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바이올렛의 무의식 #03
* * *
“후냐앗?!”
짜악! 내가 경쾌한 소리로 엉덩이를 내려치자, 알‘미라즈는 자기 엉덩이를 부여잡더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왜, 왜 때리시는 겁니까!”
“사람 앞에서 과거의 모습보고 찐따니 뭐니 해놓고 안 맞을 줄 알았다고??”
악마라서 그런가, 이리도 예절교육이 덜 됐다니, 역시 적절한 폭력을 동반한 예절 교육만이 무례한 이를 교육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죄, 죄송합니다..저도 모르게 너무 놀라서 그만..무례했습니다.”
다행히도 알‘미라즈는 전성기(?)시절 유니코르랑은 다르게 단 한 번의 교육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는 지성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알’미라즈 모르게 준비하던 꿀밤 추가교육은 나중을 위해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뭐, 저때의 나는 이제 막 1회차 회귀가 끝났을 때라 사교성이 무척 부족하기는 했지. 사람도 잘 믿지 못했고. 가족도 못 믿으니 누굴 믿을 수 있겠어.”
“어라? 지금 아르틴님 주변에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샤오메이랑 바이올렛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어, 특히 조르바.”
마지막 부분은 부정하고 싶지만...솔직히 부정하면 내가 호로새끼가 되어버린다.
아직도 생각난다. 1회차 시절, 급격한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루드비히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 비록 인간 양희민의 가족이 아니라 아르틴 루드비히의 가족이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기대하며 돌아간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만약, 샤오메이가 몇 달 뒤 나를 걱정해서 오지 않았다면, 1회차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우울증에 의한 자살이 되지 않았을까.
‘...으, 씨발. 1회차 시절은 생각도 하지 말자.’
아무튼, 그러고 2회차 직후, 나는 한 달 내내 방에 틀어박혀서 몇 년 전의 희미한 기억에 의지해 소설에서 벌어졌던 전개랑 일들을 더듬어가며 정리했다.
오로지 혼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이기적으로 굴고 모든 사람을 배신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기연을 독식해서 홀로 살아남겠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2회차 직후의 나도 진짜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구나.’
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실에서는 절친이라고 믿고 있던 유일한 친구에게 사기당하고, 고아라고 무시당하고 갑질이나 당하면서 살던 녀석이, 이 세계에 와서는 집안에서 벌레 취급 받았는데, 누굴 믿을 수 있겠어.
당시에 나를 데리러 찾아왔던 조르바를 만나준 이유도 알량한 원작 지식 때문이 아니라. 1회차 시절 몇 안 되는 내 빛이었던 샤오메이가 조르바에 대해 말해줬던 칭찬들과 나를 향해 보내주던 편지들 때문이었다.
‘편지에서는 늘 자기 자랑과 이야기만 늘어놓으면서도, 무슨 좋은 일만 있으면 나한테 편지를 보내 알려주면서 안부를 묻곤 했지.’
그래서 조르바를 처음 봤을 때, 정말 글에 나온 대로 적발 태닝 양아치 같은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싸력에 당황하면서도 궁금했다. 이 녀석이 정말로 어떤 사람일지. 그리고 샤오메이도 보고 싶었고.
‘그리고, 저 자리에서 처음 만났지.’
바이올렛, 내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동료. 그리고 짝사랑 했던 귀여운 마녀.
“바이올렛 양이 홍차를 닦아주고 마법으로 뒷정리를 해주니까, 옛날 아르틴님이 손주 이름까지 정하는 얼굴이 됐습니다..앗! 그, 비꼬려던 게 아니라!”
“뭐 그 정도는 괜찮아, 실제로 나는 저때부터 바이올렛에게 호감을 느꼈으니까.”
지금의 바이올렛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바이올렛은 늘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챙기며 자신감과 자존감을 챙겨주는, 의지가 되는 인물이었다.
원작에서도 카이엔 주변의 몇몇 히로인들의 각성을 도와준 것도, 카이엔이 아니라 바이올렛 이였을 정도로 늘 타인에게 상냥하고 노력하는 모습은 본보기가 되었다.
“내가 강해진 것도 어떻게 보면 바이올렛 덕분이지.”
“네?! 아르틴님이 강해진 게 바이올렛 양 덕분이라니요?”
