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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67화 (67/266)

〈 67화 〉 심적 변화 #02

* * *

요즘 들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그네스 황녀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다.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마리안느 공주가 요 며칠 아그네스를 지켜보며 느낀 결론이었다.

“..? 내가 보기에는 평소랑 같은데, 누님이 착각한 거 아닙니까?”

자신의 말을 듣고, 잠시 떨어져 있는 아그네스 쪽을 빤히 바라본 동생 오지에의 반응에, 마리안느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른 학생회 위원을 엄하게 혼내는 아그네스는 자신이 보기에도 평소랑 같았다. 똑 부러지는 저 말투에서는, 제국의 황족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자신조차 느낄 수 있는 고귀함이 묻어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마리안느는 자신의 동생의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멍청아, 요 근래 아그네스가 일하다가 갑자기 베시시 웃는 거 못 봤어? 친구라고 해봐야 우리 정도 밖에 없던 아그네스가 자리도 자주 비우잖아.”

“거 뭐야, 또 신작 소설 읽느라 밤 세우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말하니 아그네스 황녀가 꼭 사랑이라도 하는 것 같잖아.”

사랑. 무심하게 던진 동생의 말에, 마리안느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추종자들과도 거리를 둔 채로, 늘 혼자서 식사를 하던 아그네스의 모습은 절벽 위에 핀 꽃이라는 형용사가 늘 어울렸다. 마리안느 자신은 그런 삶의 태도에 공감하지는 못 했지만, 아그네스라는 사람을 알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마리안느 자신도 인정할 만한 천재 중의 천재인 황태자의 곁에서, 천재라는 문턱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못했던 아그네스는 1학년 시절부터 모두가 납득할 만큼 뼈를 깎는 노력으로 제국의 황녀라는 위치에 어울리는 인물임을 증명해왔다.

하지만 그런 반동일까. 아그네스는 누구와도 깊이 어울리는 것을 꺼려했다. 가끔은 덤벙대고, 가끔은 귀여운 모습을 보일 때 마다 모두가 그녀의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존재해서는 안 될 단점으로 여기는 것으로 보였으니.

“요즘은, 자신과 남의 실수에 더 관대해졌지, 심지어 저번에는 아침 조회 때 지각까지 했다는 소리도 들리고, 내가 보기에는...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야. 확실해.”

“얼씨구, 아가씨들 연애담보다 다른 나라 용병들의 전쟁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누님이 그런 달달한 소리를 다하네.”

우득!

아무리 친남매라고 한들, 거인살해자를 면전에서 비웃은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마리안느 왕녀의 감정을 실은 펀치가 옆구리에 꽂히자, 맨손으로 오우거를 찢어 죽일 수 있는 오지에 왕자는 일주일 동안의 요양치료가 예상되는 골절을 얻었다.

“이런 ㅆ...친동생을 때려죽일 셈이야?”

“시끄러워, 이 정도도 못 견디고 징징 대는 녀석은 사내라고 불릴 자격이 없어.”

격통이 느껴지는 자신의 옆구리를 만져 본 오지에는, 문뜩 정략결혼으로나마 자신의 누님에게 사내로 인정받아야 할 미래의 매형이 불쌍해졌다.

“애초에, 어느 간덩이 부은 녀석이 아그네스 황녀에 주제도 모르고 덤벼 들겠어? 작년에 리가르도 위센 녀석이 공개적으로 구애했다가 그렇게 꼴사납게 차였는데.”

물론, 자신도 한 때 아그네스를 짝사랑해서 남몰래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것은 오지에 드 레크투르의 평생을 가져갈 흑역사였다.

“글쎄, 아그네스는 보기보다 로맨티스트니까, 신분이니 격차니 그런 사소한 건 생각 안하고 덤벼드는 바보 같은 남자가 취향일지도 모르지.”

“..혹시, 들은 이야기 있어 누님?”

“멍청한 녀석,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알면 너한테 이러고 있겠어?”

멍청하다는 말에 투덜거리는 오지에를 보고 피식 웃은 마리안느는, 문뜩 왜인지 모르게 자신을 누님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녀석이 생각났다.

바보 같이 여기사와 싸우겠다고 나서서, 진짜로 이긴 후 자신을 괴롭힌 남자를 공개적으로 떡실신 시킨 그 바보 같은 녀석이.

‘그래, 그런 바보 같이 확신에 찬 녀석 정도가 아니면 무리겠지.’

내일 한번 점심 식사에 강제로 끌고 가서 아그네스를 떠봐야겠다고 마리안느는 생각했다. 동갑이긴 하지만 여동생 같은 아그네스가 이상한 남자라도 만난다면, 자신이 두들겨 패서라도 말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차올랐다.

