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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91화 (91/266)

〈 91화 〉 바이올렛의 무의식 #02

* * *

적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울면서 귀를 막고 있었던 바이올렛은, 그 적막에 의문을 품고 눈을 떠 그 앞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악몽이 끝난 건가?

“여전히, 당신은 도망치기만 하는 군요. 퍼플크로우.”

어느새 아카데미의 야외 테라스를 그리던 풍경은 사라졌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피로 물든 언덕에 서있던 바이올렛은, 자신을 향해 조소하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비르투스, 네가 어째서.”

누구 하고나 쉽게 친해지고, 상냥한 성격의 바이올렛이지만, 그런 바이올렛도 싫은 사람은 있었다. 사람의 선의를 이해타산으로 계산하고, 정치에 능하며, 필요하다면 더러운 수작도 마다하지 않는 자.

북부 교단의 현 시대의 성녀, 올가 비르투스. 그녀는 언제나 바이올렛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교단의 성녀라는 것을 과시하듯 언제나 입은 성녀복, 교단의 수녀들이 언제나 특별히 관리해주는 탓에 윤기가 흐르는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 언제나 육탄공세로 아르틴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하던 외모에 눈웃음을 너무 짓고 다닌 탓인지 휘어진 눈꼬리까지.

만인에게 사랑을 받고, 만인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할 존재, 그런 주제에 언제나 아르틴의 곁에서 불여우짓을 하며, 가끔은 카이엔과 힘을 합치면서 까지 자신을 견제하는 그 모습은 바이올렛으로 하여금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저도 늘 당신이 싫었어요, 바이올렛. 당신은 아르틴에게 방해만 되는 존재였으니까.”

방해만 되다니, 방해만 되다니! 다른 누군가가 말한다면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너에게만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어머, 뭐라는 지, 저는 당신과는 다르게 아르틴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거든요.”

“...뭐라고?”

“다친 아르틴을 간병하고, 축복을 걸어주고, 정치적인 공격에서 보호해 준건 당신이 아니라, 저였다고요.”

“그건 네가 내가 만든 물약보다 자신의 기적이 더 효과가 좋을 거라고 아르틴을 꼬득이는 바람에...!”

“아르틴이 대가리 맛 간 광신도 녀석들에게 붙잡혔을 때, 당신은 무얼 했죠, 퍼플크로우? 그 잘난 지옥의 군주도 아르틴은 구하지 못했잖아요?”

파르르, 주먹 쥔 바이올렛의 손이 떨렸지만, 그 모습조차 올가 비르투스는 한심하다는 듯 바이올렛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눈빛, 언제나 상냥하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에게는 감추지 않는 여우같은 눈.

“그러니 인정하세요, 당신은 아르틴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게 말하며, 올가는 어느새 옆에 서있던 아르틴에게 팔짱을 끼며 승리를 과시하는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자, 바이올렛은 자신의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들에 좀먹히기 시작했다.

“하지만...하지만 너 때문에 아르틴이 교단에 끌려가서 죽어버렸잖아!!!”

눈을 감고 버럭 외쳤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바이올렛은 놀란 눈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그 리고 그 말에 올가는 짓고 있던 웃음을 멈췄다. 바이올렛은 무어라 말을 꺼내 사과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아르틴은 종교재판관들에게 기소 당했다. 혐의는 다양했다. 악마 숭배, 불법적인 강령술 실험, 마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악마와 계약한 죄, 신성을 모독하고 성녀를 타락시키려고 한 죄, 제국과 왕국에 혼란을 일으킨 죄.

리처드의 사망이후 제국의 후계자가 된 황태녀 아그네스와 죽은 선왕을 계승한 마리안느 국왕은 제국과 왕국의 반란군과 배신자들을 토벌하고 질서를 가져온 아르틴을 고발한 종교재판소를 비난했다.

거기에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 카이엔과 공화연방의 거물 조르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르틴을 비호하고 나서자, 종교재판소를 장악한 광신도들은 자신들이 아르틴을 고발한 가장 유력한 증거를 제시했다.

그 증거는 바로, ‘성녀’ 올가 비르투스가 아르틴을 위해 썼던 러브레터였다. 가장 순결하고 고결해야 할 북부 교단의 상징을, 아르틴 루드비히는 색욕과 충동으로 물들였다는 증거였다.

증거가 나온 이상 그들은 말릴 수 없었다. 황제조차 건드릴 수 없는 천제가 창시한 제국의 법도에 의해, 그들의 수사와 심문에 대한 권리는 존중받아야 했으니까.

“너무 걱정들 하지 마, 겨우 러브레터 하나 가지고 뭘 어쩌겠어? 더한 것도 이겨내 왔잖아? 나만 믿어.”

아르틴은 자신을 두고 제국과 왕국이 다시 분열되려고 하자, 스스로 자진 출두하여 종교재판소로 향하였다. 바이올렛과 올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만류했지만, 마왕과의 결전에 앞서 또 다시 인류가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아르틴은 뜻을 감행했다.

