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고백
* * *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빌런은 죽었지만 다음 빌런이 또 다시 찾아올 것이고, 암 걸리는 악역을 하나 조져놨지만, 고구마 전개는 새롭게 나타날 아카데미의 시작이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냐..? 지루하다 아르틴.”
“조금만 기다려, 걔는 원래 10분에서 20분정도 늘 늦거든.”
유니코르의 징징거리는 소리에도, 나는 차분하게 빈 교실에 앉아서 허공의 상태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빈 교실은 본래 만화부의 동아리 부실이었다고 한다.
아카데미에서도 꽤 전통 있고 많은 부원을 자랑하던 동아리였지만, 저번에 남장여자로 소문이 났던 나와 조르바의 금단의 사랑을 그리다가 불순한 서적을 만든다고 적발되어 지금은 지하의 구석진 방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병신들.
덕분에, 아그네스에게 듣기로는 이 커다란 동아리 부실은 이후 우리 연금술 동아리에게 할당될 거라는 소리를 들었다. 다른 동아리들이 군침을 흘렸지만, 동아리 부실을 배정하는 것은 학생회의 권한. 정경유착의 힘은 달달했다.
“뭐, 앞으로 여기서 자주 지낼 거니깐, 영역표시라도 하고 있던가.”
“본좌를 뭐로 알고 있는 거냐 네 녀석은! 본좌는 영역표시 같은 하찮은 짐승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
심심해서 한번 장난을 치니 바로 노발대발하는 유니코르.
녀석이 챰피 같기는 해도, 옆에 두고 있으면 심심한 일은 없으니 생각보다는 좋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그 조르바라는 녀석이 원하는 게 있어서 만나려는 것 아니냐! 근데 왜 우리들이 녀석을 기다려야 한단 말이냐!”
“내가 걔한테 진 빚이 이번에 좀 커서 그래, 게다가 걔는 자기 생일 파티에도 늦는 놈이라고.”
내 설명에도 납득이 안 된다는 듯 입술을 삐쭉 내밀고 있는 유니코르.
난 녀석을 달래기 위해 주머니 안에서 당근 초콜릿을 꺼내 입에 넣어줬다.
“음! 이거 무척 맛있도다! 하나 더 다오!”
“하나 더 줄 테니깐, 10분만 더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알겠다! 입 꼭 다물고 있으마!”
먹이를 보채는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녀석의 입에 당근 초콜릿을 한 개 더 넣어주자, 녀석은 양 볼을 붙잡고 오물거리며 초콜릿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나는 드디어 다시 조용해진 유니코르를 뒤로하고, 허공에 떠오른 상태창을 팔짱을 끼고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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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인정보 확인하기.
2. 퀘스트 (New!)
3. 상점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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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보밖에 뜨지 않던 상태창에 퀘스트랑 상점이라니, 난생 처음 보는 기능들에 처음에는 뭔가 싶어 이것저것 뒤져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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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행중인 퀘스트 (2/10)
1. 중간고사의 시작!
2. 자신의 하렘을 완성시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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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게임으로 치면 의뢰를 받아서 클리어 하면 보상을 주는 시스템이겠지. 문제는 내가 이 세계에서 이런 식으로 뭔가를 받아본 기억이 없었기에,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그냥 보상도 없이 존나 굴리는 좆같은 세계가 아니었나...?’
여태까지 상태창에서 의미가 있는 건 칭호정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5회차에 갑자기 튜토리얼 보상이라니.
미리 하나 말하자면, 튜토리얼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영지로 도망친 내 눈앞에 가장 먼저 나타난 게 바로 튜토리얼에 대한 상태창의 표시였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었다. 이 세계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기, 마나를 다루는 법을 익히기, 아르틴 루드비히에 대해 조사하기. 이런 기초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시작했었다.
시간으로 치면 15년도 더 넘은 시간이라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마지막 튜토리얼이 아마 마족을 한 마리 해치우는 것으로 끝났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튜토리얼이 완료 됐다고 뜨는 거냐고..?’
『처음으로 계승특성을 획득했습니다! 튜토리얼을 클리어 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상태창에 떠올랐던 문구는 계승특성을 획득했다는 이야기였다.
『해당 특성은 시간의 흐름에 벗어난 존재의 권능입니다. 회귀를 해도 계승됩니다!』
회귀를 해도 이어진다는 유니콘의 유일한 계약자. 이 특성을 얻은 직후 클리어가 됐다는 것으로 봐서는, 이런 특성들이 아마 계승특성일 테지.
이런 튜토리얼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또 계승특성 같은 고인물 육성 시스템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진작 계승특성이나 얻으러 돌아다녔을 텐데.
‘...아, 내가 왜 그때 스킵을 눌러가지고.’
1회차 당시에는 이 상태창이라는 시스템이 너무 익숙했다. 장르소설만 10년을 읽었던 나한테는 처음의 감동이 길게 이어지지도 않았고, 늘 뻔한 말만 하다가 스킵이 끝나면 다음 튜토리얼을 알려주기도 했고.
