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56화 (56/266)

〈 56화 〉 고백 #03

* * *

“여전히 저희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으신가요, 바이올렛 양?”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차갑게 고요한 살롱의 안을 울린다. 허나, 정작 말을 내뱉은 아그네스의 표정은 차갑다기 보다는,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이었다.

“...죄송해요, 저는, 저는 역시 무리일 것 같아요.”

그 시선의 끝에 있던 바이올렛은 차분하게, 하지만 슬픈 눈으로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찻잔을 바라보았다.

샹들리에의 반짝이는 빛을 받아 마치 어두운 밤의 바다처럼, 홍차는 잔잔하게 바이올렛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그 비친 얼굴에 담긴 감정을, 바이올렛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언니, 언니에게도 분명 나쁜 제안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아르틴 오라버니가 언니를 얼마나 아끼는지 아시잖아요?”

샤오메이의 말이 맞다. 아르틴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위험을 넘겼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적으로 돌렸는가,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준 적은 셀 수도 없었다.

지옥의 군주와 계약하고도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자신을 마왕의 간자, 타락한 마녀라고 비난하던 교단 전체를 향해, 분노한 눈빛으로 열렬히 자신을 변호해주던 아르틴의 모습은, 어린 시절 동화를 보며 꿈꾸던 기사님의 모습이 겹쳐보였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기에.

바이올렛은 탁자 아래의 왼손으로 자신의 치맛자락을 꾸욱 움켜쥐었다.

“..미안해, 역시, 역시 나는. 확신할 수가 없는 것 같아.”

“...오라버니가 언니를 사랑하는 것 말인가요?”

바이올렛은 그 말에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된 후 내내 홍차로 내려 가있던 시선을 들어올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제가, 두 사람만큼 아르틴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확신을, 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아그네스 황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샤오메이는 그런 바이올렛의 태도가 조금, 아니 꽤나 답답했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출할 수가 없었다.

“..두 분은 바로 아르틴을 떠올렸고, 아르틴을 향해 자신의 진심을 고백했잖아요?”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그 말이 너무도 쓰게 느껴져서, 그래서 바이올렛은 목 너머로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저도 바로 아르틴에 대한 기억을 깨달은 건 아닌걸요. 아르틴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 덕분에 아르틴과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어요.”

아그네스는 그렇게 말하며 바이올렛의 오른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 따스함에 바이올렛이 움찔하였으나, 차마 떨쳐내진 못하고 있었다.

...물론 아그네스에게 바이올렛에 대한 친밀감은 많지 않다. 샤오메이는 그녀를 친자매처럼 여기기에, 바이올렛에 대한 죄책감을 크게 지니고 있는 것 같으나, 아그네스는 지난 회귀에도 바이올렛과 깊은 인연을 맺은 적은 드물었다.

“당신이 나쁜 게 아니에요. 바이올렛, 진심에 대한 가치는 순서나 시간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아그네스는 바이올렛을 바라보며, 아르틴에 대한 진심어린 표정을 느낄 때 마다, 그녀 또한 아르틴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이올렛의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슬퍼하는 아르틴의 표정을 보며 아르틴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아그네스는 진심으로 바이올렛에게 아르틴의 사랑을 같이 나누자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르틴에게 받은 것을, 단 한사람이 전부 돌려줄 수 있을까요? 저는..그럴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 바이올렛이 제 옆에서 같이 돌려줬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같이 아르틴에 대한 빚을, 그리고 사랑을 갚아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오만하게 정실을 자처한 자신이, 아르틴을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

“...저는, 두 사람처럼 대단하지 못해요. 먼저 고백하지도 못했고, 샤오메이처럼 아르틴에게 든든한 힘이 되거나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도, 아그네스 황녀님처럼 방패가 되어주지도, 버팀목이 되어주지도 못하는 걸요.”

