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권능 도둑을 추격하다 #03
* * *
와그작. 와그작.
나는 학교 본관 옆에 있는 카페테리아에 앉아, 우직하게 검은 콩을 씹고 있었다.
“더! 더! 더 드시는 검다 형님!”
“힘내서 먹어라 아르틴! 인간은 털갈이를 하면..푸흡...많이 추해지니 말이다!”
어째선지 과할정도로 반응해,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수업을 뛰쳐나간 샤오메이는 볶은 검은콩을 한바구니를 가져와서 나를 앉히고 먹이기 시작했다.
유니코르 녀석은 이 광경이 웃기기라도 한 건지, 중간 중간 웃음을 터트리면서 당근 주스를 쪽쪽 빨며 나를 놀려댄다.
“이런 거 다 소용없다니깐...”
“안 됨다! 그대로 뒀다가 또 머리가 홀라당 벗겨지면 저는 무슨 낯으로 다른 사람들을 봐야함까!”
사실, 정말로 다 부질없는 짓이 맞다. 2회차 때의 내가 머리에 좋다는 온갖 좋은 건 다 먹어 봤지만, 결국 소용 있던 게 전혀 없어서 가발이나 투구, 최소한 모자는 늘 상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 미역도 가져왔어. 꼭 챙겨 먹어.”
샤오메이의 닦달에 검은콩을 계속 씹는 내 맞은 편 의자에 자리 잡고 앉은 건 조르바나 아그네스가 아니라,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그렇게 만나려 했던 카이엔이였다.
당장 불치병 환자를 안쓰럽게 보듯이 바라보며 내게 미역을 내미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내 옆에서 계속 깐족거리는 유니코르 만큼이나 괘씸하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탈모의 시작은 너네 둘이었어.
“나를 정령으로 감시했나 봐? 말도 안 했는데 미역을 다 가지고 오고.”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지켜본 거지”
그게 훔쳐봤다는 거 아닌가? 이 미친 스토커새끼. 카이엔 이 녀석은 역시 BL태그를 노리는 게 분명하다.
“저번에는 대화 하자고 해도 말도 못 붙이게 하더니, 탈모라니까 바로 미역을 다 챙겨주네. 참 고맙다 야.”
“...그건 네가 잘못한 거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아니, 여자랑 사귀는 게 잘못한 거라고?
이게 동성애자의 사고방식인가?
계속 듣고 있으면 스트레스로 모근이 더 약해질 것 같았다.
“우리 형님은 잘못한 거 없슴다! 스트레스 더 주지 말고 저리 가십쇼!”
샤오메이는 카이엔의 등장에 언짢은 기색을 보이더니,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내게 팔짱을 끼며 카이엔을 향해 으르렁 거렸다. 풍만한 가슴이 팔을 감싸는 느낌이 내 스트레스도 말랑 거리게 만들어 준다.
그런 샤오메이의 모습이 불편한 걸까, 카이엔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봤다.
“...하아, 파트너. 이런 가슴만 커다란 컨셉에 미친 여자는 별로 좋은 여자가 아니야. 좀 더 똑 부러지고 야무진 사람을...”
“야, 아무리 파트너라고 해도 사귀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나는 파트너를 생각해서 말해주는 거지.”
가만히 두려고 했더니, 가볍게 선을 넘는 녀석의 말에 나는 짜증을 섞으며 카이엔의 말을 잘랐다. 아르틴의 부모님이 와도 간섭 못 할 사안을 감히 카이엔이 간섭해 오는 건 참을 수 없었으니깐.
“내 연애나 탈모 이야기 하러 온 거야? 나는 그 보다 더 중요한 주제에 관심 있는데.”
“....조금 변했네. 파트너.”
더 이상 선 넘지 못하게 확실히 선을 긋자, 카이엔은 그 조각 같은 얼굴로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다.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안달이 나서 다리를 동동 굴렀겠지만, 나는 보란 듯이 샤오메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야 당연히 변했겠지. 매번 네 비위를 맞추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나하나 녀석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연기하던 그 때랑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좋아, 파트너가 좋아하는 주제로 넘어가자. 뭘 듣고 싶은 거야.”
내가 계속 단호한 모습을 보이자, 카이엔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주제를 돌렸다. 내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오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는 걸 가장 잘 알 수 밖에 없는 녀석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뭐야, 벌써 끝난 게냐? 흥미진진해서 재밌었는데 말이다! 악! 아프다! 왜 때리느냐!”
내가 분위기 파악 못하고 징징거리는 유니코르의 머리에 꿀밤을 먹여주자, 유니코르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면서 빼액 거리다 내가 주먹을 한 번 더 들어 올리자 그제서야 조용해졌다.
