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그들은 그저 잘못된 선택을 한 것뿐이란다. #02
* * *
심야를 향해 흘러가는 어두운 밤.
조용해야 할 아카데미에는 유니코르의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르틴! 장미관은 아직 멀었느냐!”
“곧 도착할 거야, 여기서 해안선을 따라 쭉 달리면 돼!”
시온이 육망성의 아지트라고 알린 장미관은, 브론즈 기숙사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 유유자적하게 내 발로 뛰어가면서 퀘스트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던 나는 묘수를 냈다.
그건 바로 유니코르의 등에 업힌 후, 유니코르가 전력질주로 장미관을 향해 달리는 아주 심플하지만 효과적인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나를 타박하던 유니코르도, 내가 3중첩 가속 마법으로 버프를 걸어주자 오랜만의 달리기에 신이 난 듯 아카데미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유니코르가 유니콘의 모습으로 나를 태우고 달리는 게 더 빠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야심한 시간이라도 누군가는 깨어있을 수 있는 상황.
또 다시 유니콘에게 선택받은 남장여자 아르틴이 남자들의 시선을 피해 야밤에 달린다는 소문 같은 게 퍼지기라도 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합리적인 패널티는 감수하기로 했다.
“저기!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장미관이야!”
“알겠다! 꽉 잡거라 아르틴! 본좌가 최대 속도를 내보도록 하마!”
덕분에 말의 모습이라면 5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우리는 10여분이 걸리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원피스를 입고 전력질주 하느라 출렁이는 유니코르의 가슴도 꽤나 볼만 했고.
‘아니 시발, 내 머릿속에서 나가 수간충의 자아 새끼야!’
황급히 내가 고개를 흔드는 사이, 장미관의 근처에 도착하자 유니코르는 근처 수풀에서 멈춘 후 나를 등에서 내려주었다.
“가끔은 이렇게 시원하게 달리는 것도 기분이 좋구나! 그나저나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이냐?”
“글쎄, 일단 생각을 좀 해봐야지...”
수풀 안에 모습을 숨긴 나는, 우선 퀘스트 창을 허공에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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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긴급 상황! 히로인을 구출하라!
당신의 히로인 후보들이 악당에게 붙잡혔습니다!
숫사자는 자신의 여인의 위험을 좌시해서는 안 됩니다!
멋지게 붙잡힌 히로인 후보들을 구해내 보도록 합시다!
퀘스트 보상 : 구해낸 각 히로인 후보에 대한 호감도, 상점 포인트.
현재까지 공략한 여성 : 0/2명.
남은 퀘스트 완료 시간 : 02: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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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기는 했지만, 시온과 정체 모를 히로인 후보를 구해야 하는 상황. 낙관적인 시간은 아니었다.
다른 동아리 멤버들에게도 위치와 긴급 상황임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기는 했지만 언제 다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먼저 움직일지 안전한 선택지를 골라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우리끼리 우선 먼저 진입하자. 시온 말고도 구해야 할 사람이 1명 더 있어.”
“괜찮겠느냐? 마왕의 간부가 있다면 본좌의 힘으로도 부족할 지도 모른다만...”
유니코르의 걱정 어린 표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유니코르와 계약한 것만으로는 마왕의 간부를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다.
“그러니, 모습을 숨기고 몰래 침투해야지.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이때를 위해서 준비는 어느 정도 해놨으니까.”
치트키에 가까운 상점 덕에, 육체적인 수련이 부족한 것을 빼고는 준비는 어느 정도 갖춰진 상황. 다른 동료들이 나중에 도착해 시선을 끌어주기 시작하면, 나랑 유니코르가 몰래 움직여 히로인과 사람들을 구해내면 전면전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
“네가 그렇다면 본좌는 믿겠다만...일단 적의 조직에 어떻게 침입할 셈이냐?”
유니코르의 말에 나는 장미관을 바라보았다. 투명화 마법 따위로 안전하게 침입하기는 힘들 테니, 결국 그보다 더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으로 침입해야 한다.
“만약 적당히 변장하고 들어갈 만한 사람이 있다면, 훨씬 편할 텐데...”
“변장이라니? 어떻게 말이냐?”
“육망성은 인간 신도들이 모인 조직이니까. 적당한 조직원을 빼돌린 후 폴리모프 주스를 사용하면 신분을 위장하기 쉽거든. 문제는 적당한 조직원을 어떻게 구하냐는 건데...”
