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미드나이트 #02
* * *
쿠웅!
괴물의 몸에서 마기가 터질 듯이 치솟아 주변의 공기가 울리기 시작한다.
“이제는 인간이라고 연기조차 포기한 거냐?”
괴물 녀석의 모습은 방금까지 겉에 걸치고 있던 인간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빼빼마른 팔 다리는 기분 나쁠 정도로 길고, 마치 불에 탄 것 마냥 검은 피부에 붉은 안광이 희번뜩 거리는 말라비틀어진 얼굴. 장벽 너머의 땅에서 자주 보던 마기를 잔뜩 머금은 마수들과 다를 바가 없다.
뭐, 보스전으로 치면 2페이즈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겉모습만 봐도 그렇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찌릿한 감각은, 지금의 모습이 훨씬 강하다고 느낄 수 있게 하니깐.
“마왕에게 영혼까지 팔아넘긴 열락한 짐승이라니, 본좌는 너무 역겨워 눈을 뜨고 보기가 힘들다!”
“닥쳐! 네년 먼저 팔다리를 박살내고 강간해주마!!”
“감히! 천박한 괴물 주제에 본좌에게 너무 건방지다!”
그 모습에도 겁먹기는커녕 불평만 투덜거리는 유니코르를 향해 괴물 녀석이 덤벼들었고, 서로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한층 더 강해진 생존력을 이용해 방어를 버리고 몰아붙이는 괴물에게 방금처럼 유니코르가 빈틈을 향해 주먹을 꽂아 넣었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정도였는데도, 괴물 녀석은 개의치 않고 유니코르의 머리를 박살내기 위해 발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유니코르가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빛의 뿔에 손톱을 막아내자, 마치 도끼와 철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충격파가 터져왔다.
“저 정도면 유니코르가 없었으면 꽤 힘들었겠는데?”
인간형태의 유니코르와 힘을 해방한 괴물의 접전은 방금 전 시온과의 싸움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치열했다. 서로의 공격이 막히고 부딪힐 때 마다 터져 나오는 충격파 때문에 기숙사의 보호 마법이 깨질까 걱정이 됐으니깐.
“죽어라!!”
유니코르가 내지른 정권이 막혀 자세가 흐트러진 직후, 괴물 녀석이 빈틈을 노려 유니코르의 목덜미를 향해 발톱을 휘둘렀다.
유니코르가 황급히 팔을 들어 막았지만, 발톱을 막아낸 반동으로 다시 한 번 자세가 크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크게 다칠 것 같은데.
─의례성법???? : 심판??
내가 미리 준비한 신성력에 더해 기도문을 외우자, 하늘에서 강렬한 한 줄기의 백색 벼락이 괴물 녀석의 몸을 강타했다.
“크아아아악! 고통스러워! 몸이 타들어간다!!”
당연히 아파야지, 신성 마법은 내가 2번이나 회귀하면서 익힌 주특기 중의 주특기인데.
벼락을 맞은 괴물 녀석이 몸이 마비가 된 채 울부짖는 사이, 유니코르는 놓치지 않고 괴물의 명치에 뒤돌려차기를 가격시켰고, 괴물은 공중을 3번 정도 돌다 땅바닥에 추락했다.
“뒤에서 구경만 하지 말고 빨리 도와주거라! 왜 보고만 있느냐!”
그야, 유니코르가 중간에 한 대씩 맞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재밌으니깐.. 이라고 말하면 나도 한 대 맞겠지?
“설마 위대한 신수인 유니콘이 저런 괴물에게 밀릴 줄은 몰랐지..”
“무, 물론 나도 본모습으로 돌아가면 저런 괴물은 별거 아니다! 하지만 그대와의 계약의 동화율을 위해 어쩔 수 없이...어라?”
우리가 잡담을 나누는 사이, 어느새 괴물의 모습이 사라졌다.
기척을 감추는 게 장기인 녀석이니, 힘의 차이를 느끼고 도망이라도 쳤나?
“캬아아악!!!”
역시 그럴 리가 없지, 전위와 후열이 있으면 당연히 후열 먼저 처리해야하는 법. 괴물 녀석은 내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내 무방비하게 서있는 나를 덮치려고 했다. 내 예상대로 말이지.
물론, 무방비한 모습은 페이크였다. 이래서 짐승사냥이 쉽다니깐.
─제국 검술식, 거미 베기 자세.
손목을 가볍게 돌리자 롱소드의 검날이 나의 등 뒤를 향한다. 다리를 축으로 몸을 돌리며 파도를 베듯이 검의 궤적을 그리자, 괴물의 양팔이 싹둑 썰려나가는 손맛이 전해진다.