그리고 정확히 27일째 되는 날, 아르틴은 부정할 수 없는 부패하고 타락한 악마와 마왕의 간자라는 명목으로, 예정된 시간보다 2시간 먼저 시작된 재판에서 단 3분 만에 자신의 죄를 선고 받아 그 직후 화형에 처해졌다.

재판이 앞당겨졌다는 소식을 접한 아르틴의 지인들이 서둘러 재판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흉측하게 고문으로 망가진 몸은 이미 불길에 타오르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아르틴은 멀어버린 눈 때문에 자신을 구하려고 달려온 이들의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그저 목소리만은 들렸기를 바라는 동료들의 울분과 함께, 순식간에 성유와 함께 타올라 잿더미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인류는 멸망했다. 마왕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로지 인간의 탐욕과 광기에 의해 끝이 나고 말았다. 그것이 3회차의 결말이었다.

*

바이올렛은 알고 있었다. 아르틴이 자진 출두한 그 날부터, 성녀는 3일을 밤낮으로 신에게 기도하며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르틴을 구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교황과 독대하고 천사의 예지를 받아 종교재판관들의 더럽혀진 순수성을 고발하려고 나섰으며, 그녀가 북부 교단 전체를 박살낼 각오를 하고 움직였다는 사실을.

아르틴이 불타 죽는 순간, 경악한 자신의 옆에 서있던 그녀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였다는 사실을. 그녀가 진심으로 밉더라도, 그녀는 아르틴을 위해서만큼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꿈이라고 할지라도, 이 말 만큼은 해서는 안됐다. 여전히 아르틴을 죽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올가가 미웠지만, 그래도 그녀의 진심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그 말을 해서는 안 됐다.

“미, 미안해요...비르투스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됐는데..”

바이올렛은 이것이 꿈이라는 것도 망각하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올가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올가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팔짱낀 아르틴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당연한 것이다. 저건 진짜 올가가 아니라 몽마의 권능이 만들어 낸 무의식의 악몽이었으니까.

하지만 바이올렛의 마음은 더더욱 난도질당하듯이 아파왔다. 자신이 이리도 나쁜 말을 내뱉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상냥한 바이올렛은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에.

“....미안해요, 다들, 내가 못나서. 내가 나빠서..계속 상처만 주고 있는데...”

악몽은 확실하게 바이올렛을 좀먹고 있었다. 강력한 정신력을 지닌 다른 여인들이라면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바이올렛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이야기였기에.

**

나는 꿈에서 깨듯이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직후 이곳이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몽마에 하도 시달린 탓에, RC(리얼리티 체크)정도는 언제나 익혀둔 상태였으니까.

내가 사용하는 RC는 심장을 스스로 멈추는 것, 수십 번의 고생 끝에 터득한, 몽마들에게 들키지 않고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그게 이렇게도 쓰일 줄이야.

“일어나셨습니까 아르틴님?”

내가 일어난 것을 봤는지, 알‘미라즈가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와 섰다. 노출이 많은 술탄국의 무희복을 입은 탓에 가슴이 출렁이는 것이 상당히 보기 좋았다.

“언제 깨어나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저기 저 앞에 가려진 분홍색 안개가 방해해서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알‘미라즈가 가리킨 방향을 보자, 그곳에는 외부의 개입을 차단하려는 것인지 분홍색 안개로 가로막힌 무의식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과연 몽마의 권능이라는 건가.

“...네 마력으로 돌파하면 되잖아? 지니의 혈통이라면서 그 정도도 못하는 거야?”

“모..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겁니다! 섣불리 접근했다가 아르틴님하고 헤어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변명은 청산유수군, 그 많은 마력으로 마법 화살 하나 쏘지 못하면서 말야.

“뭐, 뭡니까 그 눈은!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냥 너~무 믿음직 스럽다고 생각되어서 말야.”

아마 알‘미라즈가 패밀리어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건 성처리 밖에 없지 않을까. 구리빛 피부와 균형 잡힌 몸매 외에는 다루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마력만 봐서는 임프보다도 쓸모가 없을 것 같고.

‘뭐, 일단 길이나 열까.’

꿈의 세계는 바깥과 시간이 다르다. 물론 꿈의 세계가 무조건 느리지만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 거기에 바이올렛이 겪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며 나는 몽마의 안개로 다가갔다.

파지직!!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내 의식을 통째로 불태우려는 기세의 마기가 안개에서 뿜어져 나왔다. 확실히 이 정도라면 나라도 골치를 먹을 수준 같은데..

“릴리트가 아주 단단히 준비 했나본데. 시르카를 잃을 뻔 했던 게 매우 심통이 났나봐.”

“시르카? 그게 누구 입니까? 몽마의 부하라도 되나보죠?”

“음, 정확해. 내가 잡으려다가 놓친 상급 마족이거든. 잡았으면 테이밍 했을 텐데.”

“..사, 상급 마족을 테이밍 말입니까?”