그래서 그냥 중간부터는 스킵 눌렀다. 너네들도 게임 하면 튜토리얼은 대부분 스킵 누르잖아....
‘그런데 이런 중요한 설명이 있었다면, 시간이 지나면 튜토리얼 알림창이라도 띄워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시발, 5회차 특전이 왜 안 열리나 했더니 이런 시스템을 놓치고 있었다니. 고구마는 카이엔이 아니라 나였단 말인가?
답답함에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른 나는, 메뉴로 돌아가 이번엔 상점창을 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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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회귀자님,="" 상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원하시는 물품을="" 선택하시면,="" 해당="" 물품의="" 자세한="" 설명과="" 가격이="" 나옵니다.=""/>
<현재 회귀자님이="" 보유한="" 포인트는="" 『506,752』포인트="" 입니다.=""/>
물품화살 10개 : 3포인트
물품롱소드 : 5포인트
물품회복 포션 : 10포인트
물품마나 포션 : 10포인트
물품그림자 토끼의 마석 : 15포인트
<<<이전 페이지="" 검색=""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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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752포인트. 그냥 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숫자다.
어떻게 이 숫자가 모였나 하고 계산해 봤더니, 각 회차별로 내가 생존한 게 5년, 4회차는 백도어 한다고 3년 만에 던졌으니깐 약 1년에 3만정도 쌓였더라. 4만은 어디 갔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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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인벤토리 : 품절
시스템인벤토리 확장권 : 품절
시스템인벤토리 확장권 : 품절
시스템인벤토리 확장권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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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이발, 인벤토리가 있을 줄 누가 알 수 있냐고. 딱 1개당 1만씩 4개 사니깐 4만이더라.
‘불사조의 깃털 2만 5천...’
리치의 본 드래곤을 상대하다가 치명적인 독에 감염된 아그네스를 구하기 위해, 나랑 카이엔은 불사조의 깃털을 찾아 제국의 사막을 건너 사막 술탄국까지 여행을 떠났었다.
‘세계수의 새싹 1만 3천...’
마기에 오염되어 죽어가던 유니코르를 정화하기 위해서, 엘프의 숲에서 1달간 온갖 모험을 한 끝에 겨우 얻었던 게 세계수의 잎이었다.
나는 밀려오는 정신적 탈력감을 이겨내기 위해 정신승리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상점창을 꺼버렸다.
‘나는 저런 거 없어도 잘 해왔어, 내가 병신 같은 게 아니라 내가 너무 실력이 뛰어난 탓이야!’
물론 아무리 그래봤자 내가 병신인건 변함없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찾아봤는데 드래곤 하트나 엘릭서도 있는데 탈모약은 없더라.
괜히 상점을 보고 있으면 안 그래도 받는 스트레스가 자책감으로 더 커질까봐,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상점은 자제하기로 결심했다.
“왜 그렇게 얼굴이 죽상이야 아르틴? 아카데미 최고의 로맨티스트가 됐으면 좀 더 기뻐해야지.”
그때, 문이 열리며 익숙한 구리빛 피부의 붉은 머리 미남이 의자밖에 없는 텅 빈 동아리실로 걸어 들어왔다.
“네가 약속시간을 20분이나 어겨서 죽상이라고는 생각 안 해 조르바?”
“당연히 그 정도는 마음이 너그러운 내 친구가 이해해 줄 거라고 믿고 있지.”
의자를 끌고 와 내 맞은편에 앉은 조르바는 요 근래의 나를 떠보던 의심 가득한 모습은 어디에 갔는지, 마치 병원에서 처음 만날 때처럼 여유롭고 느긋한 모습을 보여준다.
뭐, 이쪽이 내가 잘 아는 조르바 펠카스라는 남자다. 풍요로운 지갑 사정 만큼이나 마음이 넉넉하고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남자.
“그럼 저번에 봤던 이 아가씨가, 그 소문으로 듣던 유니콘인가?”
조르바가 싱글거리며 유니코르에게 살짝 몸을 기울이자, 유니코르는 정색한 표정으로 내 뒤로 몸을 숨기며 단호한 목소리로 조르바에게 말했다.
“본좌에게 함부로 말 걸지 마라 호색한.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너희 색남이라는 족속들은 우리 유니콘들의 숙적이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아르틴? 나를 싫어한다는 소리인가?”
“네가 너무 바람둥이라서 곁에 있는 것도 싫다는 소리야.”
이전에도 말했듯이, 마왕군이 세계를 침략했지만 여전히 유니콘의 계약자들은 처녀를 더럽히는 금태양이라는 존재들을 이 세상에서 모조리 멸할 의무를 부여받는다.
물론 나는 그런 의무를 따를 생각도 없지만, 근본적으로 조르바와 유니코르는 물과 기름과도 같은 관계. 절대로 친해질 수가 없다.
