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권능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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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북쪽에는 그 너머의 북쪽 땅을 가로막는 거대한 성벽은 말을 타고 7일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도 반대쪽 끝자락에 닿을 수 없다고 한다.
그곳에 종군하는 모든 제국의 병사는, 마왕이 깨어난 이후로 300년에 걸쳐서 성벽을 넘으려는 마수와 마족들을 막기 위해 장벽 너머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처럼 제국을 지키기 위해 소비되고 있다.
그런 병사들에게 주어진 삶은 강자생존의 원칙, 오로지 2년간 살아남아서 자신의 강함을 증명해야지만 그 고된 장벽의 복무에서 살아남아 검증된 강골로써 다른 지역에 배치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런 고된 군생활을 버티지 못하는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다.
그런 자들은 자연스레 목숨을 걸고 탈영했다.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어둠늑대의 이빨보다는, 차라리 붙잡혀 교수형에 당하더라도 당장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탈영병들은 수많은 이유로 죽는다.
북부 순찰대에게 걸려 그 자리에서 즉결처형 당하기도 하며, 제국의 수색대에 붙잡혀 눈보라가 몰아치는 전장에서 마수들을 유인하기 위해 힘줄이 끊어진 채 미끼로써 사용된다.
때로는 탈영병에게 걸린 현상금을 노린 현상금 사냥꾼과 마을 사람들에 의해 붙잡혀 끌려가 죽기도 하니, 북부 장벽에서는 그런 탈영병들을 멸칭을 담아 산송장이라고 불렀다.
1년 전, 리치 군단장의 시체들의 행진을 견디지 못한 날 수많은 산송장들이 전장을 도망쳤다. 대부분의 산송장은 제국 기사의 검에, 혹은 산송장이 품은 공포를 감지한 시체들의 파도에 휩쓸려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 수없이 많은 가치 없는 죽음을 지켜보다가 장벽 뒤로 도망치는 대신 장벽을 넘어 마족의 땅으로 도망친 무리가 있었다.
이 세 남자는 장벽의 근처에 위치한 마을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라고 할 만한 인물들이었다. 어릴 적부터 마을의 괴팍한 노파의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세 남자는 시체를 따돌리고 장벽 너머에서 살아가는 법을 얕게나마 알고 있었다.
세 남자들은 전장에서 도망친 직후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굳게 믿었다.
자신들이 빠진 부대는 방어선이 뚫려 방금 전까지 같이 싸우던 전우들이 시체들에게 씹어 먹히긴 했지만, 만약 도망치지 않았다면 결국 지친 자신들이 시체들에게 씹어 먹혀 마왕의 하수인이 됐으리라.
첫 번째 남자는 사냥꾼이었다. 키가 훤칠하고 리더십이 있던 그는 고향 마을에 결혼을 약속한 처녀도 있었다.
사냥꾼은 제국이 만약 전투에서 이겼더라도, 결국 그 시체들 사이에서 자신들을 찾지 못할 테니 단 3달만 장벽너머에서 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남자는 목수였다. 키는 사냥꾼 보다 세 뼘 넘게 작았지만, 과거 멸망한 드워프의 후손인 목수는 손재주가 좋고 힘과 체력이 좋았다.
목수는 세 사람이 지낼 은신처를 만들고, 자신들이 들고 도망친 무기를 손보며 혹시 모를 마수들과의 싸움에 대비 할 방법을 아는 남자였다.
세 번째 남자는 불량배였다. 체구도 마르고 변변찮은 장기가 없던 불량배는 늘 마을의 주점에서 맥주 한잔으로 하루 끼니를 때우며, 시간을 축내는 남자였다.
늘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던 불량배는, 마을에 징집관이 찾아왔을 때 드디어 자신이 출세할 길이라며 가장 먼저 병사가 되기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정신이 반쯤 무너져 두 남자가 구해오는 식량을 갉아 먹는 기생충 같은 남자였다.
하지만 사냥꾼과 목수는 불량배를 탓하지 않았다. 그들이 장벽에서 겪은 일은 그만큼 끔찍한 전투의 연속이었으며, 옛날에 불량배가 주점에서 떠들던 허풍을 떠올리면 우울한 마음이 조금 가셨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 남자는 꽤 오랜 시간을 장벽 너머에서 보냈다. 2달이 지난 시점에서는, 정신이 무너져있던 불량배조차도 얄팍한 희망을 느끼며 눈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으니깐.
