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권능 도둑을 추격하다 #04
* * *
“...하아.”
저녁 식사로 방에 싸 온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깨작거리며, 나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샤오메이가 든든하게 먹고 기운 차리라며, 최고급 정식을 사줬지만, 도저히 속으로 넘어가질 않는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일까.
‘일단, 바이올렛하고 대화는 나중에 하기로 미뤄두긴 했는데..’
내가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 것을 본 샤오메이가 자신이 아그네스 황녀님이랑 같이 미리 말해둘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바이올렛과의 약속을 뒤로 미뤄줬다. 그 의도가 분명한 상냥한 배려가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쑤셔왔다.
“왜 그렇게 한숨만 쉬느냐? 안 먹을 거라면 본좌가 대신 먹어주겠노라!”
옆에서 같이 밥을 먹던 유니코르는,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자신이 먹던 고기를 다 씹기도 전에 내 고기를 탐내기 시작했다.
“내 고기 한 점이라도 가져가면 네 엉덩이를 드럼처럼 두들겨 줄 테니깐 알아서 해.”
“히익! 역시 불결한 비동정답게 본좌의 몸을 노리는 것이냐! 이럴 줄 알았다면 두꺼운 옷을 입었을 텐데! 본좌는 바이콘이 될 수 없다!”
화들짝 놀라서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는 유니코르를 나는 한심하게 바라봤다. 얇은 티셔츠는 자기가 좋다고 입어놓고 왜 내 탓을 하는 거지?
“안 말릴 테니깐, 지금 당장 가서 갈아입어, 안 갈아입으면 방에서 내쫓아 버릴 거야.”
“지..진짜로 내쫓을 거냐? 두꺼운 옷은 덥단 말이다! 이 섬은 너무 덥고 습해서 본좌 같은 고결한 신수가 살아가기엔 너무 힘든 땅이다!”
저 인간의 형상을 한 하얀 참피를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온다. 문제는 이 두통이 익숙해지는 게 더 짜증이 난다.
“됐으니깐 입 다물고 먹어, 한번만 더 비동정 운운하면 정말로 엉덩이를 때려줄 테니깐.”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하자, 유니코르는 그제서야 과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앞에 놓인 고기를 얌전히 입에 넣기 시작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그냥 관상용으로 두기만 해도 참 괜찮은데, 입만 열면..’
은하수로 머리를 염색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은 신비한 머리카락은 너무 눈에 띄는 탓에 우선 백색으로 바꾸게 했지만, 나는 저 별빛을 품은 머릿결이 꽤 마음에 들었다. 현실에서 살 때도 별 보는 걸 좋아해서 그럴까?
건강한 글래머러스한 몸매도 유니코르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처음 내 사용인이라며 유니코르를 데리고 다녔을 때는, 남자애들과 조르바의 반응이 꽤 볼 만 했다. 말을 꼬시는 조르바라니.
물론 조르바 녀석에게는 사용인은 핑계고 학생회가 붙인 감시인이라고 추가 설정을 덧붙여야 했다. 내 사정을 빤히 아는 녀석을 속이기 위해 아그네스가 직접 공문까지 만들어 줬더니 속긴 속더라.
“야, 유니코르. 너 원래 평상시에는 좀 어린아이 모습으로 폴리모프 하지 않냐?”
사실, 내가 알던 유니코르의 폴리모프체는 이것 보다 좀더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지금이 20대 초반의 미녀의 형태라면, 내가 알던 모습은 10대 초반의 꼬맹이였는데.
“흐무흐무...꿀꺽, 그대가 그걸 어찌 아느냐?”
당근을 꿀꺽 삼킨 유니코르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야 지금의 나는 모르는 게 맞다. 하지만..
“너, 나랑 애들이 기억회귀니 뭐니 이야기 하는 거 못 들었어?”
저번에 카이엔하고 대화할 때, 옆에서 멀쩡히 당근 주스를 마시고 있던 녀석이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본좌는 그런 거 모른다! 저번에 말싸움 할 때라면 그냥 말싸움 하는 게 재밌어서 구경한 게 전부다! 악! 왜 때려!”
“그냥, 집중력이 낮은 유니콘을 위한 극약처방이라고 생각해라.”
내가 유니코르의 이마에 딱밤을 갈기자, 유니코르는 이마를 가리며 울상이 되었다. 나는 저 울먹이는 얼굴의 유니코르를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지더라.
