리며 나온다. 물론 세니아가 저 말에 불만이 있다고 해서 반박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주임교수도 아닌 자신은 저들이 보기엔 호랑이 앞의 병아리처럼 귀여운 존재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가 세니아 교수를 너무 오래 붙잡아 둔 것 같군요. 학생들 과제니 뭐니 신경쓸게 많을 텐데. 가봐도 좋아요 세니아 교수.”

“아, 네! 알겠습니다!”

그 말에 얼굴이 환해진 세니아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교수들에게 꾸벅 꾸벅 인사를 하고서야 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세니아 교수님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그것만 기억해주면 좋겠군요.”

‘..방금 부담 갖지 말라고 하셨잖아요오오...’

쿵, 문이 닫히자 세니아는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아 이를 꽉 깨물어야 했다.

이제 어쩌지? 아르틴 군에게 가서 억지로 수업을 들으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제발 수업 좀 들으라고 다리라도 붙잡고 메달려야 하나?

“...아니, 그래도 학생에게 부담감을 떠넘길 수는 없지..”

최대한 온건하게 잘 말해보자. 나는 학생들을 지켜주는 방파제 같은 존재니깐.

주먹을 꾸욱 쥔 세니아는 그래도 아르틴이 수업을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복도를 힘없이 걸어갔다.

이 모든 게 아르틴과 상담하기 하루 전까지 일어난 일이었다.

***

“그러면, 누가 나와서 골렘의 핵을 베어보겠나?”

내가 권능 도둑을 잡으러 다니려고 제대로 수업을 듣기 시작한지 정확하게 하루가 지났다.

“.....”

“자아...누가 나와서 시범대로 한 번 따라해 주면 참 좋겠는데...”

이 노골적인 시선, 교수도 학생들도 나서는 사람 하나 없이 나를 쳐다본다.

“네..제가 해보겠습니다.”

“옳지! 그럼 아르틴 군이 해보겠나? 검은 뭘 쓰나? 아밍소드? 롱소드?”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자, 대놓고 들떠하는 저 교수님의 표정을 봐라.

‘옛날에 내가 알려달라고 사정할 때는 한 달을 넘게 잘 보여야 겨우 가르쳐 줬는데.’

검잡는 법도 제대로 모르던 시절, 재능도 없고 자질도 없는 내게 친절했던 교수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교수들의 취향을 하나하나 분석해가며 잘 보여야 했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학예회도 아닌데 교수와 학생들은 모든 수업마다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하며 지켜보는 꼴이다.

‘이래서는 권능 도둑을 어떻게 찾아? 누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나를 관찰해야 하는데 나 말고 하는 사람이 없네.’

한숨을 내쉬며 뒷자리에서 앞으로 걸어 나온 나는, 버릇대로 롱소드를 집어 들었다.

“롱소드인가! 자네 체구에는 조금 검신이 길 텐데, 아밍소드가 낫지 않겠나?”

“괜찮습니다. 그냥 베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아, 물론! 그냥 베기만 하면 합격이라네! 쉽지는 않을 거야?”

그야 합격이겠지. 애초에 실전에 입각한 던전에 대한 강의에서 골렘의 핵을 베는 건 2학기 말에나 나올 강의다.

고작 1학년이 오러 소드를 펼쳐봤자 얼마나 대단하겠나. 골렘의 핵을 베는 건 원래 흠집만 내도 합격인 수업 과제다.

‘지루하네, 그냥 애들이랑 놀러다니고 싶은데.’

오러 소드를 펼치는 데 잡념이 깃들면 안 된다. 내가 검술을 막 베우던 시절 귀가 닳도록 듣던 이야기였지만, 지금의 나한테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슈웅!

“오오! 오러 소드를 이렇게 깔끔하게 펼치다니! 누구에게 배운 건가? 혹시 샤오메이 학생에게 배웠나?”

“...예에 뭐, 대련 전에 잠깐 배웠습니다.”

내가 깔끔하게 롱소드의 전체를 휘감은 붉은 오러 소드를 뿜어내자, 학생들과 교수의 입에서 감탄이 쏟아져 나온다.

영 감흥이 없다. 전에 이런 반응이 나왔을 때는 좀 즐겼는데, 마치 초등학생들 앞에서 이차 방정식 푸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것 보다는 샤오메이나 아그네스랑 알콩달콩 연애나 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가볍게 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다리는 무겁게, 상체는 가볍게, 오른팔을 길게 뻗어 마나의 흐름을 직선으로 만든다. 언제든 강한 마나를 분사시켜 오러 소드의 위력을 더할 수 있게.

─제국 검술식, 용 베기 자세.

서걱.

단번에 원을 그린 검의 궤적에 따라, 골렘의 핵이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지며 땅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 본 교수는 감탄하며 베인 핵의 조각을 이리저리 살핀다.