“크아아악! 어떻게, 어떻게 알아챈 거지? 날 느끼지도 못 했을 텐데!”
“맞아, 나는 못 느꼈지. 어떻게 그렇게 잘 숨냐?”
나는 괴물의 질문에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 태도에 열 받은 건지, 아니면 자신의 장기인 은신술이 먹히지 않은 게 자존심이 상한건지, 녀석은 집요하게 모습을 숨겼다 나타내며 나와 유니코르를 습격했다.
하지만 나와 유니코르는 괴물이 공격할 궤도를 미리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유니코르, 4시 방향. 다시 파트너한테, 7시 방향.”]
보이지 않는 정령으로 속삭이는 카이엔의 말에 따라, 나와 유니코르는 움직임에 맞춰 괴물의 습격에 대응했다.
아무리 기척을 지우는 게 능숙하다 해도, 질량이 있다면 땅과 공기의 흐름을 속일 수는 없는 법. 카이엔의 정령들에게 보조를 받는 이상 녀석의 은신술은 우리에겐 무력했다.
[“곧 내가 도착할 테니, 그때까지 버텨줘 파트너.”]
[“그냥 너 안 와도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괴물 녀석은 꽤나 너덜너덜해진 상태. 자신의 공격이 전부 막히자 분노에 돌아버린 건지 뒤로 물러난 녀석이 땅을 마구 발로 차기 시작한다.
“왜 내 공격이 안 통하는 건데! 따먹을 년들이 셋이나 되는데! 왜 못 따먹고 아파야 하는 거냐고!”
분에 찬 듯 외치는 괴물 녀석, 그런데 흘려듣기 이상한 말이 하나가 있다.
“셋? 유니코르와 시온을 합해도 둘 아니야? 왜 셋인데?”
“너, 아르틴 루드비히 너! 유니콘이 인정한 순결한 처녀인 네가 목적이란 말이다! 순결한 남장여자를 따먹을 생각에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씨발 뭐라고? 나를 따먹어? 순결한 처녀?
“푸하하하핫! 꺄하하하하하핫! 순결한 처녀라니! 머리카락 빠지는 처녀라니! 케흐흑!”
그 외침에 유니코르가 그 말을 이해한 건지 미친 듯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야밤에 나를 찾아온 이유가 나를 남장여자라고 착각해서...라고?”
“그래! 네가 남장여자라는 사실은 이미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너야말로 아카데미에서 최고로 먹음직한 암컷이라고!”
내가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되묻자, 괴물 녀석은 당당하게 내 말을 긍정하듯 강하게 외쳤다.
“푸하! 푸하하핫! 뿌헤, 켈록, 켈록! 웃겨 죽겠어! 꺄하하!”
[“...푸흡”]
이제는 아주 바닥을 구르며 너무 웃어서 기침하는 유니코르. 거기에 카이엔 녀석도 비웃는 소리가 정령을 타고 전해진다.
내가... 아카데미 최고의 암컷..?
이런 개 씨발.
“나는 남자야!! 이 발정난 괴물 새끼야─!!!”
분노에 찬 나의 호령에 따라, 아홉 줄기의 백색 벼락이 하늘을 번쩍이며 괴물의 몸을 강타했다.
“캬아아악!!!”
“뒤져! 뒤져! 그냥 뒤져버려!!”
마지막 아홉 번째의 벼락이 괴물의 몸을 강타하자, 부르르 떨던 녀석의 몸이 축 늘어졌다. 더 이상 움직인다고 해도 위협이 되질 못 하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공허하지..?”
분명 이겼는데, 진 것 같은 기분에, 나는 이를 아득 물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웃고 있는 유니코르의 궁둥이를 전력으로 발로 찼다.
“그만 웃어 씨발년아!!”
“아아아아아아악! 너무, 너무 아프다아앗...!”
아파하는 유니코르를 보며, 신성력을 전부 꼴아 박은 나는 지쳐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울고 싶을 정도로 현자타임이 너무 컸다.
*
“너 아까 웃었지.”
“안 웃었어 파트너. 그 보다 저게 그 괴물이야?”
“말 돌리지 말고, 아까 괴물이 말하는 거 듣고 웃었잖아.”
잠시 후 현장을 찾아온 카이엔이 내 질문을 무시하고 바닥에 늘어진 괴물에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나도 주변을 둘러보니 부러진 나무들에 바닥이랑 도로 박살난 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막막하다.