“일단은 기억 회귀부터, 너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거야? 다른 건 기억나는 게 있어?”
“예상한 질문이네, 가장 중요한 질문이고.”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향해 턱을 괴며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도 잘 몰라.”
“엉? 모른다니?”
“나도 잘 모른다고, 파트너. 널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카이엔 녀석도 모른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매번 이상한 치트를 써가면서 사건을 해결하고 천재적인 모습을 보이던 주인공답게 척척 상황을 분석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아는 건, 너와 관련 된 기억만은 뚜렷하다는 것과 기억을 되찾은 사람들의 공통점뿐인 걸.”
“공통점? 너나 아그네스, 샤오메이랑 바이올렛이 공통점이 있다고?”
공통점에 대해서라면 나도 가설을 몇 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확신을 가지며 이야기 하는 카이엔의 말에 나는 되 물을 수밖에 없었다.
“흐음..정말 모르는 거야 파트너? 정말로?”
그런 내 반응이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녀석은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마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남자가 봐도 고혹적이라는 묘사가 어울리는 눈웃음에, 순간 나는 옆에 있는 샤오메이가 저걸 보고 흔들리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형님, 검은 콩 먹는 손이 멈췄슴다!”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샤오메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녀석은 검정콩을 한 웅큼 움켜쥐더니 내 입에 검정콩을 쑤셔 박아 넣는다.
좀 더 상냥하게 하나씩 먹여줄 수도 있을 텐데.
“뭐, 파트너가 모른다면 나도 안 알려줄래.”
“우무? 왜!”
“어차피 곧 알게 될 텐데, 혼자서 열심히 알아내봐.”
우물우물 검은 콩을 씹는 내 모습을 빤히 보더니, 왠지 모르게 토라진 녀석이 흥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내게 심술을 부린다.
‘여자도 아닌 녀석이 왜 자꾸 끼부리는 거지 죽여 버리고 싶게..?’
혈마 펀치의 맹세가 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한다. 하지만 진정해야 한다. 지금 맞짱 뜨면 내가 100% 질 테니깐...
“그래 뭐, 기억 회귀 방법도 아니고 조건이면 곧 알아낼 수 있겠지. 넘어가자.”
내가 알려달라고 더 조르지 않고 납득하자, 카이엔이 나를 힐끔 보더니 입술을 삐쭉 내민다. 와 시발. 유니코르가 마시던 당근주스가 담긴 유리병으로 머리 후려 까고 싶다.
“지금 아카데미에 마왕군의 하수인이 잠입해있는데...”
역시나 나는 최대한의 참을성으로 참은 후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누군가 초원의 왕의 권능을 훔쳤고, 초원의 왕은 그걸 해결하기 위해 나를 선택했다는 것.
옆에서 당근 주스나 쪽쪽 빨아대는 처음 보는 여자가 유니코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카이엔도 고개를 끄덕이며 유니코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이상한 건 유니코르 녀석이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별말 안하고 그냥 멀뚱히 바라보기만 한다. 주인공 버프인가.
“빌런 녀석은 폴리모프로 모습을 바꿨을 거고, 마안의 권능과 독기의 권능을 일부 훔쳤을 거야. 녀석을 빨리 찾아내야 하고. 듣고 있어?”
“어? 응? 듣고 있지. 계속 말해 파트너.”
빌런에 대해서 차분히 설명하고 있으니, 카이엔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진 게 보인다. 뭐지? 듣기 싫은 키워드라도 있었나?
“마기를 감추는 데 엄청 능숙한데다, 모습까지 바꿨을 테니 내가 대비책을 준비하긴 할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카이엔 네가 정령들을 풀어서 아카데미 일대를 찾아주면 좋겠는데.”
“아, 그래. 음, 맡겨만 두라고 파트너.”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던 카이엔은, 저 멀리 클레어가 지나가자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클레어가 와봐서 가야겠네. 응, 미역 잘 챙겨 먹고. 무슨 일 있으면 정령으로 언질 줄게.”
내게 가지고 온 미역을 내민 카이엔은 곧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미역을 내게 내밀고는 클레어에게 뛰어갔다.
“갑자기 왜 저럼까? 권능 도둑에 대해 듣자마자 이상해 졌슴다.”
“그러게, 알고 있는 빌런인가?”
어쩌면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 얽혀 있는 빌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면 원작에 나오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구만.
“자, 저 재수 없는 기생오라비도 갔으니 한 줌만 더 먹고 다음 수업 들으러 가면 될 것 같슴다!”
“..그만 먹으면 안 돼? 이제 물리는데? 아야.”
