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후일담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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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은 죽었다. 권능을 빼앗긴 후 괴물의 시체는 아주 미약한 마기만을 남긴 미라가 되었다.
하지만 현실이 늘 그렇듯이, 단순하게 나쁜 놈을 처리한다고 모두가 행복하게 끝나지는 않는다.
“학생회 출석요구 통지서에, 아카데미 위원회의 소환장이라.”
학생회와 아카데미 측에서 보낸 공문이라며 사감 아저씨에게 받은 편지를 뜯어보니, 양쪽 다 이번 사태에 대한 증인으로 나를 부르고 있다.
뭐, 예상 가능한 전개였다. 학생회 쪽에 대해서는 미리 아그네스에게 언질을 받기도 했고, 권능 도둑의 목숨을 끊은 건 결국 나였으니 말이다.
“살인이라...”
아카데미 측의 공문에선, 이번 사건을 마왕군에 의해 발생한 유감스러운 사건이라고 부르며 온건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학생회에서 내려온 공문은 꽤 어조가 다르다.
아카데미 내부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에 대해 협조를 구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나를 용의자로 두고 있을 것은 뻔히 보인다.
“하긴, 내가 학생회한테 어그로는 엄청 끌긴 했지..”
입학 첫날부터 렉스턴을 때려 눕혔고, 학생회의 통보도 무시하고 결투를 진행했고, 이번엔 아카데미 내부에서 독단적으로 움직였다가 큰 사건을 만든 셈이다.
물론, 일반적인 학생들에게는 공표가 늦어지고 있지만, 이 좁은 귀족사회와 같은 공간에서 그 비밀이 오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듣자하니 죽은 학생의 부모가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다고 들었고.
“어떻게든 되겠지. 내 편이 없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자꾸 혼잣말을 중얼 거리느냐? 음침해 보인다.”
내가 서류를 들여다보며 독백을 하고 있자, 옆 자리 잡고 누워서 만화책을 들여다보던 유니코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너는 왜 네 침대 내버려두고 내 침대에서 누워있는 건데?”
“싫다! 떨어져 있다가 너 마저 본좌를 버리면 본좌는 어디에 가서 살아야 한단 말이냐!”
요 근래 초원의 왕한테 강제로 쫓겨난 이후, 늘 눈이 죽은 채로 상태가 안 좋던 유니코르 녀석은 내가 자신의 유일한 동아줄이란 걸 깨달았는지, 잘 때 빼고는 내 주변에서 이렇게 어슬렁거리고 있다.
처음엔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유니코르의 피부가 생각보다 시원하고 끈적임도 없어 옆에 붙으면 시원한 느낌이라 별말 안 하고 있다. 저것도 무슨 권능이라고 했던가.
“그럼 좀 조용히 있어. 안 그러면 2층 침대에다가 꽁꽁 묶어버릴 거야.”
“무엄하다! 비동정인 너는 본좌가 이렇게 가까이서 휴식한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껴도 모자라다!”
며칠 전에 저런 말을 했다면, 한 대 쥐어박았을 텐데, 버려진 그 날 눈이 완전히 죽은 채로 울먹이던 모습이 아직도 떠올라서 조금 너그럽게 봐주고 있다.
“네가 매일 같이 머리맡에 흘리고 가는 머리카락도 본좌가 다 치워주고 있는데 말이다!”
“..요 며칠은 덜 빠지거든? 조용히 하고 학생회에 갈 준비나 해.”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검은 콩과 깨를 으깬 가루를 입에 털어 넣고 있자, 마침 심심했는지 유니코르가 들뜬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학생회? 아그네스를 보러 가는 게냐? 본좌도 따라가도 되는 거냐?”
“따라가도 되는게 아니라 따라 와야 해, 이번에 빌런 죽인 것 때문에 와서 조사 받으래.”
“으엑..재미없을 것 같은데 본좌는 여기서 방을 지키겠도다! 아프다! 아파! 귀는 그만 잡아당겨라!”
나는 헛소리를 내뱉으며 침대로 돌아가려는 유니코르의 귀를 붙잡고는, 강제로 외출복을 입히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학생회로 향했다.
*
“너도 왔네, 카이엔?”
“..아, 아, 왔구나 파트너. 유니콘도.”
“반갑구나! 저번에 정령으로 같이 싸웠던 아이구나!”
학생회의 근처에서 카이엔과 마주쳤다.
내가 먼저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카이엔은 나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이유라 하나 짐작 가는 건 있는데...’
그 날,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방에 돌아가 쉬면서 조용히 그때의 일을 복기하듯이 떠올려봤었다.
‘역시, 그건 여자 가슴의 감촉이었는데...’
그 물컹한 촉감, 샤오메이의 가슴에서 느꼈던 마약같이 중독성 있는 그 감각이었다.
하지만, 카이엔한테 여자 가슴...? 그럴 가능성이 있나?