조직원을 유인하기 위해 밖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본말전도인 상황. 묘수를 떠올리기 위해 내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유니코르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르틴, 신도라는 것이 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유니코르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자, 장미관의 옆 나무 아래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저거면 충분할 것 같은데? 운이 좋군.”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본좌가 눈썰미가 좋은 것 이니라!”
나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 유니코르를 무시하고, 기척을 죽인 후 나무 아래에서 대화하는 육망성의 조직원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오, 주느비에브. 저는 사제고, 당신은 평신도에요. 만약 우리가 이런 사이라는 걸 다른 신도들이 알게 된다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레몽 사제님, 저와 레몽 사제님만 조용히 한다면, 아무도 우리의 사랑을 눈치 채지 못할 거예요!”
이 으슥한 밤에 왜 아지트에서 나와 있나 했더니, 이 남녀는 금단의 종교에 심취한 것도 모자라서 둘이 금단의 사랑이라도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개 시발 좆같은 짓만 골라서 하네. 누구는 니네 때문에 개고생을 하는데.”
“뭐, 뭣?! 당신 누ㄱ...”
“레몽 사제님? 사제니이...임...”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나를 향해 놀란 표정을 짓던 두 사람은 내 수면 마법에 의해 꿈나라에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전격 마법으로 기절 시키고 싶었지만, 불빛이 꽤나 강렬할 것을 염려해 그냥 얌전히 잠이나 재웠다.
“다 됐느냐? 이제 본좌는 뭘 하면 되느냐?”
“잠깐만 기다려 봐, 우선 이 녀석들부터 꽁꽁 묶어 두자고.”
잠시 후, 인벤토리에서 꺼낸 밧줄로 두 사람을 꽁꽁 묶은 나는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아, 미리 만들어 둔 폴리모프 포션에 각각 한 가닥씩 넣었다.
퍼엉! 포션의 색깔이 밝게 변하는 것으로 보아하니 효과는 확실한 상황.
“자, 네가 저 분홍머리 평신도 여자로 변신해. 내가 저 갈색머리 사제로 변신할 테니까.”
폴리모프의 권능이 있기는 하지만, 세세하게 모습을 바꾸는 것은 어려워하는 유니코르를 위해 스윗하게 포션을 2병 준비해둔 나는 분홍색으로 변한 포션을 유니코르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유니코르는 내가 내민 포션을 받지 않고 미간을 찡그렸다.
“왜? 포션색이 이상해서 그래? 맛은 포도주스 맛이라서 생각보다 먹을만 할텐데.”
“아니...그런게 아니라...저 여자 말이다.”
유니코르는 기절한 여자를 향해 냄새를 몇 번 맡더니, 고약한 냄새라도 맡았다는 듯이 코를 막으며 얼굴을 구겼다.
“으윽, 역시나! 저 여자, 남자에 의해 처녀막이 찢어진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방탕하게 남자들과 몸을 섞은 빗치로 변하는 것은 유니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 한다!”
단호하게 미친 소리를 내뱉으며 포션을 거부하는 유니콘의 반응에, 나는 이 녀석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처녀 퍼레이드를 즐기던 미친 망아지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말았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너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거 서투르잖아! 저 두 사람이 순결하지 않아도, 이번에는 좀 참고 넘어가주면 안 될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르틴? 본좌는 저 여자가 비처녀라고 했지, 남자가 순결하지 않다고는 안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기절한 신도를 바라보다, 이내 알아서는 안 될 사실에 깨닫고 말았다.
“그, 그 말은. 오우 씨발. 우리가 꽃뱀에게서 남자 하나를 구한거야?”
“이래서 비처녀들은 세상의 악이다. 어째서 유니콘의 계약자들이 비처녀와 금태양의 피를 원하는 지 이제야 알겠느냐 아르틴?”
“아니, 그럼 네가 남자를 마시면...나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유니코르는 당당하게 내 손에서 파란색으로 변한 포션을 낚아챘다. 그러자, 내 손에 남은 것은 핑크색 포션 뿐이었다.
“이번만 좀 참고 넘어가면 될 일이 아니 더냐 아르틴?”
“...진짜? 나보고 마시라고? 진심이야 유니코르?”
유니코르는 내 간절한 목소리에 잠시 눈을 굴리더니, 웃으며 파란 폴리모프 포션을 쭉 들이켰다. 잠시 후 순결한 남자 사제의 모습으로 변한 유니코르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 시간이 적으니 얼른 쭉 들이키거라 아르틴.”
