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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53화 (53/266)

〈 53화 〉 후일담 마무리

* * *

아카데미는 늘 재밌는 소문에 목말라 있다. 한창때의 젊은 남녀를 모아 놓은 이상 그들은 자신들을 충족시켜 줄 만한 유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현상은 높은 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뚜렷하게 보였다. 바쁜 교육 일정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고학년에게,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취미는 손도 대기 힘든 영역인 것 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쉽은 언제나 많은 이들을 충족시켜 주는 유희였다.

매일 똑같은 일상에 변화를 주며, 모든 이들과 같은 가쉽거리로 다른 주제의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시간과 돈도 크게 잡아먹지 않기 때문이다.

“들었습니까? 그 붉은 광인이 이번에는 학생회의 위센 선배를 때려눕혔다고 합니다..!!”

아르틴은 그런 의미에서 지금, 아카데미에서 다른 의미로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질릴 만하면 매번 새로운 떡밥을 던지는 아르틴의 행동은 학생들 사이에 숨어있는 호사가들에게 보물이 널린 던전처럼 흥미로웠다.

“저번에 와이즈 가문의 후계자에 이어서 위센 선배를 말입니까..?”

“듣기로는, 가문에서 박해당한 탓에 귀족주의에 대해 끝없는 분노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니야, 내가 듣기로는 위센 선배가 얼굴 앞에서 끔찍한 모욕을 한 탓에 눈이 돌아갔다고 하던데..!”

“전부 틀렸다. 평상시 행실이 가벼웠던 위센 선배를 유니콘이 선택한 처녀인 아르틴이 직접 심판한 것이다..! 이제부터 모든 금태양은 아르틴을 두려워해야 할지니..!”

“누가 밥 먹는데 쟤 불렀어? 저번에 쟤 부르지 말자고 했잖아.”

처음 퍼진 소문은 예전에 렉스턴과 벌였던 싸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검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은 낸 위센이 두들겨 맞긴 했으나, 아르틴은 이미 모두의 앞에서 제국의 기사도 꺾지 않았는가.

하지만, 소문에 깊이가 더해지자, 아카데미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르틴이 사실은 아그네스 황녀님의 약혼자라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위센 선배를 때려눕힌 이유도, 아르틴 루드비히의 눈앞에서 아그네스 부회장을 모욕했다고 하더라!”

“사실 위센 선배가 아그네스 선배를 욕보이려던 현장을 덮쳐서, 유니콘께서 직접 힘을 나눠줬다고 했어요!”

“아니야!! 아르틴 루드비히는 남자가 아니야아아아!!”

한 왜곡된 취향을 뒤로하고, 아르틴이 아그네스의 약혼자라는 소문은, 앞서 퍼진 리가르도 위센을 때려눕혔다는 소문보다 더욱 빠르게 아카데미 내부에 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위센을 때려눕혔다는 소문과 엮이기 시작하자, 위센에 대한 악명이 기하급수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전개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희 왕국 귀족파의 권위가 추락할 것 입니다!”

“위센님은 치료를 받고 있는 지금, 저희라도 움직여 소문의 흐름을 바꾸기로 합시다..!”

좋지 않은 흐름이 이어지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리가르도 위센을 필두로 한 왕국의 귀족파 학생들 이었다.

“사실, 아르틴 그 녀석이 난동을 부린 게 자신이 친 사고를 덮으려고 했답니다!”

“브론즈 기숙사에서 일어난 의문의 파괴 사건..! 그건 아르틴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저도 들었어요, 그만 사고를 일으키라고 훈계하는 선배를 때리려고, 옆에서 말리는 여학생도 때려눕히려 들었다고 하네요..!”

귀족파 학생들의 전략은 호사가의 중심이 되는 학생들에 대한 집중적인 공략.

현장에서 목격했다는 생생한 증언을 담은 중상모략, 험담이 섞이자. 몇몇 호사가들을 통해 퍼진 소문이 뒤섞여 아르틴은 현재 황녀와의 금지 된 사랑을 나눈 희대의 로맨티스트이라는 평과 아카데미에 존재해선 안 될 끔찍한 폭력 학생이라는 평이 공존하고 있는 상태이다.

“...소문이 그만큼 퍼져있는 상태에요. 도련님.”

하루도 안돼서 퍼져나가는 소문을 조사하기 시작한 샤오메이는, 자신이 이 소문을 통제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본래라면 호사가들을 다루는 데에 이골이 난 아그네스가 움직여야 했으나, 아그네스 본인도 소문에 엮였기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뭐, 나도 잔뜩 들었지. 이야, 우리 아르틴이 언제 황녀님하고 약혼을 다했는지 모르겠다니깐.”

아삭!