‘내가 실제로 본 게 있는데, 의심하기도 그렇고...’
예전에공화 연방으로 카이엔과 수련을 갔을 때 온천에서 같이 목욕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수건으로 아랫도리를 가리긴 했지만, 녀석의 대흉근은 분명 사내의 그것이었다. 한창 단련하고 있던 나도 마치 상상 속에 나올 법한 완벽한 형태에 속으로 패배를 선언했기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그때 쓸데없이 얼굴을 붉히면서 내 쪽을 힐끔거렸던 게 아직도 기분이 나빠.’
역시, 그 물컹한 감각은 뭔가 착각인 게 분명하다. 저 BL의 화신 녀석이 여자일 리가 없지.
“..왜 그런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야 파트너?”
“응? 아니 그냥 오늘도 잘생겼다 싶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내 시선을 의식한 건지, 카이엔이 불쾌감을 드러내자 나는 황급히 말을 돌리며 카이엔을 끌고 학생회 안으로 들어갔다.
‘어라, 방금 이거, 조르바가 자주 하던 거 아닌가?’
문뜩 느껴진 기시감, 그건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이번 회차에서 조르바가 나한테 자주 하던 행동과 비슷했다.
‘조르바도 좀 챙겨줘야겠다..’
이번 회차에서 피하기만 하느라 같이 놀지도 못했는데, 슬슬 마음을 굳힐 때 인거 같다.
내가 그렇게 다짐하면서 학생회의 문을 열자, 웅성거리던 내부의 시선이 한순간에 우리에게 쏠리는 게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학생회에서 협조요청 공문이 내려와서 찾아왔는데요.”
나는 무뚝뚝한 카이엔을 대신해서 친근한 목소리로 학생회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그런데, 어째 나를 향한 시선이 더욱더 차가워 지는 것은 아마 기분 탓이 아닐 것 같다.
“..아르틴 루드비히랑 카이엔 실버소드씨 맞으신가요? 그 옆에 계신 분은..?”
한 키 작은 여학생이 우리에게 다가와 묻자, 유니코르가 정체를 밝혀도 되는지 내게 눈짓으로 물어왔다.
‘..역시 숨기는 건 무리겠지?’
유니코르를 사람이라고 둘러대는 시점에서 해명에 귀찮아질뿐더러. 녀석과 계약한 이상 언젠가는 들키게 되어있다.
...하지만 또 이상한 소문이 나는 게 아닌가. 나는 그게 너무도 두려웠다.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좌의 이름은 유니코르! 위대한 일각수 암두시아스의 정통 후계자인 신수 유니콘이니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니코르는 자신만만하게 허리에 양손을 얹고 자신을 소개했다.
“들었어? 미친 여자인가? 자신이 유니콘이래.”
“붉은 광인이라더니, 같이 다니는 여자도 미친 건가 봐.”
당연하게도, 뒤에 들려오는 반응은 미친 사람을 보는 시선의 그것과 비슷했다.
사실 나라고 해도 웬 여자가 자신을 네발짐승인 유니콘이라고 설명하면 가장 먼저 재정신이 아닌 여자라고 생각 할 것 같았다.
“방금 그 말을 한 두 사람은, 본좌를 모독한 것으로 봐도 좋겠지?”
유니코르도 그 말을 들었는지, 이 자리의 모두가 느낄 정도로 강렬한 신성력을 주먹에 두르며 매서운 존재감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쫓겨난 탓에 까칠해진 유니코르의 존재감은 학생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저 순도 높은 신성력을 보고도 유니콘이 아니라고 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
“아니, 아닙니다! 설마 진짜 유니콘님 이실 줄 몰랐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아카데미의 학생회의 일원이라는 명칭이 무색하지 않게, 분위기를 파악한 두 녀석은 연신 머리를 숙이며 유니코르에게 사과를 해왔다. 하지만 퉁명스럽게 삐쭉 내민 유니코르의 입술은 들어갈 생각을 안 한다. 삐졌네.
“저, 유니콘님은 여기 어쩐 일로..?”
“본좌의 계약자가 마왕의 부하를 해치운 일로 곤란을 겪고 있는데, 당연히 본좌가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여학생이 남학생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자, 유니코르는 갑자기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처녀구만.’
누가 처녀 레이더 아니랄까봐, 순결한 아가씨가 말 거니깐 바로 기분 좋아서 입 꼬리가 씰룩거리네.
“그, 지금 저희 간부들이 회의를 진행하고 계셔서, 죄송하지만 옆에 앉아서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아, 저는 상관없습니다. 너는 어때 카이엔?”
“..나도 상관은 없어.”
“본좌는 상관있다! 기다리는...말하는데 끌고 가지 마라!”
나는 꼬장을 부리는 유니코르의 손을 잡고 질질 끌고 여학생이 안내를 받아 따라갔다.
