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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81화 (81/266)

〈 81화 〉 순수한 사랑

* * *

아르틴이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유니코르는 여전히 몸을 가득 찬 마기에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남부 교단의 여사제들이 매일같이 그녀를 성수로 씻기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덕에, 그녀는 아직 죽지도 타락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마지막이라니..그런 약한 소리하지 마..!! 한 달, 한 달 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올 테니까. 유니코르 너는 푹 쉬면서 기다리고 있어...!!”­

아르틴이 자신에게 화를 냈을 때, 유니코르는 마음이 저리듯이 아파왔다. 평상시에 자신의 장난에 반쯤 웃으며 화를 낼 때는 무척이나 즐거웠는데, 진심으로 울먹이며 화내는 그 모습은 몸이나 영혼이 아닌, 마음이 아픈 기분이었다.

‘아르틴은...아르틴은 바보이니라, 세계수의 잎이라니, 그런 귀한 것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세계수는 엘프들이 죽은 후 영혼이 담기는 신성한 나무라고 전해지는 신성한 나무, 그렇기에 나뭇가지 하나, 나뭇잎 하나까지 신성하게 다뤄지는 종교적인 유물이라고 봐도 좋다.

아무리 유니콘들이 엘프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세계수의 유물을 반출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안건, 장생종인 엘프들의 사회에서 이런 안건은 몇 년에 걸쳐서 논의를 해야 결론을 낼 수 있는 일이다.

하물며 엘프도 아닌 아르틴이, 폐쇄적으로 유명한 엘프의 숲에 찾아가 세계수의 잎을 제 시간에 받아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차라리 용을 토벌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아르틴도 유니코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틴은 떠났다. 유니코르 자신을 살리겠다는 각오로, 카이엔과 단 둘이 엘프의 숲으로 떠나버렸다.

유니코르는 문뜩 겁이 나기 시작했다. 아르틴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자신을 향해 화를 내는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죽을 지도 모른다는 현실보다도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아르틴...아르티인...’

유니코르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하트 모양 팬던트를 꽉 움켜쥐었다. 아카데미의 1년 전 여름 축제 때 아르틴을 졸라서 샀던 싸구려 목걸이. 반짝이는 황금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가치 있는 보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여태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유니코르의 보물이었다.

‘실패해도 좋다, 제발 다치지 말고 돌아와 마지막 순간에는 나를 위해 웃어다오...’

마기로 인해 열이 펄펄 끓는 유니코르의 육체는, 본인도 모르는 또 다른 열병에 걸려있는 상태였다. 그 열병의 이름은 모두가 익히 아는 병이었다.

*

그리고 한 달째 되는 날.

유니코르는 완전히 죽어가고 있었다. 이제 하루에 1시간도 제 의식을 차리지 못하며, 가끔 힘없는 목소리로 아르틴의 이름을 중얼거릴 뿐이다.

초원의 왕의 축복이 깃든 약초도, 레비아탄의 신성력이 가득 담긴 바닷물도 마기를 전부 씻어내진 못했다. 교단의 고위 사제들은 침통한 얼굴로 길어도 3일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결국, 아르틴 경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군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엘프들의 폐쇄성은 유명하니..자리에 없는 아르틴 경을 대신해 저희라도 신수님을 위해 다 같이 기도하도록 합시다.”

“훌쩍..하지만, 유니코르님은 그렇게 애타게 아르틴님을 기다렸는데..”

“어쩔 수 없습니다. 여사제님들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셨습니까. 마왕의 악랄한 저주에 이리 오래 버틴 것도 기적 같은 일입니다.”

아르틴이 없는 한 달간 유니코르의 곁을 지켜온 여사제들이 눈물을 터트리자, 고위 사제들은 침음을 흘리며 여사제들을 다독여야만 했다.

많은 이들이 신의 기적을 바랬지만, 결국 이번에는 신의 기적이 닿지 않았다. 오랫동안 교단에서 맡아 온 유니코르에게 닥친 불행이기에 그 슬픔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저벅. 저벅.

그때, 대리석 바닥을 단단하게 두드리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신전을 울려 퍼졌다. 모두가 기다려왔던 발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사제들의 표정이, 경악과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

유니코르는 꿈을 꾸었다. 아르틴이 자신을 마중 나오는 꿈.

그 꿈에서 아르틴은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걱정 어린 눈으로 상냥하게 바라보며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지난 한 달간의 기억은 오로지 고통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을 옥죄이며 머리를 망치로 수천 번을 내려찍는 것 같은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르틴...마지막에 웃어줘서 고맙구나...’

