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지옥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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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사탄과 루시퍼에 지배되던 지옥의 질서가 무너진 후, 수많은 군주들이 나타나고 사라졌으며, 영겁에 달할 것 같았던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지옥의 군주들이 완전한 승리를 선언했다.
전 루시퍼의 군단장, 바알제불.
공정한 계약의 군주, 메피스토펠레스.
천국의 방탕한 사서, 아스모데우스.
이 셋은 각자 자신의 영지 가장 높은 곳에 성을 세우고, 패배한 군주들을 유폐시키거나 자신의 수하로 들여, 지옥의 제일 으뜸가는 자들로 군림했다.
그 중에서도, 메피스토펠레스는 매우 특별한 악마였다. 본래 널리고 널린 중급 악마에 불과한 그녀가, 지옥의 제일가는 악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간과의 ‘계약’ 덕분 이었다.
계약의 성좌 솔로몬의 가호 아래에, 수많은 인간들과 계약해 힘을 기른 그녀는 지옥에서 수많은 악마들에게 자수성가의 상징. 현대 지옥 사회에서 가장 본 받아야 하는 지옥의 군주로 선정되는 위대한 악마였다.
그런 그녀를 모시는 열두 가신의 일각이었던, 아버지를 뒤이어 메피스토펠레스를 모시게 되었던 알‘미라즈는 지금 엄청난 배신감에 휩싸인 채, 군주의 알현실을 향해 깡총거리며 복도를 뛰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첫 계약을 맺는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데! 무언가 잘못 된 게 틀림없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알‘미라즈는 타고난 강대한 마력의 양으로, 메피스토 다음 가는 계약의 악마라 불린 아버지 지니의 뒤를 잇기에 손색이 없는 강한 악마로 자라날 것이라고 모두의 기대를 받아왔다.
허나, 신인지 악마인지 모를 존재는 알‘미라즈에게 오로지 상급 악마를 웃도는 강대한 마력’만‘을 줬다. 아무리 많은 마력이 있어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그저 보기 좋은 그림의 떡.
자신과 같은 시기에 천재라 불렸던 이들이 앞서 나가는 동안 알‘미라즈는 뒤처지는 처참한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하지만 알‘미라즈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멘토로 삼은 메피스토펠레스는 널리고 널린 악마였음에도 강해지지 않았는가.
자신도 계약만 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 대가를 쪽쪽 빨아먹으며, 등쳐먹는 것으로 위대한 계약의 군주의 오른팔이 되리라. 오늘 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알‘미라즈님.”
어느새 달리다 보니 알현실의 문이 눈앞에 보였지만, 그런 알‘미라즈를 알현실을 지키는 거대한 몸집의 상급 악마들이 막아 섰다.
“비키십시오! 저는 메피스토님을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지금 군주님은 중요한 업무를 보고 계십니다. 들여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감히 건방진! 제가 열두 가신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런 무례한 소리를 하는 겁니까!”
탁! 탁! 탁! 탁!
알‘미라즈가 불만의 의미로 마력을 담아 뒷다리로 세게 땅을 차기 시작하자, 두 근위악마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우거도 어린애처럼 보일정도로 거대하고 강력한 악마들에게, 쬐끄만한 토끼의 스텀핑은 그저 너무 귀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크, 크흠! 그렇게 짜증 내셔도 규칙은 규칙! 통과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최대한 헛기침으로 말을 돌리며 알‘미라즈의 앞을 가로막는 악마들. 허나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어린애를 타이르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알’미라즈는 알고 있었다.
이런 굴욕감이다. 귀여운 겉모습에 속은 이들을 공포에 물들여야 할 위대한 악마인 자신이, 메피스토의 궁정 내에서는 그저 귀여운 마스코트 취급을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 메피스토에게 마저 속아 거짓 계약을 한 자신이 너무 초라해져, 알‘미라즈는 결국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천천히 돌렸다.
[토끼를 안으로 들이거라.]
그 순간 메피스토의 목소리가 궁정의 복도를 울리기 시작했다.
