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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55화 (55/266)

〈 55화 〉 고백 #02

* * *

“잠깐! 잠깐 기다려봐 아르틴, 이야기를 정리해보도록 하자고...”

내가 해준 이야기가 너무도 혼란스러운 이야기였던 탓일까. 그 명석한 조르바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리며 내 이야기를 끊었다.

“그러니깐, 너는 이미 네 번 죽은 상태고, 어째서인지 죽을 때 마다 아카데미 입학 첫날로 돌아오는 상태라고?”

“맞아.”

“지금이 다섯 번째 삶이고, 우리 샤오메이, 아그네스 황녀님, 바이올렛 양과 카이엔 그 친구가 어째서인지 너에 대한 기억만 떠올리기 시작했고?”

“잘 이해했네.”

허무맹랑한 소리,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내 눈을 쳐다보던 조르바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 내 눈은 전에 없을 정도로 진실만을 말하는 눈이었기 때문일 테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가 너무 많아. 일단 왜 내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 거지?”

“나도 그 부분을 모르겠어, 단순히 여자만 그런가 했는데, 카이엔 녀석이 회귀한 탓에 잘 모르겠단 말이지...”

역시, 가장 알기 쉬운 건 이 5회차 특전이라는 특기를 열람할 조건을 얻는 거다. 문제는 그 조건이 뭔지 알 수가 없으니 골치가 아픈 노릇.

‘만약, 다음 회차로 회귀 했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기억을 얻지 못한다면..?’

...물론 유니코르는 계승특성이란 게 있으니 어느 정도는 나를 기억 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샤오메이는? 아그네스나 바이올렛은?

처음에는 저번의 흑역사 때문에 기억을 지우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큰 버팀목이 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버팀목을 잃고 싶지 않았다. 무한히 반복되는 5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혼자 남고 싶지 않았다.

내가 꿈꾼 건 존나 쌘 삶의 무한한 반복이 아니라, 나를 진짜로 좋아해주는 사람들과, 나를 진심으로 친구로 여기는 친구들이었다. 현실에서는 가지지 못했고, 내가 가장 바래왔던 것들.

그때, 내 우울한 기운을 정신파로 공유한 것일까. 유니코르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르틴, 너는 탈모로 우울할 때 말고는 우울하지 않았으면 한다.”

“...거참 고마운 소리네, 탈모 문제만 해결되면 즐겁게 살라는 소리지?”

“아니, 그냥 평생토록 고통 받았으면 좋겠다. 아그네스의 처녀에 대한 원수. 아야!”

잘 나가다가 드리프트를 꺾는 유니코르의 머리에 딱밤을 한 대 먹여줬다.

“솔직히, 믿기는 힘들지만...샤오메이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했던 것도 그렇고, 네가 갑자기 아그네스 황녀님을 한 번에 유혹할 수 있는 남자가 됐다고는 생각하기 힘드니깐...”

“...믿는 거냐?”

“믿어야지, 네가 이제 와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 아르틴.”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대는 조르바.

본래라면 BL 때문에 남자랑 접촉은 악수도 안 좋아하는 나지만, 왠지 모르게 울적한 기분이 나아져서 대충 그만하라고 손을 쳐내기만 했다.

머리카락이 비슷하게 붉은 것도 그렇고, 한 살 더 많은 조르바는 친형제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하는 감상에 들게 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셈이냐?”

“뭐, 마왕이 보내는 부하들 처리하면서 최대한 단서를 찾아야지.”

“아니,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

기억 회귀에 대한 단서를 찾는 것 말고 더 중요한 게 뭐 있어? 마왕 토벌?

“네 그 하렘에 대한 건 어떻게 할 셈이냐고. 벌써 아그네스 황녀님하고 샤오메이까지 건드렸잖아.”

“...아니, 내가 건들려고 건드린 게 아니라!”

“쉿, 사내가 대협 답지 못하게 이리저리 핑계를 댈 셈이냐? 나를 봐, 수많은 여인들에게 사랑받으면서도 문제 하나 없잖아!”

뻔뻔스럽게 양팔을 벌리며 자신을 과시하는 조르바를 나는 아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봤다.

문제가 하나도 없어?

“샤오메이가 말을 잘하긴 했지, 무릇 영웅의 자질을 가진 남자라면 3처4첩에 수많은 여인들을 거느리는 게 맞지 않겠어?”

저렇게 말하는 조르바는, 2년 후 엘프 유학생과 제국의 쌍둥이 자매 여귀족을 한 번에 건드렸다가 엄청난 스캔들에 휩싸인다.

내가 그걸 몇 번이나 막아줬는데, 문제가 없어?

“아르틴, 본좌가 저 남자를 죽여도 되겠는가?”

“참아 유니코르, 업보는 돌아오게 돼있어.”

“그래야지, 이 조르바가 우리 동생의 여자 문제를 해결해 줄 생각이니깐”

신성력을 끌어올리는 유니코르를 막던 나는, 녀석의 달콤한 제안에 순간 고개를 돌렸다.

“..여자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니?”

“바이올렛 양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잖아?”

나는 그 말에 놀라서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이게 무슨 소리야?

“잠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샤오메이가 나한테 아그네스에 대해 상담할 때, 바이올렛에 대해서도 상담했거든.”