“여기, 이 방에서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나를 볼 때 그 싸늘한 표정은 어디에 갔는지, 유니콘의 눈치를 보며 공손하게 안내한 여학생을 우리가 마시고 싶은 음료수까지 주문받고 방을 나갔다.
“보았느냐 아르틴! 이게 본래 계약자가 본좌에게 보여야 할 경의와 존경어린 태도이니라!”
“헛소리 말고 가만히 앉아있어, 한번만 더 헛소리하면 꿀밤을 먹여줄 테니깐.”
아, 안된다! 라고 소리치며 머리를 감싸는 유니코르를 보더니, 카이엔이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 둘은 언제 봐도 즐겁네, 늘 사이가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2회차 때 개고생 할때는 옆에서 지켜보면서 비웃기만 했으면서.”
“그건 지켜보면서 비웃은 게 아니라, 파트너를 열심히 옆에서 응원해준 거야.”
카이엔은 그렇게 말하며, 나와 유니코르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잔망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유니콘하고 계약 시켜놓고 구경하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한데 저런 거짓말이라니.
“이번 사건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엄격한 교칙에 의거해 본보기로 퇴학을 시켜야 합니다!”
아이 깜짝이야.
갑자기 옆방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에, 우리 세 사람의 시선은 소리가 들린 벽을 향했다. 평범한 인지능력을 벗어난 우리가 집중하자 옆방의 소리가 전부 들려오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낮추고 회의에 걸맞게 교양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회계관리 위센씨.”
“하지만, 저는 어째서 아그네스 부회장님이 그 두 사람을 계속 감싸고 도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 두 사람은 아카데미 내부에서 살인을 저질렀단 말입니다!”
”이번 사건은 마왕군이 벌인 테러입니다. 오히려 그 테러를 미리 막아낸 두 사람에게 보상을 내려야 합니다.”
“학생회에 미리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벌인 일 아닙니까? 게다가 까딱했으면 브론즈 기숙사가 무너져 내릴 뻔 했습니다!”
“..이 목소리는 아그네스가 아니더냐?”
“맞는 거 같네, 반대편에서 소리 꽥꽥 지르는 사람이 누군지도 알 것 같고.”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목소리는 리가르도 위센. 예전에 주인공인 카이엔과 대립해 몇 번이고 퇴학 시키려고 한 빌런도 못된 악역귀족이다.
아마도 나랑 카이엔의 처분을 두고 아그네스랑 대립하고 있는 것 같다. 마리안느 스승님이 결투 전에 경고했지만 별일 없어서 까먹고 있었는데, 이렇게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나.
“여기서 또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네.”
그 목소리를 알아챘는지, 카이엔의 표정도 썩 그리 좋지는 않다. 하긴 정치 같은 복잡한 문제는 카이엔이 가장 힘들어 하는 일이니, 정치로 공격하던 리가르도가 빌런 보다 더 싫겠지.
“옆방이 회의실인가 본데, 방음은 영 꽝이네.”
할 일도 많지 않았던 우리는 신경 쓰이는 목소리, 혹은 신경 쓰이는 화제 때문에 여학생이 가져다준 음료수를 홀짝거리며 회의 내용을 전부 엿듣게 되었다.
20분 정도 열렬하게 남작가의 버러지인 나와 평민인 카이엔을 치울 것을 주장하는 리가르도와 그 추종자들, 그리고 그걸 제국의 황녀다운 품위 있는 태도로 대응하는 아그네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엄벌은 없습니다. 이는 저와 학생회장님, 그리고 마리안느 왕녀님이 동의한 사안입니다.”
“아무리 세 분이라고 하셔도, 이런 일에 대해서 함부로 정하실 수 없는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왕국의 귀족 사회를 어지럽히고 학생회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방금이 마지막이라고. 이미 정해진 일에 대해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주장하시는 건 회의가 아니라 저희에 대한 통보 같군요.”
벽 너머로 듣기에도 살얼음이 느껴지는 아그네스의 목소리에, 보지는 않았지만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는 게 느껴진다.
“별 일 없이 끝날 것 같네, 아그네스가 잘 무마해 준 것 같고.”
“..다행이네, 리가르도랑 엮이기는 싫었는데.”
내 말에 카이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 정도로 리가르도가 싫은가?
그래도, 별 일 없이 아그네스만 만나면 될 것 같으니 골치 아픈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
벌컥.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쪽으로 따라 오시면 됩니다.”
그때, 저쪽의 회의가 끝났는지 우리에게 음료수를 건네준 여학생이 우리를 데리러 왔다.
여학생을 따라 옆방으로 들어가자, 아그네스는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서류를 정리하고 있다.
“세 사람은 앉으시고, 다른 분은 나가보도록 하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우리가 앉기도 전에 황급하게 닫히는 문. 인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아그네스가 내 쪽을 바라봤다.
“아르틴 씨! 어서와요! 많이 기다리셨죠!”
...조금 전까지 차가운 태도는 어디에 갔는지,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아그네스가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나를 반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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