내가 아쉬움에 혀를 차자, 알‘미라즈는 상급 마족을 마치 사냥개 대하듯이 말하는 나를 부담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런 리액션은 부담스러운데.

그보다 이 안개를 어떻게 뚫는 게 좋을까. 이 녀석의 넘치는 마력을 이용해서 정공법으로 뚫을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어서 귀찮은 방법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력으로 길을 열어 볼까요?”

“아니..잠깐만..뭔가 묘수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한데...”

아, 그러고 보니 이게 먹히면 간단히 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댄 후, 인벤토리를 떠올렸다. 그러자, 인벤토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이게 되네?

‘시스템 개 혜자네, 무의식 공간에서도 인벤토리가 켜진다고?’

정작 상태창은 별 쓸모도 없어서 켜본 적도 없었는데,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인벤토리에서 몽마 시르카를 봉인할 때 사용했던 봉인의 룬을 꺼냈다.

“그건 뭡니까 아르틴님? 뭔가 따끔거리는 느낌이 나는데...”

“잠자코 보고 있어봐.”

봉인의 룬에 봉인한 것은 몽마 시르카의 힘, 그리고 몽마 시르카는 분명 릴리트에게 권능을 하사 받았다고 들었다. 그럼 릴리트의 권능을 비집고 들어가는 용도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자, 열려라 참깨!”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가며 분홍색 안개를 향해 봉인의 룬에 갇혀있던 시르카의 힘을 아주 살짝 개방했다.

──쿠릉!

“오, 이게 되네.”

내 예상이 맞아 떨어진 건지, 분홍색 안개가 서서히 갈라지더니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아무리 마족 나부랭이라고 할지라도, 그 강력한 몽마의 권능을 단번에 해결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아르틴님!”

나를 보며 박수를 치며 감탄하는 알‘미라즈를, 나는 거북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 새끼 리액션이 아까부터 국뽕 O튜브 반응 같아서 많이 부담스럽다. 초면부터 나한테는 깍듯이 대하는 데, 일단은 메피스토의 친구라서 그런가?

“아, 아앗?! 잠시만요! 먼저 가지 마십시오!”

괜히 반응하면 더 요란 피울까봐 나는 말없이 알‘미라즈를 끌고 심도 깊은 무의식을 향해 걸어갔다.

‘권능의 형태로 봐서는 심도 깊은 곳에 갇혀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마침 잘 됐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이번 회차 내내 바이올렛의 반응이나 모습이 묘하게 이상했는데, 무의식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지.

“이대로 계속 걸으면 되는 겁니까? 얼마나 더 가야 할까요? 저 혹시 아르틴님은 메피스토님하고 얼마나 친하십니까? 어떻게 인간이면서 그리 강한지..”

무의식의 깊은 곳을 향해 걸어가는 내내, 알‘미라즈는 쉬지 않고 떠들었다. 정말 쉬지 않고 떠들었다. 차라리 유니코르를 데려올 걸 그랬나.

“그런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계속 이야기 하시던 회차나 회귀는 도대체 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그건 좀 설명해 줘야겠네. 무의식을 걷다 보면 분명 보게 될 텐데...”

알‘미라즈가 좀 날카로운 질문을 해, 내가 설명해주려는 찰나. 어두운 공간에 무의식을 향해 이어지던 길 주변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라, 이 풍경은...”

바뀐 풍경은 무척이나 낯익었다. 화창한 낮의 아카데미의 시끌거리는 야외 테라스. 나와 알‘미라즈는 멀리서 그 야외 테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바이올렛 양과 샤오메이 님.. 그리고?”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테라스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꼽았다. 조르바는 안 마주쳤나 본데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을 못 알아보다니.

“저건 나야. 2회차를 막 시작했을 때의 나.”

나는 활기찬 세 사람 사이에서 우중충한 표정을 하고 차를 홀짝이는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때의 나는 요령도 없고 낯을 가리는 게 여기서도 느껴진다. 1회차 내내 샤오메이랑 단 둘이서 구르고 난 직후라서 사람을 대하는 게 무척이나 낯선 시절이었지.

“네?! 저 음습하고 우울하게 생긴 작은 찐따같은 꼬맹이가 아르틴 님이라고요?! 지금이랑 얼굴 인상부터가 완전히 다른데?!”

이 씨발, 옆에 서있는데 뼈 때리네. 더 슬픈 건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저때의 나는 사실상 찐따가 맞았으니까.

“뭐..바이올렛하고 조르바한테 엄청 도움을 많이 받았지. 두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우중충한 찐따였을 걸.”

나는 아련한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2회차 시절...

“앗! 과거의 아르틴님이 홍차를 흘려서 허둥거리고 있습니다! 정말 저게 아르틴님이 맞습니까? 저 찐따 같은 꼬맹이가 커서 되는게 아르틴ㄴ..”

“뇌절좀 그만해 씨발!!”

나는 회상을 강제로 끊어먹는 알‘미라즈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강력히 후회했다. 애 말고 유니코르 데려올 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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