“아무튼, 어린아이 모습은 우리 일각수 일족이 계약자와 같이 다닐 때 보여주는 모습이도다. 아주 오래 된 전통이니라!”
“전통? 왜 어린아이 모습으로 변하는 게 전통이야?”
난생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왜 계약자였던 나한테는 이런 말을 안했던 걸까?
“그야, 계약자들이 우리 유니콘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반해서 성적인 관계를 요구하거나, 실제로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도다! 많은 유니콘들이 필멸자와의 한때의 사랑을 위해 바이콘으로 타락한 것을 본 장로님들이 만든 전통이다!”
나는 충격적인 전통의 이유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유니콘이랑 뭘 해?
“뿔 달린 말이랑 섹스를 하려는 계약자들이 있다고? 걔네는 수간 아니면 사랑을 나눌 사람이 없는 거야?”
세상에, 대부분의 유니콘들은 엘프랑 계약하는 것으로 아는데, 엘프들은 수인 박이도 아니고 수간에 취미가 있는 종족이었나?
“뿔 달린 말이라니! 유니콘은 말에 뿔 좀 달렸다고 표현해서는 안 될 정도로 고결한 신성력과 고귀한 품위를 지닌 존재들 이니라! 인간들 중에서도 비동정과 비처녀들은 그런 섬세한 장점을 인지하지 못해서 더 싫은 것이도다!”
유니코르는 버럭 화를 내며 유니콘이 지니는 매력에 대해서 15분 정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스테이크를 입에 우겨 넣으며 듣던 나는 도저히 공감하기 힘든 매력이 많았지만.
‘신성력이나 마나는 넘어 가더라도, 백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갈기와 곱슬곱슬한 꼬리털이 매력 포인트라고?’
시발, 그건 알아보는 새끼가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냥 폴리모프 한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인데 겉모습에 반했다고 하면 좀 그러니 적당히 살을 가져다 붙인 게 아닐까.
애초에 이 세계의 엘프는 꽤 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2회차 당시에 카이엔과 같이 엘프의 영토에 숨어들었다 걸린 적이 있는데, 나는 유니콘의 계약자라 겨우 봐줬지만, 카이엔은 그냥 너무 아름답다고 봐주더라.
그래, 그때도 분명히 나는 골격이 성장하기 전이라, 너무 어려 보여서 취향이 아니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역시 그냥 얼빠인 엘프가 손대는 걸 막으려고 어리게 폴리모프 하는 게 확실하다.
“지금은 꼬리가 없지만, 이렇게 엉덩이를 흔들며 아름답게 꼬리를 살랑이면 다른 신수들이 헤벌쭉 하며 본좌에게 청혼을 하곤 했었단 말이다!”
혼자서 유니콘의 매력을 열띠게 설명하던 유니코르는, 네발 자세로 엎드리더니 자신의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직접 시범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현실에서 봤던, 후배위 해달라고 조르는 AV배우 같았다.
물론, 내 리틀 아르틴이 반응하는 일은 없었다.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아무리 인간 모습이라고 해도 유니코르에게 발정하는 것은 내 자존심이 용납 못 한다. 최음제라도 원 샷 하면 모를까.
“이제 됐으니깐 그만하고 먹은 거 치우기나 해!”
“으게엑! 네 녀석은 상냥함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나는 유니코르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발로 뻥 차 주곤, 책상에 앉아 간이용 연금술 도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야야..그건 또 뭐냐? 마법에 쓰는 물건이더냐?”
“도둑 잡아야지, 폴리모프를 해제 시키는 용액을 만들까 해서.”
“뭐? 그런 대단한 물건을 네가 만들 줄 알고 있다는 거냐? 거짓말! 탈모약도 못 만들면서!”
이런 씨발. 탈모약이 거기서 왜 나와? 또 한 대 쥐어박을까?
“...됐으니깐,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가서 놀기나 해. 집중해야 하니깐.”
나는 유니코르 녀석에게 저쪽으로 가라고 손짓한 후, 램프에 불을 킨 후, 샤오메이와 번화가에 갔을 때 사뒀던 연금술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만들 폴리모프 해제 용액은 본래 연금술사 7레벨에나 만들 수 있는 고급 연금품, 이제는 집중해야 한다.
나는 내 양 뺨을 한 대씩 후려친 후 재료의 손질부터 시작했다.
