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바이올렛과 계약의 악마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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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판이 벌어진지 20분이 지났다.
극악으로 치닫나 싶었던 상황은, 갑자기 옆에서 난입한 바이올렛의 중재로 간신히 진정되었다.
우선은 어지러워진 테이블과 주변을 마법으로 정리한 후 대가리를 박자, 요 근래에 매출을 많이 올려준 단골손님이라는 입장 덕분에 당근 케이크 2판과 인당 음료수를 1개씩 추가로 시키고 나서야, 간신히 카페 주인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저기...내가 일단은 잘못했으니까...둘 다 용서해주면 안 될까...?”
문제는 눈 주변에 새빨개진 샤오메이나, 뾰로통한 표정의 유니코르에게는 여전히 용서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샤오메이는 내 왼쪽에 앉아 팔을 끌어안은 채로 아무 말도 없이 훌쩍거리고 있고, 유니코르는 뚱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아 추가로 시킨 케이크를 묵묵히 퍼먹고 있었다.
“내가 싫다고 한 건 완전히 동물하고 인간을 반반 섞은 모습이니까...그냥 수인이면 다 싫다고 한 게 아니거든...?”
“마, 맞아. 샤오메이도 유니코르도 이제 그만 용서해 주자, 응? 아르틴이 악의가 있어서 한 말은 아니잖아?”
바이올렛이 차분하게 이야기 하자, 내 말에는 대답도 않던 샤오메이가 힐끗 고개를 들어 바이올렛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약혼자는 분명 나인데 왜 내 말에는 대답해주지 않는 걸까.
“...옆에서 계속 말하는 걸 들었으니 저도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오라버니 때문에 상처 받은 건 사실이잖아요?”
물론 이 말을 듣는 나는 억울했다. 당장 케이크만 퍼먹는 유니코르만 해도, 사실 달래줄 이유도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내가 유니코르를 달래고 있는 건, 아까 떠올랐던 호감도가 올랐다는 상태창의 표시 때문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니코르도 내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뜻이겠지...’
사실 2회차 때만 해도 티격태격 하기만 했던 녀석이 내게 호감이라니, 사실 잘 이해하기 힘든 반응이긴 했다.
나야 여자의 맛을 알아서 본능적으로 반응했다고 쳐도, 유니코르는 본래부터 유니콘. 말인 녀석이 사람의 형상을 했다고 사람에게 반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어쩌면 초원의 왕이 나에게 사실상 방생했던 것이 꽤 충격이었을 지도 모른다. 회귀를 해도 풀리지 않는 계약까지 했으니, 그게 정신 상태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고...
아무튼, 그런 이유로 수간충 운운하자 크게 상처 입은 게 명백히 눈에 보이는 유니코르를 달래고 있었다. 샤오메이에 이르러서는 너무 억울했다. 샤오메이는 순혈 수인도 아니라서 동물 귀도 없는데, 어딜 봐서 수간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정말 미안해..다시는 그런 말 안할게, 응?”
하지만 논리적인 남성의 영역 이전에, 우선은 화를 풀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내가 샤오메이의 손을 잡으며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자, 샤오메이는 그제야 나를 빤히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아요, 대신 이번 빌런 사건이 끝나면 저랑 자주 놀아주셔야 해요, 아셨죠?”
“으, 응. 그래야지. 무조건 시간 낼게!”
간신히 급한 불은 껐나, 하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아직 유니코르가 남기는 했지만, 유니코르야 단순한 편이니 작정하고 달래주면 될 것 이다.
“그래서,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말이죠. 저 노란 여자는 도대체 뭔가요?”
그때, 샤오메이가 묘하게 나와 바이올렛의 눈치를 보며 당근 케이크를 야금거리던 노란 머리의 토끼 귀를 한 여자를 가리켰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무희 같은 비키니 탱크탑에 실크로 만들어진 요하게 시스루 같은 바지. 처음에는 사막 건너의 술탄국에서 건너온 첩자라도 되나 싶었지만...
‘저 금 팔찌와 귀걸이, 저기에 새겨진 건 악마의 언어야.’
결정적으로,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났을 때는 토끼 수인의 모습을 했던 녀석이, 악마들이나 마녀들만 다룰 수 있는 마력을 이용해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던 것을 똑똑히 봤다. 덕분에 얇은 천에 감싸여 저 흔들리는 커다란 가슴이나 비춰 보이는 탱탱한 허벅지에 유혹당하지 않을 수 있긴 했지만.