“지금은 좀 방황하고 있지만, 저때 바이올렛은 노력하면서도 자신감이 있었어, 누군가를 지탱하는 태양 같은 존재였지.”
알‘미라즈는 그런 내 말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어색해하는 과거의 나를 배려해 열심히 말을 걸어주는 과거의 바이올렛의 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의 공부도 힘들 텐데, 적응하려는 나를 위해서 하루에 3시간씩 매일 같이 공부해주고, 검술 수련하느라 다친 나를 위해서 직접 붕대도 감아주고, 기운 내라고 물약도 챙겨주고..”
그래서 2회차 시절의 나는 첫 1년을 바이올렛을 짝사랑했다. 그럼에도 고백은 못했다. 샤오메이 한테도 마찬가지고.
고백을 못한 이유? 간단했다. 샤오메이나 바이올렛이 조르바나 카이엔을 좋아한다고 착각했으니까. 특히 2회차에서는 카이엔과 유니코르의 집요한 방해 때문에 연애 관련해서 뭘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하지만 이상하네요, 그렇게 당찼던 사람이, 왜 지금은자신감도 없고 겁도 많은 성격이 된 건가요?”
“글쎄, 무의식 속에 들어왔으니 알아볼 수 있겠지. 이 주변에는 바이올렛도 없는 것 같고.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보자.”
“네, 알겠습니다! 가는 동안 아까 하다만 회귀가 뭔지 설명해 주세요!”
나는 과거의 풋풋한 네 사람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 후 알‘미라즈와 함께 길을 따라 무의식의 더욱 깊숙한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 길의 끝에 있을지도 모르는 바이올렛을 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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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을 매도하는 올가 비트리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아르틴이 있었다. 양 손목에 붕대를 감은 채 검을 휘두르는 익숙한 모습에, 바이올렛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저건, 우르반 헬릭 교수님한테 검을 배우던 아르틴이네..”
사실상 바이올렛이 아르틴과 처음 만났던 시기. 늘 어둡고 사람을 경계하는 눈을 하던 아르틴에게 검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권했던 것은 바이올렛 이였다.
처음에는 그저 가볍게, 몸을 움직여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였다. 샤오메이와 무술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천재인 샤오메이의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학생주임인 우르반 헬릭 선생님을 찾아가 부탁드렸었다.
물론 선생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아니, 한달 내내 등교를 거부하고 있던 아르틴이 점점 마음을 열고 움직인다는 이야기에 기뻐하셔서, 어두웠던 아르틴을 깊이 챙겨주시며 가르쳐주셨지.
그런 선생님과 자신의 마음이 닿았던 걸까. 아르틴은 날이 갈수록 밝아졌다. 잔상처가 몸에 늘었지만, 그 이상으로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던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는 것처럼 보였고, 바이올렛은 그런 아르틴의 모습에서 스스로 힘을 얻었었다.
‘늘 약초를 바르고, 붕대를 갈아주고, 널 위해 물약을 만들어 줬었는데. 언니들한테 내조라도 하는 거냐는 소리도 참 많이 들었고...‘
바이올렛은 그 자리에 앉아 아르틴이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당시에도 이렇게 아르틴이 연습하는 모습을 바라보느라 레포트를 몇 개 빼먹기도 했지만, 아르틴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아카데미 생활에 충실할 수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곳에도 아르틴이 있었다. 3회차 시절의 아르틴은 전 회차랑은 다르게 남들을 보조하며 돕는 것을 선택했다. 자신에게 마법과 강령술과 연금술을 배우고, 조르바에게 정치를 배워가며 부단히도 노력하던 아르틴의 모습은 선명했다.
‘연금술 실험을 하다가 실수로 다칠 때면, 늘 내가 손가락에 약초를 발라줬는데..’
가장 아르틴과 친밀했던 시절, 많은 도움을 받았고,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었다. 저때의 아르틴은 자신감도 넘쳐서, 늘 의지가 되는 모습에 이성의 호감을 많이 느끼기도 했다.
“저건...4회차 시절이네.”
그 옆에 있는, 전신에 흉터가 가득한, 근육질의 거구 아르틴이라는 희귀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때도 근육통에 시달리는 아르틴을 위해서 물약을 만들어주고, 영약까지 부탁받아 3일 밤낮을 새가면서 만들어 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 오랫동안 같이 있었구나.”