“이, 이렇게 깔끔하게 골렘의 핵을 베다니. 그 자세, 혹시 제국의 검사에게 검을 배운 적이 있나?”

“아뇨.. 그냥 교수님이 취한 자세를 보고 비슷하게 따라한 거죠. 예.”

“한번 보여준 것만으로 이렇게 깔끔하게 따라하다니! 나중에 한번 검술학과 교수실로 찾아오게! 밥이라도 한끼 하면서 이야기 하자고!”

네네, 하고 적당히 대답하며, 검을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가자 학생들의 시선이 크게 달라진다.

“방금 봤어? 검사도 아닌 애가 오러 소드를 50cm나 뽑은 거?”

“저렇게 검을 잘 쓰면서 결투 때는 왜 검을 안 쓴 거래..?”

“저게 다 처녀라서 잘 보인 덕에 유니콘하고 계약해서 얻은 힘이래..!”

저 시발 아르틴 남장미소녀처녀 설은 아직도 안 사라졌네.

투덜거리며 자리로 돌아오자, 샤오메이는 역시 형님! 이라는 눈으로, 조르바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조르바에게 회귀 숨기는 것 아니었냐고 되 물을 수 있지만,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냥 실력을 조금 보여주는 거다.

생각해봐라, 수업 때 비실거리던 녀석이 시험에는 갑자기 만점을 받는다? 그 뒤에 교수들이 와서 쪼아댈 걸 생각하면 더 머리 아프다.

‘적당히 교수들 비위 맞추는 게 편하지. 어차피 시온 이긴 시점에서 뭘 해도 의심할 텐데.’

...그리고 아그네스하고 약혼을 미루기는 했지만, 언젠가 할 거라면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적어도 재능 있는 천재의 모습을 보여줘야 조금이라도 납득하겠지.

“언제 검술까지 공부한거냐 아르틴? 나는 전혀 몰랐는데.”

“아, 샤오메이랑 배우면서 제국 검술도 좀 배웠지. 시온이 쓰는 게 제국 검술이잖아?”

“...아, 그렇지.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부터는 멋진 모습만 보여주는 걸? 이 형님은 감동했다.”

저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는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닌 것 같지만... 슬슬 조르바에게 밝혀야 하나 깊게 고민이 든다.

“다음에는 무슨 강의 들으러 갈 거야? 몸 쓰는 건 좀 피하고 싶은데.”

“아, 천체점성학문의 기초랑 마법의 역사가 있슴다.”

윽, 어느 쪽이든 바이올렛이 들을만한 수업이잖아.

내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샤오메이가 엄한 표정으로 내게 작게 속삭여온다.

“그렇게 뒤로 미루지 말고, 슬슬 만나서 이야기 해보십쇼 형님.”

..지금 나는 바이올렛과의 만나는 걸 미루고 있다. 대화를 분명 해야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권능 도둑을 잡는다는 핑계로 흩어져서 수업을 듣기로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누구나 조금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이 상처 준 여사친에게 가서 선물을 주고 화해한 다음, 3처 4첩을 하기로 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렇게 미뤄봤자 내일 다시 모이기로 했으니 의미 없슴다. 그냥 오늘 저녁 먹자고 이야기해서 부르십쇼.”

“...불러서 사과만 하면 안 될까? 일단 천천히 말하는 게..”

“아뇨, 형님 또 내버려두면 질질 끌어서 안됨다. 기억하십쇼. 3처 4첩.”

3처 4첩에 대한 샤오메이의 기묘한 집착 때문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다.

하렘이 싫은 건 아니지만,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뺨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 아닐까?

짜증에 시선을 돌리니, 내 옆에서 당근 주스를 쪽쪽 빠는 유니코르가 고개를 갸웃 거린다.

“달라고 봐도 안 줄 거다! 당근 주스는 본좌가 전부 마시려고 시킨 거다!”

내 사용인이라는 신분을 핑계로 데리고 다니고 있는 유니코르 녀석은 별 도움도 안 된다. 매 수업마다 지루하다고 징징대서 당근이 섞인 음식을 입에 물리니 좀 잠잠해 지더라.

거기에 카이엔 녀석은 나를 피하는 건지, 같은 수업에 들어오질 않는다. 저번에 마주치니깐 몸을 돌려서 클레어랑 같이 나갔다.

잡으러 가려다가 들어오던 교수님에게 붙잡혀서 말도 못 걸고. 정령을 다루는 녀석의 탐지 능력이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텐데.

‘아, 스트레스 받아.’

스르륵.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나는 문뜩. 내 손에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뭔가 싶어 손을 바라보자. 머리카락이 너무 쉽게 빠져 있었다.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혀...형님...? 너무 쌔게 움켜쥔 거...아님까...?”

내 손에 잡혀있는 머리카락을 본 건지, 샤오메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스트레스가, 나를 좀 먹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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