그리고 3일 후, 아르틴 루드비히는 리가르도 위센을 때려눕혔다.

**

아르틴 루드비히가 리가르도 위센을 때려눕힌 다음 날.

“내 부름에 응해줘서 고마워, 마리안느, 오지에.”

조용히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가족사진을 바라보던 리처드 황태자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뭐, 네가 찾는 일은 흔치 않아서 와봤지.”

“할 일도 없었는데 뭘..”

싱글거리며 웃는 황태자를 보며, 두 사람은 껄끄러운 감정을 느꼈다.

언제나 여유에 찬 모습을 보여주며, 아카데미라는 5년의 시간을 만끽하듯 즐기던 리처드 에르멘가르트였지만, 지금 자신들을 바라보는 눈에서는 도저히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어제 있었던...응, 사소한 마찰과, 터무니없는 소문에 대해 상담하고 싶었거든.”

“..상담이라면? 리가르도 위센 건으로? 아니면 아그네스의 약혼자라는 그 애송이?”

오지에는 왕국의 공작의 얼굴이 뭉게진 것을 사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작은 의문이 들었지만, 결국 첫사랑인 아그네스 황녀의 약혼자라는 이야기는 마왕군의 간자가 아카데미를 침입했다는 이야기보다도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었다.

그런 오지에의 물음에 답변하듯, 리처드 황태자는 서류 한 장을 오지에와 마리안느가 볼 수 있게 내밀었다.

“리가르도 위센에 대한 건이라면...위센이 스스로 학생회를 사퇴한다고 하더라고.”

“뭐? 그 위센이? 올해만큼은 널 제치고 학생회장이 되겠다고 자신만만해 하지 않았나?”

황태자의 말에 오지에는 놀랐지만, 마리안느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르틴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제 뒤늦게 학생회를 찾은 그녀는, 위센 선배가 아그네스를 향해 작부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아르틴을 비난한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분명 그 소리는 리처드에게도 들렸을 터. 지금 리가르도 위센이 목숨을 건져 병동에 입원할 수 있었던 건, 그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직위와, 왕국의 왕족들인 자신들을 배려한 리처드의 배려심 때문일 것 이다.

“스스로 한계를 많이 느꼈고, 이번 부상 때문에 졸업 준비도 바쁘다고 한가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안 그래?”

“흠..확실히, 1학년에게 두들겨 맞고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다닐 철면피는 아니지. 얼간이긴 했지만 말야.”

“그러면 우리를 부른 건, 아르틴 루드비히에 대해서겠네?”

마리안느가 아르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자, 눈썹을 움찔한 황태자는 자신의 앞에 놓인 홍차를 마시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무례함은 느끼지 못했다. 저런 사람인 것은 어릴 적부터 익히 알고 있었기에.

“맞아, 나도 우리 아그네스를 위해서 그렇게 화내준 것은 고맙지만..역시, 약혼자라 하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잖아?”

“하, 제국의 황태자도 간이 작기는, 그런 헛소문을 믿는 거야? 요 한달 사고만 치고 다닌 남작가의 애송이가 어떻게 아그네스랑 사귀겠어?”

리처드의 말에 오지에가 단박에 선을 그으며 부정하자, 마리안느는 또 주먹부터 나갈 뻔한 손을 참았다. 아무리 오지에라도 양쪽 갈비뼈가 부러지면 실생활에 불편함이 클 테니.

“오지에, 이번에 마왕군의 간자가 아카데미를 침입한 일에 아르틴 루드비히가 엮인 건 알고 있어?”

“아앙? 그거야 누님한테 직접 들었지. 그 녀석, 유니콘하고 계약해서 물리쳤다면서? 깡은 좀 있는 거 같은데, 온 학교 사람들이 녀석이 동정인 걸 알게 됐으니 얼마나 쪽팔릴까.”

“위센 선배가 아르틴 루드비히가 기숙사의 규칙과 학생회에서 배부한 마족과 관련된 위기지침을 어긴 것을 문제 삼은 것도 알고?”

“아아, 그거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아냐? 그래서 누님도 나서서 말렸던 걸로 아는데.”

“그거, 막아달라고 부탁한 게 아그네스였거든.”

순간 낄낄대던 멍청한 동생의 웃음기가 얼굴에서 사라지자, 마리안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되나 보네.

“...얼마 전에 아그네스가 나에게도 직접 부탁했거든. 아르틴 루드비히에게 가해지는 폭거를 막아 달라고.”