이상하다. 다른 기억은 나지 않는데, 아르틴과의 추억만은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 마치 어제일 같이 떠오른다는 사실이.
2회차에 아르틴과 함께 피크닉을 갔던 일이 떠오른다. 샤오메이가 만들어준 딤섬이 참 맛있었는데.
3회차에 아르틴과 함께 해변에서 노을을 보던 추억이 떠오른다. 카이엔이 갑자기 찾아오지만 않았더라면 그 날 키스하지 않았을까?
4회차에 마왕성을 향해 떠나던 아르틴을 배웅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결국 울음을 터트린 아그네스를 곁에서 달래주던 기억도 흐릿하지만 같이 떠오른다.
모든 추억이 선명하고 아름답고 슬프고 그리웠다. 그래서일까. 그 모든 기억의 끝을 떠올릴 때 마다 바이올렛은 심장이 터질 듯이 아팠다.
2회차에 언더월드로 떠난 아르틴이 다른 동료들과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가장 친했던 친구들을 잃었다는 슬픔에 식음을 전폐하던 자신은 결국 병에 걸려 마왕군을 막지 못했다.
3회차에 아르틴이 눈앞에서 불타죽은 이후, 자신은 결국 아르틴이 지키고자 한 것들을 제 손으로 부숴야만 했다. 불타 죽어가던 종교재판관들의 모습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4회차에 아르틴의 생명을 알리는 촛불이 위태롭게 일렁일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며 평생 찾지 않았던 신에 기도해야만 했다. 결국 촛불이 꺼졌을 때, 나는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나는, 나는 정말로...아르틴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매번 아르틴이 위험했던 순간, 바이올렛은 아르틴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
늘 무력하게, 아르틴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만 하며, 자신은 아르틴이 고통스럽게 죽어갈 때 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방관해야만 했다.
아르틴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직후의 기쁨은 이제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아르틴에 대한 모든 기억은, 바이올렛에게는 비극의 역사였고 슬픈 결말밖에 남지 않았기에.
“하하하하! 너도 참!”
..어느새 꿈 속 아르틴의 곁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서있다.
2회차의 루시 발렌타인, 3회차의 올가 비트리스, 4회차의 아그네스 에르멘가르트.
늘 먼저 곁에 있던 것은 자신이었지만, 어느새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상냥했던 자신은 늘 아르틴의 행복을 위해, 한 걸음 물러나 자리를 양보하기만 했었다.
내가 붕대를 감아주던 손목에는, 어느새 언더월드의 여인이 선물한 아대가 대신하고 있었다.
내가 약초를 발라주며 대화를 나누던 자리에는, 성녀가 다정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신성력으로 가볍게 상처를 치료해주는 모습만이 남아있다.
내가 같이 노을을 바라보며 웃던 옆 자리에는, 어느새 황녀님이 아르틴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앉아,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싫어...이런 건 이제..싫어...나는, 나는 늘 무력하게...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바이올렛은 비틀거리며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곳에도 바이올렛의 자리는 없었다. 모든 순간, 모든 행복한 순간의 추억의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짐과 동시에, 아르틴의 옆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 갔다.
샤오메이, 아그네스, 루시, 올가, 유니코르, 카이엔, 조르바. 모두와 행복해 보이는 아르틴의 표정을, 바이올렛 자신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응원만 하고 있는 상황.
이 모든 상황이 끔찍했다. 바이올렛 자신의 자아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끔찍한 악몽에, 바이올렛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끌어안았다.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어! 응원해줘서 고마워 ──.”
“치료해줘서 고마워, 내일도 열심히 훈련할 수 있겠다. 그치 ──?”
“저기,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사실 나는 ──를...”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자신을 비웃는 소리가 아닌 아르틴의 행복한 웃음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바이올렛에게 악몽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실 자체가 더더욱 바이올렛의 기분을 처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웃음소리가 고통스럽다니, 어찌나 이리도 이기적인 생각이란 말인가.
“...미안해, 아르틴. 정말 미안해...”
──진정한 악몽은 그저 아픔을 들추는 것이 아니었다. 좋고 행복했던 기억들마저, 슬픔과 고통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악몽이라는 사실을, 바이올렛은 여전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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