힐끗.
움찔!
내가 바이올렛 쪽을 잠시 바라보자, 바이올렛이 뭔가 굉장히 찔리는 듯이 몸을 움찔거린다.
“바이올렛, 네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설명해줄래?”
갑자기 나타나서 상황을 진정 시킨 것, 요 며칠 보이지 않던 것, 악마의 힘을 쓰는 수인. 솔직히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했지만 나는 일부러 바이올렛에게 직접 물어봤다.
“저, 저기 그게...그러니까...말할게...”
바이올렛은 자신의 긴 생머리를 베베 꼬다가, 결국 내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전부 다 털어놓기로 했다.
*
“그러니까, 얘가 그 지니의 딸이자 후계자인 악마라고?”
바이올렛의 설명을 들은, 어처구니없이 벌어진 헤프닝은 둘째 치고, 두 가지 이유로 굉장히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기억 속의 지니는 어지간한 마수들은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상급 악마였는데, 후계자라는 애 수준이 왜 이래..?”
찬찬히 이야기를 듣던 나는, 아침부터 계속 권능을 부리는 것을 실패했다는 바이올렛의 말에 의구심을 가졌다. 내가 아는 바이올렛은 자신감과 자존감이 바닥이라 문제였을 뿐, 재능에 있어서는 자신감을 되찾고 감을 잡는 순간 파워 밸런스가 무너질 정도로 천재가 어울리는 아이였다.
그런 바이올렛이 아무리 집중해도, 유사 파이어볼 하나 구현하지 못한다?
그 경우 인풋을 담당하는 바이올렛의 문제가 아니라, 아웃풋을 담당하는 이 악마가 끔찍할 정도로 마력을 다루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제, 제 수준이 뭐가 어떻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위대한 계약의 악마, 지니의 뒤를 잇는 메피스토님의 열두 권ㅅ...”
“너, 그러면 이 자리에서 네가 다 마신 당근 주스 리필 해봐.”
“그, 그건...”
계약의 악마는 대가에 따라서 돌산을 황금산으로도 바꾸는 존재. 그런데 당근 주스 하나 리필하지 못 한다? 이건 빼박이다.
“하필 소환해도 이런 악마를...바이올렛도 참 고생이 많았겠네.”
“아, 아니야...그냥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이런 젠장, 고개를 돌리니 바이올렛의 밤톨만한 자존감이 방금 발언으로 깎여나간 듯 보였다. 옆에서 내 이야기를 듣던 샤오메이가 말없이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파!
“저, 저는 메피스토님의 명을 받아 직접 바이올렛 양과 계약한 것 입니다! 제게 문제가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게 문제야. 왜 메피스토 본인이 계약하는 게 아니라, 네가 계약한 건데?”
“그...그건 저도 확실히는 모릅니다...”
3회차 당시, 바이올렛은 메피스토펠레스 본인하고 계약을 끝마쳤다. 그런데 수준이 딸려서 계약을 못했다면 이해가 가지만, 메피스토가 직접 이 악마와 계약을 시킨다?
“내가 직접 메피스토와 대화해야겠어. 열두 권속이라면 녀석과 대화도 시켜 줄 수 있지?”
초원의 왕의 사례를 생각했을 때, 초월의 경지에 이른 지옥의 군주라면 기억을 잊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저, 제가 감히 어찌 함부로 메피스토님을 현세의 존재와 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건 돌아가서 복잡한 행정절차를 밞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너 그럼 굉장히 쓸모없는 악마구나...”
내 말에 토끼귀의 악마는 상처 입은 표정이 됐지만, 나랑 계약한 것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그보다 내 걱정은 바이올렛이였다.
“바이올렛, 오늘 밤에 동아리에 올래? 널 위해 만들어 둔 지팡이가 있거든.”
“지..팡이? 나를 위해서?”
“응, 그게 있으면 저런 마력만 많은 무지렁이 악마 패밀리어라도 꽤 강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줄 거야.”
“그, 그런 마법 지팡이가 있으면 아르틴이 쓰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래, 이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자존감이 낮은 아이가 저런 폭탄을 떠맡으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3회차 때 메피스토가 장난친다고 대충 돕던 것도 바로 잡기 전까지는 바이올렛이 엄청 힘들어 했는데..’