아무리 나라도 고작 간이 연금술 키트로 고급 연금품을 만드는 건 쉽지 않다. 0.1그램이라도 재료가 더 들어가거나 끓이는 온도가 3도 이상 차이가 나면 폴리모프 해제 용액은 그냥 보기 좋은 쓰레기가 될 게 분명하다.
결국, 재료의 손질부터 끓이는 것 하나까지 확실히 내 통제 안에 있어야 한다. 다행히 내가 자신 있는 분야다. 수천 번이 넘게 시도했던 고급 연금술을 다루는 감각은, 회귀를 해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으니깐.
서걱. 서걱.
“이게 만드라고라의 뿌리더냐? 귀한 걸 잘도 구했구나.”
“....”
아까 분명히 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유니코르는 내 옆에 서서 지그시 재료를 다루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
신경 쓰지 말자, 그냥 지켜보는 것 정도는 별 신경도 안 쓸 일이다.
“그거 그렇게 깎는 것 맞느냐?”
“마력이끼를 그렇게 손질한다고? 정말 그게 맞느냐?”
“이건 바실리스크의 핵 아니냐? 바실리스크도 초원의 왕의 신하인데 어찌...”
“이 나뭇가지, 왜 끓이는 데 주황색이 나느냐? 뭔가 실수한 거 아니냐?”
“만드라고라 그렇게 깎는 거 아닌 거 같은데..”
“아, 서리바람 풀은 탈모에 좋다고 들었다.”
“내가! 조용히! 하라고! 말! 했지!!”
“아프다! 아프단 말이다! 그만! 그만 때려라!”
나는 이 잼민이도 울고 갈 훈수충의 궁둥이가 불바다가 되도록 손바닥으로 신나게 후려쳤다. 혹시나 신수라서 덜 아파 할까봐, 일부러 마나를 담아 고통이 확실히 퍼지도록 장법까지 사용한 덕일까, 20대 정도 때리자 유니코르 녀석은 내 무릎위에 추욱 늘어졌다.
“후우...후우...사람 열 받게 하고 있어.”
어떻게 20분 내내 쉬지 않고 훈수를 할 수 있는지 이가 다 갈린다. 나는 녀석을 2층 침대 위에 던져 놓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차분히 열을 식히며 손질한 재료들을 하나 둘 넣으며 용액을 끓이기 시작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절대로 탈모 이야기를 꺼내서 화난 게 아니다. 게다가 서리바람 풀은 효과도 없다. 내가 써봤기 때문에 안다.
“...씨발.”
마음이 너무 쓰렸다.
***
야심한 밤, 새벽의 은은한 달빛이 먹구름에 가려진 시간.
사각 사각 사각 사각.
나무를 마구 손톱으로 긁어댄 탓일까, 나약한 인간의 손톱이 벗겨지고 대신 그 자리에 검고 날카로운 짐승의 발톱이 자라난 한 소년이, 유심히 한 창문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히힉, 힉, 새벽 2시 인데, 아직까지 안자네, 열심히 공부하는 걸까? 노력하는 남장 여자. 이건 못 참지. 키힉.”
브론즈 기숙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높은 나무 위에서, 산송장은 저녁부터 지금까지 계속 아르틴 루드비히의 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하얀 아가씨는 뭘까? 젖가슴도 존나 크고 예쁜데... 룸메이트인가?”
산송장은 문뜩, 자신의 룸메이트였던 금발머리 소년이 떠올랐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야들야들한 살을 지닌 소년은 번뜩 거리는 자신의 눈을 보고도 다정하게 웃었다. 지금까지는 정체를 숨기느라 참아왔지만, 그 살코기를 씹고 싶은 욕망이 슬슬 올라온다.
“아르틴을 따먹고..저 하얀 아가씨도 따먹고...둘 다 내 룸메이트 앞에서 씹어 먹어야지.”
그때 세 사람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역시 무서워서 엄마라도 찾지 않을까?
“후우, 참자...잠에 들면, 그때 노리는 거야. 별미는 꾹 참아서 먹는 맛이 있는 거니깐..”
저 방의 불이 꺼지면, 그때 시작해도 늦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여태 참은 게 너무 아깝다고 산송장은 스스로를 되뇌이며 욕망을 억눌렀다.
벅!벅!벅!
나무를 긁는 발톱 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