그러나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지막 1달은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북부를 덮친 눈보라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기에 오염된 이 땅에서 그나마 먹을 수 있던 몇 안 되는 식물들은 땅에 깊게 얼어 캐갈 수가 없었고, 그나마 눈보라가 그친 날에는 마수들이 주변에 들끓기 시작했다.
지하의 좁은 땅굴 아래에서, 세 사람을 천지에 널린 눈을 퍼먹으며 하루하루 끔찍한 공포와 갈증을 버텼다. 이 눈보라가 지나가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서로를 다독이며 믿고 버텼다.
허나 작은 희망도 눈앞에 닥친 허기와 공포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2주가 지나자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3주째에도 그들은 굶주렸으며,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들려오는 마수의 울음소리에 잠도 자지 못한 탓에, 자신이 현실에 있는 건지 악몽 속에 있는 건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4주째의 야심한 밤, 작게 흐느끼는 소리에 눈을 뜬 사냥꾼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것 인지 잠에서 깬 건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나무를 잘라서 만든 동굴의 입구로 비추는 달빛에, 희미하게 사람의 형상이 보이자 사냥꾼은 의아함에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드디어 눈보라가 그친 거야?”
서걱. 서걱, 무언가를 자르는 소리, 사냥꾼은 여전히 잠에 취한 탓에 달빛이 무엇을 비추는 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무언가 섬뜩한 기분이 들어,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지금 뭐하는 거야... 혹시 말하지만 털 옷은 먹으면 얼어 죽ㅇ...”
마치 괴수처럼 웅크린 사람의 형상, 그 어깨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눈에 담는 순간, 사냥꾼은 자신이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그랬듯이.
불량배는 목수를 썰어 먹고 있었다. 기괴하게 골격이 뒤틀린 불량배는 입가에 목수의 피와 침이 뒤섞인 기분 나쁜 액체를 줄줄 흘리면서도, 눈은 즐겁게 웃으면서 오랜만에 먹는 고기를 탐하고 있었다.
아아, 사냥꾼은 자신의 입에서 쇳소리 같은 짧은 비명을 내며 뒷걸음질 쳤지만, 달빛이 비추는 나무 문 너머에서, 이곳을 들여다보는 마수들의 눈동자가 느껴졌다. 사람의 피냄새를 감출 눈보라가 오늘 밤 끝나고 만 것이다.
너무나도 끔찍한 악몽이다. 빨리 눈을 뜨면 좋겠다고 사냥꾼은 무력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한 달이 되던 날, 불량배는 모두가 기억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마왕의 영역에서 내린 눈에서 끝없이 섭취한 마기와, 인간성을 포기한 순간 귓가에 들린 달콤한 목소리가 내민 계약을 받아들인 탓 일까.
그런 불량배 앞에 나타난 존재는, 일찍이 마왕의 군단장 중 하나인 리치라 불린 자였다.
“인간은 고독이라는 것을 만든다고 하지, 항아리에 독충을 가둬두고 마지막 한 마리가 살아남을 때 까지 서로를 잡아먹게 두는 거야. 그럼, 최악의 도구가 탄생하는 거지.”
텅 빈 해골 너머로 비추는 섬뜩한 붉은 안광은, 자신이 만들어낸 도구를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기나긴 불멸 속에서 리치가 즐기는 유일한 유희는, 필멸자를 뒤틀어 자신의 창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전부였으니깐.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고독’은 꽤 수작이었다. 기대도 안한 범골 셋을 사용했을 뿐인데, 완성된 고독은 너무나도 뒤틀린 탓에 자신도 예측하기 힘든 마기를 끌어안고 있었다.
살기 위해 몸을 웅크린 탓 인지, 집중하지 않으면 바로 앞에서 관측하고 있는 자신도 인지하기 힘들 정도로 마기를 감추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향해 번뜩이는 눈에는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지켜낸 인간성이 남아 있었다.
“인간들은 너 같은 녀석들을 산송장이라고 부른다지?”
리치가 가볍게 다가오라고 손짓하자, 고독은 짐승처럼 리치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짐승도 사람도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를 인지할 수 있다면, 짐승 같은 사람도, 사람의 탈을 쓴 짐승도 그리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드는 군, 너를 산송장이라고 부르도록 하지.”
리치가 손짓하자, 리치의 로브 안쪽에서 작은 보석이 하나 떠올라 산송장의 미간에 박혔다. 산송장은 끔찍한 고통에도 이를 악물었다. 고통과 함께 차오르는 힘이 너무나도 달콤하게 산송장의 끝없는 욕망을 채워나가며 즐거움을 줬다.