비록 실제로 웃음을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의 행복감 이라면 편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유니코르는 자신의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유니코르는 잠에서 깨어났다.

“...본좌의 몸이, 아프지가 않다?”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신성력 대신 몸 안을 가득 채웠던 혼탁한 마기도 사라진 상태였다. 아니, 오히려 아프기 전보다 더욱 강한 신성력이 신체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아르틴이 자신을 구한 것이 틀림없다! 비록 옆에서 자신이 깨어날 때 까지 기다려주지는 않았지만, 그런 사소한 잘못은 용서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나를 위해 세계수의 잎까지 구해오다니! 비록 남자라고는 하나 아르틴을 본다면 꼬옥 껴안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겠노라!”

방을 뛰쳐나온 유니코르는, 자신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놀란 여사제를 발견하고 아르틴이 머무는 방을 찾아갔다. 지금 당장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유니코르는 전력으로 달려 도착한 방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고 들어갔다.

“보거라 아르틴! 본좌가 이리도 건강해졌도다! 다 네...덕분...이...다만...”

기운차게 웃으면서 들어간 방 안에서, 아르틴은 평소처럼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의 무구를 손 보고 있었다. 자신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깜짝 놀란 얼굴은, 평소의 유니코르라면 놀리기 좋은 표정이었다.

“역시 건강해 졌구나! 세계수의 잎이 역시 효과가 있었네, 내가 나만 믿으라고 말했지?”

“그...그 보다..어찌 된 것이냐...아르틴? 그 손은...?”

유니코르는 자신을 향해 반갑게 웃어주는 아르틴의 오른손을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자리에는 늘 자신을 쓰다듬어주던 손 대신, 금속으로 만들어진 가짜 손이 붙어있었다.

“아, 이거? 별거 아니야. 엘프들을 도와주다가 부상을 입었는데, 대신 미스릴로 만든 의수를 선물로 주지 뭐야? 횡재했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말하지만, 아르틴은 슬그머니 자신이 의수를 보지 못하게 뒤로 감추고 있었다. 침착해진 유니코르의 시야에는, 한 달 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아르틴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귀여운 얼굴이 그나마 자랑이었던 아르틴의 얼굴에는, 중앙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흔이 생겼다. 한쪽 귀는 잘려나간 것을 강제로 재생시킨 것인지 쭈글거리는 주름진 모양이었고, 긴 팔 옷으로도 감추지 못한 화상자국이 왼쪽 손등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이게 무엇이냐, 왜 이리 잔뜩 다친 것이냐! 왜!”

“아, 뭐. 네가 없으니까 생각보다 자주 다치게 되더라고. 매번 너 없어도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 쳤는데, 조금 부끄러운 걸.”

태연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유니코르는 자신의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참기도 싫었다. 대신 아르틴에게 다가가 상처가 가득 늘어난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애도 참, 한 달 못 봤다고 어리광 피우기는! 나 멀쩡해. 오히려 전 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바보 같은 소리 말아라, 이토록 크게 다쳤는데 멀쩡하다니 무슨 소리냐.

왜 이리 멍청한 짓을 했느냐! 잘려나간 오른손은 엘릭서라도 가져오지 않으면 고칠 수도 없는데.

너 보다 훨씬 강한 카이엔하고 같이 가놓고, 왜 이리 다쳐서 온 거야 바보야.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지금 꽉 다문 입을 여는 순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자신을 위해 이렇게 크게 다친 아르틴에게 나쁜 말을 해버릴 것만 같아서.

“그러니까 그렇게 슬픈 눈으로 보지 말아줘, 이 정도로 친구를 구할 수 있다면, 엄청 싸게 먹힌 거잖아?”

아르틴은 꿈에서 봤던 모습처럼, 상냥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다만 자신을 쓰다듬는 손이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이라는 사실이, 더욱 유니코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두 번 다시는 아르틴이 이런 아픔을 겪게 하지 않겠다고, 자신이 더욱 강해지고 의젓해져서 아르틴이 힘들지 않게 하겠다고.

한 달 만에 느낀 아르틴의 온기는, 너무나도 따스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

아르틴의 몸이 너무나도 차가웠다.

“...이상하구나, 아르틴의 몸이 이렇게 차가울 리가 없는데...”

유니코르는 입술이 새파랗게 변한 아르틴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칠칠치 못하게 입가에 새빨간 와인을 줄줄 흘린 아르틴을 대신해 냅킨을 꺼내 입을 닦아주기도 했다.