“네? 하, 하지만 메피스토님..”
[두 번은 말하지 않겠다.]
근위악마가 무어라 말 하려던 찰나, 차갑게 식은 메피스토의 목소리에 겁을 먹은 두 근위 악마는 황급히 알현실의 화려하고 거대한 문을 잡아 당겨 열기 시작했다.
““계약의 군주, 메피스토 펠리스님의 열두 권속, 알‘미라즈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굳게 닫혀 가로막혀있던 문이 열리자, 알‘미라즈는 자신을 지배하기 시작한 좌절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당당한 깡총 걸음으로 근위 악마들을 올려다보았다.
‘봤습니까? 이것이 바로 열두 권속 중 하나인 제 위치입니다!‘
그 모습까지 귀여운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지는 못하는 걸까, 불쌍한 알‘미라즈는 문을 넘어 알현실에 발을 들였다.
“그래, 왔구나. 짐의 귀여운 토끼. 왜 그리 심술이 났을까?”
..열두 권신으로써 메피스토님의 옆에 서서 찾아온 자를 옆에서 쳐다본 적은 많았다. 하지만, 알현실의 손님으로써 정중앙의 카페트를 밞는 것은 낮선 감각이었다.
자신을 대신해 가문에서 자리를 채운 대리인을 포함해, 메피스토의 열두 권속의 대표들이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 사실 만으로도 간이 작은 이는 심장이 멈출 것 같은 중압감을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의 정면에서 높은 옥좌에 걸터 비스듬히 걸터앉아, 술잔을 움켜쥔 채 내려다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악마의 존재감에 비하면 열두 권속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인이 벌레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저 같은 공간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힘의 차이가 아득하게 느껴지게 된다. 알‘미라즈는 이 순간 자신이 죄인처럼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는 걸까, 알‘미라즈는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알’미라즈는 만약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당당히 열두 권속의 후계자 중 하나로서 죽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메피스토펠레스시여, 저는 진심으로 당신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를 이렇게 매몰차게 내쫓는단 말씀이십니까!”
알‘미라즈가 생각보다 당차게 소리치자, 양옆에 도열하여 서있던 메피스토의 열두 권속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귀여운 모습 때문에 메피스토님에게 사랑받았다고 해서 저런 건방을 떨다니!’
‘자신이 인간에게 그런 불공정한 계약을 맺게 한 메피스토님의 뜻을 아직도 모르는 건가!’
메피스토의 열두 권속이라 하면, 지옥에서도 군주 다음가는 귀족인 상급악마, 허나 그런 상급 악마들도 메피스토에게는 감히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고블린이 아무리 강해봤자, 용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자신들과 메피스토펠레스의 사이에는 그 정도의 차이가 명백히 존재한다. 하물며 저 작은 토끼 악마가 선대 계약의 악마였던 지니의 후계자로 지명 받은 가장 큰 이유는, 그 귀여운 외모가 메피스토의 환심을 샀을 뿐, 버러지 같은 재능은 자신들의 측근들보다도 못한 떨거지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이 다음순간, 작고 귀여운 노란 토끼가 불타 죽는 미래를 모두가 예측하고 있었다. 어쩌면 알‘미라즈 본인마저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 이다.
“내쫓다니, 짐이 어찌 너를 내쫓았단 말이더냐? 짐은 너에게 중요한 계약을 직접 맡겼거늘. 조금 서운하구나. 짐의 귀여운 토끼야.”
허나 옥좌에 앉아 있던 소녀는 그런 모습에도 격노하기는커녕,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알‘미라즈는 한 순간 죽지 않은 자신에게 안심했으나, 이내 곧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자신이 얼마나 결사의 마음으로 외쳤는데, 저리도 뻔뻔하게 발뺌하다니.
“중요한 계약이라니요! 변변찮은 마녀의 뒷바라지 아닙니까! 심지어, 이 계약서는 인간에게 대가를 받아내기는커녕, 제가 가진 힘을 아낌없이 써가면서 도와줘야 하지 않습니까!”
