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육망성의 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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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안에는 생각보다 지금은 쓰지 않는 공간들이 차고 널렸다.
과거에는 강의실이나 중요한 시설이 위치해 있던 건물도, 동선과 새로운 설비, 혹은 보안의 문제로 내부 시설들이 위치를 옮기고 나면, 그 건물의 일부는 쓰지 않고 방치되고는 한다.
과거 아름다운 장미들이 주변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장미관이라 불린 이 건물도 그런 식으로 버려진 건물에 속했다.
본래는 창문 밖으로 바다의 풍경이 미려하게 펼쳐져, 아카데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도 꼽히기도 했던 이 건물은, 과거 해안가로 침범을 시도한 마왕군의 습격 탓에 보안을 이유로 방치되어, 지금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폐건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폐건물이야 말로 아카데미 내부에 숨어든 비밀 조직의 좋은 아지트가 되었다.
“사제 형제님! 새로운 여자를 납치해왔습니다!”
“오, 어디서 또 이런 미인을! 잘했어 평신도 형제! 지하 격리실에 보관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육망성의 평신도 계급인 안제이는, 사제 계급인 안토니오 형제에게 깍듯한 경례를 하며 초점이 흐려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여인을 데리고 지하실을 향해 움직였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요 며칠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해 눈초리가 따가웠는데, 이런 미녀를 잡아왔으니 한동안은 혼나는 일은 없으리라.
‘원래의 친목회 시절이 그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본래는 아카데미에서 낙오 된 이들의 친목 모임에 불과했던 육망성에 ‘위대한 존재’가 강림한 이후, 육망성은 철저히 비밀결사로 개편되기 시작했다.
원래 회장을 맡았던 5학년 선배는 위대한 존재에 의해 ‘충실한 하인’으로 바뀌었다. 대신 위대한 존재를 부른 신입 회원이 회장 대신 ‘대사제’를 맡아, 육망성은 마왕을 모시는 비밀결사가 된 것 이다.
“야 안제이! 뭐냐 그 여자는, 네가 잡아 온 거야?”
“아, 안녕..하세요! 다비드 사제님!, 운 좋게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여자를 발견했지 뭐에요! 아마 자신이 모시는 귀족을 찾으러 온 시종이 아닌가 싶어요.”
납치한 여인을 지하로 천천히 끌고 지하로 데리고 가던 안제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같은 2학년 브론즈 클래스였던 다비드를 발견하고 급하게 인사를 했다.
“사제님이라니, 내가 우리끼리 있을 때는 사제님이 아니라 편하게 다비드라고 부르랬잖아!”
육망성이 비밀결사가 된 이후, 모든 사람이 그 변화를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마왕의 측근이라는 저 위대한 존재가 무서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안제이와 친구였던 다비드는 앞장서서 사제장의 말을 따라 여자들을 납치해오기 시작했다.
공을 세운 다비드는 위대한 존재에게 확실한 은총을 받았다. 이전에는 160도 채 안 되는 땅딸막한 체형에, 변변찮은 마법사였던 다비드는 이제 키가 170이 넘게 커졌으며, 강대한 마나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다음 시험에는 충분히 실버도 될 수 있으리라.
“아, 아무리 그래도 누가 듣기라도 하면. 혼날까봐...”
“하하, 안제이는 겁이 많아서 문제라니까. 앞으로도 용기를 내서 사제장님의 말씀을 따르면 너도 은총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다비드를 포함한 몇 명이 눈에 보일 정도로 대단한 변화를 얻자, 소극적이던 육망성의 회원들은 점점 적극적으로 위대한 존재를 따르기 시작했다.
패배의식에 완전히 물들어, 실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뒤에서 험담하는 게 전부였던 이들에게,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제안은 너무나도 큰 유혹이었다. 하나 둘 열정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자, 이내 조직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열심히 해야 하는데, 눈만 마주치면 겁이 나서 그렇지..”
“뭘 겁내고 그래! 위대한 존재가 준 이 구슬, 이것만 있으면 누구든 금방 납치할 수 있다니까?”
신도라며 누구나 허리에 차고 있는 분홍색 구슬을 두드리며 자신감 있게 외치는 다비드의 말에, 안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방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실례한다는 말로 자신을 보게 만든 후, 분홍색 구슬을 얼굴에 가져다 보이는 것으로 여인은 제 발로 자신을 따라왔기 때문이다.
“마취제를 쓸 때는 들키면 어쩌나 했지만, 이런 아티팩트 까지 받았으니 안제이도 금방 사제가 될 수 있게 팍팍 잡아오라고. 사제가 되면 혜택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물론 안제이도 알고 있다. 사제가 되면 잡아온 여인과 남자들 중, 사제장이 허락한 여인에 한해서 자신의 시중을 들도록 할 수 있다.
이미 다비드는 사제가 된 후로 2명의 여인을 받지 않았는가, 예전 같았으면 눈도 못 마주쳤을 여인들을 메이드처럼 부리는 다비드가 안제이는 퍽이나 부러웠다.
