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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90화 (90/266)

〈 90화 〉 바이올렛의 무의식

* * *

바이올렛은 마치 수업시간에 졸다가 깬 것처럼,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내, 내가 잠든 건가?! 얼마나 잔 거지? 아르틴은..?!’

적이 몽마인 것을 듣고도 잠에 빠져들다니! 바이올렛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주변을 황급하게 둘러보며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라?’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자신은 장미관의 지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과회를 위해 만들어진 야외 테라스 중 하나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서 공화연방의 녹차를 홀짝이던 샤오메이가 깜짝 놀란 눈으로 있었다.

“..가, 갑자기 왜 그러심까? 화들짝 일어나셔서 저도 깜짝 놀랐슴다.”

“어..? 샤오메이? 여기는..? 아르틴은? 장미관은? 말투는 또 왜 옛날 말투야?”

“...꿈이라도 꾸신 검까? 요즘 중간고사 준비하신다고 바쁘시더니 많이 피곤하셨나 봄다.”

중간고사라니? 중간고사가 한 달 정도 남기는 했지만 자신은 요 근래에는 오로지 알‘미라즈와 마법을 쓰는 것에만 집중했다. 게다가 저 말투는 샤오메이 특유의 친근한 말투, 하지만 요즘은 아그네스 황녀님 보고 멋있다고 귀족식 말투를 공부한다고 자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틴 형님은 조르바 도련님이 데리고 온다고 하지 않으셨슴까! 오늘 처음 소개해드리는 건데 그렇게 긴장하신 검까?”

“...오늘이 아르틴의 첫 소개라고?”

“역시 꿈을 심하게 꾸신 것 같슴다! 아르틴 형님이 드디어 방에서 나오기로 결심하셔서 소개해드리기로 하지 않았슴까! 아! 마침 저기 데리고 오는 것 같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 일까, 영문을 알지 못했던 바이올렛은 샤오메이가 반갑게 손을 흔드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제서야 바이올렛은 자신이 무슨 상황을 겪고 있는 건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이것도 꿈이구나. 과거의 꿈.’

언제 어디서나 보석처럼 돋보이는 화려한 미남, 조르바 펠카스가 당당하게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 바이올렛은 지금 이 순간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조르바와 함께해서 대비되는 우중충하고 어두운, 붉은 머리의 미소년과의 첫 만남을 잊을 수가 없었다. 맨 처음 봤을 때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아이였지.

“여어! 두 미녀분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나? 아르틴이 너무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그런지 꽤 힘들어 해서 말이야.”

“그래서 제가 평상시에도 저랑 같이 운동하자고 말하지 않았슴까! 아르틴 형님이 근육만 키우면 그 와이즈의 얼간이도 아르틴 형님을 건들지 못할검다!”

샤오메이와 조르바가 흥겹게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지만, 바이올렛에게는 마치 음소거라도 된 것처럼 두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안녕. 나는 아르틴이라고 해.”

그래, 처음에 자신을 바라보는 아르틴의 눈은 이랬다. 마치 상처 입고 버려진 길고양이처럼 경계하는 눈빛, 하지만 그 시선에는 묘하게 자신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이 서려있었다.

샤오메이와 조르바의 설명을 듣고 상상하던 기분 나쁜 은둔형 외톨이랑은 다른, 무언가 강렬한 감정이.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의 자신은 이 눈빛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반가움이었다. 분명 지금 처음만난 자신에게 보내는 아르틴의 시선은, 마치 오랫동안 동경하던 인물을 만난 것과 같은 반가움이 서려있었다.

스윽, 아르틴이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이렇게 인사했지. 처음의 아르틴은 무척이나 소심했다. 3회차라고 부르는 삶부터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소심하고 경계심이 많아서, 나중에 유니코르와 계약하고 나서야 활력을 되찾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떻게 인사했더라? 바이올렛은 문뜩 자신이 어떻게 인사를 했었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지만, 마치 안개에 낀 것처럼 생각이 나질 않았다.

손을 흔들며 인사했던가? 아니면 악수를 했던가? 표정은 어느 표정을 지었었지?

“..바이올렛? 아르틴이 인사했잖아? 애 머쓱하겠다.”

“맞슴다! 바이올렛 언니 때문에 아르틴 형님이 또 상처 입을지도 모름다!”

말없이 고민하고 있던 바이올렛에게, 옆에 서있던 조르바와 샤오메이가 바이올렛에게 속삭이며 눈치를 주자, 바이올렛은 순간 지금이 꿈이라는 것도 잊고 놀라서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아르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미안해! 그, 반가워 아르틴, 잘 지내보..자...?”

─타닥! 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귓가에 강렬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기름 냄새, 토악질이 올라올 것만 같은 광경에, 바이올렛은 다급하게 입을 막아 구역질을 참아야했다.

“왜 그래 바이올렛? 어서 인사해야지. 아르틴이 완전히 타죽기 전에 작별 인사는 해야할 것 아냐?”