알‘미라즈가 자신의 검은 뿔 번쩍이자. 허공에서 계약서가 나타났다. 메피스토펠리스가 자신에게 직접 하사한 것이 기쁜 나머지, 한 줄도 제대로 읽지 않고 서명한 바로 그 계약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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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계약서]
해당 계약서는 계약의 성좌 솔로몬의 권능과 지옥의 위대한 계약의 군주, 메피스토펠레스가 입회하는 절대로 어길 수 없는 계약서다.
악마 알‘미라즈(이하 ’갑‘이라 칭함)와 마녀 바이올렛 퍼플크로우(이하 ’을‘이라 칭함)은 다음과 같이 소환계약을 체결하고 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약정한다.
제 1조 [계약기간]
해당 계약의 기간은 상호 간의 동의 끝에 계약을 종료하였을 시, 혹은 ‘을’이 현실세계에서 물리적인 죽음을 맞이하거나, ‘갑’이 지옥에서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까지로 명시한다.
제 2조 [업무내용]
‘갑’은 ‘을’이 소환할 경우, ‘갑’의 마력을 소환에 사용한 ‘을’의 마나의 50배에 이르도록 소모하거나 역소환을 허가받지 않는 이상, 지옥에 돌아올 수 없다.
‘갑’은 ‘을’이 내리는 지시에 성실히 이행해야 하며, ‘을’은 ‘갑’의 의식주를 책임져야 한다.
‘갑’은 ‘을’이 필요로 하며 위급한 상황일 경우, ‘갑’의 보증악마를 내세워서라도 업무를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
‘갑’은 ‘을’이 소환을 필요로 한다면, 제물에 상관없이 어느 때에도 소환에 응해야한다.
제 3조 [갑과 을의 관계에 관해]
‘갑’은 ‘을’을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의도적인 고통을 가하지 않아야 한다.
‘갑’은 ‘을’을 ‘주인님’이라 호칭해야 한다. 단, 호칭에 대해선 차후 ‘을’의 명령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
이상의 조항을 어길 시, ‘갑’은 자신의 마력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저당을 잡힐 것을 약속한다.
본 계약은 상호 동의가 있다는 전제하에, 수정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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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자신을 갑으로 칭했지, 사실상 노예 계약이라는 말조차 아까운 악마다운 계약서. 알‘미라즈는 분노에 뒷발로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저는 메피스토펠레스님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계약서로 계약을 하라고 하십니까! 이 계약에서 제가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계약서의 내용이 공개되자, 주변에 있던 악마들이 기겁을 하며 혀를 차기 시작했다.
“아무리 악마라고 해도, 어찌 저런 끔찍한 계약서를...”
“이건 완전히 알‘미라즈를 축출하시겠다는 군주님의 의지 같군요.”
“확실히 마력의 양은 쓸 만하니 마력만 거두고 내치겠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점점 커지는 주변의 비웃는 소리. 알‘미라즈는 더욱 신경질 적으로 바닥을 차며 자신의 군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메피스토펠레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착각이 있었구나, 짐의 귀여운 토끼야. 나는 너에게 거짓으로 속인 적이 없단다.”
“그럼, 이 계약은 뭐란 말입니까! 제 자신의 힘을 전부 써야하는 것도 모자라. 제 보증 악마라니! 이런 계약서에 보증해 줄 악마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바로 그대 눈앞에 있지 않느냐?”
그 말에 눈을 깜빡인 알‘미라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메피스토의 말을 자신만 들은 것이 아닌지, 모든 권속들이 자신의 눈을 피했다. 심지어 자신을 대신해 열두 권속 자리에 서있는 자신의 삼촌마저 눈을 피하자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모두가 제 눈을 피하는군요! 도대체 누가 절 보증해주는 악마란 말입니까!?”
이제는 악에 차서 악악 거리는 알‘미라즈. 모두가 불경함에 혀를 찼지만, 여군주는 웃으며 그 말에 대답했다.