“어라, 하지만 아르틴은 아그네스랑, 샤오메이와 그렇고 그런 관계가 아닌가? 유니콘들이 좋아하는 순애보랑은 거리가 멀 텐데.”
“아, 아르틴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 녀석은 초원의 왕께서 직접 인정한 우리들의 조력자! 본좌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참아줄 수 있는 계약자란 말이다!”
빼액 소리를 지른 유니코르는 저 남자 재수없다고 중얼거리며 내 옷깃을 꽉 붙잡았다.
아직도 초원의 왕에게 버림받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나.
“...내가 아그네스랑 샤오메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확정한 것도 아닌데.”
“오, 나는 눈치가 빠르거든 아르틴, 샤오메이가 너를 위해 나를 찾아와 부탁할 때의 표정은 짝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이 아니었어. 거기에 카이엔이 말했던 걸 아직 기억하거든?”
이런 눈치 빠른 제비새끼.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샤오메이랑 아그네스랑 사귀고 있어. 둘 다 진지하게 만날 생각이고.”
“역시! 그럴 줄 알았지! 매번 아니라고 했지만 난 다 알고 있었다고!”
자신이 이겼다는 듯 기고만장한 표정을 짓는 조르바. 역시 이 눈치 백단을 속이는 것은 무리인가.
“그래서, 어쩌다가 갑자기 아그네스 황녀님까지 사귀게 된 건지도 설명해주면 좋겠는데 말야.”
“..샤오메이랑 사귀게 된 이유는 안 물어봐?”
“샤오메이랑은 언제 사귀나 기다리고 있었지! 양쪽 다 뇌가 청순한 건지 진도를 나갈 생각도 없는데 이 형님이 답답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깐!”
나는 문뜩 병문안 당시, 나한테 대딸해주면 좋아할 거라고 가르쳐 준 게 이 녀석이라는 사실을 다시 실감했다.
“그래서, 말 돌리지 말고. 너한테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줬으면 좋겠어. 이 이야기를 들으려고 아가씨들이랑 데이트도 미루고 왔거든.”
“..알았어, 대신. 지금부터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전부 믿어. 거짓말은 안 할 테니깐.”
여기까지 온 이상 뒤로 뺄 생각이 없었던 나는, 천천히 내가 겪었던 일들을, 그리고 지금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번이 다섯 번째 삶이야.”
내 이야기의 첫마디를 들은 조르바의 표정이 일순간에 바뀌었다.
**
골드 클래스의 기숙사에는 수많은 부속 시설들이 존재 한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비밀 이야기를 위한 살롱이다. 훗날 세계를 이끌어나갈 인재들이 차고 넘치는 골드 클래스간의 대화중에는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될 이야기들이 많다.
살롱은 그런 이야기를 편히 나눌 수 있게, 철저히 외부와 분리 된 마법적 처리로 만들어진 대화의 장이다.
편하게 중요한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의자와 소파는 제국에서 장인들이 만든 고급 가구를 사용했으며, 늘 새롭게 준비되는 다과조차도 황족조차 만족시킬 수 있는 퀄리티로 준비 된다.
창문은 정말 바깥과 이어진 게 아니라 마법으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숲의 풍경이고, 살롱의 문은 오로지 방 안에 들어와 있는 학생들과 사감만이 열고 닫을 수 있다.
이 모든 장치는 편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골드 클래스 사감의 노력이 돋보이는 부분이었지만, 지금 이 살롱내의 분위기는 단추를 2개정도 어긋나게 잠근 정장보다도 더 불편한 상태였다.
바이올렛 퍼플크로우, 린 샤오메이, 그리고 아그네스 에르멘가르트 황녀는 만난 지 30분이 되었지만, 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까지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차가 참 맛있네요, 그렇죠?”
“그러게요, 다과도 하나 같이 일품이에요, 몽블랑도 드셔보세요.”
“...맞슴다. 저도 먹어보고 깜짝 놀랐슴다. 아르틴 형님한테도 하나 가져다...”
앗, 하고 샤오메이는 순간 당황했다. 황급히 눈치를 살피자 아그네스와 바이올렛이 다급하게 헛기침을 하며 입가에 묻은 홍차를 냅킨으로 닦아낸다.
“아하하, 홍차가 너무 뜨거워서 순간 사례가 들렸네요!”
“어머,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다음부터는 온도에 좀 더 신경 써달라고 해야겠어요.”
아르틴이라는 이름에 당황했음에도, 두 사람이 품위를 지키며 웃는 모습을 보고, 샤오메이는 일주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무술을 수련하던 지옥주 수련이 떠올랐다.
‘...살려주세요, 오라버니..’
안타깝게도, 가장 중요한 아르틴은 이 자리에 없었다. 문뜩 샤오메이는 아르틴이 왜 탈모에 시달리는지 그 순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