리처드 황태자는 자신에게 부탁하기 위해, 사춘기가 지난 후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애교까지 써가며 자신을 설득하던 아그네스의 얼굴을 떠올리자. 평정심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자신의 소중한 여동생, 아그네스가 연애를 한다고 했다면. 유니콘의 계약자인 만큼 용인할 마음은 있었다. 유니콘이 인정한 고결함과 순결함은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혼이라니?

“아그네스는..참 귀여운 면이 많아. 황녀로써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도 그렇고, 황태자인 나도 본받을 점이 많다고 생각해.”

그런 아그네스가, 아버지인 황제 폐하의 동의는커녕, 자신에게 조차 말하지 않고 약혼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늘 남들 몰래 보던 로맨스 소설이 문제였을까?

“혹시..두 사람은 들은 적 있어? 아그네스에게 들은 이야기나, 아르틴에 대한 소문이나..”

황태자가 평정심을 되찾고 물어보자, 오지에는 어깨를 으쓱였다. 왕국의 왕자는 타인에게 별 관심도 없을뿐더러, 하물며 아그네스랑 그리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 순간 마리안느는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아르틴 루드비히. 왠지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지던 붉은 머리 미소년. 그리고 며칠 전 점심시간에 나눴던, 아그네스와의 대화가.

­“이상형이라..저는, 노력하는 남자가 멋지더라고요. 선량하고, 마음이 깊은 그런 남자. 어리숙해 보이지만, 중요할 때 믿을 수 있는 그런 남자요.”­

그때는 묘하게 구체적이었던 이상형에, 그런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이라도 봤나 하고 넘어갔지만, 아마도 저 이야기는 본인이 스스로 겪은 이야기일 터다.

“아그네스가..응,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아르틴 그 꼬맹이 녀석을.”

“뭐?! 진짜? 알고 계셨슴까 누님?!”

“시끄러워, 나도 긴가민가하고 있었으니까.”

남동생의 허벅지를 쥐고 비튼 마리안느는,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을 곱씹었다.

‘도대체 언제 그렇게 빠질 정도로 연애하고 약혼까지 한 거지?’

이제 새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났으며, 아르틴 루드비히는 정학 기간 내내 샤오메이와 훈련을 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처음 황태자의 명으로 아그네스가 아르틴을 만나러 갈 때는, 아그네스도 아르틴을 모르던 눈치였다.

학생회에서 가장 가까이 지내던 자신이 모르는 만큼, 황태자도 생각나는 구석이 없는지 골머리를 싸매는 듯 보였다.

“개인적인 부탁이야. 아르틴 루드비히가 어떤 남자인지 직접 판단해주면 좋겠어. 내가 직접 만나고 싶다고 아그네스에게 말하기는 했는데...”

물론 아그네스가 당연히 만류했을 것이다. 마리안느는 자신이 잘 숨겨왔다고 생각한 첫사랑의 약혼소식에 멘탈이 나간 친동생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한 번 아르틴을 만나볼게, 아그네스에게 잘 말하면 정식으로 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고.”

“고마워, 마리안느. 내가 큰 빚을 졌는 걸.”

...물론, 단순히 황태자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날 만난 아르틴은, 자신이 보기에도 꽤나 마음이 드는 남자였고, 묘하게 친근함이 느껴져 의동생으로 삼긴 했지만, 진짜 아그네스랑 사귀는 것은 다른 문제다.

‘거기에..뭔가 기분이 찜찜하네.’

어째서 일까, 묘하게 마음 한편이 무거운 기분을 곱씹으며, 마리안느는 학생회를 나왔다.

**

어떻게 아그네스에게 말을 꺼내야 할까. 늘 생각대로 행동하던 마리안느는 어울리지 않게 고민에 빠졌었다. 역시 디저트라도 먹으면서 가볍게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이야기해야 할까?

자신은 아르틴하고 말을 놓기도 했으니, 생각보다 어색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하며 며칠이 지난 후 움직이려던 마리안느였지만.

“어머, 마침 찾았는데 잘 됐네요 마리안느!”

자신의 두 손을 꼭 붙잡은 아그네스의 반응에, 마리안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찾았다고? 무슨 일로?”

“다름이 아니라, 아르틴의 수련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데, 마리안느 왕녀님이 제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제는 숨길 생각 없이 대놓고 내조라도 하는 셈인가. 아그네스의 부탁에 그런 생각이 들자 마리안느는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뭐, 내 훈련을 받아낼 기본은 되어있고? 적당히 강해서는 무리라는 걸 알잖아?”

“걱정 마세요, 분명 마리안느도 만족할 정도로 근성이 있거든요. 제가 장담할 수 있답니다?”