바이올렛은 그 옆자리에 설 수 없었다. 이번에도 곁에서 도움이 되기보단 아르틴에 대한 짐이 될 것 같아서. 정말 진심인 두 사람보다 자신이 대단한지 알 수 없어서. 아르틴을 위해 진심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두 사람을 보면, 질투해버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그만 가보겠습니다.”

결국,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을 이겨내지 못한 바이올렛은 자리에서 도망치듯이 황급히 일어나 출입문으로 향했다. 샤오메이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바이올렛의 표정을 본 순간 뻗은 손을 다시 거둘 수밖에 없었다.

“바이올렛..그래도, 다시 생각해줘요. 아르틴에게는 당신이 필요한 걸요.”

덜컥.

닫히는 문을 향해 들린 아그네스의 마지막 말이, 바이올렛에게는 너무도 무거웠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너무 미웠다.

왜 먼저 다가가지 못 했을까. 왜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 했을까. 왜 먼저 알아보지 못 했을까.

이대로 가만히 서있다간 울어버릴 것 같아서, 방에 돌아가면 스스로를 계속 자책할 것 같아서 바이올렛은 걷기 시작했다. 그저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아, 오늘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과제도 제출해야 하는데, 예습과 복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르틴이 없으면 나는 할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할 텐데.

“...렛!”

머리가 어지러웠다. 비라도 내렸다면 차라리 펑펑 울었을 지도 모르지만, 화창한 하늘이 너무도 미웠다. 바이올렛이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씩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이올렛!”

그때, 누군가 바이올렛의 손목을 잡자, 바이올렛의 고개는 천천히 그 사람을 향해 움직였다.

“후우, 드디어. 드디어 찾았네.”

그 자리에는, 붉은 머리의 앳된 소년 같은 청년이 있었다. 기억 속에 보여주던 듬직한 뒷모습은 없었음에도, 자신을 향해 보여주는 저 미소는, 여전히 자신의 기사님처럼 멋지다고 생각해버렸다.

“바이올렛, 너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 꼭 지금 전해야 할 말이 있어.”

톡. 톡. 토톡. 토톡. 쏴아아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옷이 차갑게 젖어갔지만, 어느 한 사람도 비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너에게 상처를 주기 싫었어. 네가 나를 떠올릴 때 마다, 행복한 기억이 아니라 슬픈 기억으로 남기 싫었어. 그래서, 그래서 여태까지 제대로 말하지 못했어.”

아르틴이 뭐라고 말하는지, 바이올렛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바이올렛의 기억 속에 아르틴은 자신을 슬프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너는 늘 내게 행복한 기억이었는걸. 어두운 밤에도 행복한 꿈을 꾸게 해주는 따스한 존재가 너였다는 걸. 말해야 했지만, 목이 메여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슬픈 표정만 메아리 치고 있었다.

*

살롱에 도착했을 때, 바이올렛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떠난 지 얼마 안됐다는 두 사람의 말에 나는 탐지 마법을 쓰며 미친 듯이 바이올렛을 찾아 달렸다.

잠시 후 인기척이 없는 숲길에서 바이올렛을 발견했을 때, 나는 반가운 목소리로 바이올렛을 불렀었다. 내 말을 듣지 못한 건지, 반응이 없는 바이올렛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고 드디어 찾았다며 웃었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것처럼 대단한 존재가 아니야, 모자라고, 연약해서. 늘 자신을 연기하는 얼간이였지만...바이올렛 너랑 있으면 늘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어.”

바이올렛의 슬픈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터져 나오는 감정의 과잉을 억누를 수 없었다. 지난 회귀동안 억눌러 온, 계속해서 죽여 온 감정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나는 왜 이렇게 오버하는 걸까, 분명 처음에는 그냥 차분하게 내 마음을 고백하려고 했는데, 아그네스와 샤오메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즐겁게 웃으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건 내 독선적인 어리광이냐, 오만한 고백이고, 무책임한 말일지도 몰라. 그래도... 그래도 꼭 전하고 싶었어.”

