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땀투성이 세니아 선생님(수정)
* * *
10분은 절대 짧은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100개가 넘는 빌런 관련 이벤트를 설명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나머지 조사해야할 것들은 내가 나중에 적어줄 테니깐, 우선은 여기까지만 하자.”
힐끗 시계를 바라보니, 이제 정말 1분도 여유시간이 남지 않았다.
나는 박수를 치며 슬슬 각자의 교실로 돌아갈 시간이 됐음을 알렸다.
“병으로 죽은 연인을 마왕과 거래해 되살리려는 사람이 2학년의 분석연금술 교수님이었나?”
“아뇨, 3학년의 융합강령술 교수님이었슴다. 분석연금술 교수님은 예산 부족이랑 퇴직 권유고요.”
필기구를 정리하며 자신들의 필기가 맞나 대조하는 모습을 보니,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필기를 중시했나?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 아쉬운 건, 나에게는 질문이 전혀 없었다. 별다른 집중을 하지 않던 조르바가 그나마 헷갈린 몇 개를 샤오메이에게 물어볼 뿐.
‘...생각해보니 여기 있는 애들 전부 천재였지.’
이 세계관을 창조한 작가의 역량부족인지, 간혹 나도 알아챈 사실을 못 알아챌 때가 있기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이 스펙의 전부인 나하고는 지성의 깊이가 전혀 다르다는 소리다.
“...너는 이런 것을 어떻게 다 외우고 있느냐??”
오직, 유니코르만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감탄하는 얼굴로 바라본다.
왠지 기분이 그렇게 기쁘지는 않았다. 초등학생에게 수학에 관한 질문을 대답해주는 고등학생의 기분이 이런 걸까.
“글쎄, 일단 몸으로 엄청 굴렀지, 외우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기도 했고.”
원작자도 아니고, 내가 소설에 나오는 모든 기믹과 이벤트를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심지어 내가 발견한 이벤트의 대부분은 원작에서 나오지도 않은 이벤트다.
하지만, 외우지 않으면 안됐다.
“내가 실수하면, 너희가 크게 다쳐야 했거든, 그게 싫어서 죽어라고 외웠지.”
내가 빌런을 착각하면 무고한 학생들이 죽어 나갔다.
내가 이벤트를 막지 못하면 내가 친해진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어야 했다.
“마법이나 연금술을 공부하는 것 보단 쉬웠어, 효과도 확실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외워지게 되더라고. 그래서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어.”
회귀에 익숙해지지 않았던 초창기의 나는, 죽는 것도 싫었지만 내 친구들이 다치는 게 가장 싫었다. 무엇보다 그때의 나는 회귀로 관계가 초기화 되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느끼던 시절이었다.
“..어라, 왜 다들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봐? 갈 준비 해야지?”
문뜩, 내 주변에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애들이 전부 나를 주시하는 것을 알아챘다.
뭐지? 내가 방금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내가 그렇게 의아한 표정을 짓자, 샤오메이가 한숨을 쉬더니 나를 등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곁에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응? 갑자기 왜 그래 샤오메이?”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아그네스가 내 앞에 와 손을 잡아주고 조르바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카이엔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이유도 모를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니, 방금 한 말은 그냥 별거 아니었다는 뜻이지, 힘들었다고 티내거나 한 게 아니야.”
“걱정 말아요 아르틴, 이제 아르틴 곁에는 저희가 있잖아요.”
“미안하다. 본좌가 괜한 질문을 한 탓에 나쁜 기억만 떠올렸구나...”
뭐냐고 이 갑자기 분위기 신파는, 나는 그럴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애들아, 우리 빨리 안 가면 진짜로 지각이야! 아니 이미 한 거 같아!”
내 외침에도 녀석들은 무슨 착각에 빠진 건지, 나를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숙연한 분위기를 더 이상 바꿀 방법이 없던 나는, 그냥 눈감고 등뒤에서 느껴지는 샤오메이의 부드러움 이나 즐기기로 했다.
*
한 3분이 지났을까, 하나 둘씩 자신만의 착각의 파노라마를 끝내고 나를 놔주기 시작했다.
이미 지각한 것 같긴 했지만, 나는 그래도 얼굴 도장은 찍자는 심정으로 1학년 B반 조를 데리고 교실로 이동하려고 했다.
“잠깐 아르틴, 저랑 잠시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때, 머뭇거리며 동아리실에 남아있던 아그네스가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불러 세웠다.
“응? 무슨 이야기인데? 빌런이나 기억회귀에 관한 거야?”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잠시 아르틴과 나누고픈 사적인 이야기라고 할까...”