“하지만, 우리 들키면 어떻게 하지..? 교수님들이나 OB들이 우리를 토벌하려 하지 않을까?”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해, 4일 후에 대의식만 치루면, 이제 아카데미는 우리 육망성이 지배하는 거야! 설마 위대한 존재의 계획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
반동분자를 바라보는 듯 한 다비드의 눈빛에, 안제이는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이미 몇 명, 멍청하게도 위대한 존재에게 반기를 든 이들은 사제장에게 끌려간 후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나, 나는 그냥 걱정 돼서..”
“걱정할 것도 많다. 이제 우리는 새 시대를 이끌 위대한 인재들인데, 그렇게 겁이 많아서 되겠어? 앞으로 기운 좀 내!”
안제이를 격려한 다비드는, 다른 사제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나중에 보자며 자리를 비웠다. 전에는 소심하기는 해도 좋은 친구였는데, 요즘은 정말로 사람이 바뀐 것 같아서 안제이는 씁쓸한 감정이 올라왔다.
“휴우, 빨리 잡아온 여인 넣어두고 가서 쉬어야겠다..”
끼이익. 쿵. 철문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늘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지하로 가는 계단 문이 열렸다.
“자, 너도 조심히 내려와. 저번에 누가 다치게 했다가 큰 벌을 받았으니 조심해.”
안제이는 자신이 잡아 온 여인의 손을 잡아, 천천히 지하 1층의 격리실로 향했다. 어느 순간부터 늘 정체모를 기분 나쁜 액체가 묻어있는 지하로 가는 계단을 걸을 때면, 안제이는 소름 이 돋는 감각에 몸서리를 쳐야했다.
자신이 잡아 온 여자의 손을 잡아 이끈 것도, 차라리 사람의 체온을 느끼며 걷고 싶은 탓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을 잡은 여자가 너무 강하게 손을 움켜쥐자, 안제이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아야야!! 그렇게 세게는 말고!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자신이 놀라서 외치자, 여자는 얌전히 손을 느슨히 잡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청초한 고용인 같았는데, 어찌도 손아귀 힘이 이리도 강한지 모를 노릇이었다.
겨우 도착해 지하 격리실의 문을 열자, 소리 하나 새지 못하는 문들이 쭉 늘어진 기분 나쁜 복도가 나왔다. 길게 있기 싫었던 안제이는 가장 가까운 빈방의 문을 열고, 여자를 밀치듯이 방안에 밀어 넣었다.
“좋아, 문을 잠그고.. 으, 무서워. 빨리 나가야지!”
이 격리실에 갇힌 후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기분 나쁜 공간이다.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안제이는 격리실 복도의 문을 닫고 허둥지둥 층계참을 올라갔다.
안제이가 떠나자 지하 1층은 죽을 듯이 고요했다. 그 고요를 깬 건, 방금 안제이가 방 안에 밀어 넣은 여인이었다.
“..휴우, 빌어먹을 애새끼가. 감히 누구 손을 잡는 거야?”
초점이 없던 눈빛은 그대로임에도, 여성은 걸걸한 욕을 내뱉더니, 자신의 가슴에 달린 팬던트를 어루만졌다.
예전에 망할 애새끼가 선물해 줬던 저주받은 보랏빛 보석 대신, 도련님이 선물한 영롱한 붉은 보석이 달린 팬던트가 빛나자, 금발의 청초한 미녀의 모습이 바뀌며, 늘 하던 포니테일이 매력적인 여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도련님이 만드신 팬던트. 모습을 이렇게 깔끔하게 바꾸다니, 렉스턴 같은 버러지랑은 재능이 다르시다니까!”
──약 2시간 전, 육망성에 침투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아르틴 도련님이 준 팬던트를 시온은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만약 이 곳의 임무도 확실히 끝낸다면, 아르틴 도련님은 분명 더 큰 상을 주시리라.
끼릭. 문고리를 돌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조잡하게 만들어진 모양새랑은 다르게, 비밀결사를 자칭하는 만큼 이런 면에선 철저한 것이리라.
“이정도면, 1분이면 열 수 있겠네.”
하지만 과거 제국에서 여기사로 활동하던 시절, 첩보부대의 간자를 겸했던 시온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늘 머리카락을 묶을 때 쓰는 끈 안에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철사가 숨어있다.
도련님이 시킨 임무는 두 가지, 이 조직을 장악한 인물을 파악할 것. 이 조직이 숭배하는 존재를 파악할 것.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도련님. 저 시온이 완벽히 수행해보일 테니까요..!!”
아르틴이 육망성에 잠입 시킨 시온이,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충실한 욕망과 뒤틀린 충성심을 위하여.
***
퍼어어엉!!!
“또, 또 실패인거야!? 이번에는 완벽했는데!“
거대한 폭발음이 울리며, 바닥을 뒤덮은 마법진에서 메케한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제물을 쓴 시도, 이번이 끝이라면 준비로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 것인가. 좌절감에 빠져있던 바이올렛은, 연기 안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마기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이 반응은..?”