나를 바라보는 바이올렛의 표정이 내 기억과 달랐을 때, 그저 친구가 나를 다르게 보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 틀렸을 거다. 매 회차 마다 내게 첫인사를 건네던 사람의 인사가 전부 아팠던 기억은 없었으니깐.

“나는 너를 좋아해 바이올렛,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를 좋아하고 있어.”

하지만 바이올렛의 첫인사는 이상하게도 매번 가슴이 아려왔다. 그저 가장 친한 친구에 대한 상실감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조르바에게는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기에 달랐다.

그리고 아그네스를 이번 회차에서 처음 봤을 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깨달았을 지도 모른다. 그건 아마 내가 품고 있던 연심에 대한 미련일 거라고.

그래서 이번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서로가 같은 추억을 하고 있는 이번만큼은 조금 욕심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진심으로 말하기로 했다. 정제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을 내보이기로 했다.

“...내가, 내가 그런 과분한 사람일 리가 없잖아. 응? 아르틴 너무 흥분한 것 같아.”

바이올렛은 웃으며 빗물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조금 뒤로 넘겼다. 힘겨운 웃음. 자존감이 낮은 그녀에겐 자신에 대한 확신이 적다.

그런 그녀가, 기억을 되찾자마자 내게 찾아왔었다. 그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다. 수십 년을 동정으로 살았던 내가, 그걸 확신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우선, 들어가서 비라도 피하... 아르틴?”

나는 조용히 바이올렛을 끌어안았다. 품에 안겨있는 바이올렛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3회차 때, 나를 위해 소원을 들어주겠다던 약속 기억나?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했잖아.”

하지만 내 마음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다. 회귀 속에서 놓치고 버려야 했던 내 마음을, 이번 회차에서는 보답 받을 거다.

“그러니깐, 지금 그 소원을 들어줘야겠어.”

“나랑 쭉 같이 있어줘. 바이올렛.”

내 말에 바이올렛이 놀라 버둥거렸지만, 나는 꽉 안아서 놔주지 않았다.

누가 하렘충이라고 욕해도 상관없다. 누가 호색한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이젠 무시할 거다.

이제는 내 것을 절대 빼앗기지 않겠어. 스스로 굳게 다짐했다.

**

“어머머..!! 둘이 격하게 끌어안는 것 좀 봐..!”

클레어는 나무 뒤에 서서, 아르틴과 바이올렛이 끌어안는 광경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기숙사 뒤편에 위치한 산책로를 가볍게 걷던 중, 우연히 비를 피해 찾은 큰 나무의 뒤편에서 벌어지는 로맨스 소설 같은 광경에, 꿈 많은 클레어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참을 수가 없었다.

“빗속에서 끌어안으며 고백이라니..!! 황녀님도 저 모습에 넘어갔나봐! 그치 카이엔?”

콰드드득!!!

옆에서 같이 그 풍경을 보던 카이엔을 향해 고개를 돌린 클레어는, 들려오는 굉음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카이엔이 쥐고 있던 나뭇가지가, 카이엔의 악력에 의해 그대로 뜯겨져 나가는 모습은 무척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는데.....”

“카, 카이엔? 괜찮아 카이엔?”

늘 잔잔한 호수 같던 카이엔이, 폭풍우가 치는 바다처럼 격렬한 감정을 뿜어내자 당황한 클레어는 카이엔을 불렀지만, 카이엔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내가 먼저 곁에 있었는데.

‘파트너라고 했으면서, 같이 마왕을 죽인다고 했으면서.‘

콰르릉, 우지직!

“꺄아악! 나, 나무에 번개가! 카이엔 도망치자!”

클레어는 알지 못했다. 그 번개는 카이엔의 감정에 공명한 정령의 분노어린 화풀이였다는 걸.

반응이 없는 카이엔을 클레어가 있는 힘껏 당겨봤지만, 카이엔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서 아르틴과 바이올렛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