아그네스가 조금 부끄러운 듯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빙글 빙글 꼬기 시작했다.
“아...비밀 이야기군요. 그럼 저희가 자리를 비켜드려야죠.”
“흐음, 과연. 연애 재밌게 하라고 아르틴!”
“잠깐 본좌는 가기 싫다! 이거 놔라! 비처녀가 함부로 만지지 마라!”
샤오메이와 조르바가 뭔가를 눈치 챈 건지 나를 향해 웃으면서 버둥거리는 유니코르를 데리고 자리를 비켜줬다.
카이엔도 나와 아그네스를 번갈아가며 보더니 눈을 질끈 감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를 비켜줬다.
“...있다 봐, 파트너.”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코웃음을 쳤다. 누가 보면 구국의 결단이라도 한 줄 알겠네.
...아무튼, 나랑 아그네스가 동아리실에 단 둘이 남게 되었다.
“일단,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아그네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야기를 머뭇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설마 또 리가르도 위센이 널 귀찮게 하는 거야?”
“아뇨! 그런 게 아니라...그, 집안 문제라면 집안 문제인데..”
아그네스는 내 말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다, 이내 결심한 건지 숨을 깊게 내쉬곤 내 손을 붙잡았다.
“학생회장님, 그러니깐 저희 오라버니가 아르틴을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했어요.”
“...황태자가? 나를?”
“네, 아르틴도 알다시피 오라버니가 저에 대해서는 좀 바보같이 극성이라서...약혼자 얼굴을 직접 한 번 봐야겠다고..”
말을 흐리는 아그네스의 반응에, 나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현 학생회장이자 황태자인 리처드 에르멘가르트는 여성향 로맨스 소설에 등장할 법한 완벽에 가까운 남자다.
19살에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례로 단 한 번도 1등을 뺏긴 적이 없으며, 1년 전에는 제국의 삼검성과 대등한 경지를 완성했다고 하는, 소설 속에서 묘사되기를 주인공 카이엔에 비견될 천재 중의 천재.
하지만 그런 황태자에게도 두 가지 약점이 있는데, 하나는 엄청난 기분파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동생인 아그네스를 엄청나게 아낀다는 점이다.
덕분에 4회차 때는 아그네스와 사귀려면 자신을 꺾으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우리 연애를 막으려 들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이 있는 아그네스로써는, 말하기 힘든 것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왜 그걸 그렇게 힘들게 말해, 별 것도 아닌 일이잖아.”
“..하지만, 아르틴에게 스트레스를 더 주기는 싫었는걸요.”
나는 피식 웃으면서, 손을 꼼지락 거리는 아그네스의 손목을 낚아채 나를 향해 잡아당겼다.
“꺄악, 아, 아르틴?”
나는 부드럽게 아그네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반짝이는 은발, 새하얀 고운 피부와 대비되는 붉어지는 얼굴이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 저번에도 결국 내가 이겨서 인정하게 했잖아. 아그네스도 기억하지?”
“...네, 기억해요.”
아그네스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내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나보다 8cm나 키가 큰 아그네스가, 부끄러워서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모습은 평상시의 똑 부러지는 모습을 아는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 할 광경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마왕과 몇 번이고 싸운 내가 황태자를 겁낼 리가 없잖아?”
“..알고 있어요, 의심한 건 아니고, 그냥 괜히 신경 쓰게 할까봐..”
결국 나를 걱정해서 그리도 머뭇거렸다는 생각에, 나는 더 이상 이 귀여운 아가씨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쪽. 아그네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자, 아그네스의 새하얀 피부가 완전히 홍시처럼 익어버렸다.
“바, 바보. 이러다가 아침 조회 늦겠어요.”
나는 결석해도 상관이 없었지만, 부학생회장인 아그네스는 입장이 달랐다.
늘 학생의 모범이 되겠다고 말하고 다니던 아그네스가 조회를 빠지면, 호사가들이 온갖 루머를 퍼트릴 게 뻔했다.
“알았어, 그럼 3분만 이렇게 있자. 저번에도 샤오메이랑 같이 시간을 보냈잖아?”
“...딱 3분만이에요? 더는 진짜 안 되니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던 나는, 아그네스의 말을 키스로 끊고는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그네스도 내 입맞춤을 거부하진 않았다. 그 뒤로 우리는 최고의 3분을 보냈다.
*
우리가 동아리실을 나온 건, 정확히 3분 15초가 지나고 난 후였다.
물론 15초를 늦었다고 해서 아그네스가 화내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더 좋아하더라.