“맞슴다. 형님이 죽을 때 까지 아무것도 못한 얼간이 같은 여자면서 작별 인사조차도 못하겠다는 검까?”

경계심 어린 수줍은 얼굴의 아르틴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것은, 자신이 3회차 시절 죽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 평생의 트라우마가 된 광경. 지금도 가끔씩 잠에 들 때면 꾸는 지옥 같은 악몽의 풍경이었다.

“아..! 아아...!! 아르틴!!!”

교회의 상징인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아르틴의 몰골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전신의 피부는 난도질당해 칼자국에 무엇을 했는지 피부 곳곳에 꼬맨 자국이 선명했으며, 얼굴 가죽의 반쪽은 고문으로 인해 녹아내려, 그 곱고 아름다웠던 아르틴의 얼굴이 마치 반쪽짜리 괴물처럼 보였다.

“안녕, 바이올렛? 내가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정말 미워. 죽이고 싶을 정도로. 이럴 줄 알았다면 너를 변변찮은 쓰레기로 냅뒀을 텐데.”

자신을 보며 상냥한 표정으로 마음을 찢어발기는 독설을 내뱉으며 타 죽어가는 아르틴의 모습에, 바이올렛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속에 있는 무언가를 게워냈다.

“우엑, 우에엑...!!”

“저 모습을 봐! 내 모든 손톱이 뽑히고 이빨이 전부 뽑힐 때도 암퇘지처럼 밥이나 쳐먹던 여자가 먹은 것을 토해내고 있어!”

하하하하하하하!

아르틴이 그 말을 남기고 화염에 휩싸이자, 주변에서 알 수 없는 웃음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비웃고 매도하는 그 웃음소리에 바이올렛은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았지만,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귀에 멤돌고 있었다.

“나는, 나는 아르틴을 구하고 싶었는데...!! 괜찮을 거라고 그래서! 기다리라고 말해서..!!!”

눈을 질끈 감은 바이올렛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쳐도, 그것을 듣는 이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변명을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능력이 있었고, 힘이 있었고, 같이 아르틴을 구출하러 움직일 수 있는 동료들도 있었다. 샤오메이는 몇 번이고 아르틴을 구할 것을 주장했으며, 그 신중한 카이엔이나 조르바도 침착해야 한다고 말할 뿐 샤오메이의 의견을 말리지는 않았다.

자신은? 자신은 어떻게 했었지? 그 망할 성녀가 자신이 해결해 보겠다고 북방 교회의 광신도들을 설득할 때, 자신은 무엇을 했더라?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아니, 하지 않았다가 맞을까?

“아니야..! 나는 언제라도 아르틴을 구하러 가고 싶었어..!!”

─그렇지만 그러지 않았지. 자신을 믿으라는 아르틴의 말을 듣고,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아니야! 아니야!! 나는 걱정 말라는 아르틴을 믿고 기다렸을 뿐인데..!!”

마치 쇳조각으로 칠판을 긁는 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바이올렛의 죄책감을 칼로 헤집듯이 들쑤셨다. 왜 귀를 막아도 계속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바이올렛은 작아지기는커녕 더욱 커지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막아도, 자신을 매몰차게 비난하는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음속의 목소리는 아무리 귀를 막아도 듣지 않을 수 없는 것 이니까.

***

“자, 됐다. 이제 너랑 나는 일시적이지만 유니코르처럼 계약으로 묶인 상태야.”

나는 알‘미라즈와 일시적인 가계약을 맺었다. 꿈 속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혹시나 하는 사태에 대비해서 깔아둔 보험에 가까웠다.

“이렇게 쉽게 계약을 맺게 되다니...”

“대가로 마혈석을 내놨는데, 네가 메피스토의 간부여도 가계약 정도는 가능해야지.”

“본좌는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유니콘의 계약자인 네가 저런 악마랑 계약을 맺다니..본좌가 직접 따라가서 지켜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내가 손등에 떠오른 가계약의 증표인 토끼모양 문신을 보여주자, 유니코르는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으며 괜찮겠냐는 눈으로 바라봤다.

“주접 떨지 말거라 유니바이콘, 반푼이 마녀의 꿈에 들어가는 인물은 반푼이 마녀를 깨우려는 목적을 지녀야 한다. 그대가 같이 들어가면 꿈처럼 섬세한 무의식은 망가지고 말테지.”

“주접이라니! 본좌는 저런 마법하나 제대로 못 쓰는 악마가 제대로 아르틴을 지킬 수 있는지 의문인 게다!”

“마, 마법을 하나도 못쓰는 것은 아닙니다! 지옥이라면 저도 충분히 강력한 상급 악마라고요!”

또 헛소리를 시작하는 세 사람을 내버려두고, 나는 마나를 가늘게 실처럼 뽑아낸 후 바이올렛­메피스토의 손목과 내 손목, 그리고 알‘미라즈의 손목에 감았다. 그리고 바닥에 내가 직접 피로 그려낸 마법진에 마나를 연결하자 마법진이 약한 붉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자, 꿈에 간섭하는 강령술 준비가 다 끝났어. 나랑 알‘미라즈가 잠들기만 하면 돼.”