그 말에 마리안느는 글쎄다 싶었다. 제국의 기사를 이겼으니 기본은 있긴 하지만, 스스로도 자신의 넘쳐나는 힘을 따라올 사람은 손에 꼽힌다고 자부했을 뿐더러, 저번에 본 아르틴의 수준은 마법사보다는 나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마나근 좀 쓴다고 따라오지 못 할텐데...뭐 좋아. 아그네스의 부탁이라면 들어줘야지.”

하지만, 아르틴 루드비히라는 녀석을 평가할 최고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만약 녀석이 자신의 훈련을 잘 따라온다면, 적어도 근성이나 재능은 인정할 수 있는 남자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음날, 마리안느는 약속 장소였던 카페에서 한바탕 싸우고 있는 아르틴의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전에 위센을 때려눕히고도, 또 공공장소에서 싸운다고?’

정말로 붉은 광인이라는 소문이 맞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마리안느는 멀찍이 떨어져 싸움을 지켜봤다. 처음에는 아그네스의 평판을 생각해 말리러 갈 셈이었지만, 진검을 상대로 맨손으로 싸우는 아르틴은 꽤나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호, 격투술 자세가 꽤 제대로 잖아? 호흡이나 스텝도 안정적이야.’

왕국의 격투술은 제국의 격투기나 공화연방의 무술에 비해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 안을 들춰보면 철저히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맨손 전투에 대비한 무술이라고 봐도 좋다.

격투술 좀 배웠다고 자부하는 3년차, 4년차 전사들도 어딘가 엉성한 모습이 있기 마련인데, 지금 아르틴의 포즈는 마리안느가 보기에 확실히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 거기서는 거리를 벌리고, 필요할 때는 체중과 회전으로 충분하지. 그래, 그런식으로!’

마치 자신이 키워낸 수제자를 보는 것 같은 마음에, 마리안느는 자신도 모르게 아르틴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르틴이 머슬 버스터까지 성공시키자, 마리안느는 자신이 활짝 웃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가 수련시켰는지는 몰라도, 정말 제대로 가르쳤는데!”

저 정도 수준이라면, 훈련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이다. 아그네스가 생각보다 남자 보는 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기쁨과 동시에 갑자기 뭔가 씁쓸함이 몰려왔다.

‘...흠? 뭐지? 뭔가 찜찜한데.’

자신을 스쳐지나간 감정에 멈칫했으나, 이내 마리안느는 아르틴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기본적으로 대협의 풍모를 지닌 마리안느에게 한 순간의 감정은 덧없는 것이기에.

“잘 싸우던데 아르틴! 저번에 여기사와 싸울 때도 그렇고, 마법보다 무술이나 검술에 재능이 있는 거 아니냐!”

“아, 오셨어요 누님?”

다가가서 어깨동무를 하자, 직전까지의 투기는 어디 갔냐는 듯 귀여운 얼굴로 환하게 웃는 녀석을 보자 마리안느는 자신도 모르게 즐거운 미소로 어깨를 두드렸다.

이상하게 보면 볼수록 친근함이 드는 녀석, 귀염성 때문일까? 마리안느 스스로도 알기 힘들었다.

‘좋아, 이번에 제대로 한번 테스트 해보자고, 만약 아그네스에 어울린다면, 황태자도 내가 직접 막아주마.’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의동생이자 인정할 수 있는 남자라면 그 정도의 가치는 충분하다. 마리안느가 그렇게 답을 내리는 순간.

“저 남자는 아까 아그네스 황녀님이랑 대마녀의 손녀 바이올렛이나, 무신의 딸 샤오메이랑 뒹굴고 싶다고 말하던 허언증의 호색가입니다!”

...가슴이 욱신거릴 정도로 짜증나는 말을 들어버렸다.

샤오메이? 바이올렛? 아그네스라는 약혼자가 있으면서? 아그네스는 자신에게 널 도와달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네 사죄는 받아 주지, 대신 이 카페는 확실히 배상하고, 내 눈앞에 다시는 그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

...가슴은 뜨거웠지만, 머리가 차가워졌다. 망할 곰보를 치운 나는, 아르틴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자신을 향하는, 저 순진무구한 표정. 저 얼굴로 아그네스도 꾀어내어 속였던가? 문뜩, 첫 만남에 자신을 끌어안던 아르틴이 떠올랐다.

“스파링, 재밌겠네. 그렇지 동생? 다들 몇 대 맞으면 진실을 말하더라고?”

나는 녀석을 강제로 붙잡고 어깨를 주물렀다. 이 말랑한 육체가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얼마나 때리면, 자신의 죄를 고백할까. 만약 고백한다면, 또 얼마나 두들겨 패줘야 이 욱신거리는 가슴이 진정이 될까.

그런 생각 따위를 하며, 마리안느는 아르틴을 끌고 제1 대련실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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