본래는 골드 클래스의 못미치는 실버 클래스의 방이지만, 조르바 펠카스의 방은 골드 클래스 기숙사의 방보다 더욱 화려하고 휘황찬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제국에서 만들어진 전통있는 장인이 만든 가구, 호피로 만들어진 카페트와 왕국의 아름다운 보석들이 장식된 샹들리에까지.

아마 모든 학생을 통틀어서 이만큼 부유한 방을 꾸린 것은 조르바 도련님뿐 일 거라고 샤오메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 좋아, 아르틴이 곤란하다면 내가 도와줄 수야 있지.”

“그 말 정말인가요?!”

조르바의 말에 밝아지는 표정을 샤오메이는 감추기 힘들었다. 누가 뭐라 해도 이런 분야에 있어서 가장 능숙한 기질을 발휘하는 건, 조르바 펠카스가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르바도 가볍게 도와줄 생각은 없는지, 소파에 누운 자세 그대로 사과를 한입 더 베어물고는 샤오메이를 힐끔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네. 요 근래 나를 빼두고 둘이서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나한테는 비밀로 하고 말야.”

“...그건.”

“저번에 아르틴을 감시하기 위해 학생회에서 보냈다는 감시는 사실 유니콘 이었다면서? 깜짝 놀랐지 뭐야?”

능글맞게 웃는 조르바의 태도에, 샤오메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르바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같이 지낸 샤오메이는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틴 오라버니한테 말해서, 제대로 다 설명하도록 만들게요. 저희도 숨기고 싶어서 숨기는 게 아니거든요.”

“으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근데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지.”

올 것이 왔나, 샤오메이는 두 눈을 꼭 감고 고개를 푹숙였다.

“...되잖아요.”

“응? 잘 안들리는데.”

“외박...주면 되잖아요..”

“제대로, 크게 말해줘.”

“여자 분들하고 외박 다니는 거, 본가에 비밀로 해드리면 되잖아요!!”

그 말에 조르바는 만족하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먹던 사과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쭉 켰다.

“그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안 그래도 또 사고 치다가 걸리면, 용돈을 반으로 줄이겠다는 소리까지 들었단 말이야?”

샤오메이는 그 말에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저 말은 사고를 치겠다는 말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제발, 저는 도련님의 친구고 의동생이면서, 동시에 경호원이라고요. 제가 상단에 돌아갈 때 마다 얼마나 혼나는지..!”

“어허, 그러니깐 내가 직접 나서서 도와주겠다는 소리 아니야? 걱정하지 말고, 너는 가서 아르틴이나 설득시켜 봐.”

꾸욱, 꿀밤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을 샤오메이는 속으로 삭혀야 했다.

아직 바이올렛 언니의 건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금 자신들에겐 조르바가 필요했다. 사람들의 심리를 뒤흔들고 여심을 잘 아는 조르바가.

“...대신 아그네스 황녀님한테 작업 걸거나 하시면..”

“이런,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나는 아르틴을 진심으로 친형제 같은 친구로 여기고 있다고?”

오래 앓던 충치가 빠지면 이런 기분일까, 들뜬 조르바는 자신의 인맥이 적힌 수첩을 펼치며 샤오메이에게 자신만 믿으라는 듯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내 친구의 여자는 안 건드려, 탕자에게도 탕자만의 법도가 있는 법이라고?”

착. 하고 수첩을 접으며, 이미 샤오메이가 부탁해올 것을 예상했던 조르바 펠카스는 행동에 나서기로 시작했다. 자신의 앙증맞은 친구가 과연 무엇을 숨겨왔던 것인지 기대하며 말이다.

**

방으로 돌아와 한 숨 낮잠 자고, 씻고 머리를 식힌 나는 내가 저지른 일의 후폭풍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왕국의 서열 2위나 다름없는 공작의 후계자를 때려 눕혔으니, 가문이 나서든 주변 녀석들이 나서든 골치 아픈 일은 명확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스트레스로 머리가 펑펑 빠질 거라고 걱정한 나는, 숨도 돌릴 겸 약속한 시간이 되자 아그네스의 방으로 몰래 찾아갔다. 물론 유니코르는 당근 샐러드 좀 사다주고는 만화책 보라고 방에 두고 나왔다.

“어서와요 아르틴!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오래 기다렸어? 네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케이크 좀 사오느라 늦었네.”

“어머, 잘 됐네요. 마침 준비한 와인이 단 음식하고 어울렸는데.”

내가 미리 정한 암호에 따라 노크를 하자, 아그네스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은 후 방안으로 맞이했다.

그 후로 우리 둘은 아그네스가 준비한 와인과 케이크를 즐기며, 시시콜콜한 수다를 나눴다. 어제 새로운 로맨스 소설을 읽었다던가, 오늘 어느 교수님의 가발이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같은.