나는 내 손에 쥐어진 분홍색 폴리모프 포션을 내려다보며 이를 꽉 물었다.
여자로 변신해야 한다니, 정말로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 내가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애써 머리를 굴리자 곧바로 내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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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퀘스트 완료 시간 : 02: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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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안내 문구도 없이, 오로지 남은 시간만을 비추는 시스템의 농간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인생 진짜...개같다. 남장여자에 이어서 이번엔 TS라니.’
...다음에는 폴리모프 포션의 포도향을 좀 더 강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입안에 남아있던 액체를 쭉 들이켰다.
***
강령술사 렉스턴의 타락은, 시온 이드리스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 깊게 연관되어 있다. 오랫동안 지속된 병든 사랑을 견디지 못한 렉스턴이 결국 일선을 넘는 것으로, 마왕의 충실한 부하가 되는 것이 일련의 흐름이었다.
허나 이번 세계의 렉스턴은 조금 사정이 달랐다. 전교생의 앞에서 자신을 위해 싸운 기사를 매도하고, 구타하다가 아르틴에게 두들겨 맞은 렉스턴은 또다시 중환자실의 신세를 져야 했다.
시온을 떼어내 준 계기가 된 아르틴에게 렉스턴은 작은 고마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귀족인 자신을 망신을 준 것은 도저히 참지 못할 모욕이었다. 하지만 렉스턴에게는 아직 패가 남아 있었다.
‘위센 선배님은 나와 아주 친한 사이, 거기에 우리 가문의 가신인 남작가의 후계자도 안되는 것이 후계자인 나를 모욕했으니, 아버지가 직접 나서 줄 거야!’
이후 아르틴이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달콤한 복수를 꿈꿨던 렉스턴은, 가문에서 도착한 편지에 한 통에 의해 꿈에서 강제로 깨어나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아르틴하고 엮이지 말고 얌전히 아카데미 생활을 하라니!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더 이상 소란을 피울 경우, 후계자 자리를 재검토 하겠다는 아버지의 편지에 렉스턴은 입술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그 양아치 새끼인 조르바 펠카스의 흉계가 분명했다. 고작 돈 몇 푼에 자식의 명예를 팔다니, 렉스턴은 아버지의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선택에 대해 반항할 수도 없었다.
“아, 아직 리가르도 위센 선배가 남았어. 나한테 복수를 해준다고 했으니, 분명 아르틴을 확실하게 짓밟아 주실 거야...!”
왕국 귀족 파벌의 힘이라면 분명 샤오메이나 조르바도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렉스턴은 또 다시 달콤한 꿈을 꾸었다.
하지만 렉스턴이 퇴원한 당일 날, 리가르도 위센은 아르틴에게 두들겨 맞아 렉스턴이 입원했던 병실에 그대로 입원하고 말았다.
“헤헤...이건, 이건 꿈이야...빌어먹을...꿈이라고...”
렉스턴은 절망에 빠졌다. 교내에서의 직위도, 자신을 이끌어줄 선배도, 가문의 위상도, 자신의 기사도 전부 잃은 렉스턴에게 남은 것은, 한 달이 넘게 뒤쳐진 수업과 주변 사람들의 멸시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그래서 렉스턴은 교실에 나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르틴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무슨 모멸감을 느껴야 할지 상상조차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학 만큼은 당할 수 없었던 렉스턴은 수업 대신 도서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수업을 직접 듣지 않더라도, 스스로 독학해서라도 후계자의 자리만큼은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남아있었지만.
“모르겠어, 젠장. 모르겠다고!”
강령술에만 천부적인 재능을 보일 뿐, 그 외에는 천재라기에는 부족한 렉스턴이 단 한 번도 듣지 않은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렉스턴의 마지막 남은 자존감이었던 천재라는 아이덴티티가 박살나던 순간이었다.
“이제 틀렸어...나는 후계자도 못 되고 거렁뱅이가 되고 말거야...”
렉스턴이 홀로 비참함을 곱씹던 그때
“저..저기, 괜찮아? 뭐, 뭔가 어려운 문제가 있어?”
늘 도서관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존재감이 약하던 안경 쓴 여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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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엘레나라고 소개한 여학생은, 무척 앳된 얼굴과는 다르게 렉스턴 보다 4살이 많은 5학년 선배였다.