나는 그 말에 쯧 하고 혀를 찼다. 아마도 샤오메이는 아그네스와 해결해보겠다고 말한 일에 대해서 어려움을 겪어 조르바에게 상담을 했나 본데...

“일단, 아르틴 너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뭘 부끄러워 해야 하는데?”

“그야 당연히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해놓고, 우물쭈물 거리느라 움직이지도 못하는 네 행동이 남자답지 못하기 때문이지.”

뜨끔.

그 말에 나는 가슴이 한번 단도로 찔린 듯이 아파왔다.

“..나도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권능 도둑을 잡느라 시간이 없어서..”

“나라면 권능 도둑을 찾기 전에 바이올렛과 먼저 대화를 나눴을 거야! 여자들이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을 때, 네가 직접 대화하겠다고 거절했어야지!”

그 말에 나는 반박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바이올렛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던 나는 여태까지 대화를 미루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깐.

“듣자하니, 바이올렛에게 연애 감정이 없던 것도 아니고, 바이올렛도 너를 아직도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래도, 어떻게 하렘에 들어와 달라는 말을 내가..”

“아니, 아르틴. 그런 태도가 틀렸다는 거야.”

방금까지 장난기 있던 목소리로 재밌다는 듯 말하던 조르바는,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어려운 이야기니깐 네가 확신을 줘야지. 거절당하는 게 무섭다고? 당연한 일 아닌가! 누구나 자신을 바라보는 왕자님 같은 남자를 꿈꾸기 마련이니깐. 너는 그저 도망치는 것뿐이야. 거절당하는 것도, 어려운 일을 하는 것도 무서워서 말이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내 사람에게 나쁜 말을, 힘든 말을 하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처음 바이올렛이 나를 피했을 때부터, 나는 바이올렛에게 미움을 받기 싫다고 자각하고 있던 탓일지도 모르지.

“네가 샤오메이에게 그랬지. 정말로 나를 진심으로 사랑 하냐고? 이젠 네가 네 스스로에게 되물어봐야 할 차례야. 너에게 바이올렛 퍼플크로우란 여인은 어떤 여인인지.”

어깨를 툭툭 두드린 조르바는, 할말을 다했다는 듯 후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는 매 순간 진심을 다하라는 것뿐이야. 샤오메이에게 상처주지 말고.”

“...조언 고마워. 그 말 그대로 노력해볼게.”

“그거면 됐어, 누구나 처음엔 어색한 법이니깐. 잘 해보라고.”

조르바는 나를 격려하는 말을 남긴 채, 동아리 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르틴.”

“그래 맞아, 내가 노력해야겠지. 그렇지 유니코르?”

내 옆에 앉아있던 유니코르가 나지막이 나를 부르자, 나는 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니, 그것보다..네 녀석 설마 바이올렛까지 더럽힐 셈이냐...?”

“.....”

힐끔, 유니코르를 돌아보자 녀석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드는 게 명백히 보였다.

“아그네스에 이어서 바이올렛까지.. 너는 얼마나 많은 고결한 처녀를 더럽힐 셈이냐 아르틴!”

“악! 신성력 담아서 때리지 마! 이 미친 망아지야!”

나는 주먹에 살의를 담아 휘두르는 유니코르에게서 도망쳐,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리는 발걸음이 멈출 곳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골드 기숙사의 샬롱. 그곳에 지금 바이올렛이 있을 테니깐.

내 감정을 담아 진심으로 바이올렛과 마주 보기 위해, 나는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거기 서라 아르틴! 본좌는 아직 덜 때렸단 말이다!”

마나를 담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아르틴의 뒷모습을 보며, 유니코르는 두고 보자는 목소리로 주먹을 크게 휘두르며 외쳤다.

..물론, 폴리모프 했다고 한들 유니코르의 본질은 초원의 신수인 유니콘이다. 천리를 달린다는 적토마보다 고결하고 위대한 품종인 유니콘이, 달리기로 사람을 놓치는 일은 평범하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멍청한 녀석, 왜 그렇게 난봉꾼처럼 여러 여자를 마구 건드려 대는 것이냐.”

하지만, 이상하게 유니코르는 아르틴을 쫓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을 속으로 억누르기가 힘들어, 아르틴이 뛰어 내려간 계단에 걸터앉아 자신의 팔에 고개를 묻어 감정을 숨기려고 했다.

“2명도 무지 많은데 3명이라니.. 유니콘의 계약자란 자각은 있는 것이냐..”

단순히 처녀를 더럽힌다는 단순한 분노였다면, 차라리 쫓아가서 제대로 두들겨 패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니코르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분노가 아니란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걸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초원의 왕에게 버림받은 직후, 유일하게 남은 버팀목이 아르틴이라서 이리도 가슴이 아픈 걸까? 유니코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아르틴이 아그네스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묘하게 가슴이 시린 느낌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멍청한 바보 녀석, 이제는 어찌 되어도 본좌는 상관없다. 배에 칼이라도 박혀서 죽어버리라지.”

묘한 감정이 밀려온다. 그 감정은 유니코르가 수십 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왜 남자인데다가 순결하지도 않은 저 인간이 이리도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 인지. 유니코르는 스스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바보 같아.”

유니코르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건 아르틴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역시 이런 감정에 서툰 유니코르는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저.

그저, 아르틴을 좀 더 때려주면서 옆에 있고 싶었다. 그러지 못해서 서러운 마음에 유니코르는 계단에 앉아서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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