“보아라, 짐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르틴은 강령술도 알아서 해내지 않느냐? 이제 막 마기를 깨우친 너에 비하면 아르틴은 마력을 다루는 솜씨도 일류이니라.”

“...그, 그건 본좌의 반려자가 잘난 것이지, 저 악마가 쓸모 있다는 소리는 아니지 않느냐...”

나는 작게 한숨을 쉰 후 입술을 삐쭉 내민 유니코르를 끌어안아 토닥여줬다. 유니코르의 걱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냥 꿈에 간섭하는 것도 생각보다 어려운 일. 하물며 몽마의 권능에 빠진 이를 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위험함을 동반한 일이다.

과거 사막에 존재하던 나라 중 하나는, 어느 마녀가 내린 저주로 모든 국민이 잠들었고, 그 어떤 마법사나 마녀도 그 저주를 풀지 못해 멸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너무 걱정 하지는 마, 내가 3회차랑 4회차에 몽마놈들한테 얼마나 시달렸는데, 꿈 속 세계 정도는 앞마당 정도야.”

“...저, 정말이냐? 본좌가 같이 안 가줘도 잘 할 수 있겠느냐? 어디 다쳐서 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 나만 믿어 유니코르.”

내가 유니코르를 다정하게 달래주자, 바이올렛­메피스토는 혀를 차며 나랑 알‘미라즈가 묶인 마나의 끈을 잡아당겨 우리를 자신의 곁으로 끌고왔다.

“거기 까지 하거라, 어차피 유니바이콘 네 녀석은 5분에서 10분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꿈의 세계에서 시간은 무의식의 상대적인 영역.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는 일을 도전하는 건 짐의 토끼와 아르틴이다.”

“제,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르틴님을 오랫동안 보좌하며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니..”

알‘미라즈의 말은, 나도 조금 걱정이 들긴 했다. 저 악마 녀석, 묘하게 근거 없는 자신감은 강한데 할 줄 아는 건 적었고, 실전 경험이나 다른 것도 전부 부족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바이올렛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이 세계에서 사귄 내 첫 친구 중 하나이자, 현실에서도 사귀지 못했던 절친, 그리고 내 사랑하는 연인. 그런 바이올렛이 고통 받는 걸 효율을 위해서 참으라고? 현실에서의 30분이 바이올렛에게는 얼마나 긴 고통일지 감도 잡히지 않는 데?

‘좆까. 차라리 5분 안에 사제장 목 따고 릴리트 죽여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바이올렛은 구하고 간다.’

“자, 그럼 자세를 잡자구나, 여차하면 짐이 저 잡종말을 마법으로 도와야하니, 자세가 무척이나 중요하다 아르틴.”

“아..응, 뭐 그렇겠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몽마 시르카와 릴리트가 다시 한 번 공격해오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잠든 우리가 걸리적거리게 된다면 유니코르와 메피스토, 바이올렛과 나, 알‘미라즈까지 전부 위험해 질 수 있다.

“그런데 꼭 이런 자세로 누워야 해?”

“짐을 믿거라, 이 자세가 마법을 쓰기에 가장 좋은 자세니까.”

그런데 문제는 메피스토가 주장한 자세가 매우 엄한 자세였다. 내가 알‘미라즈와 바이올렛­메피스토를 양팔로 끌어안고 누워서 꽉 붙드는 자세가 되어버렸으니까.

“구, 군주님..! 이 자세는 너무 파렴치한 것 같습니다! 재고를..!”

“맞아! 본좌의 반려자를 홀릴 셈이더냐! 허튼 짓은 그만해라 왕따 악마!”

“시끄럽다! 지금 시간이 촉박한데 자세가지고 싸울 셈이냐! 전방이나 주시하거라 잡종말!”

바이올렛­메피스토가 시간을 들먹이자, 창피하다고 중얼거리던 알‘미라즈와 심통이 난 유니코르가 더 이상 뭐라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 둘을 보더니 바이올렛­메피스토는 만족한 얼굴로 나를 보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이 바이올렛의 몸에 키스 하거라. 그러면 꿈의 세계로 잠들 수 있을테니!”

“그건 너무 개수작 같다. 메피스토.”

나는 더 이상 메피스토의 장난에 어울려 주지 않고 미리 그려놓은 마법진을 손으로 튕기자, 마법진이 붉은 색으로 환하게 빛나며 걸어 둔 강령술이 시작되었다.

아, 동시에 삽입해둔 수면 마법의 영향인지 잠이 무겁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후후, 마지막까지 앙탈은, 잘 다녀오거라, 그대여.”

천천히 잠에 빠져드는 순간, 내가 마지막으로 느낀 감각은 부드럽게 입술에 닿는 바이올렛의 입술의 느낌이었다.

그게 뭔지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완전히 잠에 빠져들어 꿈의 세계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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