“이, 이 문제는 부여 마법의 기초 공식을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야. 여길 보면...”
그녀는 어째서인지 무뚝뚝한 렉스턴에게 무척이나 친절했다. 분명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렉스턴을 남들처럼 역겨워 하는 대신 무척이나 안쓰럽게 바라봤다.
“모, 모두가 잘 나갈 수는 없잖아...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자신만을 위한 자리는 있어야 하는거야. 그렇지?”
그녀는 친절했다. 비록 그게 뒤틀린 동질감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친절함이 렉스턴에게는 너무나도 필요했다. 그래서 렉스턴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 같이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었다.
“저, 저기 렉스턴. 우리 같은 사람들 끼리 뭉치는 비밀 사교회가 있는데..레, 렉스턴 너도 오지 않을래?”
그래서 렉스턴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건네는 그녀의 권유를 거부하지 않았다.
“어서와! 네가 렉스턴이구나! 잘 부탁해!”
“우리 육망성은 무려 50년 가까이 지속된 비밀 조직! 너도 이제부터 위대한 조직의 일원이야!”
그녀가 초대한 곳은 육망성이라는 비밀 조직. 이라고 주장하는 패배자들의 동아리였다. 마왕을 숭배하는 비밀 조직이라는 이념이 우습게도, 그들은 그저 이 아카데미에서 도태되어 이곳에 모인 낙오자들에 불과했다.
렉스턴은 그 모든 것들이 같잖았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버려진 건물에 모여서 다 같이 주문 좀 외우고 소속감을 가지는 모습은 렉스턴이 보기엔 전혀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후후, 내, 내가 바로 육망성의 37대 회장! 대, 대단하지 렉스턴?”
하지만 자신을 초대해 준 엘레나의 즐거운 모습에, 렉스턴은 이 패배자 모임에 조금 더 어울리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을 반겨주는 다른 곳도 없지 않은가.
“자, 이게 바로 회장들에게만 전해지는 의식의 책인데, 렉스턴은 트, 특별히 내가 보여줄게!”
그녀는 이 놀이에 깊이 심취해 있는 것 같았다. 밖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던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를 보고, 렉스턴은 흥미가 있는 모습을 흉내 내며 엘레나가 건네준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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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3층, 여전히 정신을 잃은 엘레나가 갇혀있는 방을 렉스턴은 복잡한 기분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마지막 순간 까지 자신이 새롭게 만든 조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마왕을 숭배하기에는 너무 착했던 것이다.
제대로 타락하지 않은 렉스턴은 그래서 그녀와 그녀의 동조자들을 전부 가뒀다. 제물로 삼거나, 고문하지도 않고 그냥 가둬두기만 했다. 몽마군주 릴리트가 그들을 제물로 쓸 것을 종용했을 때도, 렉스턴은 그러지 않았다.
문뜩, 시선을 돌리자 엘레나가 갇혀 있는 반대편 방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자신을 끔찍이도 괴롭혔던 시온이 갇혀있는 방이었다.
‘차라리 잘 됐어, 저 년을 제물로 삼는다면, 엘레나 선배는 제물로 쓰지 않아도 되겠지.’
처음에는 불쾌했고, 그 다음은 복수심에 기뻤지만, 결국 마지막에 남은 감정은 저 여자라면 죄의식 없이 희생시킬 수 있다는 안도감이었다. 렉스턴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지하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거기 너! 명령이다. 방금 잡힌 시온이라는 여자를 제물로 삼을 것이다. 희생의 제를 준비해라.”
“ㄴ.네, 알겠습니다! 사제장님!”
렉스턴의 명령에, 방금 막 사제로 진급하여 세니아를 자신의 노예로 부여받은 대니가 군기가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쳇, 세니아 교수 가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진급 하자마자 일이라니..’
대니는 속으로 혀를 차며, 지하 3층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지나가던 신도를 가리켰다.
“너! 내 노예인 세니아 교수를 지하 1층의 감금소에 데려다 놔라! 혹시라도 손 댄다면 지하 3층에 쳐박아주마!”
“알겠습니다! 사제님!”
이것이 권력의 맛인가, 고분고분히 대답하며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평신도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좋아진 대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 3층으로 향했다. 찰스도 이 기분을 느낀다면 자신을 이해하고 새로운 시대에는 자신과 함께 하리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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