후자의 이야기에서는 즐겁게 웃을 수만은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둘은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 모두 소문이나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 정도의 문제는, 둘이 힘을 합친다면 해쳐나갈 수 있다는 무언의 신뢰가 우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즐거운 시간을 현실의 이야기로 망치고 싶지 않았던가.

똑똑똑.똑.똑똑.

“어라? 누가 또 왔네요??”

그때, 방문을 두들기는 노크소리에 문을 열자, 그 자리에는 샤오메이가 머쓱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샤오메이? 무슨 일이야?”

“미안해요, 두 분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그 전에 미리 들려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괜찮아요! 그보다 무슨 일이에요? 문 앞에 서있지 말고 들어와서 이야기해요.”

샤오메이가 형님체가 아니라 진지한 말투로 운을 띄웠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다고 이해한 나랑 아그네스는 샤오메이를 방 안으로 들인 후 무슨 일이냐며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샤오메이가 들려주기 시작한 현재 상황은 참으로 기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상황이 이렇게 된 거라고?”

“네, 조르바 도련님이 또 한 건 해냈네요.”

“..걔는 정말 자기 사람이 몇이나 되는 거야?”

조르바가 한 것은 많지 않았다. 95%의 진실에 5%의 조미료를 뿌렸을 뿐.

“그거 알고 있나 자기들? 리가르도 위센이 예전부터 아그네스 황녀님을 흠모해 왔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 그런데 그런 황녀님이 내 동생 아르틴과 깊은 사랑에 빠져버린 거야!”

“분노한 녀석이 내 동생 아르틴과 황녀님에게 한 무례는 말로 하기도 두려울 정도라네, 황녀님을 작부로 부르고 내 의동생인 샤오메이를 노예라고 불렀지. 이 시대에 수인을 노예라고 칭하다니, 얼마나 두려운 구시대적 사고방식인가? 감히 황녀님에게 작부라고? 제국이 나설 정치적인 문제지.”

“물론 자기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진 않아. 하지만, 사람들은 진실을 알아야지. 안 그래 자기들?”

자신의 하렘을 움직이기 시작한 조르바는 철저히 계획적으로 귀족파의 악의적인 소문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좀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마왕군의 간자를 처치한 영웅을 범죄자로 매도하다니. 그 의도의 불순함은 어린 아이를 데려와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여러명의 선배가 칼을 차고 위협해놓고, 여학생을 때렸다니? 실제로 당시에 자리에 있던 여학생 중 입원한 아이는 전혀 없다고 하던데? 그런 헛소문을 함부로 입에 담았다간 자네의 명예가 더럽혀 질 거야”

마치 현장에 있었다는 듯이, 철저하게 귀족파의 악의적인 소문을 박살낸 조르바는 곧 이어 나와 아그네스를 희대의 로맨틱한 이야기로 탈바꿈하여 나에 대한 소문의 방향을 돌리는 데에 이어졌다.

“샤오메이를 연모해 자신을 악의적으로 괴롭혀온 백작가의 후계자에 이어, 자신의 여인에게 입에 담아서도 안 될 끔찍한 말을 한 공작가의 후계자와 맞서 싸우다니! 아르틴은 정말 로맨틱한 남자 아닌가요?”

“불의에 굴하지 않고,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기사 소설에 나올법한 멋진 남자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조르바의 수많은 인맥들이 그 의견에 동조하는 것으로. 아카데미에는 이제 나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 사라진지 오래다.

“게다가, 아르틴 루드비히와 아그네스 황녀님의 연애를 인정해 줘야 한다는 청원이 학생회에 올라오고 있어요, 투표자도 무려 300명을 돌파...”

“...그걸, 지금 몇 시간 만에 했다고?”

“2시간이요, 정확히는 1시간 40분 더 지나지 않았을 까요?”

...나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이마를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정해졌네. 조르바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적으로 돌리면, 아주 귀찮아 진다. 애매하게 거리를 두면 의심해 온다. 그럴 바엔.

“내일, 확실하게 조르바에게 말하자고.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 말야.”

“..그러는 게 저도 좋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로 유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사실 나는 교단과 상대할 때 어느 정도 알고 있긴 했지만. 다시 한 번 체감했을 뿐이다.

“그래도,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예요. 아르틴이 얼마나 속으로 고생할까 걱정했는데...”

아그네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꼭 잡아주자, 나도 그 손을 꼭 잡아주며 눈을 마주쳤다. 생각보다 우리 두 사람은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힘들어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둘이서 즐기실거면, 저는 이제 가 볼게요?”

스윽,

샤오메이가 분위기를 읽고 일어나자, 아그네스가 샤오메이의 손을 붙잡았다.

“가지 않아도 좋아요 샤오메이. 같이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도 괜찮아요.”

“네? 아, 아니, 저는 괜찮으니깐 두 분이서 오붓하게..!”

다음날 아침, 우리 세 사람은 아그네스의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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