‘아그네스가 알아서 잘 도와주겠지. 저번에 사감 아저씨 기절한 것도 겨우 수습했는데.’
역시 이래서 인맥은 있고 봐야 한다. 나 혼자서 수습하려고 했으면 유니콘과 계약한 것부터 어떻게 저걸 쓰러트렸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느라 며칠은 보내야 할 테니깐.
“어이, 카이엔, 그 괴물은 죽었어?”
나는 괴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카이엔을 바라봤다. 뭐 이상한 거라도 있나?
“...파트너.”
“응? 왜? 무슨 일 있어?”
평상시랑 다르게 약간 떨리는 카이엔의 목소리,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 챈 순간, 괴물이 다시 몸을 일으켜 카이엔의 목에 발톱을 가져다 댔다.
“감히..나를 죽이려고 하다니, 이제 아카데미는 상관없어. 지옥으로 만들어주마..!”
이런 젠장, 녀석의 눈이 아까와 같은 붉은 색이 아니라, 흉흉한 녹색광을 뿜어대고 있다.
‘마안의 권능..!’
초원의 왕에게서 훔쳐갔다는 권능을 잊고 있었다. 나랑 유니코르는 신성력으로 견딜 수 있으니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카이엔은 갑자기 마주친 마안에도 드래곤 하트가 가진 마법에 대한 저항력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몸이 마비된 듯 눈도 깜빡이지 못 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마왕이시여, 제게 힘을!!”
카이엔을 쥐고 있던 괴물의 모습이 뒤엉키더니, 점점 초원의 왕, 카토블레파스의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 아르틴! 녀석이 왕의 모습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막아야 되는 것 아니더냐!?”
아파서 쓰러져 있던 유니코르가 다급하게 일어나 괴물을 향해 삿대질 하며 동동 발을 구른다. 아마 저걸 내버려두면 3페이즈의 시작이겠지.
그렇지만, 나는 이제 존나 피곤하다. 정신적인 탈력감으로 더 뭘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품안에서 꺼낸 유리병을 변신 중인 괴물을 향해 던졌다. 유리병은 정확하게 녀석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가 깨지며, 안에 있던 액체가 기화해서 주변 일대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악!!!!”
녀석의 변신이 풀리자 방금 전 괴물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성능 확실하구만.
“뭐..뭘 한 것이냐? 녀석이 변신을 하려다가 실패했다!”
“폴리모프 해제 용액. 아까 시온이 열심히 싸울 때 완성시켜 놨지.”
괴물이 초원의 왕으로 변해 날뛰었으면, 꽤 장렬한 전투가 되었겠지. 나도 신성력을 다 쓴데다가 기숙사랑 카이엔, 시온까지 지켜야 하니깐.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변신해주는데 변신 매너? 아쉽게도 그럴만한 심적인 여유가 없다. 저렇게 좆같이 생긴 녀석에겐 여유가 있어도 기다려 주고 싶지 않고.
“크아악... 아직, 아직이다..! 나는 이 곳을 지옥으로..!”
저벅, 저벅
나는 마나 롱소드를 들고 얄팍한 독기와 이제는 빈약한 마기를 내뿜으며 비틀거리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푹. 푹 푹. 서걱. 푹.
“크엑.”
그걸로 끝이었다. 녀석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빠져나가자, 그 자리에는 말라 비틀어져 칼에 찔린 남자의 시체만 남아있었다.
“뭐 대타치고는 꽤 강했지. 왜 이렇게 쌘 놈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녀석의 시체에서 초원의 왕의 권능을 회수한 후, 옆에 쓰러져있는 카이엔에게 다가갔다.
카이엔은 정신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마안을 당한 후유증으로 아직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 하고 있었다. 용액에 휘말린 건지 머릿결이 촉촉한 게 화보 같아서 기분이 나빠졌다.
“미안하다..파트너.. 당해버렸네..”
“됐어, 일어나기나 해.”
평소라면 손도 대기 싫지만, 이번에는 도움을 받은 게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나는 카이엔 녀석의 팔을 내 어깨에 두르고는 부축해 번쩍 들어올렸다.
물컹. 물컹.
“...?”
“자, 잠깐. 내가 알아서 일어나겠다!”
녀석이 황급하게 내게서 떨어져 비틀거리며 멀어졌다.
...방금 뭐였지?
뭔가, 익숙하지만 녀석에게 느껴져선 안될 게 느껴진 것 같은데?
‘..너무 피곤해서 돌았나.’
슬슬 새벽동이 트고 있다. 오늘도 잠자기는 글렀구만.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차린 후 뒷정리나 하기로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