내가 슬슬 검은 콩을 먹기 싫은 표정을 짓자, 샤오메이가 내 머리카락을 한 가닥 뽑는다. 머리카락은 너무도 힘없이 가볍게 뽑혀 탁자위에 떨어졌다.
“계속 드십쇼. 머리카락이 옛날에 방에서 틀어박혀 있던 형님보다 비실거림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검은 콩을 퍼먹었다. 왠지 서러움에 눈물이 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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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보세요, 또 저희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저 눈 번뜩이는 것 좀 봐, 진짜 기분 나빠.”
아르틴과 그 일행이 있던 카페테리아와 멀지 않은 학생 식당.
“우적, 우적, 후루룹, 와그작!”
수군거리며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구경하며 자신의 위에 음식을 쑤셔 박듯이 대량의 음식을 씹어 삼키던 ‘대니얼‘은 10인분에 가까운 음식을 먹고 나서야, 만족한 듯 입가를 옷소매로 슥슥 닦아냈다.
산송장이 대니얼을 뒤집어 쓴지 1달이 지났다. 평생을 춥고 어두운 북쪽 땅에서 가난하게 지내던 산송장에게, 아카데미라는 땅은 낙원과도 같았다. 열대의 기후에 가까운 아카데미는 늘 따뜻해서 얼어죽을 일도 없었고, 맛있는 음식들은 넘쳐났다.
거기에 대니얼의 가문이 대단하다는 말은 사실인지, 처음으로 확인한 대니얼의 짐 꾸러미에는 평생 은화만 보고 살던 산송장에겐 과분할 정도의 금화와 보석, 고급 옷 따위가 가득했다. 산송장은 그 덕에 한 달 넘게 수업은 듣지도 않으며 먹고 마시는 것에만 몰두해 자신의 식욕을 채울 수 있었다.
“여긴 최고야, 이런 천국을 자신들만 누리다니, 너무 불공평하잖아?”
쩝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음료수로 입을 헹군 후 식당을 나온 대니얼은, 자신의 끝없는 욕망에서 식욕이 아닌 다른 욕망이 꿈틀 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루에 12시간씩 자고, 나머지 12시간은 맛있는 걸 먹는데 써댄 탓에 수면욕과 식욕은 충분했다. 그렇다면 자신을 자극하는 욕망은 확실했다.
“좋은 여자를 품고 싶어.. 아까 쫑알거리던 여자애들을 덮쳐서 죽이고 강간할까?”
눈에 닥치는 대로 여자를 납치해 품는 것도 좋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산송장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그 생각을 부정했다.
멍청하게 당장 눈앞욕망을 채우던 산송장이지만, 한 달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욕망을 채운 후에는 다른 욕심 또한 생겼다. 단순히 싸구려로 욕망을 채우기 보다는 좀 더 고급품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싶다는 허영심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 이다.
어떤 여자가 좋을까, 어디로 눈을 돌려도 자신이 평생 보던 땟국물 흐르는 계집들 보다 좋은 여자들이 한 가득이다.
짧은 참을성이 허영심을 누르고 적당한 여자를 고르려던 찰나, 산송장은 자신이 밥을 먹으며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카데미에 유니콘의 선택을 받은 고결한 처녀들이 있다고 했었지?‘
아무리 배운 게 없는 촌놈일지라도, 유니콘의 이야기는 한번 쯤 듣게 된다. 그런 유니콘이 선택한 처녀라면,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에 최고의 선택이 될 것 이 분명했다.
‘세니아 리브스, 바이올렛 퍼플크로우, 아그네스 에르멘가르트, 마리안느 드 레크투르’
자기가 들은 이름들을 속으로 반복해서 되새기던 산송장은, 유니콘이 선택한 처녀 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됐던 이름이 떠올랐다.
‘...아르틴 루드비히.’
평생을 남장을 하며 살았으나, 유니콘에 의해 처녀인 게 밝혀졌다던 남작가의 여자아이.
‘남자로 살았으니, 여자로서의 자신은 잘 모를 거야. 내가 남자의 맛을 가르쳐주면서 죽여 버리는 거지.’
무슨 표정을 지을까? 남자로써 긍지 있게 살았을 귀족 아가씨가, 자신의 손에 처녀를 잃고 오열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산송장은 자신의 고간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헤헤, 좋아, 아르틴 루드비히를 시작으로, 유니콘이 선택한 처녀들을 하나하나 납치해서 즐겨야겠어!’
그로인해 아카데미가 자신이 겪은 불행의 조금이라도 맛 볼 수 있으면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산송장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양손으로 가리며 자신의 음습한 욕망을 최대한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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