저벅. 저벅. 연기 속에서 걸어나오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 허나 그 거대한 존재감은 상급 악마과 비견되는 수준, 바이올렛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우햐햣! 그렇게 애절하게 바람, 위대한 메피스토펠레스의 열두 가신 중 하나인 저 알‘미라즈가 들어주기로 결심 했답니다!]
“여, 열두 가신?! 그럼 설마 사, 상급..?”
꼬박 하루를 들이며 거듭된 소환 의식이 드디어 성공한 걸까. 지옥의 군주인 메피스토펠레스 본인은 아니었지만, 열두 가신이라면 분명 상급 악마. 커다란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바이올렛은 기쁨에 주먹을 꽉 쥐었다.
[자, 제 위대한 모습을 보고 겁먹지 마시길! 겁에 질린 사냥감은 잡아먹어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허나, 완전히 기뻐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악마는 완전히 계약을 하기 전까지는 자신에게 어떠한 해를 끼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겁먹지 말라는 것으로 보아, 공포를 느끼는 순간 잡아먹는 악마일지도 몰라. 방심하지 말자 바이올렛!’
다크서클이 깊게 깃든 두 눈에 힘을 꽉 주며 바이올렛이 단단히 마음을 먹자, 방 안에 가득 차있던 연기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연기 사이로, 짐승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 제가 바로 모든 짐승이 공포에 떤다는, 공포의 짐승 알‘미라즈 입니다!”
“....”
안개를 열고 나온 것은, 작은 토끼였다. 노란색 털에 검은 뿔이 인상적인 작은 토끼.
“이런, 너무 무서워서 굳어버린 겁니까? 악마에 겁먹는 마녀라니, 형편없군요! 메피스토펠레스 님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잡아먹었을 겁니다!”
깡총거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자칭 열두 가신, 알‘미라즈를 보고. 바이올렛이 느낀 감정은 복잡했다.
‘너무 귀엽잖아! 그런데, 정말 강한 건가? 마기는 엄청 강력한 것 같기도 한데. 저렇게 귀여운 데?’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겁니까! 계약을 이행할 것이라면, 제게 손을 내밀어 계약의 증표인 처녀의 피를 바치십시오!”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던 걸까, 참을성이 없는 토끼가 깡총거리며 화를 내기 시작하자, 바이올렛은 다급하게 자신의 손바닥을 칼로 그어, 노란색 토끼를 향해 내밀었다.
“저, 정말 네가 날 도와줄 수 있는 거지? 메피스토펠레스의 열두 가신이라는 말, 거짓은 아니겠지?”
바이올렛의 말에, 노란 토끼는 광오한 웃음을 지었다. 토끼가 저렇게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바이올렛은 참으로 신기했다.
“이 광대한 마기를 느끼고도 그런 말을 하는 존재는 당신이 처음입니다. 과연 메피스토님께서 흥미를 느낄만한 존재군요.”
깡총 깡총 앞으로 튀어나와, 바이올렛의 피를 자신의 털에 묻히자, 계약의 성좌 솔로몬이 만든 계약의 술식이 두 사람을 감싸기 시작했다.
“자! 말하십시오 바이올렛! 저 알‘미라즈와 계약하겠다고!”
어쩌면 더 강한 악마를 불러내야 하지 않을까? 의구심이 들었던 바이올렛은, 이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만한 마기를 지닌 악마와 계약해 다루는 데에 성공한다면, 메피스토 본인과 직접 계약하는 것도 먼 미래는 아닐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바이올렛 퍼플크로우. 계약의 성좌 솔로몬의 마법에 의거해, 알‘미라즈와 계약을 이행하겠노라!”
바이올렛의 외침에 계약의 술식이 새 하얗게 빛나며, 노란 토끼 알‘미라즈와 바이올렛을 감싼 술식이 문양이 되어 자신들의 몸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이는 마녀와 악마의 계약이 성공적으로 완수됐다는 계약의 징표이기도 했다.
손등에 새겨진 토끼 문양의 문신. 바이올렛은 넘쳐나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마치 토끼처럼 깡총거리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드디어! 상급 악마와! 계약했다! 야호!”
나는 실패자도 짐더미도 아니야! 나도 아르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자신이 무슨 계약을 했는지도 모르고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거리는 바이올렛을 지켜보는 알‘미라즈는 우둔한 마녀를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마녀...함부로 계약을 이행하다니! 이제 당신을 발판 삼아, 저는 상위 존재로 거듭날 것입니다!’
그렇다. 바이올렛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소환한 악마가, 가문의 위세로 열두 가신에 속해있을 뿐, 중급 악마에 불과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앞으로 잘 부탁해. 알‘미라즈!”
“우햣! 저도 잘 부탁드리죠! 바이올렛 퍼플크로우!”
하지만 어쩌겠는가, 순진한 여인을 홀려 마에 물들게 하는 것이 악마라는 종족의 일인 것을.
...허나, 계약과 공포의 짐승 알‘미라즈 또한 알지 못했다.
메피스토가 주선한 그 계약이, 자신에게 극도로 불리한 사기 계약에 가까운 마녀를 우대하는 계약이라는 사실을.
30분 후에 자신들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양측에 의해. 바이올렛의 방안은 경악에 찬 비명이 울려 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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