“어리석지만 귀여운 짐의 토끼야, 짐이 바로 그대를 보증하노라. 짐이 그대의 보증 악마다.”
“....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방금 들은 말에 담긴 의미를 알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그대가 그대의 계약자를 지키지 못한다면, 짐이 직접 인간계에 나서서 힘을 행사하여, 그대의 계약을 돕겠다는 의미다. 말했듯이, 이 계약은 짐에게 아주 중요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알‘미라즈를 자신이 돌보겠다. 자신이 알’미라즈의 후견인이다. 방금 메피스토의 말은 저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위대한 지옥의 여군주가 열두 권속 중 하나를 스스로 키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부족하다면 짐이 그대를 강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노라. 하지만 짐은 그대가 직접 강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그러니, 앞으로 계약에 열심히 임하도록 하거라.”
그 말과 동시에, 주변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기라고 생각했던 유례없던 좌천이, 사실은 전례가 없던 엄청난 특혜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주군이시여! 어찌 저 미천한 토끼 따위를 그리도 아끼신단 말입니까! 그럴 거라면 차라리, 이 용암 대장군 아즈구단을!!!”
열두 권속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닌 아즈구단이 나와서 외치자, 다른 열두 가신들은 경쟁하듯 자신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마치 미천한 것들의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운 알현실.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메피스토펠레스가 손을 내저었다.
콰앙!!!!
용암 대장군 아즈구단의 형체가 말 그대로 용암처럼 녹아내리자. 그 모습은 본 모두가 침묵을 택했다.
“아직도 질문이 있더냐, 짐의 귀여운 토끼야? 아니라면 물러가도록 하거라. 짐은 낮잠이 자고 싶구나.”
그리고 그것으로 메피스토펠레스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런 불합리에 아무런 이의도 허락하지 않는 모습에, 모두가 한 가지 의혹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 질문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 마녀와의 계약을 이리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던 메피스토펠레스는, 가늘게 눈을 떠 겁먹은 듯 말을 떠는 노란 토끼를 바라보았다. 허나 여전히 메피스토는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질문에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행복한 과거를 추억하듯 소녀같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 마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마녀는 재능은 있으나, 내 부탁을 이루지 못한 못난이에 불과하니까.”
“그, 그렇다면..?”
“허나, 그 마녀는 짐의 친구의 소중한 이다. 비록 주제도 모르고 짐과 직접 계약하려고 했기에 계속해서 무시했으나, 짐의 친구를 도울 유일한 통로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메피스토펠레스의 친구. 그 말이 가지는 무게는 무거웠다.
바알제불? 아스모데우스? 그들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적이지 친구가 아니다.
지옥의 귀족과 계약한 마녀 발부르가? 상급악마와 겨우 계약한 마녀 나부랭이가 메피스토펠레스와 대등한 위치를 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평생을 속이고 또 속이며, 힘을 쌓아온 메피스토펠레스였다. 누가 그녀를 대등하다 여길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녀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 그렇다면 주군이시여, 그 주군의 친구는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아, 좋은 질문이구나, 그대가 짐의 친구에게 무례를 끼쳐서는 안 되니 말이다.”
깜빡. 눈을 감았다 뜬 알‘미라즈는 어느새 자신이 여군주의 품에 안겨서 쓰다듬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나 그 손길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 위대한 여군주의 손길은, 전에 한번도 보지 못했던 따스함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짐의 소중한, 유일한 친구는 바로 인간이다. 붉은 머리의 당돌한 소년. 허나 짐을 무척이나 즐겁게 해줬던 소년이란다.”
오랜 꿈에서 깬 여인이, 연인의 이름을 속삭이듯, 메피스토펠레스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알‘미라즈에게 속삭였다.
“아르틴 루드비히, 그 아이의 이름을 명심하도록 하거라.”
모두가 고개를 감히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일 때, 오로지 알‘미라즈 만이 가장 위대한 악마의 표정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알‘미라즈는 불경한 생각임에도, 감히 이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 표정은 분명, 사랑에 빠진 여인의 표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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