나는 아그네스와 헤어진 후, 마나를 이용해 미친 듯이 뛴 덕에 간신히 아침조회가 끝나기 10분 전에 교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늦은 탓에 세니아 선생님에게 잔소리 듣긴 했지만, 그 외에 별다른 일은 없었다.
유니코르가 왠지 모르게 또 잔뜩 삐져있다는 정도?
“너는 또 왜 삐졌어, 당근 케이크는 점심시간 지나고 사준다니깐?”
“본좌가 먹은 걸로 삐진 줄 아느냐! 센스가 없어도 너무 없구나!”
애는 갑자기 또 왠 헛소리야. 설마 또 아그네스가 최애니 뭐니 때문에 나한테 삐진 건가?
‘좀 있다가 당근 주스도 사다주면 풀리겠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아침 조회가 끝나자 인사를 하고 나가던 세니아 선생님이 문 밖을 나가기 전 발걸음을 멈췄다.
“아! 아르틴은 1교시 강의 시간에 교무실로 올래? 선생님이랑 가야할 곳이 있거든!”
내가 뭐라고 답변하기도 전에 알겠지? 라고 윙크하며 사라지는 선생님. 가끔은 저 텐션이 당혹스럽기도 하다.
“또 무슨 사고를 치신검까? 아니면 저희 모르게 빌런 하나 처리하셨슴까?”
“아니, 뭐 별거 안 했는데...리가르도 위센 때문인가?
내가 요 근래 큰일이 많기는 했지만, 세니아 선생님에게 불려갈 일은 공작가 후계자를 두들겨 팬 일밖에 없다.
그 녀석이 결국 일을 크게 벌리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면 좀 귀찮긴 할 텐데.
“뭐 가보면 알겠지, 너희는 먼저 수업 듣고 있어, 1교시랑 2교시는 영창 마법 강의지?”
“맞슴다! 그럼 저희 먼저 가 있겠슴다! 도련님도 은근 슬쩍 빠져나가려 하지 마십쇼!”
“이걸 들키네, 내 발로 갈테니깐 놔주지 않을래 샤오메이?”
나는 샤오메이가 나랑 대화하던 사이 몰래 빠져나가려다가 실패한 조르바에게 조의를 표한 후, 유니코르와 같이 교무실로 가려고 했는데 유니코르가 내 손을 피했다.
“본좌는 샤오메이랑 가있겠다! 애초에 가도 뭔 소리인지 모를 텐데 본좌가 필요하겠느냐!”
애 단단히 삐졌네, 자기 비하 하면서까지 나랑 떨어져 있으려고 하고.
최애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덕질이라고는 이 좆망 소설 덕질이 전부였던 나는 공감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가자구나 샤오메이! 본좌는 미리 가서 자기 좋은 자리를 맡아두고 싶다!”
휙 하고 등을 돌리고 샤오메이를 향해 가버리는 유니코르.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뭐 시간이 지나면 풀리겠지 라고 생각하며 교무실로 향했다.
끼익.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많은 대학원생과 교수들의 사용인들이 수업 준비를 돕는 게 보였다.
물론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금발머리에 뾰족한 귀, 투박한 로브는 굉장히 눈에 띄었다.
“어머! 아르틴 왔구나! 자리에 앉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평소처럼 그 풍만한 몸매를 로브로 가린 채 교육자로써 최선을 다하고 있는 세니아 선생님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갑자기 웬 몸매 묘사냐고? 여자를 알고 나니깐 눈이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가게 되는 것은, 내가 억제하기 힘든 남성의 본능이었다.
“저, 부르신 이유는 뭔가요? 대학원생 제의라면 그건 조금..”
“응? 아냐 아냐! 선생님은 대학원생은 충분히 있거든!”
그렇게 말하며 세니아 선생님이 가리킨 곳에는, 어째서인지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와 있는 후덕한 남학생과 빼빼마른 남학생이 열심히 시료를 나르고 있었다.
“찰스! 대니! 앞으로 두 박스만 옮겨주면 돼! 그것만 하면 이제 과제 채점만 하면 되니깐 힘내! 파이팅!”
“네, 네엣! 알겠습니다 교수님! 최선을 다해서 옮기겠습니다!”
“어머, 그렇게 열심히 안 해도 되는데, 끝나고 가서 내 이름으로 커피라도 사마셔~!”
대학원생이라는 두 학생은, 세니아 선생님의 귀여움 섞인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치자, 방금까지 다 죽을 것 같던 표정은 어디가고 헤벌쭉한 표정으로 보란 듯이 시료를 열심히 나르기 시작한다.
‘...아, 과연, 물소들이었나.’