그 꼴을 내가 계속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지금은 강제로라도 드래곤 하트로 만든 최강의 지팡이로 마법을 성공하는 성취감을 들여놓는 게 좋을 것이라.
‘아, 메피스토가 직접 계약하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는데.’
이 멍청한 게으름뱅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람.
***
알‘미라즈는 자신의 자존감을 끝없이 난도질당하는 이 상황에도, 아르틴에 대한 경의와 공포심이 더욱 더 깊어졌다.
처음에는 행복한 일이 벌어지라고 소원을 휘두르자, 난데없이 자신이 알몸이 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몸을 노리는 호색한이라고 생각했지만,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도 그 깊이를 헤아리기 더욱 힘들었기 때문이다.
‘제가 차고 있는 이 팔찌랑 목걸이의 글자를 확실히 읽었습니다, 게다가 처음 눈앞에서 모습을 변화시킬 때 흘러나온 미세한 마력으로 제가 악마인 것을 눈치챘고...’
무엇보다, 위대한 대군주 메피스토펠레스님을 서슴없이 메피스토라고 부르며, 직접 대화하겠다고 연락을 요구하는 모습은 지옥의 상급 악마들도 불가능한 만용에 가까운 행위였다.
물론, 메피스토펠레스님의 직속 열두 권속이며, 계약서에 메피스토님이 직접 보증인으로 결속까지 이루어진 상황이다. 정말 대화를 연결하려고 한다면 불가능 할 것도 없는 상태.
하지만 알‘미라즈는 아르틴의 요구를 거부했다. 자신이 다시 하계로 내려올 때, 메피스토님이 신신당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아르틴이 짐과의 대화를 요구한다면, 적당한 핑계로 거절하도록 하거라.”
“네? 어째서입니까? 친구 분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렇게 사랑에 빠진 표정을 해놓고, 무례를 끼치지 말라는 말까지 했으면서 대화는 거부하다니, 마지막에 들은 말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지금 이 상황은 제가 아르틴님에게 큰 무례를 끼친 상황 아닙니까?’
알‘미라즈는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라도 메피스토님이 이 상황을 지켜보시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부디 평소처럼 낮잠을 청하고 있기를 바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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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짐의 토끼 같으니, 역시 그대를 아르틴에게 보낸 것은 정답이었구나.”
아무도 없는 알현실, 옥좌에 앉은 위대한 계약의 군주 메피스토펠레스는 허공에 떠오른 수정구슬이 비추는 알‘미라즈의 시선으로 인간의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훗,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이라니. 한동안 아르틴이 곤란한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지루할 틈은 없겠구나.”
혹시나 자신이 알고 있는 아르틴과 다른 존재라면 어쩌나, 작은 불안감이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지옥의 군주라도 시간을 거스르는 존재의 정신적인 변화마저 제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르틴은 바뀌지 않았다. 풋풋하고도 답답한 동정의 모습은 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당당히 대화를 요구하는 모습은 자신이 기대하던 기억 속의 아르틴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벌이다 아르틴. 1번 시간을 거슬러놓고도 짐을 찾지 않다니, 친구의 마음을 애태운 벌은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수정구슬에 비춘 아르틴의 모습을 바라보는 메피스토의 모습은, 근엄한 지옥의 여군주에 어울리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어떤 장난을 칠지 궁리하는 악동 같은 웃음에 가까웠다.
“오래도록 애를 태우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짐이 내리는 시련을 통과하게 만들어야 알현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고...”
하지만, 메피스토 본인은 한 가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르틴에게 품은 마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부풀어 올랐기에, 결국 인내심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메피스토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헤어짐은 소설 속의 비극과도 같았지...”
그 사실을 모르는 메피스토는, 달콤한 목소리로 수정구를 쓰다듬었다. 정확히는 수정구에 비춘 아르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니, 우리의 재회는 좀 더 극적이면 좋겠구나. 아르틴.”
그 직후 알현실에서 만족감에 찬 낮고도 짙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오자. 알현실의 문 앞을 지키던 근위악마들은 사뭇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가레토스님. 이거 괜찮은 겁니까..? 군주님께서 드디어 미치신게 아닐까요?”
“...할락스, 네가 선택한 메피스토님의 근위대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인간계에 나타난다면 마왕의 군단장들조차 긴장해야 할 강력한 상급 악마인 두 악마 일지라도, 요 근래 눈에 띄게 변한 메피스토의 행동에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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