“가서, 자신을 신이라 칭하는 짐승들의 힘을 훔쳐라, 그 힘으로 인간들이 아카데미라고 부르는 곳을 지옥으로 만들어라. 네가 겪은 끔찍한 것들을, 인간들의 뇌에 깊이 새겨 놓거라.”
산송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으로 인해 이야기의 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마기로 인해 변질 된 감각은, 저 말을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을 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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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귀족이었던 대니얼은 아카데미로 가기 위해 마차를 타고 있었다. 백작가의 둘째 아들인 대니얼은 이번 아카데미 행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잘나가는 행정가인 큰형이 사실상 가문의 후계자로 확정 된 이상, 대니얼은 늘 가문에서 기를 펴고 살지 못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는 다를 거라고 행복한 상상에 빠지고 있었다.
또래의 남자 아이들과 친해질 수도 있고, 자신의 특기를 찾아 당당히 가문에서 독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참한 여자아이와 즐거운 연애를 하며 보낼지도 몰라.
자신을 호위해주는 가문의 기사도 말수가 적은 게 흠이었지만 참으로 듬직해 보였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아버지가 붙여준 가문에서 세 번째로 강한 기사님 이였다.
그러니 분명 내일은 즐겁게 아카데미에 도착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래야만 했지만.
“살, 살려주세요! 저는 귀족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제 몸값을 치룰 겁니다!”
땅바닥을 굴러다니는 말과 마부의 모가지, 갑자기 마차를 습격한 무뢰배를 상대하겠다며 나간 기사는, 1분도 지나기 전에 양팔이 뜯겨 나간 채 쓰러져 있었다.
“제발, 저희 가문은 광산도 있고 수도와도 그리 멀지 않아서, 분명 많은 돈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제발..!”
어쩌면 다니엘의 장점은 상황 파악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런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고 얼어붙거나 혼비백산해 풀린 다리로 기어 도망치는 대신, 당장 무릎을 꿇고 울음을 참으며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에 대해 상세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돈? 광산? 귀족?”
섬뜩한 노란 안광을 번뜩이는, 사람인지 뭔지도 모를 존재가 자신을 보며 중얼거리자, 대니얼은 더욱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몬스터는 아닐 거라는 자신의 예감이 맞았으니깐.
“네! 네! 정말로,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정도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살아만 있다면, 분명 아버지가 추적대를 보내실 터다. 어쩌면 몸값을 내어주셔서 정말로 자신이 풀려날지도 모른다. 살아만 있다면, 아카데미는 내년이든 내후년에든 가면 그만이다.
“...부럽네, 부러워, 정말 부러워. 즐겁겠지? 인생이 행복하겠지?”
그런 자신의 말을 듣자, 눈앞의 존재는 부럽다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가 말씀입니까? 돈이라면 드릴 테니..”
“돈도 좋지만, 나는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게 더 부러워...”
저벅저벅,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형체는, 달이 가려진 어두운 밤이라 제대로 인식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건 몬스터라기 보단 차라리 동화 속에 나올법한 못된 괴물의 형태에 가까웠다. 인간이 나쁘고 흉측한 인간의 형태를 한 무언가를 떠올린다면 이런 형태가 나올 것 같았다고, 대니얼은 생각했다.
“네 이름이 뭐지..?”
“대니얼, 대니얼입니다! 대니얼 하겐헤르츠!”
그 대답에 괴물은 입이 찢어질 듯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자신을 보는 눈이 따스해짐을 느낀 대니얼은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부터는 내가 대니얼이야. 대니얼 하겐헤르츠.”
우득.
그것으로 대니얼 하겐헤르츠는 죽었다. 산송장은 그것에 별다른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대니얼과 기사의 피에서 피어오른 마나와 혈기가 산송장을 감싸자, 산송장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산송장은 ‘대니얼 하겐헤르츠’가 되었다.
거대한 짐승에게서 권능을 훔친 이후로 생긴 새로운 능력이었다. 산송장이 죽인 사람을 섭취하고 그 힘을 흡수하면, 그 사람의 기억과 모습을 ‘훔칠‘ 수 있었다.
“아카데미, 히힛, 나도 이제부터 귀족나리다. 히힛, 즐거운 학교생활!”
아카데미에서는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할수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문뜩,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한 ‘대니얼‘은 항구로 향해 기괴한 달리기 자세로 뛰기 시작했다. 말보다 빠르고 거미보다 흉측한 모습이었지만, 그 기척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분명 내일은 즐겁게 아카데미에 도착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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