저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마음으로 대학원생을 신청했는지 알 것 같다. 불쌍한 녀석들. 대학원생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람대접 받기는 힘들 텐데...
“찰스랑 대니 둘이서 정말 열심히 해주거든! 대학원생이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이번 마왕군의 스파이를 토벌한 일로 호출 받았지?”
아, 맞다 그런게 있었지. 학생회의 임팩트에 묻혀서 그만 잊고 말았다.
“역시! 표정을 보니 몰랐다는 표정이네! 선생님이 그럴 줄 알고 같이 가주려고 시간을 내줬거든!”
“..음, 저 수업은 어떻게 하고?”
“아르틴은 어차피 수업 안 듣잖니! 그보다 우리 아르틴이 대단한 교수님들에게 칭찬받으러 가는 게 더 중요할거야!”
영창 마법 교수님은 그렇게 생각 안할 것 같지만... 솔직히 마법은 가장 지루한 강의기도 하고 다 아는 거라 별로 상관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 좋아요. 지금 바로 갈까요?”
“그래, 아! 찰스야! 5교시 강의 준비도 끝내 줘! 부탁할게!”
“아!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헤헤!”
나는 그저 일을 부탁하는 데도 좋다고 실실 대는 버팔로들을 뒤로하고,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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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장님께서 급한 볼일이 생겨서 잠시 자리를 비우셨는데, 금방 오신다고 하네요! 여기서 잠시만 대기해주세요!”
학장의 사무실에 도착했더니, 학장은 없었고 대신 비서가 우리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학장의 사무실은 굉장히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가구로 가득했다. 저기 박제된 부엉이가 인상적이구만.
“휴! 엄청 긴장된다, 그렇지 않니 아르틴?”
“그러게요, 이런 호화로운 곳은 또 오랜만이네.”
나랑 세니아 선생님은 총창의 책상 맞은편에 세팅된 손님용 의자에 앉았다.
학장의 사무실이라서 그런가, 손님용 의자도 엄청 푹신하니 좋았다.
‘동아리 방에 쓸 의자를 이걸로 사달라고 할까?’
학교 예산으로는 무리겠지만, 조르바라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한 번 졸라봐야지. 저 부엉이 지금 나랑 눈 마주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한 10분 정도 기다렸는데, 학장은 여전히 도착할 생각을 안했다.
게다가 학장의 사무실은 비서가 냉방 장치도 틀어주지 않아서, 꽤 습하고 더운 탓에 나는 슬슬 딴 생각을 할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 되게 덥네요, 가서 비서한테 냉방 장치라도..”
선생님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자연스럽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이 퍽이나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지금 뭐하세요?”
“응? 너무 더워서 로브 안이 땀으로 흥건하지 뭐야! 그래도 이렇게 있으면 무척 시원하거든!”
로브의 단추를 풀고, 자신의 크기만으로 폭력에 가까운 거대한 폭유를 드러낸 세니아 선생님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손수건으로 땀으로 흠뻑 젖은 가슴을 닦아내는 엘프 미녀의 모습은, 속으로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대단한 장관이었다.
게다가, 땀이 흥건한 탓에 가슴을 가리는 얇은 천 옷은 완전히 젖어서, 분홍색 브레지어가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꿀꺽.
나는 그 놀라운 광경을 음미하듯 마른 침을 삼키며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저 가슴골에 코박고 숨 쉬다가 죽으면 사인은 행복사겠지?
“어머, 아르틴 너도 땀나는 거 봐! 선생님이 닦아줄까?”
“아뇨, 아니...네 뭐 그러셔도..”
거절하려던 나는, 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거대한 폭유에 거부하지 못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퀴퀴할 줄 알았던 땀 냄새는, 하프엘프 특유의 상쾌함이 섞여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최음제처럼 남성을 자극하는 향수 같은 묘한 냄새가 났다.
‘이래서 하프 엘프가 남자를 꼬시는 것 밖에 할 줄 모른다는 소문이 나는 건가..’
세니아 선생님의 가슴이 너무 커다란 탓에, 선생님이 내 곁에 다가와 땀을 닦아주려는 자세만 취해도 내 상반신을 꾸욱 눌러 포근하게 압박해주고 있다. 그 촉감은 마치 모성애를 물질로 구현한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와 동시에 뭔가 좆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이 행복을 좀 더 즐기기로 마음 먹었다.
벌컥.
“두 사람 다 미안 하군요, 제가 많이 늦었습니...”
역시나, 내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온 늙은 노인은, 자신의 눈앞에서 씰룩이는 엉덩이를 보고 굉장히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또 다시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세니아 선생님의 가슴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