“졸리기라도 한 것이냐? 으응? 식곤증이 이리도 심하다니, 내가 요 근래 너무 무리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아르틴은 요 몇 달간 루시라는 방탕한 여자를 돕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만나고 싸움을 하고 다닌 상태였다. 그러니 식사를 하다 피로에 못 이겨서 잠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구나, 본좌가 특별히 무릎베개를 해줄테니 잠을 청해도 좋다.”

유니코르는 피를 토하며 죽어있는 아르틴의 동료 중 하나의 시체를 옆으로 밀치고, 고급진 의자에 앉아 잠든 아르틴을 고개를 자신의 무릎이 기대게 했다. 어찌나 깊이도 잠에 빠진 것인지, 평소에 골던 코도 골지 않고 마치 죽은 것처럼 잠든 아르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본좌가 조금 생각을 해보았다. 어째서 그대만 보면 이리도 즐겁고 신나는 것 일까. 그대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왜 이리도 행복한 기분이 드는 것 일까.”

철퍼덕. 아르틴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루시라 불리던 여인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위험한 일이라고 몇 번이고 경고했지만, 듣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유니코르는 생각했다.

“처음엔 그저 그대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대를 따라 사귄 다른 친구들과는 아무리 같이 있어도 이런 기분이 들지 않더구나.”

문뜩 코를 찌르는 비린내가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와인잔에서 달콤항 향기에 뒤섞여 풍기자 유니코르는 기분이 무척 나빠졌다. 벽에 와인잔을 던질까 했지만, 아르틴이 깰 것을 염려한 유니코르가 와인을 향해 신성력을 뿜어내자 그 안에 담겨있던 독기와 비릿한 향기가 사라졌다.

“그것을 아느냐? 유니콘들은 단 한명의 수컷만을 평생토록 사랑한다고 하더구나. 나는 어린 시절 그 감정을 동경했다. 내가 사랑하는 수컷과 한 평생 같이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느냐.”

아르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기며, 초점을 잃은 두 눈을 꼭 감겨주었다. 여전히 아르틴의 몸은 너무나도 차갑게 식어 있어,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한 유니코르는 신성력을 끌어내 아르틴의 몸을 따스한 빛으로 덮어주었다.

“그런데 그대와 하는 순간이 행복하고 즐겁구나, 그대와 영원히 같이 있고 싶구나,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왜 나는 일찍 깨닫지 못했는지. 정말 그대가 말했듯이 나는 바보 같은 면이 있었나 보구나.”

하하하! 유니코르는 입으로 크게 웃었지만, 눈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붉은 눈물이 뜨겁게 흘러, 아르틴의 차가워진 볼에 뚝 뚝 떨어졌다.

“그것 아느냐 아르틴? 유니콘은 그 순수한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래서 우리들은 반려자의 마지막 순간에, 같이 눈을 감으며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저 멀리서 아르틴과 동료들을 식사에 초대한 이들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순간 복수를 떠올렸으나, 유니코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르틴은 착하게 살았으니, 죽어서도 천국에 갔으리라. 그러니 아르틴을 다시 만나려면, 자신도 더러운 피를 손에 묻히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르틴, 천국에서도 그대를 볼 수 있다면, 이번에는 그대를 안아줄 수 있을 정도로 멋진 여성이 되겠노라, 그대를 쓰다듬을 수 있을 정도로 키 크고 멋진 여성이 말이다.”

그대는 발칙하게도 가슴이 큰 여자를 좋아했지, 다른 여자의 엉덩이를 훔쳐볼 때는 그 눈을 찔러주고 싶었는걸, 팔다리가 짧아서 매번 나를 업어줬으니, 이 다음에는 내가 너를 업어줄 차례 같아. 죽어서는 한쪽 손이 의수가 아닐 테니, 오른손을 깍지 끼고 너를 마주보고 싶어, 그리고, 그리고──

“다음에는 내가 먼저 너한테 말할래, 너를 사랑한다고.”

순수한 사랑을 품은 반려를 잃은 유니콘은 그 자리에서 생기를 잃고 죽어버린다고 한다. 어린 시절 유니코르는 그 결말이 너무도 슬펐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슬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죽어서 다시 만날 아르틴에게, 해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이 떠올랐으니까.

차갑게 식은 아르틴의 이마에 입술을 맞춘 유니코르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예전처럼 환하게 웃는 아르틴을 만나길 바라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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